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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뷔/ <자카르타>
나의 데뷔 경로/ 대학 1학년 때 친구따라 영화 동아리 들어갔다가 졸업할 무렵 이명세 감독이 <지독한 사랑> 연출부를 부산 출신으로만 뽑아 운좋게 영화계에 입문했다. 아는 선배들이 서울 와서 편집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연출부보다 안정적이라고 권해서 함성원 편집실로 들어갔다.
나의 대표작/ <살인의 추억> <남극일기>
나의 이 장면/ 사천터널 장면
*여중생 살해 현장에서 김상경이 내려오다가 터널로 바로 이어진다. 김상경이 터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용의자 박해일 집으로 가면 안 좋을 것이다. 집보다는 복선으로서의 터널이 중요하다. 만약 호흡을 길게 주고 김상경이 박해일 집에 갔다가 나중에야 터널이 나오면 얼마나 리듬감이 없겠는가. 그리고 용의자 집으로 가는 김상경의 미디엄 클로즈업이 전 시퀀스 마지막의 송강호 클로즈업과 바로 같이 붙으면 안 어울리니까 중간에 터널이라는 여정이 있는 게 좋다.
*용의자
편집의 마술 [4] - <살인의 추억> 김선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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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뷔/ <미술관 옆 동물원>
나의 데뷔 경로/ 원래는 연출 준비를 하며 글을 썼는데, 편집기사인 아버지가 그만두셨을 때 공들인 유업을 살려보고 싶었다.
나의 주요작들/ <공동경비구역 JSA> <혈의 누>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왕의 남자> <사생결단>
나의 이 장면/ 오대수(최민식)가 혀를 자른 뒤 우진이 자살하기까지.
*우진이 고개를 숙이고 오대수와 포옹한 뒤 일어나면 비슷한 미디엄 사이즈로 갈 것인가 풀숏으로 빠질 것인가. 동일한 신인데도 다른 신인 듯한 느낌인데 넓은 사이즈로 마무리짓고 싶었다. 바로 우진이 죽을 것 같은데 안 끝나고 이 사이즈로 시작해 더 집중력을 높인다.
*아주 큰 클로즈업에서 롱숏, 거기서 다시 극단적 클로즈업으로 왕복하는 걸 좋아한다. 인물의 동선 중심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이미지 중심으로 가기에 중간 과정은 많이 들어낸다.
*오대수의 무릎 꿇는 사이
편집의 마술 [3] - <올드보이> 김상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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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뷔/ <마지막 방위>(1997)
나의 데뷔 경로/ 공고를 마치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석달 배우는데 극장 광고업자가 찾아왔다가 나를 충무로 청맥녹음실에 연결해줬다. 녹음실에서 일하다가 교황 방문 기록영화 편집을 맡으면서 영화 편집으로 들어섰다.
나의 주요작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공의 적2> <실미도> <신라의 달밤> <유령> <화산고>
나의 이 장면/ 슬픈눈과 남순의 마지막 술집장면.
*남순이 계단 내려가는 첫 컷과 슬픈눈이 계단 올려가는 마지막 컷은 운명의 상반됨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명세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눈 쌓인 뿌연 유리창은 기다림의 분위기를 설명한다. 점프컷으로 술집장면을 빠르게 연결했다.
*처음엔 남순의 툴툴거리는 캐릭터가 두드러지고, 슬픈눈은 오히려 여성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이름만 부를 거요?” 뭔가 있을 듯한 장면이다. 슬픈눈의 표정은 그저 이름만 묻는다는
편집의 마술 [2] - <형사 Duelist> 고임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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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술대요 재봉틀이다. 내 위에서 영화는 사지가 꿰맞춰지고 이음매없이 매끄럽게 연결된 뒤 마침내 숨결을 얻는다. 예전 내 주인들은 무비올라니 스탠백이니 하는 내 선조의 몸 위에서, 손으로 일일이 필름을 확인하고 자르고 붙이는 중노동을 했다. 이제 주인들은 한결 편해져 자판 한번, 마우스 한번 옮기는 것으로 가위질과 바느질, 순서 바꾸기, 속도 조절, 화면 전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장에서 영화를 찍은 필름과 필름을 텔레시네하여 비디오테이프로 옮긴 것이 편집실에 오면 나와 내 주인의 일과가 시작된다. 그날 찍은 것을 보내오는 현장이 있고 며칠분의 촬영치를 묶어서 보내오는 곳도 있다. 비디오테이프를 컴퓨터 하드디스크로 옮겨 입력시킨 뒤 OK 컷만으로 영화 순서를 이어붙이는 순서편집은 편집의 초벌구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촬영이 다 끝나고 수십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쌓이면 본격적인 편집이 시작된다. 내 앞으로 감독과 현장의 모든 걸 기록하는 스크립터와 편집기사가 옹기종기 모여 순
편집의 마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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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비, 근대가 스스로 빚어낸 파국
<혈의 누> 이창우 작품비평 전문
이 영화가 스릴러인 이유는 예고된 살인과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객주와 그의 가족이 처형당한 방식 그대로 객주를 밀고한 자들이 죽어간다. 객주는 중인 계급으로 한지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부르주아다. 그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사대부 귀족 계급과의 갈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지절단으로 객주가 죽어가는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나, 영화의 절정에서 공장 시설인 도르래를 사용하여 사지절단시키려고 하는 장면은 중심적인 볼거리다. 이야기상으로는 하나의 잔인한 처형 방식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단연 관객을 가장 몰입시키고 무섭지만 매혹시키며 반복이 주는 강박의 지점이다.
