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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부산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영화의 보고(寶庫)가 열 번째 수문을 연다. 10월6일부터 14일까지,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에서 9일 동안 치러지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알려졌듯이, 열돌을 맞은 축제의 첫장은 대만의 거장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가 쓰고, 마지막 장은 황병국의 <나의 결혼원정기>로 채워진다. <쓰리 타임즈>는 거장이 지금까지 빚어낸 스타일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라는 평가를 받았던 영화. 올해 부산에서 상영되는 프린트는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120분 버전) 때와 달리 감독의 재편집을 통해 만들어진 135분짜리 최종본이다. 개막작에서 거장이 펼쳐 보인 미학적 스펙트럼을 엿볼 수 있다면, 폐막작인 <나의 결혼원정기>는 신붓감 찾아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두 노총각의 우여곡절을 따르는 대중영화다. 두 작품 모두 개·폐막작 예매 첫쨋날과 둘쨋날에 표가 동이 났다.
올해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 수는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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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다운 마케팅이 시작되다_1990년대
긴 겨울 지나 바야흐로 봄이 오는 것일까. 싹이 트기 전에 누군가는 밟힐 것이라 했고, 활공하기 전에 누군가는 떨어진다고 했는데, 견디고 또 견디니 볕이 드는구나.
“윗선배들을 배제하려는 건 아니었고,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의욕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네트워크 정도였다. 매일 만나다시피했던 것 같은데, 충무로에서 삼겹살 먹고 강남이나 이태원에 있는 나이트클럽에도 가고 그랬다. (웃음) 그러다 모임 내에서 스터디를 하게 됐는데 제작, 배급, 상영 등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 발제하는 식이었다. 내 경우에는 <광고학개론>이라든가 <카피라이팅의 기술> 같은 이론서를 구해서 읽기도 했지만 김정률, 이황림 같은 선배들이 내놓은 광고물을 보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심재명)
1990년대 초에 결성된 영화사기획실모임은 그저 단순한 친목도모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철, 이춘연, 채윤희, 이준익, 석명홍, 권영락,
한국영화 마케팅 30년사 [3] -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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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영화광고 시대, 튀어야 산다_1980년대
바야흐로 벗어야 사는 시대인가. 애마부인이 그러하고, 람보가 그러하다. 사용무기는 다르지만, 살색유혹 앞에 당할 자 있으리요. 통금해제와 함께 달려온 애마부인을 영접하고자 유리창을 박살내는 관객의 이 극성을 보라! 태평양 건너 날아온 람보를 염탐하고자 새벽 행렬도 마다않는 관객의 저 아우성을 들으라! 여기에 더해 어우동과 코만도는, 변강쇠와 엠마뉴엘은 또 어떠한가. 불황의 터널을 벗진 못했지만, 극장가는 잠시나마 웃음을 되찾는구나.
“1980년 초인가. 극장 앞에 금성 19인치 TV를 놓고서 외화 수입사들로부터 받은 예고편을 비디오로 받아서 틀었어요. 반응이 꽤 좋아서 정식영업증을 내고는 청계천 등지의 TV 파는 가게 등에도 돌리면서 전시용으로 좀 틀어달라고 했다고. 그러다 <람보> 때인가. 불법복사 하는 놈들이 걸려들어갔는데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갖고 있어서, 어느 날인가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있어. 영화사에서 받
한국영화 마케팅 30년사 [2] -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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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없는 자는 구해야 합니다. 극장 문 열면 손님 쏟아지던 한국영화의 황금광 시대는 1960년대로 막을 내립니다. 배우들이 뿜어내는 광채에 기대어 더이상 영화를 편하게 선전할 수 없게 된 1970년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국영화의 처절한 호객행위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30년, 항상 정도만 고집할 순 없었습니다. 문지기 노릇하던 험악한 기도 아저씨들이 나서 “자, 아가씨 막회 보고 가요!”라며 윽박도 질러야 했습니다. 편법도 곧잘 썼습니다. 내용과 다른 포장으로 관객을 현혹해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보도자료를 보내고, 배우들의 싸이 홈피를 마련하고, 대규모 현장공개와 시사회를 진행하는 2005년 추석. 지난 30년을 버텨낸 충무로의 상술 일부를 공개합니다.
