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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스턴트의 역사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새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60∼70년대를 풍미했던 소자본 액션영화나 홍콩과의 합작영화, 이대근, 백일섭 등이 주연하는 액션영화, <소림사> 시리즈 등이 8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고, 액션영화는 <우뢰매> 시리즈 등의 아동영화나 비디오용 영화를 통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결국 대중적인 액션영화가 줄어들었고, 스턴트 인력 또한 방송으로 무대를 옮겨갔다. <전설의 고향> <암행어사> 같은 드라마나 <긴급구조 119>류의 재연 프로그램은 당시 스턴트 인력이 깃든 공간이었다. 지금 한국영화를 이끌고 있는 스턴트계의 주요 인물들은 35mm 액션영화의 전통이 거의 끊어졌던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충무로에 들어왔다. 전문식 감독이 86년, 정두홍 감독과 신재명 감독이 90년에 영화계로 발을 디뎠고, 70년대에 들어왔다가 홍콩에서 활약했던 원진 감독을 제외하면 현역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5] - 한국 스턴트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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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신성일(26·가운데)씨를 비롯한 세명이 ‘레펠’ 훈련을 하고 있다. 성일씨는 11월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중천>을 대비해 다양한 와이어액션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교육생으로 들어와 스턴트 경력 2년째를 맞고 있는 그는 “와이어를 타는 건 전혀 무섭지 않다. 줄을 잡아주는 사람을 믿으면 되니까”라고 말한다. 그는 체구가 날씬하고 몸놀림이 가벼워 와이어 훈련을 자주 하고 있는데 “와이어를 타고 공중돌기 등을 하는 기량까지 익히려면 아직 멀었다”면서 싫은 티 하나 안 내고 각종 와이어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2/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와이어 액션의 보조장치로 사용되는 ‘디셀레나’와 ‘에어램’을 놓고 스탭들이 연구하고 있다. 디셀레나는 위쪽의 검은 박스처럼 생긴 것으로, 공기압을 이용해 와이어를 순식간에 당기거나 풀 수 있다. 고공에서 뛰어내릴 때 안전한 제동을 도와주고 횡점프를 할 때 순간적으로 높이 뛰어오르게 해준다. 그 아래에 있는 게 에어램으로, 발판을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4] - 서울액션스쿨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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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턴트의 내일, 이곳에 있소이다
이거 제대로 찾아온 건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안에 자리한 보라매체육관으로 들어선 순간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급작스레 터져나온 라틴음악 때문이었다. 끈적한 땀내음과 불꽃 튀는 무예 단련 대신 체육관 안에는 라틴댄스의 리듬을 타고 있는 남녀 몇쌍만이 있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입구로 가보니 ‘댄스 스포츠 강좌’, ‘체대 입시 아카데미’, ‘배드민턴 교실’ 등 어지러이 나붙은 플래카드 틈새로 네모난 현판이 보인다. ‘서울액션스쿨’, 이 여섯 글자가 마음을 놓게 한다. 슬쩍 둘러보니 체육관 바깥을 서성대는 건장한 청년들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오전 동안 댄스 스포츠 강좌의 차지였던 이곳이 힘찬 기합과 고함 소리, 마룻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로 가득 찬 서울액션스쿨의 세상이 된다. 보라매체육관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서울액션스쿨은 98년 설립된 이후 한국 스턴트 액션의 메카로 자리잡아왔다. 정두홍 감독을 비롯해 9명의 무술감독과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3] - 서울액션스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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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임 더?”
8월20일 PM 5:00 경기도 강화군 석모도
“너무 체력이 약한데. 한 게임 더 하는 게 어때요?” 방송 출연으로 얼굴이 낯익은 여의도 FC의 최창호 박사가 나이스 가이 팀을 약올린다. 무술연기자노조 축구팀인 나이스 가이쪽에서는 “우리는 다 환자예요”라며 슬그머니 물러서더니 결국 마지막 게임에 뛸 선수들을 물색하느라 바쁘다. 잠깐 교체멤버로 들어섰다가 10분을 채 뛰지 못하고 허리가 아프다며 빠져나온 김형준 무술감독은 통증이 계속되는지 계속 울상이다. 노조 지부장인 김범석 무술감독은 한 방송사와 계약문제를 이야기하느라 휴대폰을 좀처럼 놓지 않는다. “축구공 다 바람 빼버려!” 번듯한 휴가 한번 가지 못해서인가. 서울 떠나 강화도라고 해서 아이 데리고 따라왔더니만, 종일 축구 구경만 하게 만드는 남편이 못마땅한지 한 무술감독의 아내가 분통을 터뜨린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10시부터 시작된 친선 축구는 느지막한 오후까지 선수를 바꿔가며 끝모르게 계속되고 있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2] - 새내기 스턴트맨의 하루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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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말하는 이들을 취재하기란 쉽지 않다. 배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오감을 통해 느낀 감정을 곧장 몸으로 폭발해낸다. 그 순간을 포착하기도 어렵거니와 다시 그 순간의 몸의 감정을 말로 추궁해서 끄집어내는 일만큼 막막한 것도 없다. 스턴트맨이라고 다를까. 스턴트라 통칭되는 움직임의 기본은 무술이라기보다 연기다. 도합 십몇단을 가진 고수라고 해도, 카메라 앞에 서려면 기본 발차기부터 새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그들이 내지른 주먹과 뻗어찬 발이 스크린에서 매 순간 놀라운 복화술 연기를 선보이는 것도 묵묵히 땀방울을 훔치며 단단하지만 내밀한 몸을 만들었던 지난한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렵다 하더라도 <씨네21>은 몸이 만들어내는 그 놀라운 침묵의 대화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여전히 궁금했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먼저 새내기 스턴트맨을 추적했다. 여기에 이어 한국 스턴트 액션의 산실, 서울액션스쿨에 대한 현장검증기를 이어서 살펴보았다. 현재 한국영화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1] - 새내기 스턴트맨의 하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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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인터넷영화 사이버극장 우후죽순, 충무로와 따로 또 같이
