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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문익환 목사의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줄 것 같지는 않다. 45년의 두터운 세월을 홀로 버틴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의 신념을 온전히 보여준다는 건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욕심이 아닐까. <선택>은 그의 신념 혹은 이념을 ‘선동’하거나 ‘선전’하고자 하지 않는다. 자신의 끔찍한 운명을 끝내 사랑한 한 인간을 차분히 응시할 뿐이다. 그 삶의 방식은 0.75평 감옥 안이나 밖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는 생의 조건을 견디는 가르침일지 모른다. <선택>을 보다보면 또 다른 김선명이라 할 홍기선 감독이 궁금해진다. ‘비린내나는 리얼리즘’영화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만들고 <선택>을 내놓기까지 10년. 그는 왜 그 먼 길을 그토록 힘겹게 걸어왔을까? 80년대 영화운동을 주도했던 장산곶매에서 홍 감독과 함께했던 이은 감독이 그 질문을 대신 해주었다. 홍기선 감독과 이은 감독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
영화 <선택>의 선택 [1] - 홍기선 vs 이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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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 고민이 되는 건 세속적인 걸 버리면 편한데, 현실에선 그냥 미련을 버린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학교에서는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그게 옳지만, 현실에선 분명히 침략인데 그걸 받아들여야 하거든요. 또 정부에선 파병을 이야기하고. 혼란스럽죠.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은 그냥 본질적인 가치로만 산단 말이죠.
홍기선 | 나는 걱정 안 해요. 내가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은 | 아니, 정치에 신경 안 쓰더라도 당장 파병하면 나와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가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잖아요. 마음을 비우고 딱 잊어야 할지, 아니면 시민단체와 함께 국회 앞으로 가서 시위를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거죠.
홍기선 | 그냥 마음으로만 반대할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시민단체와 더불어 움직일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입장에서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이거 보면서 <아리랑>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뭐라도 떠올랐나요? 사실 <아리랑>은 여러 곳
영화 <선택>의 선택 [2] - 홍기선 vs 이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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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선택>의 김선명은 홍기선 감독의 명백한 페르소나이지만 배우 김중기의 초상이기도 하다. ‘통일’이란 단어에 온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는 김선명의 모습은 1988년 판문점으로 북쪽 학생 대표를 만나러 가겠다며 날을 세웠던 김중기의 눈빛과 겹쳐진다. 그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배우 김중기가 한때 서울대 총학생회 조국통일추진위원장으로 격렬히 투쟁했다는 이력은 아득히 먼 과거가 돼버렸다. <선택>의 놀라움은 에둘러가지 않는 방식으로 그 아득함과 대결해 지금도 유효한 살아 있는 그 무엇으로 전해준다는 점이다. <선택>은 배우 김중기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새삼 궁금하게 만든다. 노년의 김선명이 0.75평 안의 감옥에서 무언가 득도한 듯 초연한 태도로 삶을 다스리는 모습이 자꾸 인간 김중기의 실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무 반성한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반성을 못한 것
영화 <선택>의 선택 [3] - 배우 김중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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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 구도다. 인상적인 건 ‘청소’ 마크를 단 소지들이 교도관을 대신해 장기수들에게 폭력을 일상적으로 가하는 장면이다. 물론 그들도 피해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본 소지들도 그랬다. 저쪽에 붙어 혜택도 많이 받고. 가해자 오태식도 결국은 체제 대립의 희생양이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장기수들은 북에서도 ‘잊혀진 존재’가 됐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장기수 분들도 저쪽 체제의 피해자다.
-<선택>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은.
=(환갑을 맞아 동료들이 넣어준 부식 중에서) 나직이 사과를 베어먹는 장면, “야, 첫눈 온다”라는 소릴 듣고 창 밖을 내다보는 장면, 출소하는 날 핸드헬드로 방 안을 휘둘러보다가 내레이션 들어가는 장면. 눈오는 장면에선 다른 죄수들과 동화돼 감옥생활을 편하게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한 느낌이어서 그랬고, 나갈 때 장면은, 음
영화 <선택>의 선택 [4] - 배우 김중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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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간의 아름답고 짜릿했던 현장의 기억들 #1
제8회 부산의 축제를 알리는 개막식의 올해 사회자는 박중훈과 방은진씨. 박중훈씨의 특유의 유머와 영화제 단골사회자 방은진씨의 노련함으로 활기찬 막이 올랐다.
야쿠쇼 고지-안성기 오픈토크 10월3일 5시 파라다이스 가든에서 일본의 국민배우와 한국의 국민배우가 만났다. 일본영화 <잠자는 남자>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던 두 배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웃음을 건네며 양국의 ‘국민토크’를 나눴다.
