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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에 올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종교적인 기적이나 빤히 보고서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은 예나 지금이나 할리우드의 단골 소재다. 오래가진 못했지만 1999년 미국에서 개봉한 첫주에 <식스 센스>를 누르고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스티그마타>는 초자연적인 힘에 영혼과 육체를 저당잡힌 프랭크를 내세운다. 그녀의 몸엔 예수의 성스러운 상처가 새겨지고 조사나온 앤드루 신부는 결국 그녀를 조종한 힘이 이단으로 몰려 바티칸으로부터 파문당한 한 신부의 영혼이었음을 밝혀낸다. 새롭지 않은 이야기지만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했던 루퍼트 웨인라잇은 쉴새없이 관객의 눈과 귀를 공격한다. 강렬한 록 사운드에다 갑자기 몽환적인 읊조림을 이어 붙이거나 한 프레임 내에 여러 이미지를 중첩한 <스티그마타>를 두고 <LA타임스>는 ‘90년대 MTV 버전의 엑소시스트’라 평했다.
하지만 강력했던 초반의 MTV식 몽타주는 점점 단순한
90년대 MTV 버전의 엑소시스트, <스티그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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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는 인간사 희로애락으로 안무한 영화다. 사랑과 정열, 환희와 고뇌, 질투와 분노가 출렁대는 탱고의 강렬한 선율과 춤사위는 댄서들의 심리와 개인사를 거울처럼 비춰내고, 초기 유럽 이민자들의 정착과 군부독재 시절 등 아르헨티나의 고단한 역사까지 아우른다. 역사와 사회, 전통예술에 대한 속깊은 애정으로 들쭉날쭉한 필모그래피를 그려온 카를로스 사우라도, 이제 그 모든 관심사를 한번에 녹여내는 노하우를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탱고>는 <피의 결혼식> <카르멘> <플라멩코>로 이어진 그의 춤 영화 행진에, 이렇게 의미심장한 마침표를 찍는다.
슬럼프에 빠져 있던 중견 연출가가 젊고 아름다운 무희를 뮤즈로 맞고, 그 사랑으로 천국과 지옥을 현기증 나도록 오가면서 필생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스토리나, 극중극을 내러티브로 활용한 구성은 특히 <카르멘>과 닮은 꼴이다.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이 정착을 거부하자 배신감에 살인을 저
인간사 희로애락으로 안무한 영화,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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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칼바람 소리가 났다. 어떤 일본 감독도 기성사회와 그렇게 맹렬하게 싸운 적이 없었다. 재일동포 차별, 사형제도, 전후 일본민주주의 실패, 일본 공산당의 스탈리니즘적 몽매함을 가차없이 내리쳤고, 나중엔 국가의 존재가치까지 부인했다. 일본인 심성의 밑바닥을 헤집으면서 느리고 긴 싸움을 벌였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내가 농부라면 오시마는 사무라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던 그가 70년대가 되자 변했다. 아무리 “체제가 바뀌어도 밑바닥 인생들은 그대로다.” “일본을 떠나 국제적 감독이 되고 싶다.” 등의 체념적 발언을 하더니, 갈기를 휘날리며 도쿄 거리를 누비던 거친 모습은 사라지고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TV 여성상담프로에 나왔다. 프랑스의 아르고스필름이 제작비를 댄 <감각의 제국>은 그 와중에 태어난 영화다.
<감각의 제국>의 원제는 ‘사랑의 투우’다. 투우는 투우사와 소 가운데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다. <감각의 제국>
뻔뻔스럽고 도발적인 포르노그라피, <감각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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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마에 관한 영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왜 죽였는가, 원인은 무엇인가? 세인들은 흔히 정서적, 환경적 요인으로 모든 범죄행각을 설명하기도 한다. 혹자는 뇌과학의 입장에서 ‘양심의 박동음’을 들을 수 없는 이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것이 막연한 분노 탓인지 아니면 신체상의 결함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프리츠 랑 감독의 <M> 이후 연쇄살인마에 관한 스릴러물은 긴 계보를 형성한다. 스파이크 리는 <똑바로 살아라>와 <말콤X> 등의 수작들로 사회적 발언과 작품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흑인 감독. 그가 처음으로 만든 범죄 스릴러물 <썸머 오브 샘>(이 영화는 <선 어브 샘>(Son Of Sam)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은 디스크와 펑크, 성해방의 물결이 드셌던 197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관객을 향수어린 시공간으로 몰아넣는다.
<썸머 오브 샘>은 실화가 바탕이다. 44구경의 매그넘
미국인들의 정신적 진공상태에 방점을 찍다, <썸머 오브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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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속에 담겨진 은밀한 연애이야기’라는 홍보카피를 달고 있지만 <인터뷰>는 숱한 사랑이야기를 빌려 카메라의 진실, 나아가 진실 그 자체를 궁리하는 영화다. 마치 좋은 연애소설이 끝내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성찰에 가 닿듯, <인터뷰>의 로맨스는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그건 어쩌면 진실과 거짓를 구분하는 ‘경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혹은 경계짓기의 무의미함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인터뷰>의 화두는 대중영화의 코드에 쉽게 접속될 만한 게 아니다. 하지만 감독은 낯설고 생경한 영화 컨셉을 주류의 울타리 내에서 풀어내고 있다.