12월26일 두대의 카메라가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 입구를 봉쇄했다. 입구 측면은 소니 VX9000이, 정면은 VX1000이 맡았다. 행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엉거주춤한 동선을 피한 끝에 감독의 OK사인이 떨어지자, 무리들은 여느 촬영현장과 달리 다음 신을 촬영할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날 보충 촬영을 끝낸 <밀레니엄 살인 행진곡>은 2000년 1월1일 인터넷으로 네티즌들에게 선보였다. 촬영현장에서 2대의 DV(디지털 비디오)가 유감없이 보여준 기동성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영화제작에서 기동성, 작동용이성, 경제성 등 디지털 작업의 매력은 그간 충무로와 독립영화계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고, 2000년 열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디지털 삼인삼색’이라는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진행중인 박광수 감독과 김용태 감독, 신작 <눈물>을 준비중인 임상수 감독처럼 전면에 디지털 카메라를 배치하
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4] - 디지털과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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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를 여는 첨병 POP.com
지난해 연말, 타임 온라인을 비롯한 수많은 웹사이트에서 네티즌들의 투표를 통해 20세기를 규정짓는 단어를 결정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자동차,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1위에 오른 단어는 인터넷 혹은 컴퓨터. 1983년 <타임>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파란을 일으키면서 인간의 생활을 급속도로 바꾸어놓기 시작한 컴퓨터가 90년대 초부터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무기까지 획득하게 되면서 20세기 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컴퓨터로 시작해 인터넷으로 불붙기 시작한 이런 변화의 물결은 산업 전 분야에 걸쳐 파장을 미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런 변화를 대표할 만한 사건이 바로 본격적인 인터넷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지향하면서 지난 99년 10월25일에 오픈한 POP.com의 설립. 어쩌면 그저 한 홈페이지의 개설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이 사건이 그토
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3] - PO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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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선댄스영화제에서 보스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화인 토드 버로는 셀룰로이드의 죽음을 선언했다. 최근에 진행되는 영화계의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는 영화제작과 배급에서 35mm 아날로그 필름이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그 선언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건은 98년 10월에 있은 스티븐 아발로스와 랜스 웨일러가 만든 <라스트 브로드캐스트>(The Last Broadcast)라는 영화의 개봉이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인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 소니 VX-1000이라는 저렴한 가격의 DV(디지털 비디오 6mm)카메라를 가지고 저예산으로 촬영됐고 편집 또한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편집으로 완성됐다. 획기적인 것은 극장상영까지도 디지털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흔히들 하는 것처럼 완성된 DV영화를 키네코작업을 거쳐 35mm 필름으로 옮기는 대신 이 영화는 디지털 데이터를 인공위성을 통해 송출했다. 이것을 수신한 미국 내 다섯개 도시의 극장들은 고화질 디지털 비디오 프로젝터를
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2] - 디지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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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5년 디지달씨의 하루, "20세기 인간들은 불편했겠어…"
“아니, 영화 하나 만드는 데 정말로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는 거야?”
디지달씨는 ‘영화의 역사’ 과목 첫 시간에 인터넷II 영화학교가 실시간으로 전송해준 이른바 ‘필름’이라는 것의 3차원 입체영상을 보며 눈앞의 모니터를 향해 이렇게 내뱉었다. 20세기에는 전화를 쓰기 위해서 전화선 설치공사를 대대적으로 해야 했던 바보 같은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직업상 알고 있었지만, 불과 95년 전인 2000년까지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름이라는 것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름의 모양이라는 것도 일단 이상해 보이는 데다가, 그걸로 영화를 찍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달라붙어 촬영을 한 후, 다시 현상이라는 것을 해 자르고 이어붙여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설명까지 듣고 나니 ‘20세기의 인간들이란 정말 불쌍했구나’라는 생각마저 떠올랐다.
남들로부터 최고의 직업이라고 인정받는 이동통신 전자상거래
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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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직설법을 좀 써보고 싶었다”
-<외출>은 시작과 결말이라는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을 화면 밖 전화벨 사운드로 처리했다. 어떤 의도였나.