영화선전, 신문만이 내 세상_1970년대
바야흐로 TV시대가 도래하였도다. 연인하고 약속하고 퇴근시간 재촉하던 샐러리맨 어딨으며, 마누라와 외식하고 오랜만에 손 맞잡던 중년 부부 어딨는고. 극장
한국영화 마케팅 30년사 [1] -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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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가는 투자자들의 요구가 더 큰 부담”
<어제>의 촬영지 쓰훼이교 입체교차로에서 만난 장양
장양의 차를 따라 도착한 곳은 쓰훼이교 입체교차로였다. 자전거를 탄 행인들과 고가도로 위를 달리던 운전자들이 가던 길을 멈춰선다. 잔디밭에 들어선 취재진과 긴 머리의 장양 감독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 열몇개의 다리들이 늘어선 광경이 보이는 이 입체교차로는 장양이 2001년 만든 <어제>에서 부자간의 교감을 보여주는 장소로 쓰였다. 장양은 베이징의 독특한 공간인 사합원, 후통, 동네 목욕탕, 100여개가 넘는 입체교차로 등을 자신의 영화 속에 즐겨 끌어들였다. 그의 작품 <샤워>에서는 좁고 후미진 베이징의 세부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생활상이 담겨져 있다. 장양은 영화감독 장화순의 외아들이다. “성장배경 때문인지 부자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많이 찍었다. 현실에서는 예술의 견해차나 생활문제로 아버지와 오히려 자주 싸웠다. 어렸을 때 말썽을
아시아 영화 기행: 중국 [4] - 중국감독열전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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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다”
라이브 카페에서 만난 <색을 보여드립니다>의 최건
육교 아래 위치한 베이징 CD 재즈 카페. 한적한 오후에 문을 열자마자 때아닌 록음악의 굉음이 쏟아진다. 평평한 무대에 원형으로 둘러서서 ‘베이징 록의 대부’ 최건과 그의 멤버들이 신나게 리허설을 하는 중이다. 장위안 감독은 “중국 록의 기억은 최건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살육당한 시위대의 주제가로 쓰였던 <일무소유>(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는 최건을 천안문 세대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색을 보여드립니다>로 영화감독에 도전하는 그는 “음악영화이며, 한 가지 노래로 세 인물의 이야기가 묶일 것”이라고 새 영화를 전망했다. 여기서 인물이 의미하는 세 가지 색은 각각의 음악과 연결된다. “파란색은 전자음악, 빨간색은 록, 노란색은 팝”을 뜻한다. 그는 “경제 발전은 매우 빠르지만 중국의 문화나 정치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현실을 평했다.
아시아 영화 기행: 중국 [3] - 중국감독열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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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아장커의 영화적 선배가 아니다”
<무극> 온라임게임 선보인 조어대에서 만난 첸카이거
<패왕별희>의 첸카이거 감독을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조어대로 향했다. 타고 온 차량은 가까운 호텔에 세우고 주최쪽 차로 갈아타고 조어대에 들어간다. 북핵을 위한 6자회담 장소로 잘 알려진 조어대는 총리 윈자바오의 업무공간이며 청와대 영빈관과 유사한 장소이다. 오늘은 첸카이거의 신작 <무극>의 온라임게임 사업설명회가 열린다. 신작 <무극>과 관련한 사업발표가 조어대에서 열리고 구름처럼 몰려든 중국 언론의 태도만 봐도 첸카이거의 현재 위상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첸카이거는 중국 영화계의 최고 실력자 한상핑 총경비와 동석하여 기자들의 답변에 응했다. 그의 신작 <무극>은 중국 인민에게 유명한 또 한명의 감독 펑샤오강의 신작 <예앤>과 오는 12월 극장가에서 맞대결한다. 행사가 끝나고 첸카이거와 단독 인터뷰를 나눴다.
