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9·11 시대, 할리우드의 영웅은 보통 사람들이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두 항만경찰과 전직 군인, <플라이트 93>의 이름도 모를 승객들처럼 말이다. <뉴스위크>에 의해 ‘최고의 신화’라고까지 표현된 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각광받는 건 언제나 영웅담 또는 신화를 원해온 할리우드의 필요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9·11 이후 실제로 뉴욕 소방대원들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사실과도 관련있다. 엄청난 재앙에 맞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헌신적으로 해낸 이들은 또 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했을 때 주민 3만3520명을 구조하거나 대피시킨 미국 해안경비대가 그들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 해안경비대의 활약상을 담은 <가디언>은 새로운 영웅들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선보이는 영화다. 이 영웅담의 한축은 그동안 수백명의 조난자를 구해낸 고참 대원 벤 랜달(케빈 코스트너)이 담당한다. 그는 “(구조대상자가)
보통 영웅 혹은 슈퍼 일반인들의 절박한 분투기, <가디언>
-
한 악당이 무고한 아이를 감금하고 살해한다. 경찰에 붙잡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유가족들의 울부짖음에도 그를 감옥으로 내몰 길이 없다. 이토록 성긴 법의 그물코에도 이 사회는 정녕 정의로운가? 야가미 라이토(후지와라 다쓰야)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일본 경찰청 경시관 지망생이자 열혈 정의파인 라이토에게 세상은 악으로 물든 비정한 곳이다. 자괴감에 육법전서를 내던지자 이를 대신이라도 하듯 데스노트가 찾아든다.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죽는다.’ 노트의 위력을 깨달은 라이토는 단죄받지 않은 범죄자의 사형을 위해 스스로 정의의 사도를 칭하고 나선다.
공부는 물론 운동신경 역시 발군인 라이토의 반대축에 류이치(마쓰야마 겐이치)가 있다. 정체 불명의 그는 마시멜로와 빵을 꼬치에 꿰어 먹는 요상한 인물이지만 실은 미해결 범죄를 수차례나 해결한 명탐정이다. 멈출 줄 모르던 라이토의 살인 행각은 류이치의 등장으로 고비를 맞는다. 짙은 색 옷과 흰 티셔츠처럼 대조적인 두 인물은,
천재적 인물들의 정의를 넘어선 두뇌 싸움, <데스노트>
-
<러브러브 프라하>는 체코의 베스트셀러 소설 <여자들을 위한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2005년 체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자국 내에서 흥행몰이를 한 이 작품은 올해 부천국제영화제에 초청돼 매진사례를 기록한 바 있다. <러브러브 프라하>의 주인공 라우라(주자나 카노츠)는 남다른 외모로 뭇 남성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여자다. 마음 가는 대로 이 남자, 저 남자를 오가던 그녀에게 어느 날 아버지뻘 되는 남자 올리베라(마렉 바슈트)가 나타난다. 라우라는 지적이고 중후한 매력에 반해 올리베라와 관계를 맺지만, 첫날밤을 보낸 뒤 그가 엄마 야나(시모나 스타쇼바)의 옛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러브러브 프라하>는 엄마의 과거 남자가 딸의 연인이 된다는 다소 자극적인 설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설정일 뿐 영화는 세 사람 사이의 갈등을 발전시킨다거나, 묵직한 드라마를 끌어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잠시 호
거침없는 그녀들의 연애사, <러브러브 프라하>
-
제약회사 최연소 부사장인 존 헨리 암스트롱(앤서니 마키)은 회장 파웰(우디 해럴슨)의 비리를 주식거래위원회에 고발했다가 해고당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직장도 구할 수 없고 자산도 동결된 존은 레즈비언이 되어 찾아온 옛 여자친구 파티마(캐리 워싱턴)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돈을 받고 아이를 만들어달라는 것. 아이를 가지고 싶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입양허가를 얻지 못한 파티마는 영리하고 잘생긴 존의 정자를 받아 임신을 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성공한 레즈비언 여성을 떼로 몰고온다. 존은 하룻밤에 몇번씩 정자를 쏟아내면서 파웰과의 힘겨운 싸움도 계속해야만 한다.
스파이크 리가 28일 만에 찍은 저예산영화 <그녀는 날 싫어해>는 엔론과 마사 스튜어트 등의 스캔들로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도덕적 공황 상태를 보여주는 영화다. 흑인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여 돈만 알고 살아온 존은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기업과 중역들의 위선을 깨닫고,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권리를
너무 많은 토끼를 쫓아간 영화, <그녀는 날 싫어해>
-
-
천재가 느긋하게 신천지를 개척해갈 때, 불운한 경쟁자는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는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처음부터 평등하지 않았다. 비극적인 탄성과 환희는 천재성의 불평등에 기반했다. 로버트(휴 잭맨)와 알프레드(크리스천 베일)의 경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수평적이다. 로버트가 상당한 재력가이고 알프레드는 보잘것없는 떠돌이지만 이 점은 알프레드가 마술의 본성을 좀더 꿰뚫고 있는 것으로 상쇄된다. 우애 깊은 동료였던 이들이 최고의 마술사 자리를 주거니받거니 꿰차면서 마술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는 동력은 천재성이 아니라 사랑조차 제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 질투와 분노다.