정창화-임권택 오픈토크 ‘액션영화의 대부’ 정창화 감독과 임권택 감독의 오픈토크가 파라다이스 야외가든에서 열렸다. 임 감독은 “1955년 정 감독님의 <장화홍련전>에서 제작부 똘마니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며 정창화 감독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임 감독은 정창화 감독에게 액션영화를 한편 더 만들어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제1회 아시아영화인상 마흐말바프에게 환호를! 10월8일 그랜드호텔 2층 볼룸에서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2] - 현장 스케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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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동 영화의 거리에는 언제나처럼 10여개의 부스가 차려져 행인들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항상 북적거리는 남포동이지만, 상영작이 적어서인지 예년만큼 흥분된 분위기는 덜했다.
영화의 바다? 사람의 바다! 10월3일 개천절이 금요일이라 황금연휴를 맞은 남포동 극장가가 사람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남포동에서는 영화제 작품을 6개관에서만 상영했지만, 해운대보다 좌석 수가 많아 상당한 관객이 찾아왔다. 하지만 첫 주말이 지나자 남포동의 인파는 다소 한산해졌다.
영화계에도 햇볕이? 영화제 사상 최초로 북한영화 7편이 부산을 찾았다. 국정원과 통일부와의 지루한 협의 끝에 뒤늦게 상영이 결정된 탓에 많은 관객이 참석하진 못했지만, 남북영화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 의의만큼은 인정받을 만했다. 사진은 북한영화 상영 첫날인 10월7일 오전 11시30분 <신혼여행>이 상영되는 대영시네마 3관으로 입장하는 관객의 모습. 노인들이 상당수 찾아 이채로운 풍경을 연출했다.
영화인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3] - 현장 스케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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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노라 보앗노라, 한국영화의 힘
올해 부산프로모션플랜(PPP)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 프로젝트가 어느 해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감독들의 우수한 프로젝트가 15편 이상 접수되었다. 선정에 어느 해보다 힘들었다”는 정태성 PPP 수석운영위원이 말은 총 18편의 프로젝트 중 선정된 5편의 한국프로젝트의 면면만 보더라도 과장이 아님을 알수 있다. 여기 미국으로 건너간 지 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명세 감독을 비롯, 허진호, 정재은, 김인식, 전수일 감독이 선보이는 신작 프로젝트와의 짧은 만남을 주선한다.
전쟁의 상흔, 생이별의 절규
이명세 감독의 <크로싱>
오랜만에 고국의 영화인들과 만난 이명세 감독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2000년 4월에 미국에 건너가 3년 넘게 이국 땅에서 영화준비를 했던 그에게 낯익은 얼굴과 정감어린 언어가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수많은 영화인들이 오랜만에 만난 이명세 감독에게 악수를 청했고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4]- PPP에서 만난 한국 감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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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있고, 감정이 풍부한 사랑 이야기
허진호 감독의 <행복>(가제)
봄날이 간 뒤, 보리밭에서 웃음짓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2001년 개봉한 <봄날은 간다> 이후 2년 만에 새로운 프로젝트 <행복>(가제)을 들고 부산에 나타난 허진호 감독은 찰나의 행복 뒤에 잔인한 사랑의 붕괴과정을 담아냈던 전작의 고통을 말끔히 잊은 듯 보였다. 게다가 이제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말고 극적인 상황 속에서 나오는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다시 한번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징한 탐험을 시작할 태세였다.
“DVD 작업 때문에 와 <봄날은 간다>를 연달아 볼 기회가 생겼다. 문득 <봄날은 간다>가 참 건조하게 찍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카메라와 인물과의 물리적 위치뿐 아니라, 인물을 바라보는 심리적 거리 역시 너무 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어쩌면 나란 사람이 그 사이 많이 건조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5] - PPP에서 만난 한국 감독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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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연다
하나 마흐말바프, 이강생, 세디그 바르막, 마니쉬 자, 이제 영화감독의 길을 향해 걸음마를 시작한 이들은 뭔가 특별한 사연을 갖고 있는 아시아의 신인감독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의 영향을 받아 다큐멘터리를 만든 14살 소녀감독, 11년 동안 배우생활을 한 뒤 모니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앉은 감독, 아프가니스탄의 척박한 터전을 헤치고 23년 만에 데뷔작을 만든 감독, 첫 단편으로 칸영화제에서, 첫 장편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감독까지, 아주 특별한 이들을 만나보자.
카메라에도 ‘인격’이 있습니다
14살 소녀 감독 <광기의 즐거움>의 하나 마흐말바프
소녀가 영화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는 8살이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된 중편 다큐멘터리 <광기의 즐거움>을 만들었던 때는 13살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예술과 상업이라는 구분과 상관없이 인간을 도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지금 14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8] - 아주 특별한 신인감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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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위에 끔찍하고 비극적인 기억을 읽었다”
탈레반 정권 후 첫 번째 장편 <오사마>의 세디그 바르막 감독
세디그 바르막(41) 감독은 영화제 게스트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끌었다. 탈레반 정권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첫 번째 장편영화이며,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제작을 맡아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하지만 폐허로 변해버린 아프가니스탄의 풍광 위에 생계를 위해 소년으로 변장했다가 비극의 낭떠러지로 발을 내디디게 되는 소녀의 운명을 겹쳐놓은 <오사마>(2002)의 절절한 울림을 대하고 나면 그에게 쏟아진 환대는 온당하고 마땅하다.