아시아 영화 기행: 중국 [2] - 중국감독열전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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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인도, 이란을 경유한 아시아영화의 네 번째 기착지는 중국이다. 이것은 인디컴시네마가 기획하는 12부작 다큐멘터리 <아시아영화기행>의 중국 1편 촬영팀과의 동행기다. <씨네21>과 부산국제영화제가 후원하고 CJ미디어가 공동제공하는 <아시아영화기행>은 부산영화제 기간 동안 12편의 각 작품을 1편으로 모아 편집한 버전을 상영하고, 10월3일부터 12일까지는 SBS에서 연속 방영할 예정이다. 이번 기획에서 한국과 더불어 중국은 유일하게 두편의 다큐멘터리로 방영된다. 100년을 맞이한 또 하나의 영화종주국, 세계 영화시장의 마지막 엘도라도, 화권 영화라는 이름으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영화사적 지위를 유지해온 아시아영화의 본가 중국을 찾아갔다. 1952년생 첸카이거부터 1971년생 루추안에 이르기까지 중국영화의 명운을 결정지을 대륙감독 12인과 베이징에서 차례로 조우했다. 세계 영화산업의 미래를 결정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황사는
아시아 영화 기행: 중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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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내줘야 하나?
한국영화 점유율 40% 육박
12월22일 현재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36.7%. 문화부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정책연구원이 잠정 집계한 수치다. 한국영화는 지금 “이러다간 ‘우리 스스로 스크린쿼터를 내줘야 할지 모른다’는 말을 그냥 웃어넘겨버릴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그동안 정부는 물론 영화인들도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40%가 될 때까지 스크린쿼터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올해 점유율이 40%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40%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기록적인 성장임은 분명하다. 지난 9월 말 35.3%에 비해서도 1.4% 늘었다.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오차가 생길 수도 있지만 이런 추세라면 연말까지 최종 점유율은 35∼39% 정도로 추정된다. 그동안 한국영화는 점유율이 93년 15.9%에서 94년 20.5%, 95년 20.9%, 96년 23.1%, 97년 25.5%로 꾸준히 늘었으며
1999년 한국영화 결산 [4] - 99년 한국영화 10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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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뉴웨이브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이장호-배창호의 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인 88년, 세 젊은 감독의 등장이 한국영화의 새 시대를 예고했다. 장선우, 박광수는 그때까지 한국영화사에 등재되지 않았던 사회적 리얼리즘의 깃발을 들었다. 전통적 영화어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도, 이들은 데뷔작에서부터 영화를 당대 현실 깊숙이 끌고 들어갔다. 장선우는 <성공시대>로 한국 자본주의의 폐부를 건드렸고, 박광수는 <칠수와 만수>로 도시빈민, 장기수 같은 예민한 사회적 이슈를 정면으로 다뤘다. 90년에 나온 두 사람의 두 번째 작품 <우묵배미의 사랑>(장선우)과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은 지금도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각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작. 한국 뉴웨이브로 불리게 된 이들과 다소 떨어진 자리에서 제3의 인물 이명세가 <개그맨>으로 외롭게 데뷔했다. 영화가 개인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굳게 믿는 이 영화광은 영화 형식을 본격적으로
1999년 한국영화 결산 [3] - 90년대 한국영화 10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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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영화 베스트 - 감독·프로듀서·배우 부문
감독/ 이명세
