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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원칙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 겁니다”
“제가 69년생이거든요. 88학번. 오슨 웰스가 26살 때 <시민 케인>을 찍었는데, 되게 안 좋은 사례인 것 같아요. (웃음) 젊어서 정력과 예술적 에너지를 그렇게 심하게 방출하면 되겠어요. 저의 희망은 앨프리드 히치콕 아저씨입니다. 그분이 1899년생이에요. <싸이코>가 1960년 영화잖아요. 그럼 환갑잔치 다음해에 찍은 거예요. 저도 환갑잔치 다음날 <싸이코> 같은 영화를 크랭크인할 수 있다면 정말 성공적인 인생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씨네21>쪽에서,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제 차례 앞에 ‘평온한 일상을 비트는 힘’이라고 붙여놓았는데, 제가 이야기할 화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플란다스의 개>는 정말 일상에서 출발한 영화였죠. 저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것들로부터 쏟아져나온 영화거든요. 그 영화 찍은 아파트가 제가 신혼 초 3년 동안 살던 곳이에요. 거기
영화인 7인 특강 [9] - 봉준호·홍상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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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일 <씨네21> 창간 10주년 특강 ‘한국영화의 현재를 묻다’가 강의장이었던 연세대 위당관에 미열을 남긴 채 끝을 맺었다. 마지막 주의 단상을 장악했던 인물은 봉준호 감독과 홍상수 감독이었다. 6월20일쯤부터 차기작 <괴물> 촬영에 돌입할 예정인 봉준호 감독은 원효대교 아래서 최종 헌팅을 진행하다가 강연장에 바로 도착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특유의 입담이 시작되면서 체력 또한 살아난 듯했다. 사회자인 오기민 마술피리 대표와의 문답에 들어가기 앞서 그는 장장 40분에 걸쳐 영화에 입문한 뒤 겪었던 일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봉 감독의 예의 ‘비주얼’한 화법 덕분에 관객은 상체를 강단으로 기울일 정도로 집중한 채 경청하고 있었고, 오기민 대표는 “준비할 시간이 없어 즉흥적으로 만든 것이었을 텐데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봉 감독의 이야기는 때때로 다른 곁가지로 빠져나가곤 했지만, 그 덕분에 내용은 오히려 풍부해졌다. 이어진 문답에서 그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인 7인 특강 [8] - 봉준호·홍상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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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쉽게, 값싸게, 신실에 가까이
뜨거운 거리의 함성, 유폐된 창살 아래 깔린 침묵, 후미진 구석의 외로운 투쟁. 80년대 후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독립영화 단체들에는 아무도 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들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홈 비디오를 들고 나섰다. 16mm 필름 작업에 비해 가격이 싸고 복제가 쉽고 조작이 용이하며 현장에서의 기동성이 중요했던 이들에게 성능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저 카메라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로부터 10여년. 사무실은 새로운 디지털 주인들이 차지했고 예전에 현장을 누볐던 기기들은 유물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독립 다큐멘터리의 전선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96년부터. 당시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우수한 디지털 카메라는 소니의 VX1000였는데, 97년 푸른영상의 <명성, 그 6일의 기록>, 서울영상집단의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이 카메라를 썼다. 하지만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4] - 독립 다큐멘터리와 디지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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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미래를 두드린다
영화의 미래를 노크하는 주문으로 우리가 새삼 그 이름을 외치기 전부터 디지털은 우리 곁에 있었다. 특수효과, 상업 영화의 제작일지를 담은 메이킹 필름, 동네 비디오숍 한쪽 벽을 메운 에로 영화들은 모두 이제껏 심상하게 마주쳐온 디지털 영화의 얼굴들이다. 최근 우리가 목격하고 전해듣는 디지털을 둘러싼 영화계의 희망찬 야단법석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영화로서의 디지털 작업’에 대한 발견 그리고 발명이다. 혁신된 성능의 카메라는 디지털로 하여금 필름 발뒤꿈치 쫓아가기에 바빴던 만년 열등생 처지를 털고 독자적 영상문법까지 배태할 수 있는 당당한 매체로 끌어올리는 중이며, 인터넷과 디지털 프로젝터 극장의 대두는 바야흐로 디지털 영화가 촬영부터 상영까지 독자적인 일생을 꾸려갈 생육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이제 문제의 초점은 누가 이 씨앗을 가꿔 풍성한 열매를 맺느냐다. 모색은 도처에서 활발하다. 가장 열띤 궁리와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은 세계 영화 커뮤니티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3] - 진행중인 디지털 프로젝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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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에 투항한 건 아니다"
-단편이긴 하지만 박광수답지 않은 영화다. 제목부터.
=글쎄. <그 섬에 가고 싶다> 때 떠오른 이야기였다. <그 섬…>에 출연했던 안소영씨가 벗는 장면 때문에 고민하는 걸 봤다. 안소영씨는 우리 세대의 뇌리엔 깊이 새겨진 배우다. 에로 스타가 예술 영화에 출연해 진지한 연기자로 변신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도 벗어야 한다면? 그런 모티브가 흥미로웠다. 당시에 삼성이 제작비를 대 장편 감독 몇몇이 단편을 만들기로 했는데, 나만 시나리오를 썼다. 7년 잠자고 있다가 이번에 기회가 온 거다.
