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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스타인 형제 vs 테리 길리엄, 승리는?
현실과 맞서는 판타지, 환상을 굳게 믿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면, 이것은 누가 봐도 테리 길리엄의 프로젝트다. 그러나 맷 데이먼과 히스 레저, 모니카 벨루치를 아우르는 캐스팅에 판타지 액션 모험이라는 대중적인 장르로 포장된 <그림형제>는 누구나 확신하는 기대작이 아니었다. 1975년 애니메이션 <몬티 파이손과 성배>로 데뷔한 이래 30년 동안 열편의 영화를 만든 테리 길리엄의 신중한 작업 편수를 고려하더라도, 그의 마지막 영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이후 7년이란 공백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2000년 가을. 길리엄이 10년을 준비했고 죠니 뎁까지 끌어들인 필생의 역작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세트장을 물바다로 만든 폭우와 스탭간의 불화, 주연배우인 장 로수포르의 건강 악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앙을 차례로 겪으며 좌초됐다. 테리 길리엄은, “언제나 나의 첫번째 선택”이라 부르며 아
테리 길리엄의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저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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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험악한 늑대와 흉악한 마녀가 숲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을 유혹하던 시절. 그리고 그 아이들이 사랑과 지혜와 용기를 무기삼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무렵. 현실 세계와 마법의 세계가 그처럼 완강하게 연결되어 있던 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여년 전 막을 내렸다.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그림형제는 점차 힘을 잃어가던 그 마법의 흔적을 기록한 이들이다. 그들이 남긴 동화는 지금까지 전세계 어린이들의 꿈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누군가, 아직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우리의 무의식 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마법의 세계를 영화로 만든다면. 떠오르는 이름은 그리 많지 않다. 꿈이나 환각으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야성, 혹은 본능을 계기로 여지껏 알던 것과는 달라진 세계와 대면하게 되는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왔던 테리 길리엄. 그런 그가 그림형제를 주인공으로, 현실과 환상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는 어떤 시대를 영화에 옮긴다는 소식은 길리엄과 그림형제
테리 길리엄의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저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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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냉소 사이
<만지>(卍)
출연 와카오 아야코, 기시다 교코 | 1964년 | 컬러 | 90분
삶의 방식 혹은 목표로서의 욕망을 자주 다뤘다는 점에서 마스무라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런 일처럼 보인다. <만지>는 <문신>(1966), <치인의 사랑>(1967)과 함께 다니자키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로 마스무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제목으로 쓰인 ‘卍’의 모양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도 한데 엮일 수밖에 없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변호사의 아내인 소노코는 취미 삼아 다니던 미술학교에서 미츠코라는 젊은 여성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에 미츠코의 애인이 개입하고 나중에는 소노코의 남편마저 미츠코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이들 사이에는 복잡한 정열의 미로가 만들어진다. <만지>는 소노코와 미츠코 둘로 시작된 관계의 망이
일본 누벨바그의 반항아,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 [3] - 프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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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출발점은 개인에게 있어야 한다
이처럼 마스무라의 영화들에서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눌린 삶의 부조리함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사회 문제를 다루는 (리얼리즘) 영화감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이란 환경이 낳은 비극적 운명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체념의 상태로 더욱 몰고 갈 뿐이라며 그런 유의 영화들을 거부했다. 그것들의 기저에 놓인 믿음과 달리 마스무라는 환경이 아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출발점 역시 개인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따라서 시스템에 대한 마스무라의 반발은 아마도 짓밟힌 개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0년대 초반에 그는 로마의 영화실험센터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체험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는 (아름답고 강한) ‘인간의 발견’을 꼽는다. “박물관에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힘을 체현한 회화와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에는 당당한 시선, 확신에 찬 걸음걸이,
일본 누벨바그의 반항아,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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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계의 대표적인 반항아 오시마 나기사조차 “와, 당신 반항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라고 감탄하게 만든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스무라 야스조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일본영화의 전통을 맹렬하게 거부한 일본 누벨바그의 대표적 악동이다. 그의 영화세계는 팽팽한 속도감, 우여곡절 많은 스토리 그리고 개인과 자유를 중시한 점 등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욕망 추구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여, 욕망의 예술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이렇듯 에너지 넘치는 영화들을 무수히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에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11월21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 상영회는 최근에야 일본 영화계의 뒤늦은 주목을 받은 음울한 거장,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호기가 되어줄 것이다.
한창때의 혈기방장한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영화 전체에 대한 증오심을 거론할 때 거기에는 자기 영화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
일본 누벨바그의 반항아,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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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안 변해도 연애는 변하더라
고윤희/ 지금 연애는 하고 있는가.
