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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학원물 시리즈가 그리는 혹독한 학교
상업영화 시장에서 중급 코미디와 정통 멜로드라마가 귀해진 지 오래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더 강렬하고 극적인 장르물이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 자극적인 서사가 장르물의 중심이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무대가 학교라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지난 2년간 화제를 모은 학원물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생존, 폭력 그리고 계급이다. 생존과 폭력이 서사를 이끄는 중심축이 되고 포식자와 피식자로 나뉘는 학생 캐릭터의 유형화는 어느새 한국 학원물의 공식이 됐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국의 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비현실적인 일들이 화면 속에선 당연한 것처럼 취급된다.
<피라미드 게임>(2024)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계급구조를 노골적으로 그린다. 대기업이 세운 백연여고에서는 ‘피라미드 게임’을 통해 A등급부터 F등급까지 학생 서열을 매기고 꼴찌는 반 내 합법적인 왕따가 된다. 왕따는 어떤 괴롭힘을 당해도 순
최신 한국 학원물 시리즈가 그리는 혹독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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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원물 시리즈가 그리는 학교의 경향은?
요즘 학원물 시리즈를 보면 어쩐지 낯설다. 극 중 학교는 더이상 누구나 다니는 일반적 교육기관이 아니다. 고위층 자녀들만 다니는 상위 1% 명문 사립고이거나 문제아들이 모인 ‘꼴통’ 학교다. 어느 쪽이든 교실에서는 공공연히 난투극이 벌어지고 조직적인 마약 거래까지 행해지며 안전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말 그대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한때 교실은 소소했다. 성적과 가족문제는 여전히 컸으나 졸음과 배고픔을 참아가며 짝사랑에 설레고 친구와 시답잖은 수다로 깔깔대던 10대들이 있었다. 미세하고 예민한 성장통의 시간이 그곳에서 흘러갔다. 미디어 속 학교는 언제, 어떻게 잿빛으로 변했을까. 학생들은 왜 더는 웃지 않을까. 문제의식과 호기심을 가지고 최근 학원물 시리즈의 변화를 분석하고 제작 현장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산업적, 사회문화적 맥락을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보통 학교’가 희귀해진 지금, 그 부재 속에서 놓친 것과 앞
[기획] 한국 학원물에는 왜 평범한 학생이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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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뿔을 그리는 선>을 비롯한 네편의 ‘원뿔 영화’를 만들면서 매콜은 지속시간이 관객의 경험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점을 깨닫고, 표준적 영화의 상영시간을 더 급진적으로 해체하는 방식으로 공간, 관람성, 조형성, 순열조합을 탐구했다. 갤러리 설치를 위해 기획된 최초의 작품인 <네대의 영사기를 위한 긴 영화>(Long Film for Four Projectors, 1974)에서 관객은 45분 길이의 필름 릴을 포함한 네개의 영사기가 이루는 부등변 사각형 모양의 광선 공간을 체험했다. 영사기마다 총 8번의 릴 교체를 수반하고 이때마다 영사의 방향이 달라지기에 총 8번의 순열조합이 6시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 작품에 대한 노트에서 매콜은 이 작품의 관객이 “공통의 경험 시간을 차지하는 하나로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고 “언제 올지, 작품에 어떻게 접근할지,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에 대한 결정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라고 썼다.뉴욕의 아이디어 웨어하우스에서 1975년 6월
21세기 매콜의 귀환 - 푸투라 서울, 앤서니 매콜 개인전 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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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레이번스본대학교에서 사진과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한 앤서니 매콜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영화와 미술의 전통적인 경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고 서로 긴밀히 얽혀 있던 두 가지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966년 설립된 런던영화인협동조합(London FIlmmakers’ Co-operative)은 피터 지달, 맬컴 르그라이스 등을 중심으로 주류 극영화의 환영주의적 재현을 벗어나 영화의 구성 요소와 제작 과정,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내용으로 탐구하는 구조주의적, 유물론적 실험들을 전개했고 그 실험들은 영화 이야기의 허구적 시간에 선행하는 상영시간과 사건으로서의 영사 행위에 대한 관객의 참여적 지각을 촉진하는 갤러리 영사와 상영 퍼포먼스를 포함했다. 영화적 활동에 나서기 전부터 영국 전위영화 작가들과 교류했고 상영회에도 참석했던 매콜은 데이비드 커티스의 <실험영화> (Experimental Cinema, 1971)에서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
영화와 미술의 경계가 와해될 때 - 푸투라 서울, 앤서니 매콜 개인전 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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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일부터 9월7일까지 푸투라 서울에선 미디어아트, 복합예술의 거장 앤서니 매콜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 이 진행 중이다. 앤서니 매콜은 1970년대 영국 아방가르드 영화 운동의 기수로 꼽히는 인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영상, 조각, 설치, 드로잉, 퍼포먼스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영화와 미술의 상관관계를 탐구하고 실천해왔다. 전시를 감상한 김지훈 교수(중앙대학교 영화미디어학센터 디렉터)가 앤서니 매콜에 대해 밀도 높은 글을 보내왔다.
*이어지는 글에서 김지훈 교수의 앤서니 매콜에 대한 분석이 계속됩니다.
