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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교만에 대한 혐오, 그리고 자기연민
대폿집에서 1차 테스트 촬영이 끝났다. 친분이 있는 한 스탭이 너무 재밌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저거, 완전히 감독님이네요. 유지태씨가 하는 대사도 감독님이 하는 말씀하고 똑같아, 손짓도. 어쩌면 저렇게 닮았죠.” 이날 촬영 대본 역시 A4 2장짜리로 현장에서 감독이 바로 써서 건네준 것이다. 선화와 만난 다음날이다. 전날 밤 다들 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긴가민가해서 문호의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문호는 삼각구도 안에서 어떤 모멸감을 느끼던 차에 돌잔치에 모여든 학생들을 우연히 만나 술자리까지 동석했다.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겠거니 했다가 그 기대감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을 겪는다. 이 순간의 문호가 딱 홍상수라는 것이다. 4분짜리 롱테이크의 각본은 이렇다.
술판이 간 지 꽤 된다. 문호와 일곱 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있다. 문호가 뭔가 게임에 걸렸다. 술을 마셔야 되고, 지금 한잔을 마시고 있다. 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동행취재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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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 - 완벽하게 디렉팅 된 인공의 세계
2003. 12. 13 26회차 촬영장
처음 허용된 시간은 3분이었다. 경기도 부천의 허름한 호프집에서 벌어진 리허설 장면을 취재하는 데 주어진 시간이 그랬다. 좁은 공간이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첫 촬영장 공개인 만큼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영화사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각 매체에 배당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의외의 장면을 목격했다. 현장에서 즉흥성을 중시한다던 홍상수 감독이 배우에게 대사의 억양, 고갯짓의 크기까지 너무나 세세하게 ‘디렉팅’하고 있었다. 유지태와 김태우가 진짜 소주와 맥주를 마시는 건 예상했던 일이지만 감독과 번갈아 대사를 되뇌일 줄은 몰랐다.
헌준(김태우)과 후배 문호(유지태)가 7년 전의 연인인 선화(성현아)를 찾아와 기다리는 참이다. 헌준이 먼저 선화와 연애를 했고, 얼마 뒤 선화를 남겨두고 도망치듯 유학을 갔다. 그뒤에 선화는 문호와 연애를 했다. 두 사람과의 연애가 끝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동행취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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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연스러움, 인공의 세계와 딱 붙어있도다
1월10일 홍상수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5월 초 개봉예정)가 크랭크업했다. 홍상수 영화는 국내외에서 임권택 감독 버금가는 관심을 끌어당기는 초미의 관심사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감독 스스로 완성품을 내놓기까지 늘 짙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영화 제작에 집중해야 할 에너지가 자칫 엉뚱하게 방해받아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홍상수 감독이 몇 차례의 촬영장 취재를 기꺼이 허용해주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의 촬영현장은 그의 영화를 쏙 빼닮았다.
홍상수 영화에 대한 분석은, 좀 과장스럽게 말하면,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그의 영화에 대한 선호와 가치 평가를 떠나서 대체로 합의되는 것이 있다. 언뜻 의미없어 보이는 사건과 배경을 의미있어 보이는 사건과 배경 속에 빼곡히 깔아놓음으로 해서 무수히 많은 질문을 쏟아내고(영화평론가 심영섭이 <오! 수정>과 &l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동행취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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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으로 싸우는 장면의 안무를 직접 했다고 들었다. 다른 사무라이영화의 검술 장면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검술장면을 위한 안무가가 있었지만, 나는 거의 모든 검술 대결신의 안무를 내 자신이 구상했다. 오기야 집에서 두 게이샤와 긴조 하수인들과의 대결신을 제외하고는. 나는 검술 대결장면들이 이전의 영화들에서 사용된 동작들의 조합들처럼 비슷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전문가들에 의해 잘 짜여진 결투장면들과는 무언가 다르게 하고 싶었다. 나는 검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결투를 싫어한다. 결국 이러한 결투장면에는 쨍그랑, 댕그랑거리는 쇳소리만 남는다. 운 좋게도, 자토이치는 보통 단칼에 일격을 가한다. 그래서 나는 정형화된 타입의 검술 대결장면을 피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하토리 역의 아사노 다다노부에게는 수년간 내가 축적해왔던 풍부한 기교를 부릴 수 있게 허락했다. 아사쿠사의 코미디 장면에서, 나는 검술신들을 많이 연습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 마음속
득도한 대가가 만든 오락영화, <자토이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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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가 말했다.“다케시, 난 자네 영화의 무례함이 좋아,계속 그렇게 만들어!”
-<자토이치>는 원작, 그것도 대단히 유명한 원작이 있는 영화다. 왜 <자토이치>를 영화화하게 되었는가.
