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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우주선이 지구에 왔다. 그런데 맨해튼, 시카고, 워싱턴이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이다. 우주선은 석달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닐 블롬캠프는 데뷔작 <디스트릭트9>에서 ‘낯선 친숙함’을 흥미진진한 SF스릴러의 틀에 솜씨 좋게 녹여넣으며 전대미문의 ‘요하네스버그 SF’를 완성했다. 쓰레기로 꽃을 만드는 엔딩신이 안겨주는 기묘한 감동처럼, <디스트릭트9>은 그렇게 닳아빠진 에일리언물이 진화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씨네21>은 이 영리한 데뷔작을 기념하며, 블롬캠프의 악전고투 제작기와 함께 SF작가 배명훈과 SF평론가 김상훈이 텍스트 안팎을 넘나들며 읽어낸 기고문을 준비했다.
최대한 비할리우드적으로 영화 찍기
독창적인 데뷔작 <디스트릭트9>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8년 초여름, 미국 곳곳에 ‘인간 전용’(For Humans Only)이라는
<디스트릭트9> 21세기형 SF를 보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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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 하트넷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게스트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으는 배우다. 그런데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그 흔한 수행원도 없이 성큼 인터뷰룸에 들어선 그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바랜 진과 모직 셔츠의 편안한 차림새만큼이나 그는 첫마디부터 자신을 솔직하게 내려놓을 줄 아는 배우였다. 이병헌, 기무라 다쿠야를 포함해 자신까지 수염을 기른 포스터를 가리키며 “나는 수염과 함께 간다,라는 제목을 붙여도 되겠죠?”라고 농담을 건네는 그에게서 자기혐오와 구원을 오가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클라인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전적인 진지함을 고수하는 대신, 그는 유려한 대화의 방식을 습득한 재치있는 달변가였다.
<진주만>과 <블랙 호크 다운>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시작한 연기생활 13년, 그는 그 관심을 즐기는 대신, 배우로서의 도전이라는 과제로 기꺼이 전환했다. 경험이 곧 좋은 연기의 밑바탕이 된다고 믿는 그는 최근 <21세기 사
[조시 하트넷] 트란 안 훙 작품이라 묻지도 않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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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 안 훙이 입을 열었다. 조시 하트넷, 기무라 다쿠야, 이병헌이라는 톱스타의 캐스팅부터 제작까지 총 3년간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하고자 했던 언어라고 전했다. 그리고 자신을 불러 세우는 ‘베트남’을 벗어나 이제 그는 인간 본래의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씨클로>로 그가 던졌던, 그러나 매듭짓지 않았던 구원에 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 근래 들어 가장 용감한 그의 도전이다.
‘차기작은 <씨클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씨클로>를 발표한 직후 트란 안 훙 감독은 이미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연출에 대한 희미한 윤곽을 제시했다. ‘신약성서의 현대판이 될 것’이라는 짧은 힌트가 첨언의 전부였다. 알다시피 트란 안 훙의 다짐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다. 차기작인 <여름의 수직선상>으로부터 9년, 닮은꼴인 <씨클로>로부터 무려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집요한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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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이 하루에 다섯신을 찍었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전설이다. 그는 한 장면을 그렇게 빨리 찍는 감독이 아니다. 느리게 지켜보고, 거기서 생각을 가다듬고, 또다시 되뇌인 뒤 연인의 심리를 발전시킨다. 그러니 하루 다섯신이 아니라 어쩌면 다섯컷도 힘든 사람이 그다. 그런 그가 빨라졌다. 담아두기보다 버릴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현장, 그곳에서 그의 영화도 변화를 습득했다.