배종옥/ 아니.
고윤희/ <러브토크>는 어쩌면 <연애의 목적>과 정반대에 서 있는 영화다. 그래서 <연애의 목적>은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배종옥/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재미있게 봤다. 젊은 아이들이 젊은 감성으로 저렇게 연애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윤희/ 사실 나는 창피했다. 20대에 썼던 시나리오여서.
배종옥/ 신선했다. 원래 20대에는 그런 연애를 하는 거지 뭐.
고윤희/ 그 시나리오를 스물아홉에 썼다. 그런데 서른이 넘는 순간, 사춘기가 오는 것처럼 사람이 확 변하더라. 그래서인지 지금은 <연애의 목적>이 좋은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쓸 때는 진실한 감정이라 믿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제는 사랑을 해도 겁이 나고, 방어하고 숨거나 애당초 딱 잘라버리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다보니 이젠 <연애의
배종옥·고윤희의 러브토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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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다른 게 아니에요. 좋고 끌리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아무 계산없이 즐거운 시간을 쌓는 게 연애예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즐기면 되잖아요.” 유림의 유들유들한 대사에 <러브토크>의 써니라면 무어라고 답했을까. 그야 누구도 모를 일이다. <연애의 목적>과 <러브토크>가 말하는 사랑은 빛의 속도로도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는 발칙하고 고통스럽게 까발리며 ‘시작하는’ 연애담이고, 다른 하나는 시커멓게 속으로만 머금은 채 체념하다 ‘끝나는’ 연애담이니까. 도저히 대화가 통할 리 없는, 다른 세계다. 하지만 두 상극의 연애담을 만들어낸 여자들을 한자리에 모은다면, 어쩌면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연애의 목적>을 쓴 당돌한 고윤희 작가와 <러브토크>에서 마사지 테라피스트 써니를 연기한 배종옥을 한자리에 모았다. 한옥을 개량한 안국동의 한 소담한 와인바에 두 사람은 3
배종옥·고윤희의 러브토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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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짜리 장편 졸업작품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망각을 잊는 역설의 길을 걸었던 윤종빈 감독은 그러고나서도 한참을 이어진 가시밭길에 발을 들여야만 했다. 대학생이 졸업작품을 찍는다는데, 그것도 두 시간짜리 장편영화인데, 누가 시간과 돈을 흔쾌히 던지겠는가. 다행히도 그에게는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1천만원과 미쟝센단편영화제 상금 500만원이 있었고, 여기에 자비 500만원을 보태어 촬영은 마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용서받지 못한 자>가 상업영화 못지않은 재미를 가질 수 있었던 건 꼼꼼하게 닦아놓은 프리 프로덕션 과정과 감독의 의지 덕분이었다.
정학과 파출소 출입 여부를 묻자 반쯤은 침묵으로 긍정해주었던 윤종빈 감독은 독하게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외할머니댁 부근 독서실에 몸을 묻고 보냈다. “당연히 친구들은 욕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공부를 했다.” 게다가 막무가내의 기질도 조금은 있는 듯했다. 아버지가 원한 법대는
올해의 독립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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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는 대부분 놀라움을 주는 축제다. 평소라면 광고의 홍수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르는 이름없는 영화와 낯선 감독, 그 신천지에 발을 들이는 경이로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았던 관객이라면 매우 드물게 경험하는 그런 발견의 순간을 체험했을 것이다. 중앙대 영화과 졸업작품인 <용서받지 못한 자>는 문턱을 낮춘 영화적인 재미와 침묵을 깨는 통렬함으로 부산영화제를 뒤흔들었다.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과 뉴커런츠 특별언급, 넷팩상, PSB관객상 수상이라는 쾌거는 그에 주어진 부상. “내가 절실하다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는 윤종빈 감독으로부터 잊혀진 시간을 캐내어 옥돌로 다듬어 내놓기까지 고난과 환희의 순간을 들어보았다.
군대에서 담배를 배워 온 선배가 있었다. 여자처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이유를 한번도 말하지 않았고, 험한 일 한번 해본 적 없는 고운 손가락 사이에
올해의 독립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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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학의 영화동아리는 흔히 충무로라 불리는 기성 영화계에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고 영화 관련 서적도 드물었던 시대엔 영화과보다 앞서 영화를 탐식하던 곳이었다. 영화동아리 구성원들에게 설문을 돌린 것도 그들이 영화과 학생들보다 더 마니아적 성격이 강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결과는 영화과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세대임을 감안해도 그들의 시각과 결론은 아주 많이 닮았다. 특별히 마니아라는 점이 두드러지는 응답이 드물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원하는 정보를 언제든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영화동아리의 마니아적 성격도 그만큼 탈색된 것이 아닐까.
