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에 들 때까지, 도전 또 도전
<취화선> <천년학>의 임권택 감독
그의 인물들은 떠돌이 운명을 지녔다. 그와 함께해온 스탭들 또한 다르지 않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스탭들은 ‘유랑’을 각오해야 한다.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이 정처없이 떠도는 장면. 모든 스탭들이 강원도에서 전라도까지 버스로 이동하며 장승업의 궤적을 만들어갔다. 눈감고 상상해보라. “아, 여기야”라는 감독의 낮은 탄성. 기다렸다는 듯 모든 스탭들이 버스에서 내려 촬영 준비를 서두르는 풍경을. <취화선>뿐만이 아니다. <천년학> 제작진 또한 9월부터 또 한 차례의 유랑을 계획하고 있다. “세트를 짓더라도 대개 10%밖에 안 찍는다.” 한 스탭의 말이다. ‘남도화첩’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영화 속 가경(佳景)들은 발품 팔아 찾은 실경(實景)들이 거개다. 지치고 꺼릴 법도 하건만 스탭들은 감독의 이런 스타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랫동안 감독을 도운 한 스탭
한국영화 로케이션 대백과 [3]
-
한국예술종합학교 뒤편 골목은 일단 유보
다음 확인헌팅 장소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뒤편 골목에 있다는 반장 집. 앞차를 놓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스탭들은 곧장 이동 분위기다. 사진으로 본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밤 촬영이라 무난할 것 같았는데, 실제 보니 너무 낡았단다. 퇴짜 이유는 또 있다. 김동천 촬영감독은 “배우들의 동선이 확보가 안 되는데다가 반장 집 앞 장면은 비가 내려야 하는데 강우기 설치하는 것도 만만찮아 보이네요”라고 한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불만을 접수한 김효정 제작실장이 “여기가 사실 제 출퇴근길”이라며 평소 눈여겨봐뒀다는 골목길을 보여주겠다고 나선다. 길잡이를 자청한 김효정 제작실장의 걸음이 빨라진다. 뒤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인다. “실장님,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제 성격 알잖아요. 초조해하는 것하곤 거리가 먼데….” 응원과 위안의 대화가 오가지만, 점점 스탭들의 보폭도 빨라진다.
“대문이 하나였으면, 담이 좀 낮았으면, 중산층 정도의 집이었으
한국영화 로케이션 대백과 [2]
-
“촬영허가를 받지 못해서 도둑촬영을 했다. 한국과 중국의 축구경기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얻은 방송사 조끼를 껴입고서 카메라를 반입하는 해프닝을 벌였다.”(<쉬리>) “약속이 되어 있던 나이트클럽이 문을 안 열어주는 바람에 결국 촬영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비트>) “섭외를 위해 주인에게 ‘젊은 놈 하나 살려주십시오’라는 눈물로 쓴 장문의 편지를 보내야 했다.”(<8월의 크리스마스>) 불과 몇년 전 일들이다. 그때, 한국영화 로케이션 공식은 저지르고 보는 무데뽀였다. 감독이 점찍은 공간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촬영허가를 따내야 했고, 틀어지면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촬영을 강행해야 했다. “제작부 막내 때 스탭들이 식사할 식당 잡아놓고 난 다음에 하는 일이 다음날 촬영 장소 섭외였다. 지금처럼 감독과 스탭들이 함께 사전 헌팅 회의를 하고 로케이션 계획을 미리 짜는 것도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싸이더스FNH 윤상오 이사의 말처럼, 지난 몇년 동안
한국영화 로케이션 대백과 [1]
-
<시간>을 다 본 첫 느낌은, 한마디로, ‘뜨악했다’. 말 그대로 <시간>은 ‘선뜻 끌리지 않는’ 또는 ‘미덥지 못한’ 김기덕의 영화였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은 매우 ‘낯선’ 김기덕의 영화였다. <시간>의 영화적 공간은, 그동안 익숙해져버린 전형적인 ‘김기덕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 공간은 <악어>의 ‘다리 밑’과 같은 도시 주변부적 삶의 치열한 생존의 공간도, <수취인불명>의 기지촌과 같은 역사적 공간도, <섬>의 ‘저수지’와 같은 상징화된 우화적 공간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대 또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 대사가 많은 ‘수다’스러운 영화였다. <시간>의 공간은, 전형적인 홍상수적 공간에 가까워 보였다. 그 공간과 김기덕의 ‘유치한 대사’와의 만남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어색해 보였다.
새로운 공간에서도 침묵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이제까지 이 글을 과거 시제로 써왔다.
