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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널뛰며 동유럽 현대사의 어두운 진실을 일관되게 추적해온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이 전체주의 체제가 그들의 가장 밝은 미래를 짓밟는 아이러니를 차가운 시선으로 해부한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스크린 데일리> 최고점인 3.1점을 기록한 <두 검사>는 1937년 소비에트연방을 배경으로, 감옥에서 불타버린 수천통의 편지 중 한통이 기적적으로 새로 부임한 지방 검사 알렉산드르 코르니예프의 책상에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실험물리학자인 조지 데미도프의 원작을 발견한 과정에 대해 감독은 “지난 30년간 화장로 없는 아우슈비츠라 불린 굴라그와 나치수용소 수감자들의 책을 상당히 많이 수집해왔다”며, 1969년에 쓰였지만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의해 1980년에 모든 원고가 압수되었다가 2009년에야 비로소 출간된 소설을 “러시아 고전 동화의 구조로 복각”했다고 말한다. “거기로 가라.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는 모른다.
권력을 성찰하는 방법, <두 검사>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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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미혼모 아리안은 만삭의 몸으로 자기를 버린 엄마를 찾아다닌다. 그 이유를 들어야 엄마가 될 수 있을 것처럼. 펄라는 아기가 남자 친구를 자기 곁에 잡아둘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제시카는 고민 끝에 준비된 가정에 아기를 입양시키기로 결심하지만 정작 딸을 방치했던 엄마가 나타나 갓난아기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언노운 걸> 이후 전성기의 예리함을 잃었다는 불평에 아랑곳없이 다르덴 형제는 희망이 절실한 곳을 찾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고 어린 엄마들의 쉼터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21세기 시네마에 심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이미 두개의 황금종려 트로피를 선반에 올려 둔 감독이지만 신작 <어린 엄마들>(JEUNES MÈRES, 가제)로 각본상을 받은 다르덴 형제의 얼굴은 어떤 수상자보다 환하게 빛났다(그들의 칸 각본상 수상은 2008년 <로나의 침묵>에 이어 두 번째다).
- <어린 엄마들>은 다섯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그들끼리
불행의 유전을 끊다, <어린 엄마들>(가제)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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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사이에서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된 작품은 올리베르 락세 감독의 <시라트>였다. 인물들을 서서히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시라트>의 선택에 열렬히 환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기자들도 존재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 화제의 중심에 섰던 <시라트>는 최종적으로 제78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라트>를 연출한 올리베르 락세 감독은 꾸준히 칸영화제의 선택을 받아온 창작자다. 장편 데뷔작 <유 아 올 캡틴스>는 2010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부문에 초청돼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을, 두 번째 장편 <미모사>는 2016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부문에서 네스프레소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파이어 윌 컴>은 2019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주목할 만한 시선)을 수상했다. <시라트>에 이르러 올리베르 락세 감독은 테크노음악에 맞춰 밤새 춤을
이미지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시라트> 올리베르 락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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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킴 트리에르는 자신의 전통을 세워가고 있다. 그의 신작은 여전히 개와 늑대의 시간, 인물들의 자기인식을 대변하는 제3의 보이스오버, 배우 레나테 레인스베, 고약한 유머와 멜랑콜리가 동반한 서정의 드라마와 동반한다. 오슬로 3부작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이어 <센티멘털 밸류>에서도 일관된 스타일을 확장해나가는 동시에 감정적 깊이와 가족의 다성적 시선을 감싸는 서사의 품은 키워냈다. 한 작가의 완연한 진일보다.
<센티멘털 밸류>는 가족을 떠났던 영화감독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르스가르드)가 두 자매를 찾아오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가족의 혼란과 슬픔을 들춘다. 특히 배우인 언니 노라(레나테 레인스베)는 아버지가 쓴 자전적 작품에 주연배우로 출연해줄 것을 제안받고 오래된 마음의 상처 속을 헤매게 된다.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은 영화와 동시대 예술이 처한 현실, 오래된 집과 물건들을 경유해 가족의 연약한 맨살이 서로 맞닿는 순간까지 관객을
온유함의 필요, <센티멘털 밸류>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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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르 파나히는 놀라운 이야기꾼이며 스릴러의 장인이다. 창작의 자유에 대한 이란 정부의 억압과 투옥은 그의 스토리텔링을 더욱 깊고 독창적으로 벼릴 뿐이었다. 공식적 영화제작 금지령이 해제된 2025년 파나히가 칸에 가져온 <심플 액시던트>는 예술적 자기 성찰을 담은 전작 <노 베어스>에 비해 훨씬 직설적이다. 영화는 정당한 권리를 외치다가 구금돼 고문당하고 삶에 깊은 내상을 입은 시민들이 가해자로 추정되는 남자를 우연히 마주치며 시작한다. 남자는 한사코 자기는 그 악덕 관리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복수를 원하는 피해자들은 무고한 이를 해칠지도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으로 인해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남자의 아내는 출산 직전이라 돌봄을 필요로 한다. <심플 액시던트>의 프리미어에서 울려 퍼진 경외의 갈채는 이튿날 진행된 라운드 테이블 인터뷰 자리에서도 소리 없이 계속됐다.