-<이재수의 난>에서 예고된 변신이라고는 얘기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특별히 변신을 의식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최근 세 작품이 모두 시대물이었기 때문에 현대물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있다. 하지만 유행하는 가벼움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거다. 모두가 가벼움을 좇고 있는데, 나까지 그럴 필요가 뭐 있겠는가. &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2] - 박광수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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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문동 영상원 스튜디오에 마련된 <빤스 벗고 덤벼라> 촬영장엔 촬영감독이 둘이다. 한 사람은 충무로 출신 이병호 기사, 다른 한 사람은 영상원 졸업생 김병서(23)씨다. 이병호씨가 35mm 카메라로 영화 속 영화 <보일러>를 찍고 있고, 이병호씨가 <빤스 벗고 덤벼라>의 촬영감독이다. 이병호씨는 말하자면 촬영감독이라는 배역을 맡은 배우인 셈이다. 말하다보니 좀 헷갈린다. 자세히 설명하면, <빤스 벗고 덤벼라>는 예술 영화 <보일러>에 출연한 에로물 출신 여배우 이야기다. 예술 영화에 출연했으니, 점잖고 지적인 연기만 할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벗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고민이다. 정말 여기까지 와서도 감독 말대로 빤스 벗고 덤벼야 하나.
6mm다윗과 35mm 골리앗의 한판?
<빤스…>는 전주영화제가 기획한 삼인삼색 디지털 영화 <N>의 첫 번째 영화. <N1>이 주제이며 <빤스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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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제에 <꿈의 미로>(1996) <엔젤 더스트>(1994) <반쪽 인간>(1981, 단편) <셔플>(1986, 단편) 등 4편의 영화가 상영된 이시이 소고 감독(43)은 84년작 <역분사가족>으로 유명해진 인물. <역분사가족>은 중산층 가정의 악몽과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을 통해 일본사회의 집단적 스트레스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 지난 10일 감독과의 대화에서 그는 <역분사가족>에 대해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영화다. 한마디로 펑크난 타이어 같은 느낌”이라고 신랄하게 자평했다. “유럽에서 호평받기도 했지만, 일본에선 정제되지 않은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 거친 느낌 때문에 일본에선 제작비 대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10년 동안 장편을 못찍었다. 제작자가 요구하는 대로 찍긴 싫었고 그래서 가끔 돈이 되는 대로 단편을 찍었는데, <셔플> <도쿄 블러드> 등이 그렇게 해서 만들었다. 어
아시아 감독 3인전, 세 감독에게 묻다 [4] - 이시이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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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밍량(43)은 더이상 소개가 필요없을 정도로 국내 관객과 익숙한 이름이지만, 정작 그의 영화 가운데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 수상작인 <애정만세>(1994) 한편밖에 없다. <청소년 나타>(1992) <하류>(1997) <구멍>(1998) 등 세편을 상영한 차이밍량의 날은 ‘아시아 감독 3인전’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아 보조의자를 놓고도 서서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멍> 이후 아직 신작이 없다. 11일 관객과의 대화시간에 나타난 그는 “3년간 새 영화를 안 찍어서 이렇게 만나는 게 쑥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동안 쉰 건 아니다. 시나리오 2개를 완성했고, 그 중 한편을 올해 말까지 찍고 싶다. <흑안권>(Dark Eye Circle)이라는 영화인데 눈주위가 검게 되는 걸 일컫는 말이다. 맞아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해도 그런
아시아 감독 3인전, 세 감독에게 묻다 [3] - 차이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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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세 번째 영화 <오!수정>의 촬영을 마친 홍상수 감독(40)은 후반작업 진행중에 이번 행사에 참석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은 국내 개봉, 비디오로도 나왔지만 50여명이 필름으로 다시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특이한 건 상영시간에는 한산했던 객석이 감독과의 대화시간엔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꽉 들어찬 점.
일상성의 영화에 대해 그는 스스로 이렇게 설명했다. “나 스스로는 일상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부른다면 그건 내가 다룰 수 있는 진흙덩어리 같은 거다. 손에 잘 붙는 진흙은 자꾸 만지게 된다. 내겐 본질적인 냄새, 상징화하기 쉬운 것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있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 그걸 재생산하는 건 재미없다. 패널로 참여한 영화평론가 김영진씨가 “일상의 리듬에는 슬픔이나 고통도 있지만 행복한 순간도 있고 기쁨도 있다. 하지만 홍 감독 영화는 행복에 금이 가고 기쁨이 끝나는 순간에 시작해 하강하
아시아 감독 3인전, 세 감독에게 묻다 [2] -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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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탈보다 아름다운
지난 3월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아시아 감독 3인전’은 홍상수, 차이밍량, 이시이 소고 등 세 사람의 영화를 다시 보는 자리였다. ‘일상과 이탈’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영화제에서 영화상영 이상으로 관심을 모은 행사는 이들 3인 감독과 평론가들이 함께 한 포럼. 12일 저녁 8시30분부터 2시간가량 진행된 포럼에는 200여명의 관객이 자리를 함께 하며 세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비록 같은 테두리로 묶었지만 세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서로 겹치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때문에 토론 역시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기보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쪽으로 자연스레 옮겨갔고, 이들 작가에게 든든한 후원자인 열혈관객들이 있음을 확인시키는 자리가 됐다.
