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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와 류승범의 <추격자>
대한민국 최고의 부검의 vs 시체를 여섯 토막내 버린 희대의 살인마. <용서는 없다>는 정체불명의 범죄자와 그를 쫓는 이의 대결을 그린 스릴러, 이를테면 <추격자> 등과 비슷한 유의 영화다.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혹은 다음 희생자를 구출하려는 의도로 형사 또는 수사관 역할을 떠맡은 누군가는 범인의 주변을 맴돌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들은 마침내 격돌한다. <용서는 없다>가 여기에 덧붙인 독특한 무언가는 첫 번째 일찍이 살인자가 공개됨은 물론 체포된다는 점, 두 번째 그를 압박하는 주인공이, 다소 독특하게도, 부검의라는 점이다. 밀실에 갇힌 범죄자와 수사관 사이의 두뇌게임을 강조함은 물론, 한국영화에서 전문적으로 다룬 바 없는 부검이라는 영역을 중심축으로 색다른 과학수사를 선보이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한창인 금강 하구둑. 여섯 조각으로 절단된데다 한쪽 팔마저 사라진 여성의 시체가
[하반기 기대작] 12. 용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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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남편을 사랑하다
갑작스런 언니의 미스터리한 죽음. 남은 건 그녀와 살을 맞대고 살았던 언니의 남편뿐이다. <파주>는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고통이다. 아니, 고통이라고 생각했던 실체가 알고 보니 사랑이었다는 제법 독한 맛의 멜로드라마다. 스스로 차마 인정하기 힘든, 누구에게도 인정받기 힘든 금기의 사랑. 안개 자욱한 파주의 풍광과 함께 펼쳐지는 <파주>는 바로 이 헤어나올 수 없는 희뿌연 사랑을 기술한다.
운동권 대학생 중식. 짝사랑이라는 ‘과거’를 품고 도피하듯 온 파주에서 한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불만족스럽던 결혼의 끝은 갑작스런 아내의 사고사였다. 아내에겐 돌아가신 부모를 대신해 돌보던 어린 여동생 은모가 있다.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의 인연으로 맺어진 형부는 죽은 언니를 대신해 그녀의 보호자를 자청한다. 사고 뒤 장장 7년, 이상하게 얽힌 두 남녀의 줄다리기는 모양도 실체도 없다. 사랑보다 미움이, 미움보다 의구심이 앞서는 미스터리한 사랑. 과
[하반기 기대작] 11.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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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의 합격점 받은 시나리오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일본의 인기 미스터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용의자 X의 헌신>(2008) 등의 원작자로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작가다. <백야행>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제목 자체가 익숙한 것처럼 2000년 일본에서 출간돼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올라섰으며, 2006년에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 출연한 아야세 하루카가 자신의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남자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피해자가 15년 전 벌어진 살인사건에 관련된 인물임을 알게 된 수사팀은 그 사건의 담당 형사였던 동수(한석규)를 찾아간다. 과거를 회상하던 동수는 피해자의 아들이었던 요한(고수)을 떠올리게 되는데, 당시 14살 소년의 완벽한 알리바이와 유력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를 종결했었다. 한편, 재벌
[하반기 기대작] 10.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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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대 초대형 도술이 펼쳐진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했다. 나는 놈이 있으면 기는 놈도 있다 했다. <전우치>는 뛰고 날고 기고 그렇게 다 한다. 지난 <박쥐> VIP 시사회에 참석해 뒤풀이를 하던 <전우치>의 김윤석은 “와이어 연기가 힘들었다”는 송강호의 얘기를 듣고 헛웃음을 켰다. <전우치>는 와이어 연기가 기본이라 힘들다, 아프다 구시렁댈 처지가 못 됐기 때문이다. 와이어와 한몸이 되는 건 당연한 일. <홍길동전>과 함께 대표적인 고전 영웅소설로 꼽히는 <전우치전>에서 캐릭터 모티브를 따와 현대를 배경으로 재창조한 <전우치>는 누명을 쓰고 그림족자에 갇힌 조선시대 도사 전우치(강동원)가 500년 뒤인 현대에 봉인에서 풀려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에 맞서 싸우는 활약상을 그린다.
전우치는 도술 실력은 뛰어나지만 사실 풍류와 여자에도 제법 관심 많은 젊은 도사다. 봉인에서 풀려나는 조건으
[하반기 기대작] 9. 전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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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는 이별을 통보하고…
나는 그가 90년 만에 맞닥뜨린 첫사랑이다. 그는 나를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나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섹스를 할 수는 없다…. ‘금지된 사랑’이라는 닳고닳은 주제를 인간 소녀와 뱀파이어 청년의 하이틴 로맨스 스타일로 풀어낸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신참내기 작가 스테프니 메이어는 햇볕 좋은 날 연필 물고 빠져들 법한 백일몽을, 예측 가능한 클리셰를 전부 끌어들이면서도 간질간질한 궁금증을 놓치지 않은 채 소박하게 끌고 갔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성공이었다.