-3박4일의 짧은 일정 안에 과거의 사랑, 사랑의 새로운 발단, 갈등이 모두 담긴다. <비포 선셋>의 인상도 지울 수 없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스스로 ‘어 이거 <비포 선셋>에서 본 거 아니야?’ ‘어 가만 있어봐.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웃음)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나는 일을 그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전 영화들이 계절이나 감정적인 변화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기간 자체를 주고 그 안에서 캐릭터들의 변화를 살펴보고 싶었다. 애초 짜
[허진호] 현장감은 살리고, 유머는 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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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이 서울을 떠났다. 아니 그의 연인들이 서울을 떠났다. 그가 서울을 떠나는 건 여행이나 휴가가 아닌, 늘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다. 낯선 곳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격렬한 사랑, 이별을 경험해냈다. 중국 청두, 그의 연인들을 만나게 한 그곳에서 허진호 감독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번 사랑에선 냉소보다는 따뜻함이, 안타까움보다는 희망이 느껴진다. 말 그대로, 새로운 허진호의 사랑 <호우시절>이다.
한국에서 중국 청두로 향했을 때 생기는 1시간의 뒷걸음질. <호우시절>은 자오선 남쪽, 한 시간의 시차가 불러온 사고 같은 사랑이다. 건설 중장비 회사 팀장 동하(정우성)는 청두 출장길에서 우연히 미국 유학 중 만난 메이(고원원)와 두보초당에서 재회한다. 쓰촨으로 출장 간 남자와 ‘쓰촨이 고향이라’ 그곳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여자 둘 모두에게, 생각지도 않던 만남은 분명 우연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의 출장으로 주어진 짧은
<호우시절> 냉소의 자리에 희망의 언어를 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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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일부터 폐막일까지 날짜별로 엄선한 스무편
8일(목): <굿모닝 프레지던트> Good Morning President /개막작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대통령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유명하거나 커다란 사건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인물을 중심으로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 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인물과는 상관없이 상상적인 대통령을 그려내는 경우다.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후자에 가깝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상적 대통령 속에 현실적인 모습을 기입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장진의 영화는, 그가 구사하는 유머처럼, 반대가 되는 지점에서, 청개구리처럼 출발하기를 좋아한다. 그의 가장 매력적인 작품 중 하나인 <아는 여자>가 사소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공통으로 지닌 집단화된 추억을 끄집어내는 방식(그것은 야구 자체일 수도 있다)이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공적인 대통령 속에 담긴 사적인
[PIFF2009] 뭘 봐야할지 모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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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은 국제적으로 이미 이름을 알린 다른 홍콩감독들이 수시로 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자신이 뿌리를 내린 홍콩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대부분 홍콩을 중심으로 제작하여 (그 뒤 중국 관객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소재의 토속성이 아주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살아 숨쉬는 홍콩의 느낌과 사회 분위기에 대한 감상을 그려내고 어떤 경우에는 정치에 관한 비유도 묻어난다. 그의 이러한 홍콩에 대한 자각은 그를 앞 세대의 상업영화 감독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실력의 감독으로 홍콩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두기봉의 영화는 다루는 소재와 촬영 스타일은 다양하지만 정작 본질이나 목적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독특한 영화사상에는 항시 무협영화사상이 뿌리 깊이 내리고 있었으며 캐릭터마다 협객의 기개를 지녔다. 그를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근 10년 내 비관적인 전망의 홍콩영화산업에서 영웅과 영웅의 기개를 표현해낼 수 있었던 많지 않은 감독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무협영
[PIFF2009] 강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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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영화제가 엊그제 같더니 어느덧 14회까지 왔다. 하긴 횟수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성장했다. 이에 <씨네21>의 추천작들을 엄선했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상용 프로그래머의 리뷰부터 올해 한국영화의 주목할 만한 경향을 짚어보고, 올해 부산을 찾는 홍콩영화계 최후 거장 두기봉에 대한 홍콩 영화평론가 사이먼 신의 시선을 엿보며, 끝으로 영화제 기간동안의 날짜별 스무편의 추천작을 골랐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8일 개막하며 예매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부산에서 만나자!