<인터뷰>에는 대부분의 장면이 두번 반복된다. 우선 전반 15분 동안 대략의 줄거리를 잡아줄 장면들이 영화감독인 은석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리고는 ‘인터뷰 1년 전 프랑스 파리’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의 서두보다 더 이전 시간으로 거슬러올라가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
카메라 속에 담겨진 은밀한 연애이야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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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고도 여왕이 될 수 있었던 스타, 섹스와 혼, 에로티시즘과 정신이었던 스타,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보였던 스타(에드가 모렝).” 입술 위에 찍힌 점마저 시대의 기호였던 스타였지만 <노마진 앤 마릴린>의 마릴린 먼로는 처참하기만 하다. 그녀는 배우였지만 연기를 고통스러워했고 무진장한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한순간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다. 무명 시절 그녀는 성공을 꿈꿨지만, “배우가 되려면 잘나가는 놈하고 배를 맞춰야 해”라며 천연덕스럽게 자기의 욕망을 밀고 갔지만, 막상 성공이 다가오자 감당을 못한다. 술과 진정제에 의지해 파멸의 순간을 미뤄온 그녀는 끝내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이 되려면 뭐가 필요하죠?”
<노마진 앤 마릴린>은 스타의 아우라가 거둬진 ‘인간’ 마릴린 먼로의 일대기를 냉정한 시선으로 되돌아본다. 그녀의 육체를 팔아먹으면서도 어떤 감독도 그녀의 연기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혼은 늘 실패였고 어머니의 자리는 박탈당한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
‘인간’ 마릴린 먼로의 일대기, <노마진 앤 마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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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무서웠다. 긴 머리를 질질 끌고 기어서 천천히 스멀스멀 계단을 내려오던 여인의 한, 그리고 이어지는 죽음들. 평이한 장면에서조차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들로 심장을 터지게 만들었던 끔찍한 영화 <주온>. 할리우드가 공포영화 마니아들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이 영화에 손을 댔다. 동양의 이 그로테스크하고 무섭기 짝이 없는 귀신을 서양은 어떻게 받아들여 변주할 것인가. 현실로 귀환한 혼에 대해 동서양의 시선은 어떻게 교차할 것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그루지>는 이러한 호기심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주온> 시리즈로 일약 혜성처럼 떠오른 시미즈 다카시가 여전히 이 미국판 <주온>의 감독이며 영화의 배경 역시 일본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루지>의 관심이 원작의 서사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 영화의 목적은, 혹은 제작자 샘 레이미의 야망은 원작이 뿜어내었던 강렬한 공포 그 자체를 확장시키는 데 있
공포의 재료가 된 동서양의 만남, <그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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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속수무책으로 아이들의 병 앞에서 나뒹군다. 어른들은 그저 울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한다면 아이들은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 아이들은 낯선 서로의 환경을 넘으며 친구로 길들어진다. 병이 죽음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사귐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커간다는 얘기로 읽는다면, 이 영화는 흔치 않은 성취를 거둔 셈이다.
이상한 일이다. 어른들이 없어도 아이들은 자란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꼭 초등학교만은 아닌 것 같다. 병에 걸려도 아이들은 자라며, 병원도 아이들의 훌륭한 학교가 된다. 아니 이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아이들은 병을 거쳐 더 웃자란다. <안녕, 형아>는 자연스럽지만 잘 드러나지 않은 이런 이상한 진실을 보고하는 영화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병에 걸리고 죽는다는 자연현상은 얼마나 잔인하며 또 동시에 자연스러운가. 그러나 이 진실이 어린이에게도 예외없이 해당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정말 쉬운
병이 깊어도 아이들은 푸르구나, <안녕, 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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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입문자들에게는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 옛날, 멀고도 먼 한 은하계에서(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라는 익숙한 자막과 함께, 존 윌리엄스의 스코어가 울려퍼지면, 데자뷰처럼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이하 <시스의 복수>)는 막을 올린다. 몇날 며칠에 걸쳐 바그너의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를 상연하던 독일 바이에른주의 어느 오페라 하우스처럼, 극장은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집회에 참여한 신도들로 가득 찰 것이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3번째 에피소드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오페라의 마지막 장이다. <보이지 않는 위험>과 <클론의 습격>에 탄식했던 광신도들의 마지막 기대를 충족시켜면서 시리즈의 막을 내려야 하고, 동시에 4번째 에피소드인 <새로운 희망>과의 연결고리를 지으며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세계를 열다,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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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작품번호 4번 <생활의 발견>은 감독의 모든 영화를 꿰뚫는 제목을 가졌다. 