신체의 파편화는 근대의 속성을 잘 함축한다. 이성적 합리주의는 모든 것을 구획하고 이산함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진보를 자랑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통합되고 유기적인 것이 해체되는 아픔과 상실감을 의미하며 결국에는 일종의 도착적인 강박의 형태로 그것
제11회 <씨네21> 영화평론상 [3] -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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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半) 허공에서 허공으로 탈주하는 호모루덴스
<왕의 남자> 이현경 작품비평 전문
<왕의 남자>의 서사장치는 ‘놀이’이다. 놀이의 본질은 반(半) 허공 같은 것이어서 현실에 줄은 댄 채 허공에 떠있는 아슬아슬한 묘미와 쾌락을 제공해야 한다. <왕의 남자>는 놀 수밖에 없었고 놀고 싶었던 호모루덴스, 장생과 공길, 연산과 녹수의 짧은 놀이판을 복기하는 영화이다. 본래 장생과 공길, 연산과 녹수는 놀이의 짝이었다. 장생과 공길은 저잣거리 남사당패 공연의 짝이고, 연산과 녹수는 구중궁궐 내실에서 벌이는 은밀한 놀이의 짝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장생과 공길은 내관 처선에 의해 궁궐로 놀이판을 옮기게 되고, 장생-공길은 공연자로 연산-녹수는 관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첫 공연에서 무대와 객석은 호위 병사들에 의해 삼엄하게 분리되었고, 네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무한대로 벌어졌다. 그러나 왕이 웃자, 호위 병사의 창끝은 거둬지고 거리는 급속도로
제11회 <씨네21> 영화평론상 [2] -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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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씨네21> 평론상의 당선작이 결정됐다. 총 72편의 작품이 응모했고, 그중 리안에 대한 이론비평과 <왕의 남자>의 작품비평을 제출한 이현경씨가 최우수상, 장이모 영화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론비평과 <혈의 누>의 작품비평을 제출한 이창우씨가 우수상을 수상했다.
심사평: 남다른 시각과 치열함 돋보여
영화평론상 심사를 하다보면 궁금할 때가 있다. 라캉을 언급하지 않고서 이론비평을 쓰는 것은 불가능한가, 라는 궁금증. 이번 공모에도 라캉을 인용한 이론비평이 많았다. 현대비평에서 라캉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인용하되 자신의 언어로 소화하지 못한 흔적이 역력한 것은 끝까지 읽기가 곤혹스럽다(경우에 따라선 고문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문장으로 남과 대화한다는 것은 무모하거나 용감한 일일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지녔으나 글 자체가 문제의식을 못 따라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평론도 결
제11회 <씨네21> 영화평론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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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년 하고도 4개월 전. 그들은 지금처럼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다. 자신들의 장편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공동감독으로 <씨네21>과의 인터뷰에 응했던 김태용, 민규동 감독. 사적이고 기이한 기운으로 가득한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던 두 사람은 그간 해외 유학 생활을 경험했고, 길고 긴 시간을 돌아 각각 자신들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첫 번째 단독 장편 연출작을 완성했다. 지난해 가을 민규동 감독은 서로 다른 빛깔을 지닌 일곱 커플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개봉시켰고, 김태용 감독은 지난 5월18일 각자의 개성을 자랑하는 세 커플(?)이 서로 다른 과정을 통해 색다른 가족을 꾸리는 영화 <가족의 탄생>을 개봉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구성의 영화를 완성한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그중 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청하는 것은 민감한 일처럼 느껴졌고, 대화를 청하는 입장은 조심스러웠다. 그러
주목! <가족의 탄생> [5] - 김태용·민규동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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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성립 조건 제시하는 <가족의 탄생>
<가족의 탄생>은 대안가족 홍보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가 절정에 이르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홍보영화의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 밖에서 누군가가 대안가족 홍보용 팸플릿이라도 나누어줄 것 같다. 이건 영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상황과 설정이라도 어쩔 수 없는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가족의 탄생>이 내세우는 대안은 무엇인가? 모계가족인가? 이건 편집부에서 제안한 주제이기도 한데, 그렇게까지 잘 맞는 건 아니다. 모계가족을 다룬 모범적인 영화인 마린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안토니아와 그의 가족들은 가족의 전통과 가계에 대한 분명한 자기 생각이 있고 그를 능동적으로 실천할 의지도 있다. <안토니아즈 라인>은 정치적인 메시지가 분명한 모계가족 옹호 영화이다.