-관객 반응이 좋았다.
=진심으로 영화를 받아들인 것 같다. 어쩌면 한국도 (아프가니스탄과) 비슷한 고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본 적이 있는데 공감했다. 전쟁을 벌인 자들은 결코 그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다.
데뷔작 <오사마>를 만들기까지 바르막은 수많은 협곡을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9] - 아주 특별한 신인감독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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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인생의 절반은 황산벌에서 배웠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올 여름, 어느 촬영현장이라고 쉬웠겠느냐마는 유달리 몸으로 뒹군 현장이 있었으니, 바로 <황산벌>의 현장이다. 질퍽해진 땅 때문에 다리 한쪽 옮기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20kg이 넘는 갑옷과 온갖 무기들을 들고 나뒹굴어야 했으니 말이다. 6년 전 기획 때부터 올 여름 촬영현장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황산벌>이 드디어 이번 주말 극장에 걸린다. 그리고 이 영화와 함께한 정승혜 제작이사가 <황산벌>의 지난 6년의 기록을 여기 풀어놓았다.
#1 ▶ 6년 전, 조철현의 이준익 옆구리 찌르기
“‘백제의 마지막 날’을 소재로 사극영화 한편 맹글면 어쩌것소이. 계백장군, 의자왕, 김유신, 화랭이 관창 나오는 황산벌 전투 야그 안 있소….”
<키드캅> 이후 5년 만에 만들어 개봉, 절반의 성공을 거둔 <간첩 리철진>을 끝내고 이미 그 이전에 기획되었던 <아나
<황산벌>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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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사투리에 능한자 우대, 숙식제공”
“캐스팅도 다 했고 이제 슬슬 전쟁 혀야제!”
거시기 역의 이문식, 의자왕에 오지명, 계백 처에 김선아…. 그리고 류승수, 이원종의 기꺼이 특별출연, 김승우, 신현준 즐거운 우정출연…. 이렇게 원하는 대로 되는 거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었다. 분에 넘치게 좋은 주연급 배우들로 캐스팅 윤곽이 잡히고 대사 있는 역할만 60여명이 필요해 불가피하게 오디션을 봐야 했다.
과감히 신인배우들로 포진하자는 전략을 세운 뒤 500여명의 지원자 중 추리고 추린 250여명의 연기를 꼬박 열흘간 심사했다. “사투리에 능한 자 우대, 숙식제공”. 이 한줄에 몰려든 배우들의 열렬한 응원과 노력은 제작진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사실 사투리는 표현의 방식일 뿐 무조건 사투리를 잘한다고 뽑는 대신 열정이 살아 있는 배우들로 선발했다. 이른바 엑기스 천군만마인 그들은 끝까지 주연들을 긴장시키면서 ‘참여영화’의 진면목을 보여
<황산벌>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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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와이어,No CG 리얼 액션의 진수
한국의 ‘국가대표 무술감독’ 정두홍은 얼마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언젠가 와이어 액션의 유행은 지나간다. 그때를 위해 새로운 라이브 액션을 준비하겠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에게 결정적인 자극을 준 영화는 지난 10월8일 부산영화제 야외상영관에서 선보인 타이의 액션영화 <옹박>이었다. “후배 스턴트맨들이 <옹박> <옹박> 하기에 뭔가 해서 불법복제 VCD로 봤는데(이 영화는 이미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으며 파일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옹박>의 액션은 아직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분명 사람이 공중을 날 듯 점프하는 데 중력감각이 느껴지며, 엄청난 스피드로 나무 위에서 움직이는 데 특수촬영의 흔적은 없다.
정말이지 영화가 내세우는 ‘No 와이어, No CG’는 사실로 보인다. 여기에는 와이어 액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6] - 정두홍 vs 토니 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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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홍 | 너무 뛰어난 배우를 데리고 찍어서 좋았겠다. 그래도 뭔가 어려움은 없었는지.
판나 리티크라이 | 글쎄…. 확실히 말하건대 얘는 천재다. 내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연습벌레다. 모든 기술을 완전히 습득한 것 같은데도 연습을 하루에 다섯 시간씩 한다.
토니 자 | 몸이 아파도 기절할 정도로 연습을 해야 한다. 어떤 액션장면을 떠올리곤 내가 할 수 있다 없다를 테스트 해본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밤 12시가 된다.
정두홍 | 지금 몸무게가 어떻게 되나.
토니 자 | 63kg다. 다음 영화를 위해서는 62kg를 유지해야 하는데 부산 와서 음식을 마구 먹다보니 조금 쪘다.
정두홍 | 나도 공중에서 오래 떠 있으려고 체중조절을 열심히 하곤 했다. 그리고 3∼4년 동안 다리에 납덩이를 달고 야밤에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척추 연골 5개가 서로 붙어버린 것이다. (웃음) 이젠 조금만 높은 데서 뛰어도 허리가 아프다.
판나 리티크라이 | 나도 그렇다. 전세계 무술감독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7] - 정두홍 vs 토니 자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