허위의식과 인과율의 미망(迷妄)을 걷어내고 살아 움직임(生活)의 정체를 직시하는 작업, 현실이 비로소 현실로 보일 수 있도록 ‘알맞은’ 양식을 부여하는 스위스 시계공 같은 작업이 홍상수 감독의 지난 10년이었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가 그리는 인간과 그들의 일상이, 달리 아무것도 되지 않도록 정밀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를테면 무엇의 상징이나 내러티브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의 영화에서 자고새는 그저 자고새다. 그렇게 발견한 현실의 파편을 재구성하는 홍상수식 패턴은 대구와 반복, 모방과 차이였고, 덕분에 사람들은 그가 지식인의 위선과 소시민적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조롱하고 있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작품 편수가 거듭되면서 홍상수 감독의 ‘일상’은, 꿈과 회상을 끌어들이며 영역을 슬금슬금 넓혀왔다. 꿈꾸고 회상하는 동안에도 생의 시계는 어김없이 간다는 점에 홍상수는 주목했다. 작품번호
회상과 꿈, 도취의 시간도 일상의 표면, <극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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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트>로 동성애 문제를 다소 논쟁적으로 다루었던 여성 감독 안토니아 버드가 일급 범죄자에게 눈을 돌렸다. 당연히 좀도둑들을 다룬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영화 속에는 주인공 레이가 꿈꾸듯 상상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시민들이 경찰 앞에서 시위하는 대목들이다. 레이가 놓인 현실 공간도 여러 문제로 데모중이다. 그는 위기에 처하자 석탄사용 반대시위 현장에 있는 어머니에게 찾아간다. 결국 세상에 대한 분노와 폭력이 레이를 범죄자로 만든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충고하듯 한마디 던진다. “네가 무슨 로빈후드라도 되는 줄 아니?” 장르적 완성도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레이 역은 <프리스트>에서 인연을 맺은 로버트 칼라일이 맡았다. 그는 <트레인스포팅>에서 야비한 갱 역할을, <풀몬티>에서는 스트립쇼를 벌이는 따뜻한 아버지를, <칼라송>에서는 낭만주의적인 혁명가를 열연한 바 있는 영국의 명배우다. 이 작품에서도 지적이면
세상에 대한 분노와 폭력, <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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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판돈으로 100만달러가 걸린 게임이 시작되었건만, <헌티드 힐>의 프라이스와 그의 아내 에블린은 느긋하다. 프라이스는 이 게임을 통해 이혼을 요구하는 에블린에게 색다른 이벤트를 선사할 수 있고, 또다른 삶을 꿈꾸는 에블린은 자신의 정부를 불러들여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을 죽일 수 있기 때문. 판을 벌인 프라이스와 짜고 치는 에블린, 여기까지 <헌티드 힐>은 스릴러 게임으로 몰고 갈 태세다. 하지만 <헌티드 힐>은 최종적으로 호러 게임을 선택한다. 헌티드 힐은 수십년 전 끔찍한 생체실험이 자행되던 정신병원이 있던 곳. 환자들의 난동으로 화재가 발생하고 5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곤 모두 몰살당했던 사건이 있었고, 초대받은 이들이 모두 그 생존자들의 후손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자신들을 죽음의 게임으로 초대한 이들이 악령임을 알게된다. 호러 게임은 예기치 않은 상황을 서로의 계략으로 여겼던 프라이스와 에블린까지 죽음의 판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헌
100만달러가 걸린 호러 게임, <헌티드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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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순지 감독에게서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첫 번째 편지엔 ‘망자(亡者)에 대한 그리움’이 적혀 있었다. 이번엔 ‘애틋한 첫사랑’이다.
이와이 순지 감독 영화는 한편의 연애만화와 다를 바 없다. 남녀의 통속적인 로맨스를 즐겨 다룬다. 그런데 방식이 남다르다. 죽은 이에 대한 사랑이야기(<러브 레터>)거나 결박 강박증을 앓는 어느 남녀(<언두>)일 때도 있다. <4월 이야기>는 첫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여성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이 흔해 빠진 연애담을 이와이 순지 감독은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일상의 자그마한 비밀,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사랑의 기적을 마법처럼 빚어내는 것이다.
<4월 이야기>의 히로인은 마쓰 다카코. <러브 제너레이션>이라는 트렌디 드라마로 일본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4월 이야기>에서 마쓰 다카코는 풋풋한 미소로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특별한 절정부 없이 부드럽
이와이 순지의 매력과 한계, <4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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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데 꼭 소득분배구조 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늘 말씀하는 대로 세상에는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다. “왜 하필 나야?” 비명을 지르면서도 노상 치다꺼리를 도맡는 멤버가 가정에나 직장에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머지가 고마움을 아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내 손 안가면 되는 일이 없어”하는 투덜거림에 숨겨진 은밀한 기쁨을 알아챈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편할 대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형제 많은 집에서 흔히 보듯, <지금은 통화중>에서 이 보람없는 봉사는 둘째 이브의 몫이다. <리어왕>으로 치면 코델리아 역인 이브는 아버지의 끝없는 투정에 파김치가 돼가면서도 아버지가 말을 걸면 언제나 대답해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벨만 울리면 아예 “네, 아빠”하며 수화기를 든다. 노환으로 기억에 구멍이 숭숭 난 아버지도 이브의 전화번호만은 잊지 않는다. 멕 라이언의 이브는
멕 라이언의 영화, <지금은 통화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