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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 없는 미스터리, 팬시 상품같은 이미지만 연출
좋아하는 일본 미스터리를 꼽을 때, 나는 언제나 <백야행>을 첫머리에 놓는다. 그 냉랭한 감성이 좋고, 그 치열한 시대감각이 좋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거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할리우드에 견준다면 토니 스콧 정도 될까. 하나의 소재나 제재를 놓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고안하고 직선으로 달려간다. <용의자 X의 헌신>의 주인공 이시가미처럼, 문제를 풀어내는 가장 효율적이고 완전한 방법만을 생각한다. 그것은 엔지니어라는 전직에서 연유하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일 수도 있고, 애초에 그 이상은 능력 바깥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장점만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빠르고 정확한 스토리와 구성에만 전력투구. 그 덕에 비난도 종종 받는다. 동세대의 여성작가 미야베 미유키에 비하면 인물의 깊이와 심리묘사가 턱없이 떨어진다는 비판이다. 동의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힘이
<백야행>을 보는 네 가지 시선 [1] 김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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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을 보는 네 가지 시선- 원작소설·드라마판과는 어떻게 다른가
영화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의 원작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다.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제작됐고, 영화로 만들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서일까. 지난 11월10일, 언론시사를 가진 <백야행>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압축하려다 원작의 결을 잃어버렸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감성이 없어진 점을 매력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영화로 압축할 때,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는 이야기나 비교하지 않더라도 영화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맞서는 중이다. 어떤 의견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화제의 원작을 영화화한 <백야행>이 태생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백야행>을 둘러싼 대표적인 4가지 입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했다.
하얀 어둠속, 어떻게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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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CG는 없다. 탄탄한 시나리오는 있다. 우주는 전자파로 번뜩이는 대전(大戰)의 배경이 아니요, 자연스럽게 걷고 뛰는 것 외엔 그 어떤 특별한 액션도 없다. 격리된 인간의 내면을 설득력있게 조망하려는 패기만은 선연하다. <더 문>은 비범한 SF영화다. 주요 인물은 사실상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두명의 인물과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뿐. 우주인의 개척정신을 배반하듯 인류가 발자국까지 남긴 지구의 위성 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행성 하나는 우습게 날려버리는 트렌디한 SF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당황할 만하다.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의 고전 SF영화를 사랑한다”는 CF감독 출신의 신예 던컨 존스 감독은 말한다. “현대 SF영화와는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오랜만에 발견한 야심가의 데뷔작 <더 문>을 소개한다.
머지않은 미래. 샘 벨(샘 록웰)은 달 기지 사랑의 유일한 거주자이자 승무원이다.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 거티(목소리 연기 케빈 스페
SF를 철학적으로 개척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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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질문은 이거다. 로버트 저메키스가 드디어 언캐니 밸리를 극복할 것인가. 대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 인간에 가깝지만 인간과 완벽하게 같지 않은 인공체에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낀다는 개념)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의 퍼포먼스 캡처 기술과 디지털 액터는 “부제를 <시체들의 밤>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CNN>)는 불평을 자아낸 <폴라 익스프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그러나 마담 투소의 박물관에서 짐 캐리와 콜린 퍼스의 밀랍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촬영한 듯한 <크리스마스 캐롤>의 캐릭터들은 여전히 어딘가 꺼림칙하다. 눈동자는 흐리거나 지나치게 밝고, 근육의 움직임은 어쩔 도리 없이 조금 경직되어 있고, 몸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가볍다. 한마디로 유령 같다.
캐릭터가 유령처럼 보인다면 성공한 것
그런데 잠깐.
[must see] <크리스마스 캐롤> 더 환상적으로, 확 소름끼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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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돌아왔다. 순수함과 강인함을 가졌지만 끔찍한 남자들과 잔혹한 세상에 희생돼야 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여신이 다시 강림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페넬로페 크루즈다. 알모도바르와의 네 번째 합작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크루즈는 복잡미묘한 연기를 펼쳤다. 물론 이번에도 스크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그녀의 빛나는 외모와 그보다 더 눈부신 재능이다. 어린 나이에 영화계로 뛰어들어 수많은 영화를 통해 아름다운 외모와 이를 능가하는 능력을 발휘해온 크루즈의 삶은 신데렐라의 동화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크루즈는 17년이라는 연기인생 동안 숱한 파랑을 거친 끝에 마침내 전성기를 개막했다. 새로운 지중해의 여신 페넬로페 크루즈의 삶을 되돌아본다.