=이 프로젝트는 기대하지도 않게 사이토 치에코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분은 20년도 더 전에 내가 아직 코미디언으로 초창기였을 무렵, 아사쿠사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나의 조언자였다. 그녀는 또한 <자토이치>의 가쓰 신타로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몇년 전, 그녀는 나에게 <자토이치> 후속편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 제안은 꽤 흥미롭게 들렸는데, 그 이유는 내가 항상 원했지만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시대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내가 직접 주연을 맡기 원하는지를 물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내가 가쓰 신타로를 대신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지만, 사이토 치에코는 거절의 응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
득도한 대가가 만든 오락영화, <자토이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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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캐릭터를 해체하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를 리메이크하면서, 기타노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에 도전한다고나 할까. 시대극의 ‘시간’을 지워버리고, 머리까지 금발로 바꿔버린다. 아니 가장 중요한 신체적 특징까지 초월해버리고, 자토이치의 사회적 존재까지도 틀어버린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는 차별받는 약자의 편이었고, 그런 부류에 근접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차별과 차별받는 자의 위치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 ‘대세’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늘 허리가 굽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유랑하는 자유인이다. 동류의식으로, 억압자에 대해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승부를 위하여 싸운다. 근원을 따진다면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보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쓰바키 산주로와 닮았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녀석들 중에 제일 나쁜 건, 자토이
득도한 대가가 만든 오락영화, <자토이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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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비트 다케시=<자토이치>
<자토이치>는 기타노 다케시가 처음으로 각색을 한 영화다. 기존의 작품들은 모두 기타노가 직접 스토리를 쓰고, 인물을 만들었다. 멜로영화인 <돌스>까지도 기타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고, 그 덕에 가부키의 ‘사랑의 도피’를 잘못 이해했다는 비판까지 들었다. ‘자토이치’는 전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의 하나다. 원작소설에 만화, 가쓰 신타로라는 배우가 출연한 수십편의 영화가 일본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다. 대중의 영웅을 다시 스크린으로 끌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오래전 구로사와 아키라에게서 ‘자토이치 역이 어울릴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고, 아사쿠사에 사는 절친한 친구가 부탁을 하여 만들어진 기타노의 <자토이치>는 과거의 캐릭터와 상당히 다르다. “<자토이치>는 지금까지 몇편이나 만들어졌기 때문에, 얼추 그 형태가 정해져 있다. 그것에 따라간다면 편
득도한 대가가 만든 오락영화, <자토이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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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토이치>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갖추게 된 것도 자신의 기획이 아닌 외부의 기획이라고 하는 '거리감'이 기타노 자신과 상승작용을 낳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토이치>에서는 배우로서의 비트 다케시를 포함해, 기타노 다케시에게서 일종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여유가 <자토이치>를 훌륭한 오락영화로 만들어 낸 힘이었다고 생각된다. 비트 다케시의 이치는 피차별자가 아닌, 자유인에 가깝다. 이는 가쓰 신타로와 기타노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면서, 본질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타노 다케시판 <자토이치>와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 시리즈의 차이점이 생기며, 동시에 기타노의 <자토이치>와 <요짐보> 사이의 공통점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산주로도, 자토이치도 방랑하는 자유인인 것이다.
영화광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이 알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는 ‘코미디언’이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정상
득도한 대가가 만든 오락영화, <자토이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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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명 배우들의 생활 조련사-스케줄매니저 최지윤
In <태극기…>
현장에서 최지윤(26)씨의 별명은 ‘꼴통’. 워낙에 고집이 세고 하는 행동이 나이답지 않게 강단지고 야무진 까닭에 붙은 별명이다. 동시녹음기사와 “∼통!!” 하는 수인사를 주고받으면서 그녀의 아침은 시작된다. 전날 감독과 조감독이 리허설을 통해 짜놓은 촬영일정을 이미 배우들에게 연락은 넣어놓았으니, 현장에 오면 속속 도착하는 배우들 의상부터 챙긴다. 아침을 굶은 배우들에게 배낭에서 각자 입맛에 맞는 부식거리를 꺼내 먹이는 폼은 얼핏 동물원의 노련한 조련사 같다. “배우들은 모두 예민한 어린아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다음 수순은 부상자를 살피는 일이다. 작은 상처는 상비 구급약으로 처리하고, 부상이 깊은 배우들은 메모지에 적힌 인근 병원으로 전화를 돌려 왕진을 부탁하거나, 병원까지 직접 후송한다. 이제 쉬는 시간이다. 커피를 조르는 배우들에게 한방차, 율무차를 지급하고, 특히 골초배우들에겐 복숭아홍차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막힌 스탭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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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밖을 기록한다 - 다큐멘터리 사진 김진형