김성태 | 이번 포럼은 영화제의 주제인 ‘일상과 이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세 감독의 영화는 영화 내용뿐 아니라 만드는 방법에서도 ‘일상과 이탈’이라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아시아 감독 3인전, 세 감독에게 묻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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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대표 선수들의 작업 목적 & 연애 덕에 봉 잡은 언니들
연애란 뭘까? 우선 연애(戀愛)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 보면, ‘인간의 육체적 기초 위에 꽃피는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애정’이란 뜻이라고. 어렵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연애를 하는 것일까? 옆구리가 시리다 못해 결려서? 아니면 결혼이라는 ‘절대반지’를 얻기 위해서? 천 가지 사랑에 천 가지 목적이 있으니 그걸 어떻게 다 설명하랴만, 대표적인 연애 목적을 통해 슬쩍 짐작이나 보자.
연애의 목적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다
만날 운명이면 반드시 만나게 돼 있는 걸까? <세렌디피티>의 못말리는 운명론자 커플은 당연히 “YES”라고 할듯. ‘세렌디피티’는 원래 ‘우연한 행운’이란 뜻이다. 영국에서 온 사라(케이트 베킨세일)와 미국인 조나단(존 쿠색)은 이 세렌디피티 때문에 7년간의 세월을 엎어버렸다. 크리스마스이브, 뉴욕의 한 백화점에서 각자 애인에게 줄 장갑을 고르다가 그만 눈이 맞아버린 두 사람. 그
영화를 통해 뽑아보는 9가지 연애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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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화니까, 미국 관객이 즐겁게 만들어야죠”
지난 5월17일 오전 10시. <씨네21> 사무실로 나카다 히데오가 전화를 걸어왔다. J호러의 제왕은 할리우드에서의 경험과 <링2>에 대한 자신감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주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진행된 30분간의 전화 인터뷰.
-할리우드에서의 첫 작업이다. 일본 현장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었나.
=일본에서는 어떤 앵글에서 촬영하고 편집할지를 대충 현장에서 결정한 뒤 그것에 따라 촬영하는데, 미국에서는 일단 여러 각도로 신중하게 숏을 찍어두어야 한다. 테스트 스크리닝을 한 뒤에 곧바로 포스트 프로덕션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중에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하고는 많이 다른 방식이었다. 미국 관객을 위해 컴퓨터그래픽을 많이 사용해서 시각적인 공포감을 조성했던 것도 달라진 부분이다.
-전편인 <링>이 오리지널 일본판의 극적 짜임새를 많이 가져가는 것이었던
할리우드로 간 일본 호러 [3] - 나카다 히데오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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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의 강도를 높여라” 특수효과 가미
<링2>는 기술적으로도 복합적인 텍스트다. 일본 감독이 일본식의 스타일을 그대로 살려 만들어낸 <그루지>는 서구적 취향으로 호러를 드러내기가 어렵지 않은 데 비해 미국 언론들이 <링2>에 보내는 비평은 호평이건 악평이건 간에 꽤나 다층적이다. 특히 도드라지는 특수효과의 이용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견은 어딘가 모순이 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링>을 가장 무섭게 만들었던 것들, 일상적인 물건과 관습들이 던져줄 수 있는 공포가 특수효과의 축제 속으로 사라졌다”고 아쉬움을 표하면서 <링2>가 고어 버빈스키가 감독한 <링>보다도 더 미국적이라고 지적했고, <LA타임스>는 “나카다 히데오는 그에게 주어진 예산으로 최대한의 특수효과를 보여주려는 매혹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시시 스페이섹의 등장이 에이단의 방에서 불타는 CG나무의 형상보다도 훨씬 오싹하다”고 실
할리우드로 간 일본 호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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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원혼’은 어떻게 할리우드에 이식됐나
고어 버빈스키가 감독한 <링>이 북미에서만 1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던 2003년은 J호러(일본 호러영화를 일컫는 일본과 서구의 호칭)의 할리우드 침공 원년이었다. 예상을 넘어서는 흥행에 고무된 할리우드는 나카다 히데오의 <검은 물 밑에서> <여우령> <카오스>, 시미즈 다카시의 <주온> 등 구미가 당기는 J호러의 판권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통역불능(Lost in Translation)의 가능성이었다. 제작자들은 J호러라는 물건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손을 대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공포의 근원을 생생하게 회치기 위해 할리우드는 호러의 사무라이들을 불러들였고, 나카다 히데오와 시미즈 다카시는 <링2>와 <그루지>라는 서로 다른 J호러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두 작품이 박스오피스에서 또렷한 성공
할리우드로 간 일본 호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