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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사람을 먹는다. 영화 <차우>의 제목으로 쓰인 ‘차우’는 바로 그 식인멧돼지를 일컫는 이름이다. 몸길이 2m. 추정 몸무게 약 410kg. 지리산 기슭의 10년 무사건사고 마을 삼매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이 거대한 몸집의 동물은, 세상에 있을 법하나 실제 존재하지는 않는 가상의 동물이다. 말하자면 <차우>에서 삼매리 마을 사람들과 뒤엉키는 식인멧돼지는 100% 가짜다.
<차우>는 코미디와 호러를 독특한 감각으로 조합한 영화 <시실리 2km>(2004)로 데뷔한 신정원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이 영화의 멧돼지 CG 작업은 ILM 출신의 할리우드 스탭 한스 울리히가 맡고 있다. CG 작업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컴퓨터상에서 픽셀로만 완성되진 않는다. ‘차우’는 세 가지 타입으로 만들어졌다. 애니매트로닉 버전, 스턴트 버전, CG 버전. 애니매트로닉 버전은 눈 깜박임이나 귀 펄럭임 등 섬세한 신체 표현들이 가능한 고가의 로봇 인형이고,
[하반기 한국영화] 한스 울리히 CG수퍼바이저가 말하는 <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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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정윤수 감독의 1년 전 대답은 단호한 부정이었다. 내 것보다는 남의 물건을 탐냈던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2007)의 네 주인공은 ‘지금 살고 있던 사람’을 떠나서야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질문에 대해 정윤수 감독은 이제 복잡한 긍정으로 답한다. 한 남자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또 한번의 결혼을 감행하는 이야기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혼없이 두 가정을 거느리는 대담한 여자의 로맨스다. 박현욱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인어공주> <팔월의 일요일들>의 송혜진 작가가 각본을 쓴 작품. 제도가 둘러놓은 울타리 속에서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의 주인공들이 자기 집을 버린 채 옆집을 탐했다면, <아내가 결혼했다>의 여주인공 인아(손예진)는 자기 집도 지키고 저 아래 경주에 새로운 집도 차린다
[하반기 한국영화] 정윤수 감독이 말하는 <아내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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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고고클럽을 무대로 통행금지의 밤을 젊음으로 질주하던 고고밴드 ‘데블스’가 온다. <고고 70>은 바로 70년대 기지촌 클럽을 전전하던 보컬 상규(조승우)와 기타리스트 만식(차승우), 그리고 그들의 6인조 그룹 데블스의 이야기다. 화려한 무대매너와 카리스마로 고고클럽 ‘닐바나’를 주름잡던 그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함께 상경한 미미(신민아) 역시 매력적인 춤과 패션으로 동반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화재로 멤버가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지고, 긴급조치 9호로 무대마저 잃게 된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데블스는 다시 열정의 무대를 준비한다. 음악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오직 음악을 향한 열정이 그들을 이끈다. <고고 70>은 바로 모처럼 만나게 되는 순도 100%의 음악영화다. <다세포 소녀> <짝패> <라디오 스타> 등을 거치며 쉼없이 달려왔던 방준석 음악감독 역시 오직 그 열정 하나만으로 <고고 70>에 매달렸
[하반기 한국영화] 방준석 음악감독이 말하는 <고고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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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아침이다.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익숙한 손짓으로 축음기를 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경쾌한 재즈. 그런데 멜로디가 익숙하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남자는 재즈로 편곡된 <메기의 추억>을 들으며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고, 구두를 닦는다. “음, 멋있어.” 거울 속 용모에 만족한 남자가 발랄한 스텝으로 집을 나서는 순간. 잡음으로 가득한 축음기의 음질은 5.1채널의 서라운드로 변신한다. <모던보이>의 음악을 맡은 이재진 음악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은 일종의 선전포고다. “아마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축음기 소리가 5.1채널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처럼 <모던보이>도 모노가 아닌 5.1채널 버전의 경성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다. (웃음)”
음악은 <모던보이>의 “첫번째 퍼즐”이다. 1930년대 경성이 배경이자 중심 캐릭터인 영화를 만들면서 제작진이 겪은 가장 큰 고민은 “고증의 하한선과 모던의 상한선을 어디에 둘 것인
[하반기 한국영화] 이재진 음악감독이 말하는 <모던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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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는 영조가 즉위한 해다. 그러나 여균동 감독의 퓨전사극에서 1724가 뭐 그리 중요하리오. <1724 기방난동사건>이라는 제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는 오히려 ‘난동’이다. 권유진 의상감독(해인엔터테인먼트 대표)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시나리오를 보니 정통사극이 아닌 건 분명했다. 재미는 있겠지만 정말 어렵겠다 싶더라.” 고증과 과장을 잘 배합하는 것이 최대 관건임은 분명해 보였다. “너무 고증과 관계없이 나가면 대개의 감독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요? 고증을 잘 살려서 만들어가면 감독들은 또 이런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웃음) 그 사이를 잘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했던 딜레마는 없었다. 여균동 감독은 고증은커녕 난동보다 더한 난동을 원했던 것이다.