[기획] 빛과 안개, 공간의 시네마 - 푸투라 서울, 앤서니 매콜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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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셰프인 세실(쥘리에트 아르마네)은 돌연 일터를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요리 경연 서바이벌 우승 후 레스토랑 개업을 준비하던 차에 원치 않은 임신 소식으로 혼란스러워진 탓이다. 처음으로 셰프의 꿈을 키웠던 가족의 식당에서 숨을 돌리며 그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이든 부모, 가정을 이룬 친구들이 시간의 흐름을 체감케 하는 동시에 세실이 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삶을 가늠하게 한다. <리브 원 데이>는 아멜리에 보닌 감독이 2023년 세자르상을 수상한 동명의 단편을 각색해 내놓은 첫 장편이다.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신인감독의 첫 장편영화가 선정된 최초의 사례다. 지난해 칸영화제 개막작 <더 세컨드 액트>가 형식적 실험에 충실했다면 <리브 원 데이>는 목표 지향적인 인물이 본원지 에서 과거 인연들을 만나 영감을 얻는다는 익숙한 구성을 취한다. 장소를 세실의 레스토랑에서 고향으로 옮김에 따라 한 개인에서 세실의 관계 성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리브 원
[기획] 칸영화제 개막작 <리브 원 데이> 리뷰, 개인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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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칸영화제는 화려함보다는 불편함을 택했다. 장기화된 전쟁, ‘뉴 스트롱맨’ 시대가 만들어낸 세계적 불안 속에서 열린 올해 칸은 영화제가 동시대 정치와 예술의 접점을 성찰하는 공간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한다. 심사위원장 쥘리에트 비노슈를 필두로 한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단은 인도 감독 파얄 카파디아, 이탈리아 배우 알바 로르바케르, 미국 배우 핼리 베리와 제러미 스트롱, 모로코계 프랑스인 작가이자 활동가인 레일라 슬리마니, 멕시코 감독 카를로스 리에가다스, 차드 다큐멘터리스트 디외도 아마디, 그리고 홍상수 감독으로 구성됐다. 이들의 첫 공식 석상인 개막 기자회견 직전 벌어진 두개의 사건이 질문 공세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먼저 개막 전야에 가자 지구 출신 예술가 파티마 하수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할리우드 및 유럽 영화계 인사 350여명이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통해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일가족 10명과 함께 목숨을 잃은 하수미는 올해 칸 사
[기획] 제78화 칸영화제 개막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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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은 드물게 높은 계단으로 향하는 길목에 레드카펫을 설치하는 영화제다. 올해는 심사위원장 쥘리에트 비노슈,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 로버트 드니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초대된 홍상수 감독, 개막작을 연출한 아멜리에 보닌 감독 등이 가장 먼저 계단을 올랐다. 뤼미에르 대극장이 위치한 팔레 드 페스티벌 정문에 위치한 24 계단은 초당 24프레임인 전통적인 필름영화에 대한 경외를 뜻하며 카미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가 흘러나오는 영화제 타이틀 필름은 이 계단을 기어코 천상까지 펼쳐 올린다. 매년 5월 중순의 약 2주간, 프랑스 남부 칸섬은 오직 영화만을 위한 숭고한 성소가 되고자 한다. 올해 영화제는 그러나, 예술이라는 초국적의 영토를 숭배하기보다 현실과의 관계 맺음을 직시하는 목소리들이 더욱 각광받는다. 개막 기자회견에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던 동료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에 대한 입장을 밝혀주기를 요구받은 쥘리에트 비노슈의 대답처럼. “그는 더이상
[기획] 칸의 과제, 제78화 칸영화제 개막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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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일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에서 배창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영화 <배창호의 클로즈 업> 공개를 계기로 마련한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박장춘 감독과 배창호 감독이 공동연출한 신작 다큐멘터리는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15년 전 최신작”인 <여행> (2009)까지의 국내외 촬영지를 방문해 배창호의 영화 세계를 조명하는 에세이영화다. 이날 오전 기자회견부터 특별전 상영작인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황진이>(1986), <꿈>(1990)의 GV에 참석하며 전주에서 바쁜 일정을 이어간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 (문석 프로그래머) 배창호가 관객들을 만나 ‘자연’과 ‘사랑’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한국영화에 몸담아온 지난 43년을 돌아보았다.
마스터클래스 진행을 맡은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대학생 때 극장
배창호의 자연주의에 주목하라,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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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영화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시네필의 미개척 영토는 아마도 호주영화일 것이다. 오랜만에 전주영화제를 방문한 호주 출신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에이드리언 마틴은 진귀한 호주영화들을 소개한다. 이번 게스트 시네필 섹션에서 에이드리언 마틴이 엄선한 작품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호주영화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간 알 수 없었던 다채로운 호주영화에 대해 에이드리언 마틴과 이야기를 나눴다.
- 16년 만에 전주영화제를 방문했다. 이번 프로그램의 선정의 변을 듣고 싶다.