솔직히 말하자. 페넬로페 크루즈가 진정한 배우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불과 3년 전 <귀향>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페넬로페 크루즈는 그저 얼굴 예쁘고 관능적인 육체를 소유한 섹시 스타로 보였다
페넬로페 크루즈, 그녀에게 항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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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고, <천지창조> 속 신과 아담의 손가락이 ‘끊어지며’ 달리던 기차가 ‘은하철도 999’처럼 허공으로 추락한다. <타이타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형 크루즈호가 실감나게 뒤집힌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가 보여주는 재난 스펙터클은 그날 밤 악몽으로 재현될까 두려울 만큼, 단연 압도적인 현실성으로 능란하게 펼쳐진다. 지난 11월1일 LA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2012> 프리미어 시사회에서 감독과 각본가, 주연배우들을 만났다.
“우리에게 시간이 좀더 있을 줄 알았는데….” <2012>의 과학자 애드리언이 망연자실하게 내뱉을 때, 열렬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처럼 지구멸망설이 실감나는 때가 또 있었던가. 이건 온갖 휴거설과 밀레니엄 바이러스 앞에 덜덜 떨던 1999년보다 더하다. 극지방의 빙하는 놀라운 속도로 사라지고, 북극곰은 서커스 묘기하듯 얼음덩어리 위에 불편하게 버티다가 결국
<2012> 묻자, 누구를 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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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13일은 배우 최무룡이 눈을 감은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한달 앞둔 지난 10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던 양 실장을 연기했고,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극중 손예진을 치료하던 의사를 연기한 배우 권병길의 전화였다. 그는 외국의 배우는 추억하면서도 한국영화사에서 오랫동안 기억돼야 할 배우에게 주목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씨네21>은 최무룡의 오랜 팬이라는 그에게 글을 부탁했고, 그는 글과 한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다음의 글은 최무룡의 연기와 삶을 담은 기록이자, 한 배우를 사랑한 또 다른 배우의 고백록이다.
어린 시절, 옆 동네 대천해수욕장에서는 해마다 ‘바다의 여왕’ 선발대회가 열렸다. 그해 피서객을 대상으로 한 미인대회쯤 되는 행사다. 사진을 좋아하던 권병홍 형님은 해마다 대천을 찾아 사진을 찍곤 하셨다. 김진규와 최무룡, 김지미가 함께 찍힌 이 사진도 어느
[최무룡 10주기] 모범답안의 위선을 연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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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들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섯,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이다. 출연진의 이름을 받아적는 것만으로 유혹적인 <여배우들>은 배우들이 자기 자신으로 캐스팅된, 즉, 윤여정이 윤여정을, 이미숙이 이미숙을, 고현정이 고현정을 연기하는 영화다. 여섯 여배우들이 패션지 <보그>의 화보를 촬영하고자 한자리에 모인다는 가상의 설정 아래 성격이며 사생활 따위, 즉, 그들의 실체가 셀레브리티들의 삶을 염탐하고 싶어 안달인 21세기의 관객 앞에 노골적으로 전시된다. 게다가 이 폭로전의 얼굴들을 찬찬히 곱씹어보라. 브라운관에서 무르익고 스크린에 나이테를 새긴 걸출한 배우들이요, 결혼과 이혼, 스캔들로 각종 미디어를 뒤흔든 곡절 많은 여인들 아닌가. 여배우들과 영화, 연기와 실제, 영상매체와 인쇄매체, 그리고 패션의 동거를 둘러싼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이재용 감독의 신작이다. 질문이 목까지 차올랐다. 필모그래피를 도전하듯 확장시킨 <다세포 소
<여배우들> 이토록 아찔하게 솔직한 순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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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2009)가 11월5일(목)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일(화)까지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린다. 개막작으로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산티아고 보우 그라소 감독의 <생산적 활동>(아르헨티나)과 50살 생일을 맞은 한 남자가 아내와 낱말게임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공상에 빠져드는 세실 베르낭 감독의 <내 머리 속의 낙서>(프랑스), 두편이 상영되며 폐막작은 국제경쟁부문의 수상작이 상영된다. 특히 애니메이션인 <생산적 활동>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의 부속물처럼 다뤄지며 세상을 움직인다는 기발한 상상력이 놀라운 작품이다.