하긴 <1724 기방난동사건>이라는 영화 자체가 조선시대에도 조폭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부터 시작된 완벽 퓨전요리다. 천둥(이정재)은 조선 제일의 주먹이
[하반기 한국영화] 권유진 의상감독이 말하는 <1724 기방난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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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언옥 미술감독은 <신기전>을 촬영하는 동안 여주인공인 홍리로 살았다. 홍리(한은정)는 신기전을 제작하는 무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인물이다. 신기전의 기본도면과 원리를 습득하고 그것을 응용해 신기전을 만드는 홍리와 영화적으로 신기전을 재현해야 하는 민언옥 감독은 다를 바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홍리의 방을 만드는 게 가장 쉬웠다. 그녀 역시 디자이너 아닌가.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그림만 그리는 줄 아는데, 사실 과학적인 근거에서 작업하는 게 많다. 그녀의 방도 내 작업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웃음)”
<신기전>은 1400년대 세종 시대의 이야기다. <춘향전> <혈의 누> 등의 사극영화에서 미술을 담당했던 민언옥 감독은 <신기전>의 공간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감성을 채워넣으려 했다. 세종이 조선에 뿌려놓은 과학과 이성의 공기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관객의 상식적인 선을 중요하게
[하반기 한국영화] 민언옥 미술감독이 말하는 <신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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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 난감하다. 러시아어 교사 양미숙(공효진)은 천하의 ‘삽질 여왕’이다. 게다가 툭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은 완전 대박이다. 그런 홍익인간인 그가 짝사랑하는 동료이자 심지어 유부남이기까지 한 서 선생(이종혁)의 또 다른 연애(그러니까 바람?)를 막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한 부모의 이혼을 원치 않는 서 선생의 딸이자 교내 ‘왕따’인 서종희(서우)도 그 작전에 합세한다. 그렇게 미숙과 종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연애를 방해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써서 달려들지만 당최 일은 쉽게 풀리지 않고 꼬여만 간다. 이거 참 요상한 동맹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가슴이 아니라 정신이 아픈 선생과 철부지 학생은 얼떨결에 손을 잡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사건은 더 꼬여만 간다. <홍당무>의 재미란 그런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란 게 노력한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현재 후반작업 중인 <홍당무>는 박찬욱 감독이 대표로 있는 모호필름에서
[하반기 한국영화] 이경미 감독이 말하는 <홍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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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움에 반드시 새우 등이 터지는 건 아니다. 제 몫만 딱 챙기고 잘살아가는 새우도 있으니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하 <눈눈 이이>)의 안토니오가 그런 인물이다. 안권태·곽경택 공동연출작인 <눈눈 이이>는 사건 해결에 관한 한 ‘백전백승’인 강력반장 백성찬(한석규)과 대량 금괴 및 현금 절도를 계획하는 도둑 안현민(차승원)간의 밀고 당기는 힘 대결을 그린, 이른바 ‘투톱 남자영화’다. 여기서 안토니오는 안현민으로부터 밀수 금괴 600kg을 팔아 현금화해달라는 거래를 제안받고 이를 즉시 백 반장에게 고자질하는 치사한 인물. “성공하면 커미션 챙겨 돈 벌고, 실패하더라도 백 반장이 대신 처리해줄 테니 뒤탈없을” 꼼수를 부리는 거다. 양다리를 걸친 채 손 안 대고 코 풀어보자는 안토니오의 계획은 어떻게 될까.
안토니오는 낮에는 금은방, 밤에는 트랜스젠더 클럽을 운영한다. 안현민이 그에게 금괴 600kg 처리를 부탁해오는 것도 그가 밀수와
[하반기 한국영화] 안토니오 역의 이병준이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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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를 베트남으로 속여라. 남편을 찾아 베트남에 가는 여자 순이의 이야기 <님은 먼곳에>는 사실 타이에서 촬영한 영화다. 제작여건상 촬영 허가를 받기 쉬운 타이가 인접국가 베트남의 대체 공간으로 선택된 셈이다. 따라서 영화의 미술이 초점을 맞춘 것도 타이를 베트남처럼 자연스레 위장하기. 영화의 프로덕션디자인을 담당한 강승용 미술감독은 “타이와 베트남은 둘 다 지형적으로 길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재해 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축 공법부터 생활방식까지 모든 게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촬영 전 사전 조사차 베트남에 다녀왔고, 이후 베트남 전문가를 따로 둬 70년대 당시 베트남 상황에 대한 디테일을 전해 받았다. 하지만 정작 속이기보다 더 힘들었던 건 그 거짓말을 티가 안 나게,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타이, 베트남에 대해 국내 관객이 갖고 있는 “상식적인 이미지”와 실제 모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은 강승용 미술감독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이다.