수중탈출 마술로 좋은 세월을 보내던 이들의 관계는 마술에 대한 욕망이 좀더 컸던 알프레드의 예기치 않았던 실험으로 부서진다. 로버트의 아내가 공연 도중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 그렇지만 이 사고에서 시작된 로버트의 알프레드에 대한 분노는 복수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순간이동 마술로
‘무한’ 확장의 욕심, <프레스티지>
-
배창호 감독은 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세련된 정서와 감각으로 동시대를 보여준 감독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의 새로운 작품 <길>은 오랜만에 영화 크레딧을 통해 만나게 된 그의 이름만큼이나 반갑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황진이> <꿈> <정> 같은 영화보다도 <기쁜 우리 젊은 날>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이 우리의 뇌리에 더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은 언제나 전통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고 잊혀져가는 우리만의 어떤 것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 그는 한때는 자신도 선배 감독들이 옛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날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저예산영화들이 쉽게 선택하게 되는
인생과 용서에 대한 오래된 정서를 길 위에서 배우다, <길>
-
두 남자가 한 여고생을 엘리베이터에서 유괴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동거지가 어설프다. 클로로포름으로 적신 수건을 여고생의 입에 틀어막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약발이 잘 안 듣는 모양으로, 여고생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여고생을 가둔 상자가 꿈틀거린다. 코미디로도, 혹은 스릴러나 드라마로도 갈 수 있는 이 초반 대목부터 <잔혹한 출근>은 셋 모두를 잡으려고 한다. 그래서 개인기에 기반을 둔 폭소보다는 상황이 낳는 간헐적인 웃음과 이중유괴의 긴장이 낳는 스릴, 그리고 결국 가족애로 귀착되는 감동이 <잔혹한 출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코미디로 입지를 굳힌 김수로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지만 <잔혹한 출근>에서 코미디가 차지하는 비중은 낮은 편이다.
평범한 가장인 듯한 동철(김수로)은 주식투자 실패와 막대한 사채이자로 인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황이다. 다정한 아내와 어린 딸 앞에 사실을 밝힐 수 없는 그는 대출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주변 사람
개인기가 스릴러와 만나 드라마로 풀린다, <잔혹한 출근>
-
“당신은 막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다. 당나귀 마차에 오르면 감자술을 마시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운전사가 당신을 모실 것이다. 더블린 성에 들어서면 파이프 밴드의 ‘대니 보이’와 4리터들이 기네스 맥주로 환대를 받을 텐데 맥주는 3분 안에 비워야만 한다….”
영국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아일랜드인에 관한 진실>(1999)에서 풍자한 아일랜드 인상은 IT 초강대국이 된 아일랜드와 거리가 있지만 왜곡된 아일랜드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른 새벽 내가 찾은 산골짜기 그곳으로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황금빛 보리를 흔들어놓았네”라는 로버트 조이스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일부 구절처럼 아일랜드 인상기는 푸른빛과 저개발, 전원 등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런데 로버트 조이스의 노래 가운데는 “우리를 묶은 침략의 족쇄는 견디기 어려웠네”라는 구절이 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 보리밭에 피냄새가 난다고 노래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199
당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보리밭의 물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1997년 <주간 소년점프>, 한 젊은 만화가가 해적왕 되는 것이 목표인 소년의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인기가 높아진 만화는 일본 너머로까지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42권째 단행본 발행’이라는 대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혼자 망망대해를 떠돌던 소년은 6명의 동료를 얻는 한편, 고액의 현상금이 걸린 해적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오다 에이치로의 <원피스>다.
<원피스>는 <하록 선장>의 소년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화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이 꽂은 깃발 아래서라면 언제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해적. 그를 지탱하는 믿음직한 동료들. 그리고 모험. <하록 선장>의 모티브를 <원피스>는 더 밝고 단순하게 그린다. 신념과 동료애를 직설적으로 강조하고, 치열한 싸움이 끝나도 슬픈 죽음이 없는 밝은 세계를 만든 것이다. 모험 만화인데도 대규모 소녀팬이 형성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흔한 키스신도 없는
본편을 알수록 재미가 클 것, <원피스: 기계태엽성의 메카거병>
-
<마음이…>는 어린 남매가 하염없이 기다리던 부모의 자리를 애완견으로 메운다. 주인공 찬이가 여동생 소이의 생일에 강아지를 훔쳐오는 행동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처음 생일선물로 훔쳐온 ‘마음이’는 소이의 어리광, 그리움, 눈물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찬이의 짐을 나눠지는 유사 가족의 역할을 수행한다. 가족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는 전반부는 빙판 위의 비극을 기점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선다. 드라마의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려고 애견영화의 주인공 마음이(달이)에게 엄청난 죄의식을 부과하는 스토리는 비약으로 느껴진다. 마음이의 찬이를 향한 외로운 애정과 찬이의 외면으로 이루어진 후반부의 시선은 둘의 관계를 왜곡한다.