=원래 찍을 때는 그냥 이미지만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반작업을 하면서 소리를 넣는 편이 이해를 쉽게 하지 않을까 싶었다.
-결말은 첫 구상대로인가.
=그렇다. 예전 영화들이 두 남녀가 헤어지는 느낌으로 끝났기에 <외출>은 그것이 해피 엔딩인지는 몰라도 둘을 만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가 김형경씨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 <외출>이 나왔다. 중견 문인이 정색하고 써내려간 영화소설이라니 독특하다. 마치 영화를 미리 보고 쓴 듯한 세부묘사가 있더라.
=조성우 음악감독의 회사 M&F에서 기획한 책이니까 편집본을 보셨을 수도 있다. 촬영현장에서 만났을 때 이런저런 의견도 들었다. 서영이 좀더 강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욕을 하는 건 어떨까 등등.
허진호의 <외출> [2] - 허진호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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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드라마 장르를 통해 생의 고요한 이면을 사려 깊게 들추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스크린에 안착한 직후 아시아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으로 독보적 지위를 점한 배우 배용준. 여러 편의 사랑영화에서 착실한 실적을 쌓으며 이미지와 연기력을 연마해온 배우 손예진. 제작에 연루된 이름만으로도 떠들썩했던 영화 <외출>이 9월8일 개봉을 앞두고 지난 8월23일 1천명에 가까운 취재진이 몰려든 시사회에서 공개됐다. <봄날은 간다> 이후 4년 만에 스크린에 나선 허진호 작품 3번 <외출>은, 느린 걸음을 떼는 사랑영화라는 점에서는 전작 두편과 유전자가 같다. 그러나 ‘선정적인’ 소재와 직설화법을 선택해 출발부터 전작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었던 이 영화는 도착지도 적잖이 낯설다. <외출>의 면면을 살피고 그 와중에 떠오른 질문들을 허진호 감독에게 던졌다.
(이 기사
허진호의 <외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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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네?” “니가 그렇게 썼잖아, 일기장에.” 1987년 4월
공포에 질린 운동권 피의자 박명식과 능숙한 고문형사 김영호가 마주한 고문실. 그리고 전혀 엉뚱한 질문. 가학적이고 악랄한 형사, 평범한 서민 가장의 두 얼굴 사이에 김영호는 첫사랑에의 그리움을 아주 짧지만 진하게 드러낸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리를 전다.
=나는 관객이 여기 와선 김영호에게 동화되기를 바랐다. 최소한 연민은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가장 악랄하기도 해야 한다. 이때부터 내가 너무 힘들어졌다. <초록물고기> 때는 나는 이야기를 빠져나와서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빨려들어가 있었다. 특히 4번째 장에선 괴롭고 힘들었다.
-김영호가 박명식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그냥 징그럽고 끔찍하다. 왜 그렇게 찍었나.
=그 장면 찍기 전날 잠을 못 이루고 내내 악몽만 꿨다. 힘들었지만 그날은 특히 그랬다. 나는 이 장면은 이야기의 맥락보다 고통의
이창동을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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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은 느리다. 말도 느리고, 동작도 느리다. 정신도 느린 것 같다. 1980년대 중반에 소설가 생활을 시작했는데, 아직 90년대에도 도착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동료들이 왕창 빠져나간 지 오랜인데도 이창동은 어쩐지 80년대를 서성이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심지어 거꾸로 간다. 김영호라는 사내의 20년사를 일곱 토막 내어,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했다. 맨 마지막 장면은 1979년, 그의 나이 스무살 시절의 어떤 하루다. 속도의 계율을 아예 걷어차내는 짓인데도, 이창동은 “첫사랑의 순수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랬다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누군들 첫사랑이라는 말만으로도 가슴젖지 않으랴. 하지만, <박하사탕>을 통해서 그곳에 이르는 건 심란함을 각오해야 한다. 본래 맑고 착했던 청년이 완전히 부서지는 과정을, 그것도 역순으로 목격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가슴아픈 일이다. 더구나 이 여정에는 한국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면
이창동을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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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무서운 것은 지금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
지난 6월18일 드림웍스 스튜디오에서 웨스 크레이븐을 만났다. <나이트메어>와 <스크림>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공포영화 감독인 그는 지적이고 차분한 말투의 노신사였다. 영화 트레일러만을 본 뒤, 소수의 국제부 기자들과 함께 작은 회의실에 앉아 오붓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한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고 쉬었다.
=한 2년은 쉰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리메이크를 디멘션 영화사와 만들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진행이 어려웠다. 사실 100일 이상 촬영을 했는데 스튜디오와 마찰이 좀 있었다. 운이 없었나보다. 그리고 심장측관이식수술을 해야 했기 때문에 1년을 더 쉬어야만 했다.
-<나이트 플라이트>는 호러영화가 아니다. 이제 호러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나.
=그런 건 아니다. 단지 지금은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에 관심이 더 많을 뿐이다. 당장 호러물을 만들고 싶지
<나이트 플라이트>와 웨스 크레이븐 [2] -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