- <심플 액시던트>를 만드는 동안 개인적으로 겪은 심리
안대와 포승줄에 결박되었을 때 들려온 소리, <심플 액시던트> 자파르 파나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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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누릴 수 있는 뜨거운 여름을 되찾아주고 싶었다.”(허가영 감독) 가족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노년 여성 영순(허진)은 손녀의 결혼식이 아닌 남자 친구 학수(정인기)의 49재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한줄의 로그라인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 <첫여름>으로 허가영 감독은 한국 최초로 제78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 1등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로레알 파리의 라이트 온 우먼스 워스 어워드 수상작에도 이름을 올렸다. 허가영 감독이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바탕이 된 <첫여름>은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돼 곧 국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 축하한다. 라 시네프에서 1등상을 수상하게 된 소감은.
감사하다. 원래 무대 체질이라 긴장을 잘 안 하는데 1등상으로 이름이 불리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졌다. 프랑스의 노인 관객들이 <첫여름>을 보고 삶의 용기를 얻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고 말해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도
할머니라는 여자, <첫여름> 허가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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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은 거장과 신인감독, 처음 영화제에 초청된 연출자의 신작으로 다채롭게 채워졌다. 주요 수상작들은 대체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으나 이란 정부의 강압적 체제를 비판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심플 액시던트>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은 연일 축제를 지속하는 와중에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영화제측의 전언으로 느껴진다. <씨네21>은 이번 칸영화제에서 10명의 영화인을 만났다. <첫여름>의 허가영 감독, <심플 액시던트>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 <센티멘털 밸류>의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 <시라트>의 올리베르 락세 감독, <어린 엄마들>(가제)의 다르덴 형제, <두 검사>의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 <르누아르>의 하야카와 지에 감독, <거울 No.3>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조은수 촬영감독이 그들이다. 뤼미에르 극장을 배경으로 이들은 영화에 대한 자신의 각별
[특집] 칸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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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제작자이자 아내인 진지 쿠글러, USC 영화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세브 오해니언과 함께 제작사 프록시미티 미디어를 설립했다. 이후 프록시미티 미디어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스페이스 잼: 새로운 시대> 등의 작품을 성공시키며 승승장구했고, 2021년 영화 개발 및 제작 전무로 레베카 조를 영입했다. <씨너스: 죄인들>은 외부 제작사와의 협력 없이 오직 프록시미티 미디어의 인력으로만 제작한 영화다. 레베카 조에 따르면 <씨너스: 죄인들>은 “오리지널 IP로 영화를 만드는 게 어려운 시기에 우리만 만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목표 아래 탄생한 작품이다. “특정 시대, 특정 국가, 특정 민족의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세계 어디든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아픔, 삶의 총체에 감응할 수 있다. 장르성 또한 <씨너스: 죄인들>만이 시
다양한 뱀파이어 스릴러 엮어내기, <씨너스: 죄인들> 총괄 프로듀서 레베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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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레이디 페이 주를 연기한 이후 할리우드의 주목이 쏟아진 배우 리 준 리에게 어느 날 단 두장의 대본이 주어졌다. 그 속에 적힌 배역에 관한 정보라고는 ‘미국 남부 억양이 짙은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설명뿐. 연기 학교에서 배운 다양한 억양을 비로소 쓸 기회라 생각해 오디션에 임한 리 준 리는 일주일 후 이 작품이 라이언 쿠글러의 새 프로젝트라는 걸 알게 됐고, 한달 후 식료품 가게 주인 그레이스로 <씨너스: 죄인들>에 합류했다. “1930년대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작품에서 잊을 수 없는 얼굴을 새긴 배우 리 준 리를 만났다.
- 돌리 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알려지지 않은 미국 남부의 중국계 미국인 이야기>(2017)를 참고했다고.
당시 중국계 미국인들은 노예제 폐지 이후 흑인 다음으로 목화밭에서 일해야 하는 노동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목화 노동을 원치 않아 자발적으로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이
배우는 이야기를 전하는 통로, <씨너스: 죄인들> 배우 리 준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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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마일>을 타고 흐른 밈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친숙한 배우 오마 벤슨 밀러가 <씨너스: 죄인들>의 콘브레드 역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특징을 넘어 <씨너스: 죄인들>이 품은 메시지가 무엇인지까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명강사였다.
- 이번 내한의 소감은.
<8마일>의 내 모습을 그렇게 좋아해주고 있을 줄이야! 벌써 20년이 넘은 작품인데 아직도 나를 알아봐주고 응원해준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고 감사했다. 영화는 ‘소모성 콘텐츠’가 아니다. 30년 후에도 지구 반대편의 한국 팬들과 나의 유대는 이어질 것이다. <씨너스: 죄인들> 역시 그렇게 유의한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 어떤 부분에서 개인적 소회가 깊은지.