11살 찬이(류승호)는 어린 동생 소이(김향기)와 단둘이 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라져버린 어머니는 돌아올 기약이 없다. 찬이와 소이의 유일한 위안은 찬이가 훔친 리트리버 ‘마음이’다. 하교하는 찬이를 소이와 마음이가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며 그들의
세상 끝까지 함께 해준 친구, <마음이…>
-
“사라지는 게 아쉽지 않아요?” 우이도의 모래산 앞에서 생전의 민주(김지수)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 몇 십년은 충분히 그 자리에 있을 자연을 두고 그녀는 조금은 오만하게, 벌써 그것의 사라짐을 슬퍼한다. 사라짐을 붙들기 위해 사진을 찍고 누군가와 함께 다시 돌아갈 것을 기약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모래 알갱이가 다 흩어지기 전에, 그녀의 삶이 먼저 흩어졌다.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에 이어 <가을로>에서도 김대승 감독의 화두는 여전히 사라짐 혹은 상실이다. 민주는 그 사라짐을 그저 미리 안타까워했을 뿐이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상실감은 그저 안타까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이병헌)는 죽음처럼 살다 결국 절벽에서 떨어지는 길을 택했고 <혈의 누>에서 인권(박용우)은 비통함을 잔혹한 복수심으로 메웠다. 그의 영화는 살아남은 자가 그 끔찍한 상실
가을 단풍속에 녹아든 비극과 멜로, <가을로>
-
도시의 아침이다. 여자들은 각반을 차듯 종아리에 스타킹을 말아올리고 속눈썹을 곧추세운다. 아직 침대에서 뭉개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키스를 날리고 반짝이는 구두에 발끝을 밀어넣는다. 지금 싱그러운 그녀들은 약 6시간 뒤면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는 자기 최면을 삼세번 중얼거리며 심호흡으로 무너지는 신경을 붙들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오프닝 시퀀스는 군장을 꾸리는 병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들은 전쟁 중이다. 학보사 편집장 이력서를 품고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도 그 전장에 끼어들기 위해 면접에 나선다.
<보그> 편집장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언뜻 듣기에 낸시 마이어스 감독(<왓 위민 원트>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같은 현대 여성 풍속화가의 일감이다. 앤드리아가 도전한 언론계 첫 관문은 세계 패션산업을 쥐락펴락
여자친구끼리 볼 만한 데이트무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로마네스크 말고) ‘알트마네스크(Altmanesque) 벽화’라는 것이 있다. 로버트 알트먼(81) 감독의 영화 만드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알트먼의 재기작으로 통하는 <플레이어>(1992)와 <숏컷>(1993)에 이르러 정립된 이 스타일은 가히 ‘배우 하렘’이라 할 만한 대형 앙상블 연기, 에피소드적 서사, 상대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고 겹치는 대사, 변두리를 맴돌다 치명적 행위를 저지르는 주변 인물이 특징이다. 알트먼 감독에게 필요한 재료는 적당한 공간과 배우가 전부다. 인물들은 잉글랜드 저택 파티의 손님이 되기도 하고(<고스포드 파크>), 산부인과 의사와 그의 여인들일 때도 있으며(<닥터 T>), 발레단(<더 컴패니>)이나 콘서트(<내슈빌>), 프레타 포르테 쇼의 참가자들(<패션쇼>)일 때도 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한 장소에 인간 군상을 몰아넣고 가만히 기다리면 시추에이션은 저절로 ‘돋아난다
알트먼식 앙상블영화, <프레리 홈 컴패니언>
-
젊은 배우들이 잔뜩 출연하는 성장영화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자의 능력이나 그들의 앙상블 연기 혹은 탄탄한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스토리 전개나 매혹적인 화면 구성 같은 것들이 아니다. 연기가 아직 몸에 익지 않았기에 다소 어색할 수는 있지만,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그 단점이 오히려 관습화된 연기로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키면서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을 전해줄 때의 쾌감, 바로 그것이 이런 성장영화의 독자적인 매력이라 믿는다. <발레교습소>의 매력과 단점은 이러한 에너지들을 폭발시키며 놀 수 있는 판을 배우들에게 깔아주면서도, 이내 그것을 관습화된 서사 속에 가둬버리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폭력써클>은 이러한 면에서 더욱 아쉬운 작품이다. 영화는 관습화된 캐릭터와 서사 속에 젊은 배우들을 묶어두면서 그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몇몇 고등학생이 있다. 육사 진학이
상투적인 폭력장면의 전시, <폭력서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