국내 유일의 국제경쟁단편영화제로서의 자부심은 출품작 수에서 증명된다. 총 82개국 2027편이 접수돼 역대 최다의 출품국가 수와 출품작품 수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본선에 진출한 작품은 총 30개국 52편으로, 8개 부문으로 나뉘어 3300만원의 상금을 놓고 영화제 기간 중 섹
고다르·카락스의 비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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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국 감독이 돌아왔다. 2004년 <가능한 변화들>을 만든 지 5년 만이다. 그리고 그가 “밝아졌다”. 인간의 피폐한 초상을 그렸던 <가능한 변화들>이 ‘섬김’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 <매직 캔디>가 됐다. 스크린에서 잠시 떠났던 시간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는 조심스레 종교란 말로 침묵의 시간을 설명했다. “뭔가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가능한 변화들>을 끝내고 좀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어요. 이전처럼 작업할 수 없었고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그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2006년 세례를 받은 건 자신에 대한 성찰, 표현자의 본질적인 고민의 결과였다. “어떤 일을 하며 사는지”보다 “어떻게 사는지”에 마음이 쓰였고, <가능한 변화들>의 인물들처럼 “좀처럼 변하기 힘든 사람이란 존재”가 민병국 감독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는 종교를 만났다. 믿음과 절제 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
[민병국] 나의 종교, 나의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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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예상하는 건 당연하다. 과거 개그 프로그램의 ‘바람잡이’ 캐릭터로 관객과 시청자 모두를 휘어잡았던 서승만 아닌가. 그런데 그의 개그가 풍자를 지향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지. 남에 대한 관심이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그린 <영웅은 없다> 역시 상당히 시니컬한 분위기의 영화다. “경험담이에요. 한번은 비오는 날 비닐우산으로 남자에게 맞던 여자를 구해준 적이 있는데, 이 여자가 남자 편을 드는 거예요. 난 누명은 쓰지 않았지만, 사회의 그런 부분들에 분개하고 사는 편이죠.” 만약, 다시 메가폰이 주어진다면 그때도 사회고발성 작품을 할 생각이다. 사실, 이미 또 다른 작품을 찍어놨다. 대학로의 극단 운영자와 건물주의 갈등을 다룬 <연기수업>이란 장편영화다. 역시 경험담이다. “극단은 배고픈데, 건물주만 배가 부르더라고. 시나리오도 직접 쓰고 내가 가진 여유로 만들었어요. 개봉도 생각하는데, 그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영화에 뛰
[서승만] 에구구, 오지랖이 사람 잡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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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금잔디’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구혜선을 만났다. 단편 <유쾌한 도우미>의 ‘감독 구혜선’으로 만난 것이지만 사실 그는 창작소설 <탱고>를 출간한 것은 물론 그 속에 삽입된 자신의 일러스트를 모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또 앨범까지 발매했기에 딱히 감독, 작가, 화가, 뮤지션 그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는 팔방미인의 재능을 뽐냈다. 최근에는 방배동 서래마을에 갤러리 ‘마놀린’을 열어 그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바로 이곳에서 구혜선을 만난 날, 오후 4시임에도 ‘오늘은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편’이라며 웃었다. 연말 크랭크인 목표로 음악영화로 알려진 장편 데뷔작을 준비하느라 늘 밤을 새우는 모양이었다.
<유쾌한 도우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신부와 수녀에게 연신 “구원해주세요”라고 애타게 외친다. 바로 신부와 수녀는 “죽음을 통해 구원받고 싶다면 진심으로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유쾌한 도우미’들이다. 고해성사가 처음이라는 남자부터
[구혜선] 성당에서 쫓겨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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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에 새로운 스타일의 ‘향단’으로 출연하는 류현경을 감독의 이름으로 마주했다. 그 두 가지 모습이 쉽게 겹쳐지지는 않지만 감독 류현경은 사뭇 진지했다. “사람들이 ‘류현경 감독’이라 그러면 너무 손발이 오그라들고 또 ‘허세’라고 그럴까봐 신경 쓰인다”고 말하지만 그 연출 경력은 꽤 오래다. 중학교 3학년 때 영화부 활동으로 연출은 물론 주연배우로 출연해 만든 <불협화음>은 EBS의 <네 꿈을 펼쳐라>라는 프로그램에 방송돼 호평을 받은 적 있고, 조은지와 정경호가 주연한 <사과 어떨까?>(2006)라는 단편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배우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반으로서 마지막 워크숍 작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남녀 관계 이야기로 직접 출연도 할 생각인데 제목은 <방황하는 날강도>”라며 웃는다.
흥미롭게도 <광태의 기초>는 자전적인 연애담에서
[류현경] 무표정도 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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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감독’이란 표현이 낯설지 않은 유지태가 <초대>라는 작품으로 관객과 만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감독이라 불리는 게 어색하다며 현장에서도 그냥 ‘지태씨’라 불러주는 게 가장 편하단다. 이미 오래전 연기는 물론 학업을 병행하면서 연출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는 단편 <자전거 소년>(2003)으로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고 이후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2005)와 <나도 모르게>(2007) 등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영화를 만들더라도 최대한 사람들에게 덜 알려지는 방법을 고민했다”는 그는 유지태라는 이름이 주는 선입견 없이 꾸준히 자기만의 영화세계를 매만져왔다.
<초대>는 한 패션잡지사의 제의로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화보 중 하나를 단편영화 형식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에게 화보 출연 겸 연출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알려진 <자전거 소년> 이전에 습작처럼 두편의 단편을 만
[유지태] <라 제테>에 바치는 오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