할아버지께서 영화의 배경인 1930년대 미시시피에서 사셨다. 난 할아버지가 그곳에서 사시며 겪은 이야기와 시대의 풍광을 간접적으로 물려받았다. 내가
악이 아닌 희망으로, <씨너스: 죄인들> 배우 오마 벤슨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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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 죄인들>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블루스의 천재 새미(마일스 케이턴)다. 엄청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지만, 목사 아버지는 그의 음악을 부정하고 억압한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사촌 스모크 형제(마이클 B. 조던)의 도움으로 새미는 ‘영가’로서의 음악에 눈을 뜬다. 이 중요한 역할에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연기 경험이 없던 신인배우 마일스 케이턴을 기용했다. 뮤지션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이 소년은 셀프 테이프를 통한 오디션으로 섭외됐다. 막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유튜브를 통해 마일스 케이턴의 무대를 본 적 있었고, 공연에서 뿜어내는 그의 열정을 이미 눈여겨본 상황이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영화에서도 명확히 발휘됐다. “초반에 삼촌과 함께 차를 타면서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은 실제 라이브 공연이었고, 사촌 역인 마이클 B. 조던 배우의 리액션도 진짜 반응이었다. (웃음) 무더운 날씨였지만 그 에너지가 현장을 뒤덮었던 기억이 난
소년의 신념, <씨너스: 죄인들> 배우 마일스 케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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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빼놓고 <씨너스: 죄인들>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영화 속 블루스의 걸쭉한 선율에 맞춰 헤드뱅잉하고, 아일랜드 음악의 흥겨운 비트를 따라 발을 구르다 보면 어느새 1930년대 미시시피 대평원에서 독주라도 들이켠 양 흥이 나고 이내 울컥한다. 영화 속 블루스의 향연은 음악감독 루드비그 예란손과 그의 아내인 총괄 뮤직 프로듀서 세레나 예란손에 의해 생동했다. <블랙 팬서>와 <오펜하이머>로 두 차례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고, <테넷> <메이의 새빨간 비밀> 등의 음악을 작곡한 루드비그 예란손은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모든 장편영화를 함께한 영화적 동반자이자 대학 시절부터 함께한 지음이다. 세레나 예란손은 <오펜하이머>의 현악 편성을 주도한 바이올리니스트이고, 이번 영화에서 프로듀싱을 도맡으며 전공 이외의 영역에서도 성큼 도약했다. 루드비그 예란손과의 인터뷰는 한정된 시간에 대화를 마칠 수밖에 없어 아쉬웠던 세레나 예
블루스는 영화를 세우고 지탱하는 골조다 - <씨너스: 죄인들> 음악감독 루드비그 예란손 총괄 뮤직 프로듀서 세레나 예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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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 죄인들> 배우 마일스 케이턴, 오마 벤슨 밀러, 리 준 리 인터뷰
총괄 프로듀서 레베카 조와 총괄 뮤직 프로듀서 세레나 예란손, 그리고 음악감독 루드비그 예란손과의 대화
지난 2주간 <씨네21>은 <씨너스: 죄인들>의 리뷰,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잠>의 유재선 감독과의 마스터스 토크를 실었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씨너스: 죄인들> 기획기사는 출연진, 스태프와의 단독 인터뷰다. 미국 내에서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씨너스: 죄인들>의 배우와 제작진이 흥행의 불꽃을 이어가고자 지난 5월 한국을 찾았다. 작품의 주인공 새미로 분하며 전세계 관객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각인한 마일스 케이턴, 의 밈으로도 잘 알려진 문지기 콘브레드 역의 오마 벤슨 밀러, 1930년대 미시시피를 살아가는 중국계 미국인의 삶을 체화한 그레이스 역의 리 준 리 배우의 이야기를 담는다. 누구보다 한국의 정서를 깊이 이
[기획] 영화 보고 나니 할 말이 많아서, 너무 많아서! 영화 <씨너스: 죄인들> 배우, 제작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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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순수한 첫사랑이나 내면의 갈등을 조용히 견뎌내는 인물들이 떠오른다. 거기에 최근에는 감정을 분출하거나 거친 기운을 품은 캐릭터들이 하나둘씩 더해지며 박진영 하면 떠오르는 얼굴의 폭이 다양해졌다. 2017년 영화 데뷔작 <눈발> 속 숫기 없던 소년이 <하이파이브>에 이르러서는 영생을 외치는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 <하이파이브>에서 박진영은 초능력자의 췌장을 이식받은 영춘으로 분한다. 신구 배우가 본래의 노인 영춘을, 박진영은 하이파이브 멤버 중 힐러 약선(김희원)의 능력을 빼앗아 젊어진 영춘을 연기한다. 건강한 20대의 몸에서 그치지 않고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는 영춘은 남은 하이파이브 멤버들을 추적하며 끝없는 욕망을 드러낸다.
- 딸(진희경)에게 “어디 있다 이제 와?”라고 말하는 첫 등장 신에서 놀랐다. 노인의 목소리이면서도 동시에 신구 배우의 말투와 매우 흡사하더라. 여전히 영춘이라는 걸 관객에게 설득해야 하는 중
[기획] 귓가에 남는 얼굴, <하이파이브> 배우 박진영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