99년은 80년대 말 한국영화의 수평선에 새 물결을 일으켰던 세 기수 박광수, 이명세, 장선우가 ‘여행’에서 돌아온 해였다. 그리고 셋 중 가장 행복한 귀환의 주인공은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였다. 복귀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그는 장르부터 음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명세 상’을 부수는 전략을 통해 더욱 철저히 이명세다워지는 길을 택했다. 전작들에서 동화의 나라를 외로이 유영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카메라는 짐승처럼 쫓고 쫓기는 거친 사내들의 세계에서 뜻밖의 안착지를 찾았다. 하나의 사물을 정확히 표현하는 이미지는 단 하나라고 믿는 순결주의자의 집요한 시선은, 추적자와 도망자의 타오르는 집념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관객도 ‘광장’으로 나온 그의 장인정신에 따뜻하게 화답했다. 이명세 감독이 세기 끄트머리에서 맞이한 ‘쨍하고 해뜰 날’은 99년 한국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1999년 한국영화 결산 [2] - 올해의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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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제작편수 50편, 관객 점유율 36.7%(12월22일 현재). 한 세기가 저물어가는 1999년 세밑의 한국영화 결산표의 차변과 대변이다. 지난해보다 제작편수는 불과 3편 늘었지만 점유율은 무려 95% 이상 성장했다. 이런 수치에는 <쉬리>의 폭발적인 흥행 등으로 약간의 거품과 허수가 묻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화와 영화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새 천년으로 질주하는 한국영화의 내일에 기대를 가져도 될 법 하다.
1999-2000 네 번째 특집은 ‘한국영화 폭발’이다. 90년대 한국영화계 10대 사건과 올해 한국영화계 10대 사건을 짚어보고 올해의 영화·영화인을 뽑았다.
올해의 영화·영화인 선정위원은 <씨네21> 20자평 필자·영화전문 필자, <씨네21> 객원기자와 기자로 구성했다. 선정부문은 ‘올해의 영화 베스트5’와 감독, 프로듀서, 시나리오, 촬영, 남자배우, 여자배우 ‘올해의 영화인’ 6개 부문을 나눠 뽑았다. 선정위원들에게 제
1999년 한국영화 결산 [1] - 올해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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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콕 찌르는 코미디의 제왕 우디 앨런이 <할리우드 엔딩>이라는 신작을 들고왔다. ‘독설가’ 우디 앨런이 할리우드식 결말을 가져와 자기 스타일로 요리했는데 역시 좀 다른 맛이 난다. 할리우드 영화의 엔딩들엔 어떤 특징들이 있지않던가. 가족들은 모여앉고, 남녀는 맺어지고, 영웅은 지구를 구한다. 비극으로 끝나는 할리우드영화는 보러 가고 싶지도 않겠지만, ‘이렇게 끝났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는 건 자유다. 올해 할리우드영화 중 인상깊은, 혹은 어이없는 엔딩을 보여준 영화들도 3개씩 뽑아봤다. 영화의 결말에 관한 기사이니만큼 스포일러가 가득. 알아서들 조심해주세용~.
1.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
할리우드란 곳은 가족 빼면 별 남는 게 없는 동네다. 그거 빼고 영화 만들어보라면 이러지 않을까. “팥 없이 호빵을 어떻게 만들어?? 버럭!” 왜 아니람.
할리우드표 가족영화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대표적인 결말이란 이런 식이다. 1. 혼자 사는 할아버지
할리우드에 딴죽걸기 -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엔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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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사랑을 하면 세상을 다 얻은 듯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한다. 누가 맞는 걸까. 신기하게도, 둘 다 맞다. 사랑은 둘 다 될 수 있으니까. 이와 유사한 일이 또 있다.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가 주는 느낌은 듣는 사람의 연애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의 쓴맛을 보지 못한, 사랑의 영원함과 진실함을 (아직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연애의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은, 사랑이 변한다는 걸 이미 ‘알고’있다. 사랑의 반대말이 이별이건 무관심이건 그게 뭐가 중요한가. 사랑은 결국 사랑이 아닌 그 무엇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쯤 되면 이 감정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사랑이 결국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가 더이상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가, 실은 우리가 서로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사람
멜로영화엔 “이런 것 꼭 있다” - 눈물 쏙 빼는 멜로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