김기덕의 <시간> 4인 비평 [4] - 변성찬
-
-
<시간>은 먼저 두 가지 점에서 흥미를 끌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영화는 최근의 문제적인 감독들이 즐겨 다루는 ‘시간’의 모티브로 출발한다. 그 시간이 선형적인 진행형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간>은 시간의 종착점과 출발점이 동일한, 순환적인 시간개념을 다루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보여줬던 시간의 순환성에 대한 또 다른 사유의 결과인데, 이번에는 순환의 구조 속에 동일한 인물이 배치돼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의 시작과 끝에 만날 수 없는 같은 사람이 동시에 등장한다. 그런데도 비현실적인 인물배치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허구 속에서 매듭지어 있다. 아마 우리 영화에서 시간에 관한 사유의 소재를 이만큼이라도 제공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익숙한 소재, 희미한 사유
이런 ‘새로운’ 시간개념에 들어 있는 주내용도 문제적인 감독들이 최근에 자주 다루는 정체성의 분열에 관한 것이다.
김기덕의 <시간> 4인 비평 [3] - 한창호
-
시간은 존재와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존재는 어떻게 동일성을 유지하는가? 변화하는 건 무엇이고, 불변하는 건 무엇인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관계의 새로움을 꾀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시간은 흐르는 것인가, 존재하는 것인가? <시간>은 철학적 난제들로 가득하다. 물론 답도 있다. 그 답은 변증법적이거나 불교적이거나 들뢰즈적이다(가장 자신있는 키워드를 골라보시라). 어쨌든 <시간>의 세계관은 안티-플라토니즘적이다.
1. 세희와 새희, 그녀는 하나인가 둘인가
그녀는 지우와의 관계(R)를 새롭게 하고자, 세희의 얼굴을 버리고 새희(New희)가 된다. 그러나 그녀가 얻은 것은 ‘신선해진 관계’(NewR=New희&지우)가 아니다. 그는 세희와 열렬히 사랑했던 당시의 지우가 아니라 세희에게 실연당한 지우, 즉 지우^이다. 따라서 관계는 새희&지우^=R^이 된다. R^은 그녀가 바랬던 NewR과 다르다. 그녀는 지우^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연
김기덕의 <시간> 4인 비평 [2] - 황진미
-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이 드디어 8월24일 개봉한다. 그동안 개봉 여부에 대한 논란도 많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극장에서 만난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제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기덕 감독은 이 영화가 한국의 극장에서 개봉될 마지막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남겼다. 더불어, 이 영화가 “20만명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간의 흥행실적이나 배급규모로 볼 때 상황이 좋지는 않다. 과연 우리는 김기덕 영화를 다시는 한국의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될 것인가? 황진미, 한창호, 변성찬, 남다은 네명의 평론가가 영화평을 보내왔다. 응원이든 비판이든 <시간>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기는 흔치않은 영화다. 4인4색 영화평을 통해 <시간>이 던지는 철학적, 영화적 질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죽음만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반복
고백하자면, 나는 김기덕의 영화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이 없다. 한때는 그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도무지
김기덕의 <시간> 4인 비평 [1] - 남다은
-
“누가 누구랑 비슷하다는 느낌에서 시작했다”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를 흥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행간읽기다. 그는 아주 구체적인 것에만 답할 수 있거나, 아니면 어떤 큰 덩어리의 전체 생김새를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애쓴다. 처음 듣는 사람은 좀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어떤 문제를 가까이서 집요하게 헤집어본 경험이 있거나, 무엇이든지 자기 식대로 한 걸음 비껴서서 조망해보려고 노력해본 사람들에게 무릎을 칠 만한 구절이 많다. 그의 대답을 상기하며 영화를 상상하는 게 필요하다. 이게 홍상수식 어법을 귀담아듣는 포인트일 수 있겠다. 개봉 전 인터뷰임을 감안하여 주로 현장 연출을 중심으로 묻고 답했다.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하자며 시작했지만, 진심으로 아는 건 모두 말해주었다.
-어떤 상황이나 단상에서 시작된 영화인가. <해변의 여인>에 관해서는 처음으로 나가는 인터뷰니, 상투적이지만 이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보통 몇 가지가 섞이는데, 처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 촬영현장 [2]
-
홍상수의 신작 <해변의 여인>이 8월31일 개봉한다. 홍상수의 7번째 영화다. <씨네21>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에 이어 그의 영화현장 취재기를 세 번째 허락받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길목마다 놓인 꽤나 흥미로운 장면을 보는 행운도 얻었다. 서해안 신두리해수욕장에서 벌어지는 1남 2녀의 사랑, 아니 그렇게 말하고 나면 항상 부족한 홍상수식 영화 모험을 곁에서 보고 담아왔다. 홍상수의 현장은 조용하지만, 역동적이다. 독자들에게 그 느낌을 전하고 싶다. 보충하여, <해변의 여인>에 관한 감독의 인터뷰도 함께 실었다.
동해가 아니고 서해구나, 편견이 있었구나. <해변의 여인>의 현장을 찾아가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 남자(들)의 여행은 여자의 장소로 찾아가는 행위이거나, 그 장소에 가면 여자를 만나는 신기한 사건이거나, 그녀(들)의 흔적을 뒤따르게 되는 은연중의 탐문이다. 그러나 남자와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 촬영현장 [1]
-
아내여, 장미처럼 妻よ薔薇のやうに Wife! Be Like a Rose!