한국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질문에서 영화동아리 응답자들과 영화과 응답자는 거의 비슷한 답변을 했고 순위만 한두 계단 차이를 보였다.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감독은 박찬욱, 최고의 한국영화는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강우석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5] - 영화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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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는 개교 이후 충무로에 감독과 현장인력을 가장 많이 배출한 단일 교육기관이다. 연출, 프로듀서, 촬영을 전공하는 아카데미 22기 재학생 19명 전원에게 설문을 청했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가장 높이 평가한 감독은 홍상수다. 다른 설문 그룹에서 박찬욱과 봉준호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결과다. 홍상수를 최고로 꼽은 응답자들은 “영화언어에 대해 가장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평가했다. 최고의 한국영화에 대한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두 그룹과 달리 흥행작 위주가 아닌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 다수 포진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수위를 차지했고, 박찬욱 감독 작품 중에도 <복수는 나의 것>이 선택됐다. <살인의 추억>을 제외한 작품들은 역대 흥행순위와는 거리가 멀다. 상업적 감각과 대중영화의 성취에 대한 응답은 다른 설문 그룹과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4] -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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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과 학생들이 현재와 미래의 감독으로 점지한 인물은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다. 설문에 응한 영화과 학생들은 감독에게 집중된 초반 다섯개의 질문에서 두 사람을 모두 5위권 내로 진입시키는 애정을 과시했다. 박찬욱 감독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감독’으로 꼽혔고 봉준호 감독은 ‘최고의 한국영화, 한국영화 베스트5, 2000년 이후 데뷔한 감독 중 가장 주목받을 감독’으로 선정됐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는 설문 전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높은 순위를 점했다. 두 사람은 작가주의와 웰메이드한 상업영화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공통분모를 지녔다. ‘상업적인 감각을 가진 감독’을 묻는 문항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 항목에서도 수위를 차지한 강제규 감독과 김기덕 감독보다는 박찬욱 감독, 장진 감독의 약진이 눈에 띈다. 두 질문의 핵심은 흥행과 제작기간이지만 박찬욱 감독과 장진 감독의 선전은 응답자들의 취향을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3] - 대학 영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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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화광들이 집단으로 출몰하고 동거동락하는 세곳의 ‘서식처’는 영화산업의 시스템에서 비껴 있고 그래야 옳다. 그러나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유하는 ‘게토’는, 어쩔 수 없이 한국영화의 에너지이자 꿈이기도 하다. ‘젊은 영화광들에게 묻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의 설문조사 결과는 평단과 충무로로 대별되는 기성 세대의 인식과 평가를 살짝 배반하면서도 슬쩍 공유하는 흥미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세 부류의 취향이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면서도 현장에 가장 근접한 영화아카데미는 영화의 이상 혹은 목적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다른 두 부류와 뚜렷한 ‘노선 차이’를 드러낸다.
어쨌든, 가장 단순하게 뭉뚱그리면 이들은 고결한 작가주의나 취향없는 상업영화 어느 한쪽을 편애하지 않고 이를 동시에 꿈꾸는 가치기준을 자신있게 들이밀고 있다. 단적으로, 박찬욱을 이 시대의 화두처럼 내세운 반면 홍상수(나아가 김기덕까지)를 부재시킨다. 그리고 김동원의 <송환>은 홍상수보다 더 완벽하게 소외된다. 상업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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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 세계가 아마추어 집단을 거울처럼 비춰보고 성찰하는 게 유용할까? 대학 영화과와 영화동아리, 영화아카데미는 말하자면 아마추어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광(혹은 시네필)이기도 하다. 영화광은 프로페셔널이 아니지만 그들과 그들 너머까지의 세상을 동경하고 수집하며 미래로 삼는다. 그들을 사로잡은 지금의 감독과 영화로 미래의 감독과 영화를 가늠하는 건 그래서 가능하지 않을까. ‘젊은 영화광들에게 한국영화의 오늘과 미래를 묻는다’는 취지의 설문을 시작하고 그 결과를 들여다보면서 왜 더 일찍 이런 걸 해보지 않았을까, 새삼 자문하게 됐다. 설문은 불친절하고 투박했지만, 젊은 영화광들의 답변에선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우려와 탄성이 동시에 흘러나오기도 한다. 독자로 부를 수밖에 없는 개별적인 영화광들과 프로페셔널들과 더불어 그들의 생각과 취향을 음미해보려고 한다. 설문에 성심성의껏 응해준 6개 대학 영화과 151명, 6개 대학 영화동아리 회원 41명, 영화아카데미 22기 19명에게
젊은 영화광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