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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영화는 매혹적이다. 영화제란 할리우드와 동아시아, 유럽 몇몇 나라에 한정된 영화 메뉴가 간만에 다양화될 수 있는 기회다. 올해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공유한 베트남, 유구한 역사 실크로드의 기억을 간직했지만 소련 연방의 붕괴와 함께 독립한 젊은 국가들이 포진한 중앙아시아로 발길을 돌려보자. 익숙한 명성을 확인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이 발견의 기쁨이다.
1990년대 포스트 소비에트를 엿보다, 중앙아시아영화 특별전
안시환/ 영화평론가
‘중앙아시아 특별전: 포스트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5개국 영화’는 구소련 해체 뒤 독립국가로 분리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장편 10편과 단편 2편을 소개한다. 소련 해체 이전 작품과 2000년대 작품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대체로 해체 이후 1990년대 작품이 중심이다. 초청작의 인지도에서 가장 앞서 있는 작품은 카자흐스탄 초청작이다. ‘디지털 삼인삼색 2006’에 참여한 바 있는 다레잔 오미
[전주영화제 미리 보기 5] 前代未聞, 미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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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영화제에서, 7시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를 선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롱테이크의 새로운 미학을 선보인 벨라 타르, 난해한 실험성으로 급진적인 영화의 예시를 제시한 알렉산더 클루게 등은 도전 자체가 의미있는 거장이다. 그러므로 기억할 것. 제아무리 훌륭한 영화라도, 보지 않은 모든 영화는 무용지물이다.
가시적 세계 그 너머로 침투하는 시네아스트, 벨라 타르 회고전
홍성남/ 영화평론가
옴니버스영화 <비전스 오브 유럽>(2004)에 포함된 벨라 타르의 작품인 <프롤로그>는 빵을 얻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단 하나의 숏 안에 담아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 5분짜리 영화는 어쩌면 타르 영화의 요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속의 무게를 담으려 하고 인물과 세계가 만나서 빚어지는 어떤 공기를 포착하려 하며 결국에는 가시적인 세계 그 너머로 침투하려는 의지를 가진 카메라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
[전주영화제 미리 보기 4] 巨匠本色, 거장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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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의 장점 중 하나는 진보적인 실험영화들을 꾸준히 소개해왔다는 점이다. 모두가 어려운 영화일 거라고? 그렇지 않다. 세계가 조금이라도 좋아지고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면 혹은 딱딱해진 지각과 감각이 만개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에게 아래의 영화들을 추천한다. 자, 겁먹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스크린에 몸을 맡기자. 그럼 신천지가 열린다.
<이윤동기와 속삭이는 바람> Profit Motive and the Whispering Wind
2007년 │ 존 지안비토 │ 58분 │ 미국
정치적이며 실험적인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발표해오고 있는 존 지안비토의 신작. 영화는 인적이 드문 묘비들과 미국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비들을 무수히 비춘다. 그곳에는 바람이 불고 그 바람 소리를 따라 과거 역사는 현재로 불려온다. 이 영화의 시선은 이미 죽어버려 땅속에 묻힌 것들을 의도적으로 오래 응시함으로써 지금 다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시선의 회복을 촉구한다. 그 공간에 관한 관조적 시선
[전주영화제 미리 보기 3] 驚天動地, 실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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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다 낯선 이름들이다. 하지만 지난 한해 이런저런 영화제를 순회하며 세계영화의 중심으로 곧 들어올 신예들이라고 판명된 미래의 명단이다. 이중 당신을 매혹시킬 새로운 이름은 누구일까. 영화제의 재미란 낯선 이름과 처음 보는 영화에서 나의 공감을 발견해보는 것이기도 할 텐데, 그렇다면 다음의 작품들은 당신을 시험에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늘, 땅 그리고 비> The Sky, the Earth and the Rain
2008년 │ 호세 루이스 토레스 레이바 │ 110분 │ 칠레, 프랑스, 독일
잊을 만하면 사냥꾼의 총성이 귀를 찢는 어두운 숲과 변화무쌍한 하늘, 휑뎅그렁한 해변을 가진 칠레 남부 섬마을. 차가운 돌멩이처럼 응어리진 외로움과 무력감을 안은 채 살아가는 세 여자와 한 남자가 있다. 그들은 혼자 걷고 혼자 비를 바라보고 혼자 사과를 베어물고 혼자 라디오를 듣는다. 간혹 서로 속삭이는 위로의 말은 관객에게까지 들리지 않는다. 상점 판매원으로 일하며 병
[전주영화제 미리 보기 2] 刮目相對, 신성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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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The Obscure
2007년│ 류우에 │ 87분 │ 중국
오우삼의 <적벽대전>, 펑샤오강의 <집결호>, 더 거슬러올라가면 장이모의 <인생>. <소설>을 연출한 류우에의 경력은 촬영감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자오선생> 외에도 <미인초> <십삼괘포동>을 연출했으며 <소설>은 그의 네 번째 연출작이다. 그리고 류우에는 네 번째 연출작 <소설>에 이르러 이를 데 없이 비범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마침내 탄생시켰다. 중국의 유명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생과 시와 문학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 그 자리에 진행 보조원으로 자리한 한 여자가 있다.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그 여자가 문득 이 호텔에서 지난 과거의 남자를 재회하면서 허구의 이야기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둘은 서먹함과 반가움으로 재회를 기념하며 아이같이 즐거워하지만 밤이
[전주영화제 미리 보기 1] 名不虛傳, 작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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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을에 다시 영화의 빛이 축복처럼 퍼진다. 제9회 전주국제영화제가 5월1일부터 9일까지 그 빛을 뿌린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기존의 ‘인디비전: 국제경쟁’ 부문의 명칭을 ‘국제경쟁’으로 바꿔 신인들의 경쟁을 독려하는 한편 자유, 독립, 소통이라는 전주만의 대안적 기치는 여전히 고수함으로써 변화와 전통의 균형 감각을 자랑하고 나섰다. 예년에 비해 많은 1204편이 출품됐으며, 그중 40개국에서 온 195편의 알찬 상영작을 만날 수 있다. 튼실한 프로그램 외에도 헝가리의 거장 감독 벨라 타르, 프랑스의 유명배우 드니 라방 등 각국의 해외 게스트도 속속 전주를 찾을 예정이다. 영화의 고을에서 열리게 될 대안의 잔치를 어떻게 즐겨야 할까. 그 즐거운 고민을 덜어드리기 위해 다섯 가지 키워드로 상영작을 미리 소개한다. 작가, 신성, 실험, 거장, 미지의 세계.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에 빠져도 즐거우리라.