호주영화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통 알려진 호주영화라고 한다면 <행잉 록에서의 소풍>(1975), <매드맥스> 시리즈(1979~), <피아노>(1993), <뮤리엘의 웨딩>(1994) 등이 있다. 그런 영화들을 여기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영화들을 선보이고 싶었다.
- 상영작 중 단연 걸작은 올해 2월 작고한 커린
영화의 디테일 비평의 스타일, 기획전 ‘또 다른 호주영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게스트 시네필 에이드리언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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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 주말 영화의 거리는 여우비로 자주 젖었다. 축제 중 전주에는 이리도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그래서 극장이 더 아늑했는지 모른다. 올해의 프로그래머 이정현과의 만남도 그 반작용의 한 예다. 벚꽃에 물 든 듯한 연분홍 슈트 차림으로 레드카펫을 밟았던 그는 비슷한 빛깔의 원피스를 입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나 창밖 공기와 대비되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아이들이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로 오고 있다면서. 기다린 가족과의 재회, 마지막 관객과의 대화를 앞두고 만난 이정현에게서는 충만한 기쁨이 엿보였다. 영화제를 통과하며 동료들, 관객들과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재확인한 긍지가 그 안에 스며 있었다. 외풍이 파고드는 자리 한편에 난로를 두고 그가 큐레이션한 영화들에 관한 대화를 시작했다.
<꽃잎>을 끝낸 다음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됐고
이정현 프로그래머가 선정한 작품은 여섯편이다. 그중 출연작은 세편으로, 모두 그의 연기 인생에서 이정표처럼 서 있는 영화들이다. 그는 <꽃
많은 분들이 단편영화를 응원해주기를 바라게 됐다, 올해의 프로그래머 이정현 배우 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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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할부지>로 지난해 장편영화 데뷔를 치른 심형준 감독이 전주를 찾았다. 총 6차례 상영과 네 차례 관객과의 대화를 소화하며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바쁜 감독이 된 그는 후지필름, 그린피스 인터내셔널, 그리고 매거진 <오보이!>가 공동 제작한 영화 <클리어>의 연출을 맡았다. 전주영화제 후원사로서 3년째 영화를 제작 중인 후지필름 일렉트로닉 이미징 코리아는 “영화제 상영으로만 그치지 않고 오래 기억될 영화”를 만들 적임자로 심형준 감독을 낙점했다. 사진작가 출신으로 후지 카메라를 애용해왔다는 심형준은 “같이 영화 찍어보자. 주제는 자유”라는 회사의 부름에 ‘환경’이라는 주제를 직접 제안했다. 소속사(웨이브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환경운동가, 오랜 친구인 줄리안 퀸타르트처럼 그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환경에 대한 의식을 시나브로 쌓아왔다. 비록 “전문가도 아니고 관련 통계를 잘 아는 사람도 아니기에 흔들리기도 하고 실수도 한다”는 그는 그런 혼란과 모순
자유와 환경, <클리어> 심형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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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연고 없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세 가족은 들개를 사냥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유능한 사냥꾼으로 마을의 인정을 받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죽인 짐승에게서 불안정한 가족의 처지가 겹쳐 보인다. 한국계 캐나다인 제롬 유 감독의 첫 장편 <잡종>은 한국인 디아스포라 가정의 불안함을 그려낸다. 한살 때 캐나다로 이주했던 그였기에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캐나다에서 한국인으로 살며 겪은 부모와 동료의 기억을 한데 모은 작품이다.” 특히 모국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상영한 이번 전주영화제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평생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한국인임을 인정받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한국 관객들에게도 이 가족의 모습이 수용되길 원했다.”
본디 혈통과 결부된 단어인 영화의 제목 <잡종>은 이민자 가족에게는 “야생의 삶과 길들여진 삶 사이에 놓인 선택의 문제”다. “디아스포라 가정은 주류사회에 동화될지 아니면 지금껏 살아온 길을 굳건
해소되지 못한 슬픔에 대하여, <잡종> 제롬 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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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한구석에 박힌 다다미 넉장 반의 단칸방. 이른 아침 텔레비전을 켠 이일하 감독은 한 여자를 마주했다. 혐한 발언에 맞서 눈 하나 깜짝 않고 자기 할 말을 하는 여자는 가난한 유학생의 “움츠러든 삶에 사이다가 터지는 느낌”을 선물했다. ‘헤이트스피치’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의 투쟁기인 <카운터스>를 만들면서 그와 재회한 이일하 감독은 그제야 확신했다. “당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꼭 찍어야겠다!” 다짐을 밝히자 뜨거운 화답이 돌아왔다. “네가 찍는 거라면 내 한몸 불살라볼게!” 재일 한국인 활동가 신숙옥은 그렇게 이일하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다큐멘터리이자 올해의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상영작 <호루몽>에 불을 붙였다.
영화는 신숙옥이 자신을 악의적으로 곡해한 극우 시사 프로그램 제작사와 다툰 기록을 중심에 둔다. 감독은 “소송 결과가 안 나오면 영화도 안 끝난다”는 걸 알았다. 다행히 한달간의 일본 로케이션 촬영 기간에 판결이 나왔고, 신숙옥이 통화로 이를 전해
신숙옥, 촌철살인의 전사, <호루몽> 이일하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