In <태극기…>
촬영현장에 긴장만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슛’과 ‘컷’이 만들어내는 진공의 세계를 벗어나면 여백이 있다. 김진형(36)씨가 렌즈에 포착하고자 했던 것도 그것이었다. 장동건과 원빈이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오지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또 다른 카메라들이 배우들을 클로즈업하고, 제작과정을 따르는 동안 그는 여백을 쓸어담았다. 시나리오를 읽고나서 김씨는 “스펙터클에 압도되어 묻힐 수 있는 디테일한 풍경들을 건져올리자는 것”을 컨셉으로 삼았다. 그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풍경뿐만 아니라 나름의 실험도 감행했다. 특수분장으로 만든 시체들을 실제상황처럼 찍어놓은 사진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인물의 경우 처참한 전투를 치른 생존자의 모습을 연출해 극대화하려 했다. 하지만 현장이 매번 그의 의도를 응원해주진 않았다. 4일을 기다렸던 최민식의 경우, 촬영 도중 총기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곧바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막힌 스탭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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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힘, 전쟁영화는 디테일! - 군사자문 김세랑
In <태극기…>
할리우드식으로 명명하면 김세랑(32)씨의 역할은 밀리터리 테크니컬 어드바이저. 영화 속 개별 전투장면의 구성이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은 없는지 시나리오를 감수하고 촬영에 쓰일 의상, 소품, 장비가 한국전쟁 당시 쓰였던 것과 다르지 않는지를 고증했다. 발품 팔아 남대문시장 등에 처박혀 있거나 외국 경매 사이트에 나돌던 50년 전의 군복들을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터라(군장의 경우 보는 것과 입는 것은 천지차이여서 직접 구입했다고) 의상팀에 본뜰 실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이 입었던 옷의 종류만 100여벌. 갖고 있던 30벌을 들고 가서 이중 적어도 15종은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 입을 쩍 벌리던 제작진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영화 속 진태와 진석이 입고 있는 군복이 달라지는 것만으로 한국전쟁의 진행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귀띔. 다만 예산과 시간 부족으로 몇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막힌 스탭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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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년 정도 됐나요. 희귀 크레딧이 등장한 게 말이죠. 이젠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그동안 충무로는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푸드 스타일리스트, 안무가, 공예전문가, 권투선수 등등 다른 직종에서 이력을 쌓아온 이들을 심심찮게 초빙해왔으니까요. 하지만 2월6일 개봉하는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무려 대여섯개의 희귀 크레딧이 등장한답니다. 제작부와 연출부만 무려 20명, 촬영현장에 상주했던 전체 스탭 수가 100여명에 달하는 이 대가족 가계에는 비록 핏줄(?)은 다르지만 엄연히 한몫을 담당했던 이들이 줄줄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프라모델 조립부터 시작한 군사자문가, 용병이라 불리며 제작부 일까지 겸한 단역배우, 자급자족 원칙의 특수촬영기사, 화기(火器)라면 사족을 못 쓰는 총기관리 요원, 숨겨진 1인치를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수백명의 일정을 책임졌던 스케줄매니저 등이 그들이죠. 이들의 짧은 스토리 모음은 그동안 쉽사리 털어놓지 못했던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 고백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막힌 스탭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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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이해준_ 결국 김진민 감독이 프로젝트를 다시 하자고 한다. 김지혜 작가에게 원고를 넘겼다.
김지혜_ 난 왜 이럴까. 다시 시나리오를 가져오면서 또다시 “2주 만에 끝내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잘 안 된다. 이 시나리오는 끝이 안 나는 게 운명인지도 몰라, 하면서 ‘네버 엔딩 스토리’를 떠올린다.
2002년 7월
김지혜_ 야속한 세월이여. 벌써 여름이다. 그동안 감독에게선 드문드문 전화가 왔었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으련만. “아, 독촉드리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 뭐하고 지내시는지 궁금해서…”라고 깍듯이 말한다. 끊고 나면 왠지 슬퍼질 정도다. 요즘엔 공손한 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미안해서 안 되겠다. 다시 시나리오에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2002년 8월
이해영_ 대단하다. 약속을 지키다니. 비록 6개월이 지난 뒤지만, 김 작가가 쓰기 시작한 뒤 ‘2주 만에’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됐다.
2002년 10월
이해준
<안녕! 유에프오> 시나리오 ‘제작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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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해영_ <신라의 달밤>이 제작사를 옮겨 좋은영화로 갔다. 이후 맡은 멜로영화 <피아노> 각색은 뭔가 잘 안 됐지만, 김지운 감독의 <커밍아웃> 시나리오를 각색했다. 한석규가 출연할 뻔하던 〈11월의 비>,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 등의 각색도 맡았다. 허허. 이제 우린 잘 나가게 된 거다. 그런데 김진민 감독은 임상수 감독의 <눈물> 조감독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2000년 연말
이해준_ 싸이더스의 김무령 프로듀서가 와인파티를 연다면서 홍대 앞의 한 바로 해영과 나를 초대했다. 유난히 어두웠던 그곳엔 영화계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아, 명함이라도 챙겨왔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하는 와중 임필성 감독이 손목을 잡아끈다. “저기, 저쪽 테이블에….” 그가 가리킨 곳에 미모의 여인이 앉아 있다. <인디안 썸머>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김지혜라는 이름의 시나리오 작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
<안녕! 유에프오> 시나리오 ‘제작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