웰컴 투 전주! 대안의 잔치를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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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여서 얻는 게 뭐죠?”_<데스워치> │ DVD 출시
<GP506>의 한핏줄 영화라고 부름직하다. 1차 세계대전 중 폐허가 된 독일군의 참호를 발견한 영국군 중대가 그 안에서 점차 미쳐가며 서로를 죽인다는 내용의 공포영화. 나이를 속이고 입대한 젊은 병사로 등장하는 벨은 동료들에게 연약한 낙오자 취급을 받지만, 결국 모두가 미쳐가는 가운데에서도 칼부림의 광기에 휘말리지 않는 인물로 극의 중심을 이끌어간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참혹한 도살장. 이미 그곳에서 소년의 앳된 얼굴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우리 아빠도 나보고 미쳤다고 말하는걸.”_<춤스크러버>
<아메리칸 뷰티>보다 7℃ 정도는 더 싸늘한, 미국 중산층에 대한 냉소와 성장영화의 형식을 기묘하게 반죽해놓은 작품. 가전제품 광고처럼 모두가 멋들어진 집에서 우아하게 살아가는 교외의 한 마을. 부모들이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동안, 아이들은 로커룸 앞에서 마약을 나누며 그들만의
놓치면 아쉬울 제이미 벨의 미개봉작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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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와 닮은꼴의 유년기
제이미 벨의 유년기는 <빌리 엘리어트>와 묘하게도 닮은꼴이었다. 벨의 어머니는 열여섯의 나이에 그를 임신했고,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녀를 떠났다. “60년대에 발전이 정지되어버린 듯한” 영국의 변두리 시골 마을에서 홀어머니의 손에 자라난 벨은 빌리처럼 허기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소년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춤에 매혹된 집안이었다. 댄서 출신의 할머니, 이모, 어머니를 둔 벨은 동네 소녀들의 춤 수업을 흘끗거리며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큰 소리를 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토슈즈를 바지 속에 숨긴 채 발레를 배우러 다녔다. 그리고 1999년, 2000 대 1의 경쟁을 제치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낙점을 받은 소년은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 감히 상상치도 못했을 압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러셀 크로와 톰 행크스를 제치고 BAFTA(영국 아카데미: British
<빌리 엘리어트>에서 8년 뒤, <할람 포>의 배우 제이미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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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년을 기억한다. 작은 뼈마디가 금세라도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릴 것처럼 온몸을 뒤흔들고 중력을 거부하듯 세차게 날아오르던 소년, 빌리 엘리어트. 열망과 두려움, 환희와 울분을 격정적인 몸짓에 응집해 폭죽처럼 터뜨렸던 열네살의 제이미 벨은 2000년 스크린이 발견한 영롱한 보석이었다. 그리고 2008년. 어느덧 20대에 들어선 벨은 <빌리 엘리어트> 이후 처음으로 고향땅 영국으로 날아가 새로운 이름을 달았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제목이 곧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할람 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나무 위 오두막에 틀어박힌 채 살아가는 할람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걸치고 립스틱을 바른 채 망원경으로 세상을 훔쳐본다. 새어머니를 살인범으로 의심하고 증오하면서도 부글대는 호기심과 성적 열망으로 관계를 맺는가 하면, 고향에서 도망쳐나와 머무르게 된 런던에서는 시계탑 뒤편의 다락에 몰래 기거하며 어머니와 꼭 닮은 여성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본다. 찬란한 희열로 허공을
[제이미 벨] 빌리, 이젠 어른이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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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서울 전 수도여고
수도여고는 이전했지만, 서울 남영동에는 여전히 수도여고가 남아 있었다. 폐교가 된 채. 그리고 그 안에는 <여고괴담>의 공포 역시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공교육의 폭력성을 공포영화로 풀어낸 <여고괴담>의 영어제목은 ‘속삭이는 복도’(Whispering Corridors)다. 대낮에 홀로 찾은 폐교에는 속삭이는 복도들이 층층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최강희가 쾅쾅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다가올 것만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복도. 불과 1년 전만 해도 여고생들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을 복도에는 과거의 활기보다는 영화 속 공포감만이 싸늘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모습이 공교육의 실체와 일면 닮아 있는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학교의 모습 역시 폐교의 으스스한 분위기만큼이나 어둡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시작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듯 폐교를 빠져나왔다.