주목! <가족의 탄생> [4] - 듀나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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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비교한 <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의 신작 제목이 <가족의 탄생>이라고 했을 때, 이 작품이 다중 플롯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알려졌을 때, 나름의 연기력으로 무장한 배우들의 이름이 드러났을 때,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가족담론이 유행이 되고 상품이 되는 이 시대에, 가족주의건, 가족해체건, 대안가족이건, 가족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자고로 가족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어느 인물의, 혹은 이야기의 파편적 배경으로 홀대(?)하는 것이 이 시대 가족의 뻔하면서도 미묘한 구석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상에 적당히 지겨워진 관객에게 ‘이런 가족도 가족이야’라는 달콤하고 쿨한 가르침을 선사하는 영화는 선택받기 유리한 조건에 있다. 게다가 에피소드식 구성이라니.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함께 만들었던 민규동 감독의 <내 생애 가장 아름
주목! <가족의 탄생> [3] - 남다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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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주인공들을 내세워 다양한 갈등 구조 조망한 <가족의 탄생>
빈틈없이 잘 짜인 이야기를 가진 영화는 보는 이를 하나의 주제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만큼 작품 속에 관객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두지 않는 법이다. 김태용의 새 영화 <가족의 탄생>은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플롯을 버리고 느슨하게 엮인 세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접근한다. 영화는 서두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은 세 가지 장면을 제시한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게 배치한 플롯을 일목요연하게 구성하는 데 익숙해진 관객은, 서둘러 인물들을 제목에서 암시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예상보다 긴 시간과 넓은 공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가족의 탄생>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한 ‘리좀형’(rhizome) 구조와 닮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와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작은 가지들이 뻗어나와 있는 ‘수목형’(tree)
주목! <가족의 탄생> [2] - 김지미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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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을 주목해야 할 이유
민규동 감독과 함께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완성한 이래, 두 번째 장편을 단독 연출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묘한 영화다. 남매, 모녀, 연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놓인 한없이 가깝고도 먼 관계를 통해 관객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이 영화는 꼼꼼히 곱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느껴지는 섬세한 텍스트다. 이에 네명의 평론가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한편의 영화를 바라봤다. 헤픈 여자들이라는 캐릭터(김봉석), 다중 플롯 영화 중에서도 흔하지 않은 이 영화의 구조(김지미),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감독의 감수성(남다은), 또 다른 가족을 말하는 사려깊고 정치적인 방식(듀나)에 관한 다음의 글들은 <가족의 탄생>으로 향하는 또 다른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태용 감독의 오랜 친구이자 날카로운 조언자인 민규동 감독이 <가족의 탄생>과 그
주목! <가족의 탄생> [1] - 김봉석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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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푸는 것이 비평가로서의 임무라 본다
홍성남: 앞에서 거론했던 마스무라나 루이즈처럼 혹은 ‘현재의’ 알랭 레네처럼, 어떠한 이유로든 남들이 비평적 영토에서 배척한 영화감독들에 대해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다. 당신이 (재)조명하는 미국 감독들, 예컨대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앤서니 만, 니콜라스 레이, 오토 프레밍거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공통점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들은 모두 당대에 어떤 ‘오해’를 받았던 감독들이지 않나.
조너선 로젠봄: 맞는 지적이다. 오슨 웰스도 그 리스트에 포함된다.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준비 중이다. 그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 비평가로서 내가 가진 임무가 아닌가 한다.
홍성남: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나와 있는 걸로 아는데, 그것들과는 다른 입장의 책일 것 같다.
조너선 로젠봄 =내가 과거에 웰스에 대해 쓴 글들의 모음집이면서 새로 쓴 글들도 들어 있다. 새 글들은 웰스에 대한 잘못된 자료와 오해를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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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비평은 영화에 관한 논쟁을 촉진시켜야 한다”
‘라울 루이즈의 영토를 지도로 그리기’라는 조너선 로젠봄의 글은 루이즈가 일궈놓은 그 방대한 영화의 대지를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힘닿는 데까지 감히 탐사해보겠다는 의지만으로도 읽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아마도 그는 영어권에서는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루이즈라는 시네아스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영미권 평자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처럼 로젠봄의 글들에서는 다른 영미권 평자들이 쉽게 거론조차 하지 못하는 이름들이 다뤄지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대 마스무라 야스조, 현재의 알랭 레네나 장 뤽 고다르, 장 마리 스트라우브 등등의 존재들이 그의 글 어디에선가는 그저 지나치는 대상이 아니라 깊이있게 논의되는 주제가 된다.
그처럼 “주류의 위치에서 대안적 형식의 영화를 들여다보는” 능력과 열의를 가진 로젠봄은 영화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관심의 창구를 가능한 많이 열어젖힌 진정한 코스모폴리탄-비평가들 가운데 하나다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