1935년, 흑백, 74분, 출연 지바 사치코, 마루야마 사다오, 이토 도모코
미국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일본 토키영화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 <아내여, 장미처럼>은 나루세의 초창기 성공작이며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영화다. 원작이 되는 나카노 미노루의 신파극 제목이 <두명의 아내>이듯이, 영화는 두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슌사쿠는 에츠코라는 법적 아내를 떠나 시골 마을에서 전직 게이샤 출신인 오유키와 함께 살고 있다. 에츠코의 딸 기미코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되찾아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진정한 아내의 미덕, 혼인 생활의 어려움, 고독에의 공감을 서정성 짙은 터치로 그려낸 작품.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2년 뒤에 나루세와 결혼하게 되는 여배우 지바 사치코가 기미코 역을 맡았다.
긴자 화장품 銀座化粧 Ginza Co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세계 [2]
-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일본영화 1세대의 대표 감독인 나루세 미키오는 다른 두 감독에 비해 늦게 조명받은 작가다. 강인한 여성의 삶을 물 흐르듯 담아내고, 인간의 역정을 수수한 화법으로 그려내는 간소함. 그의 영화엔 미동도 하지 않는 격렬한 침묵이 있다. 8월17일부터 9일간 서울 하이퍼텍 나다에서 나루세 미키오의 회고전이 열린다. 한국에선 4년 만의 회고전이다. <부운> <흩어진 구름> 등 10편의 작품이 상영되고,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강의도 진행된다. 그에 앞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세계와 상영작 10편에 대한 소개를 싣는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란 언제나 개봉 뒤 몇주가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놓은 깊은 인상은 나루세의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옳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다만 그의 영화가 꽤 오랫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정당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존재한다. 일례로 그는 그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세계 [1]
-
3. 문화적 불평등 - 미국적 vs 무국적적
TV판이든, 극장용이든 미국산 애니메이션들은 미국산이라는 출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의 상징 ‘슈퍼맨’의 어린 시절을 다룬 <스몰빌>, 말괄량이 여자아이들을 다룬 <파워퍼프 걸>, 엽기적인 욕쟁이 초등학생들이 나오는 <사우스 파크>, 전형적인 미국 가정을 보여주는 <심슨> 등은 미국식 유머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미국 사회를 스스로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비판 의식조차 오히려 미국인의 자신감과 여유를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미국 백인사회의 오버로 읽히기도 한다.
서양과 백인우월주의는 미국 애니메이션을 대표해온 디즈니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코드였다.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에 나오는 백인, 금발 여자들은 백마 탄 왕자와의 로맨스라는 시대착오적인 남녀관계를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뮬란> <포카혼타스> <릴로 & 스티치>의
미국 애니메이션 VS 일본 애니메이션 [2]
-
바야흐로 애니메이션 황금시대다. 지난 10년간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전세계적으로 벌어들인 돈이 60억달러(약 5조7천억원)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다. 올해는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65%를 차지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일명 ‘아니메’)의 극장판이 전면 개방이 되는 해인데다, <슈렉> 시리즈, <인크레더블> <니모를 찾아서> 등이 흥행에 성공한 미국에서도 스타 배우들이 더빙한 애니메이션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현재도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 <몬스터 하우스> <카> <파이 스토리> <포켓몬 레인저와 바다의 왕자 마나피> <가필드2> 등이 개봉을 했거나 앞두고 있어 한동안 애니메이션 붐은 계속될 전망이다. 양국의 치열한 애니메이션 제작 경쟁이 예상되는 가운데, 향후 주도권을 지게 될 쪽은 어느 쪽일까?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비교하고, 골리앗들 사이에 낀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
미국 애니메이션 VS 일본 애니메이션 [1]
-
6. <베어>의 곰
“곰 귀에 경 읽기, 끊임없이 시도하면 통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은 곰의 연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길들이고 훈련하는 대신, 카메라가 아예 곰의 시각에 맞추는 쪽을 택했다. 그 덕분에 100% 곰에 의한, 곰을 위한, 곰의 영화를 찍을 수 있었지만, 제작기간 8년 내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 했다. 곰과 친해지기 위한 감독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곰과 인사하며 입을 맞췄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위험천만한 사건도 있었다. 카메라 장비를 들여다보던 감독을 보고, 공격의 몸짓으로 오해한 곰이 그를 공격한 것. 장 자크 아노는 재빨리 죽은 척해 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다. 주연배우는 숫곰 바트와 아기곰 두스. 그 중 바트는 조련사가 전달하기도 전에 감독의 주문을 척척 알아들었다고 한다. <베어> 외에도 <가을의 전설> <디 엣지&g
동물 배우들의 촬영 뒷이야기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