<친절한 금자
사진기자 서지형이 찾은 영화 속 촬영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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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여인> 충남 태안군 신두리
누구도 홍상수 감독에게 사랑의 판타지를 기대하지 않지만, 신두리를 찾는 이들 중 누군가는 분명 낭만을 기대할 것이다. 내 기억에 바닷가에는 늘 낯선 이성이 있었고, 가끔씩 그들과의 짤막한 연애를 그려보기도 했으니까. 중래(김승우)와 선희(송선미) 역시 바닷가에서 만난 낯선 이성들이었고, 휴가지에서의 연애가 늘 그렇듯 그들의 연애도 결국엔 시시하게 끝이 나버린다. 실제로 신두리는 인파가 북적거리는 여느 해변과 달리 인적이 드물고 식당들도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저녁으로 사라지는 해를 보고 있노라니, 신두리 어딘가에서는 분명 남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몰을 보며 바닷가를 거닐면 낭만보다는 쓸쓸함이 앞선다. 쓸쓸해진 이들은 이성과의 만남에 목마름을 느낄 것이고, 자연히 바닷가에서 스친 낯선 이성에게 수작을 걸게 되지 않을까. 물론 여름도 아니고 휴가철도 아닌 4월 어느 날 이곳을 찾은 낯선 남자에게
사진기자 서지형이 찾은 영화 속 촬영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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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길을 걷다 낯이 익은 곳을 발견한다. 어디에서 봤을까.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그곳의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퇴색되었던 기억은 선명해지고, 현재의 장면은 빛을 발한다. 비단 이미지만이 아니다. 주인공의 귓볼을 스치던 은은한 바람의 감촉, 쏟아지던 빗속에서 비릿하게 퍼져가던 피냄새, 아이를 잃고 낯선 도시의 아스팔트에 쓰러져 흐느끼던 한 여인의 비통함까지…. 영화에서 봤던 명장면을 실제로 조우한다는 것은 시각적 즐거움 이상의 만족을 선사한다.
이렇듯 명장면을 선사한 촬영지를 직접 가보고 싶은 맘이 간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절실한 바람을 안고 사진기자 서지형이 한국영화 속 명장면을 남긴 촬영지를 찾아가보았다. 사진으로 그곳을 만나고 나면 다가오는 주말 그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을 게다.
명장면,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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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왕국이 개점을 앞두고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약 4개월이다. 개점 준비가 한창인 중국은 지금 날이 갈수록 불쾌지수를 높이고 있다. 선진문화를 주입하고자 정부가 강제하는 각종 규제들과 티베트 탄압 등 중국 내 인권문제를 향한 전세계적인 비난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조화의 여정이라 이름붙인 성화 봉송길은 각국에서 벌어진 시위에 시달리고 있으며 올림픽 개막식에 불참하겠다는 전세계 총리들의 뜻이 연이어 통보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지난 4월15일 영화 <포비든 킹덤: 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이하 <포비든 킹덤>)의 주연배우인 성룡과 이연걸의 기자간담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아마 중국으로서는 <포비든 킹덤>이 달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림픽을 앞둔 지금, 중국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높일 영화로 안성맞춤이다. <서유기>를 원작으로 한 <포비든 킹덤>은 보스턴의 한 백인 소년이 어느 날 신비로운 힘
중국에서 무술쌍웅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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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결혼이 연애 이상으로 달콤할지도 모른다. <고스트 앤 크라임>의 조 드부아, 제이크 웨버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시시하고도 위험한 망상에 빠져들게 된다. 식탁이 뒤집히도록 악을 쓰고 발을 구르는 세딸들의 난장판 속에서 아침을 챙기고, 머리를 빗겨주며, 하찮은 질문 하나 무시하지 않고 응답해주는 남자.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자신에겐 “파티”라고 말하는 그에겐 늘어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조차 눈부시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속 터지는 우직함이나 비현실적인 선량함이 아닌, 딱 정확히 알맞은 온도의 사려 깊음. 1989년에 데뷔했으니 벌써 20년차의 배우인데, 제이크 웨버는 필모그래피의 길이에 비례하는 중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7월4일생>이나 <펠리칸 브리프>처럼 출연장면을 애써 색출해봐야 하는 조·단역이 대다수.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던 <U-571>의 중령은 실전에서는 뒷걸음질을 치는 남자
[제이크 웨버] 딱 알맞은 온도의 사려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