주인공 벨라와 에드워드의 이어질 듯 말 듯한 안타까운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 1편 <트와일라잇>과 달리 2편 <뉴문>은 녹록지 않은 작업일 것임이 분명했다. 일단 줄거리상 남주인공 에드워드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다. 뱀파이어 근처에 머무는 한 벨라가 큰 위험에 처할 것임을 인정하게 된 에드워드는 벨라에게 이별
[하반기 기대작] 8. 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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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인간병기 ’비’를 만나다
억울하겠지만 연출자로 자리잡은 제임스 맥티그보다 먼저 눈길이 가는 쪽은 제작자, 워쇼스키 형제다.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과 각본을 담당한 제임스 맥티그의 데뷔작 <브이 포 벤데타>와 비슷하지만 보다 느슨한 방식으로. 먼저,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가수 겸 배우인 비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이번 영화의 주연으로 낙점된 배경부터 그러하다. 워쇼스키 형제의 전작 <스피드 레이서>에서 녹록지 않은 무술 실력을 선보여 제작진들의 호감을 산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비가 맡은 주인공 라이조는 전형적인 일본 무사, 닌자가 아닌가. <스피드 레이서>로 일본 망가와 재패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을 대놓고 과시한 워쇼스키 형제의 영향력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설정이다.
“우리는 래리와 앤디, 그리고 <스피드 레이서>의 무술감독과 닌자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비가 그 영화에 가장
[하반기 기대작] 7. 닌자 어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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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로 아톰이 돌아왔다
‘우주소년 아톰’이 돌아온다. 컴퓨터와 거대 자본의 힘을 빌려 CG애니메이션으로, 화려하게. ‘아스트로 보이’는 한국인이라면 ‘아톰’이라고 기억할 로봇 소년의 영어 이름으로, ‘만화의 신’ 혹은 ‘아니메의 아버지’라 불리는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가 1952년부터 연재한 만화 <철완 아톰>의 주인공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에서 이를 원작으로 일본 최초의 TV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만들어 1963년부터 방영하면서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일본 인구의 40%가량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들였을 정도라니 가히 폭발적인 인기다. 이후에도 1980년과 2003년 두 차례 더 TV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바 있다.
레트로 열풍을 타고 도착한 2009년작 <아스트로 보이: 아톰의 귀환>에서 눈여겨봐야 할 특징은 이 영화가 아톰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인 CGI 버전이라는 점이다. 미래 도시인 메트로시티의 풍경이나 아톰의 무기들,
[하반기 기대작] 6. 아스트로 보이: 아톰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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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캐리가 스크루지라니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뭘까? 아마도 <호두까기 인형>과 더불어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아닐까. 피도 눈물도 없는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3명의 유령을 만나 삶의 참된 의미를 배운다는 이야기. 그냥 동화 아니냐고? 모르는 소리다. 여기에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요소, 각종 유령이 등장하는 호러소설적 요소, 그리고 구원과 새로운 삶이라는 신학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소, 이 모든 게 골고루 갖춰져 있다. 영원불멸의 생명력을 보유한 이야기라고 할까.
로버트 저메키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야말로 오랜 꿈의 프로젝트였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을 전작 <폴라 익스프레스>나 <베오울프>처럼 테크놀로지의 또 다른 신기원으로 등치시키려는 시선을 경계하고 있다.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
[하반기 기대작] 5. 크리스마스 캐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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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도 안 했는데 걸작의 반열에…
“감독은 너무 과대평가된 직업이에요. 다들 아시잖아요. 감독이 하는 일이 ‘예스’ 또는 ‘노’라고 답하는 게 고작이라는 걸. 딴 게 더 있을라고요? 천만에요.” 아마 이 도발적인 언사가 전세계 감독들을 그토록 사로잡았나보다. 영화 <나인>의 한 구절. 영화의 주요 인물인 프로듀서 릴리안(주디 덴치)이 예술가로서의 방향을 잃은 감독 귀도(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향해 내뱉는 대사는 세상 모든 감독을 향한 통렬한 비판이자, 자극이다. 감독들이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 1순위에 올랐으나, 원작자 페데리코 펠리니의 명성에 눌려서, 혹은 자신이 ‘예스’나 ‘노’를 대답하는 감독에 그칠까봐 저어했던 영화. 금기를 깨고 나선 이는 롭 마셜 감독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가 뮤지컬영화 <시카고>를 제법 성공적으로 연출한 롭 마셜 감독이라서.
11월25일. <나인>의 할리우드 개봉을 앞두고, 언론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영화를 향한 흥
[하반기 기대작] 4. 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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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노아의 방주를 만든다고?