[하반기 한국영화] 강승용 미술감독이 말하는 <님은 먼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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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세 남자의 얽히고설키는 추격전을 담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요체 중 하나는 액션이다. 아무리 중국의 풍광이 뛰어나고 캐릭터들이 기묘하며 훌륭한 기법으로 촬영됐다 한들 멋진 액션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관객은 맥빠진 장면만 보다가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반칙왕> 이후로 김지운 감독과 호흡을 맞춰온 정두홍 무술감독은 <놈놈놈>의 액션을 구상하기 위해 깊은 고민을 해야 했다. “뭔가 새로운 액션을 만들고 싶다”는 김지운 감독의 주문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 “<놈놈놈>은 ‘만주 웨스턴’을 지향하는데, 처음에는 서부극에 동양적인 무술을 접목하려 했다. 그래야 우리 색깔이 난다고 봤는데 조화롭지 않았다. 그러다 <석양의 무법자>를 보게 됐는데 서부극 특유의 매력이 느껴졌다. 결국 <놈놈놈>의 액션도 서부극의 기본적인 액션에 기반할 수밖에
[하반기 한국영화] 정두홍 무술감독이 말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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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이 북한의 고위층 계급을 그린 영화라면 <크로싱>은 최하단, 말단 계급 사람들의 이야기다.” 북한 출신 김철영 조감독의 설명은 명쾌하다. 그는 자신의 상업영화 이력을 <국경의 남쪽>으로 열었다. “<국경의 남쪽>에선 정치적 위협 때문에 가족들이 탈북하게 되지만 <크로싱>의 용수(차인표)는 가족의 약과 식량문제만 아니었으면 탈북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볜 땅을 밟고 수용소를 거쳤다가 남한 땅에 무사히 이르지만, 북쪽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 때문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 아버지. <크로싱>의 여정은 아픔으로 점철돼 있다.
김철영 조감독이 이 영화에서 일반적인 조감독의 역할 이상을 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가장 처음 한 작업은 시나리오 모니터링이다. “아무래도 다양한 종류의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보니 여러 사람의 삶이 한 사람의 한정된 인생 안에 다 들어
[하반기 한국영화] 김철영 조감독이 말하는 <크로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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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계가 여름 시즌을 시작으로 하반기의 대반전을 노리고 있다. 한국영화 또한 새로운 도약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촛불을 든 셈이다. 6월19일 개봉하는 <강철중: 공공의 적1-1>을 시작으로 <크로싱>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님은 먼곳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놀이터인 여름 시즌에 맞승부를 펼친다. 이후에도 <홍당무> <신기전> <1724 기방난동사건> <모던보이> <고고 70> <아내가 결혼했다> <차우> <영화는 영화다> 등이 한국영화의 재기와 자존심 회복을 위해 차례로 극장에 나올 예정이다. 어찌됐거나 영화는 사람이 만드는 법. 하반기 개봉작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온 영화인들을 만나 하반기 한국영화 대역전극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하반기 한국영화] 큰 놈, 센 놈, 별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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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5월23일 금요일 _ 이제는 실전이다!
오후 두시, 지하철 5호선 종착역인 방화역에서 정 감독 일행과 만났다. 카메라를 비롯해 온갖 촬영 도구를 한 가득 짊어지고 온 이들은 지친 기색도 없다. 일행의 말대로 “감독님 집 밥”의 힘 때문일까? “소매치기 엄마에게 훈련받는 장면을 감독님 집에서 찍었는데, 밥을 두끼나 먹고 왔어요. 아침엔 해물탕 점심엔 불고기, 진짜 맛있던데요.” 오전에는 조원 모두가 골고루 돌아가며 촬영했다. 실전에서 직접 카메라를 잡아본 소감은? “처음엔 꼭 촬영이 아니라도 아무 거나 시키면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카메라는 만져만 봐도 설레더라고요.” 성기혜씨가 말한다. 그 옆에서는 배우를 맡은 최성민씨가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는 장면을 연습 중이다. 정병길 감독과의 인연으로 <우린 액션배우다>의 두 배우 신성일, 김경민이 소매치기로 우정출연했다. 눈빛마저 노련한 이들과 비교하자면 최성민씨는 아직 서툴다. “제가 지갑을 뺄 때까지 주
처음 영화만들기에 도전하는 독립영화제작 워크숍 현장 밀착취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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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5월19일 월요일 _ 독립영화와 친해지기
취재 한 시간 전, 광화문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 도착했다. 첫 출근날 첫 취재라니. J선배가 함께 있어주어 든든했지만, 한편으로는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독립영화 감독들과 함께 옴니버스영화 만들기’ 강좌가 시작되는 오후 일곱시, 센터 안은 조용했다. 고개를 숙인 채 안내문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긴장감이 축적된 무거운 침묵이 강의실 공기를 타고 흘렀다.
제일 먼저 총대를 멘 사람은 이송희일 감독이다. 19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지는 독립영화제작 워크숍의 첫 강사로 나선 그는 ‘독립영화의 과거와 내일’이란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인디영화 수준의 예산으로 촬영한 <디 워>는 독립영화일까요, 아닐까요? 스스로 독립영화인을 자처하는 김기덕 감독의 <숨>은요?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영화만들기에 도전하는 독립영화제작 워크숍 현장 밀착취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