2008년 <히스토리채널>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지구 종말 2012>는 어지간한 납량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고대 예언서(무녀 시빌레)에서 현대 문물(컴퓨터 프로그램 웹봇의 불길한 예언 혹은 NASA의 온갖 발표)에 이르기까지 2012년 지구가 종말을 맞는다는 온갖 주장이 조목조목 소개됐다. 예를 들어 주술가이자 과학자였던 마야인들이 별자리의 흐름에 기반해 만든 달력은 몇 천년 뒤의 개기월식과 일식 날짜까지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런데 이 달력은 정확하게 2012년 12월21일에 끝이 난다. 더이상의 달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마야인들은 이날 지구, 태양, 은하계의 중심이 일직선으로 정렬되는 이른바 ‘2만5800년 만의 그랜드 크로스’가 발생한다고 예측했다.
할리우드가 이 군침 도는 소재를 아주 모른 척했던 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나 <데스 레이스> 등 ‘문명 종말 그 뒤’를 다루는 영
[하반기 기대작] 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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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도 살아남은 부성애
"하지만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선(善)이 꼬마를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버지와 어린 아들은 하염없이 남쪽을 향해 걷는다. 지구에는 대재앙이 발생했고 문명은 파괴되었으며 사물은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회색 재로 뒤덮여 있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색깔이 있는 것,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그는 어린 아들만이 지켜야 할 전부라고 생각한다. 남쪽으로 가는 여행길에는 인간고기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이 출몰한다.
‘지구 멸망의 날’에 관한 상상력은 대개 선악으로 갈린 두 패거리와 화려한 액션과 ‘그래도 내일은 태양이 뜬다’는 섣부른 희망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 코맥 매카시가 썼고 2007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 <로드>를 원작으로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 문명 파괴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그
[하반기 기대작] 2. 더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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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부터 <전우치>까지, 2009년 하반기 기대작 12편 소개
좀 뒤늦게 모았다. 그래서 더 엄격하게 모았다. 추석 개봉영화들이 공개된 지금, 그 이후부터 올 연말까지 우리가 주목하는 영화 12편을 모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주드 로의 <셜록 홈즈>부터 롤랜드 에머리히의 블록버스터 <2012>를 지나 ‘비’의 할리우드 첫 주연작 <닌자 어쌔신>, 그리고 <트와일라잇>의 속편 <뉴문>까지 초기대작 엄선이다. 거기에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전우치> 등 한국영화들까지 모았다.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란 기대, 이 시점에선 마음껏 가져도 좋다.
주먹 쓰는 ’보헤미안’ 홈스의 탄생
이름만으로 흥분된다. 셜록 홈스, 역사상 가장 저명한 영국 태생 탐정이 스크린 공략에 나섰다. 셜록 홈스의 이름을 자신만만하게 전시한 이번 작품은 아서 코난 도일의 탐정 소설을 바탕으로 한
[하반기 기대작] 1. 셜록 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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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1] ‘친절한 영화씨’가 사랑받는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웃고 울 수 있는 지점을 짚어주는 거더라.”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본 한 투자관계자는 지금 한국 대중영화의 친절함을 지적한다. 물론 대중영화에 친절함은 기본 옵션이다. 다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생각하는 적정의 친절함과 관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관객이 원하는 친절함의 정도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얼라이즈 픽쳐스의 원동연 대표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입장 변화를 이야기했다. “<박쥐>는 관람평을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며 욕을 써놓는 관객이 많았다. 만약 3, 4년 전이었다면 그 안에서 함축된 의미를 찾으려 하거나, 몰라도 모른다고 선뜻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모르면 모르는 거다.” 주제가 명확한 이야기와 쉬운 서사뿐만 아니라 웃고 울 장면에서 한번 더 웃고 울게 만드는 연
친절해야 해, 나쁜 놈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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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산업과 관객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 사이 같다. 여전히 서로를 좋아하고 싸우는 일도 거의 없지만 놀라우리만치 서로를 오해하곤 한다. 멀리서 지켜보건대 미국 영화산업과 관객의 관계는 훨씬 더 단순해 보인다. 할리우드는 잘나가는 스포츠 자동차를 타고 값비싼 선물과 전율로 연인을 유혹한다(물론 가까이에서 보면 이 관계 역시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충무로는 연인에게 무엇을 제공하면 좋을까에 대해 확신이 없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관객의 예측 불가능한 취향이 한국영화 전체의 창의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왔다. 몇년 전 홍콩 감독 진가신을 인터뷰할 때 그는 소양 높은 관객을 가진 한국영화가 부럽다고 했다. 관객이 한 종류의 영화만 좋아하면 감독들은 그 스타일로만 영화를 만들고 그 나라의 영화는 그만큼 일률적이 될 것이다. 반대로 관객의 취향이 예측 불가능하면 감독들은 새로운 것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
<해운대> <
이제 한국 관객은 예측 가능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