단순한 낭만성을 벗어 던지고
상영작을 통해 본 한국영화의 새로운 혹은 진행 중인 물결에 관하여
<씨네21> 독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두명의 평론가가 만든 영화가 올해의 한국영화 중 가장 중요한 목록일지도 모른다.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와 김소영(‘김정’ 감독으로 소개된다)의 &l
[PIFF2009] 해운대에 ‘영화 쓰나미’가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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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메이드 드라마’, ‘명품 드라마’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인터넷 팬카페라든지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의 ‘<탐나는도다> 갤러리’(이하 탐도갤)에서 터져나오는 반응은 상상을 초월하게 뜨겁다. 매회 방영될 때마다 새로운 글이 수백건씩 올라오고 주연배우를 향한 애정 공세는 지금까지 ‘마니아 드라마’라고 일컬어지는 그것들에 비해 단연 압도적이다. 그 폭발적 반응의 이유는 무엇일까.
“나, 일리암만 찾으면 떠날 거우다.” “어느 암자인지 내 알바 아니나, 비구니가 되겠다는 결심을 미리 하지는 말아라.” 지난 주말 <탐나는도다>를 보다가 이 부분에서 빵 터졌다.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일리암’이라 발음하는 것을 두고 진지하게 암자 운운하는 대사를 알아들으려면 사실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봤어야만 가능했다. 1회부터의 진정한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은밀한 유머 코드. 결론부터 말하자면 MBC 여름 특선 주말드라마 <탐나는도다>는 한
탐스러운 이 드라마 쭈욱 ‘닥본사’ 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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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꽤 걸렸다. 후련하지 않은가.
= 글쎄, 막상 끝내려고 하니까 좀 섭섭하다. 너무 오래해서 그럴까? 나도 모르게 정이 많이 든 것 같다. (웃음)
- 예전 인터뷰를 보면 항상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영화를 고민하는 게 보였다. 상업영화감독으로서는 당연한 거지만, 그런 기대가 <불꽃나비>에서는 더 크지 않을까 싶다.
= 앞으로는 아예 그런 거 안 하려고 한다. (웃음) 두 작품 다 상업적으로는 성과를 못 내지 않았나. 나는 항상 관객과 만나려고 했다. 그러면서 흥행성 면에서 모자란 부분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감동 코드나 드라마트루기에서 관객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와니와 준하>는 성의있게 만든 작품이지만 친절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가진 실력의 한계였다. 하지만 <불꽃나비>도 두렵고 걱정스럽다. 나는 한다고 했는데, 만약 또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때는 내 한계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 <불꽃나비
[김용균] 멜로,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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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이기에 앞서 국모였던 명성황후의 죽음은 언제나 슬픔보다 분노가 먼저였다. 명성황후를 그렸던 수많은 사극 드라마들, 소설들, 그외 또 다른 이야기들은 그녀의 죽음을 역사적 맥락에서 묘사했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의 정치적 갈등, 한반도를 점령한 뒤 대륙으로 전진하려던 일본의 압력, 그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란 한마디를 남기고 의연한 태도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화도 분노의 신화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두렵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출발점이다. 여성으로서의 명성황후, 그리고 그녀를 지킨 일개 무사의 충정어린 사랑이 영화의 요체다.
이야기는 한 여자의 운명적인 외출로 시작한다. 고종과의 혼례를 앞둔 어느 날, 자영(수애)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바닷가를 찾는다. 밤에는 자객으로 낮에는 뱃사공으로 살던 무명(조승우)은 우연히 그녀를 배에 태운다. 자영은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불안감을 털어놓고,
<불꽃처럼 나비처럼> 그녀는 정말 두렵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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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내 운명>에 이어 다시 사랑 이야기를 꺼냈다.
= 뭐 크게 벗어나겠나. 사랑 이야기라 해도 이번에는 사랑의 감정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 삶인 사람들, 삶이 곧 사랑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들여다보면 설렘, 열정, 욕심, 욕망 뭐 그런 것들인데, 이번에는 조금은 포괄적인 사랑을 보여주려 했다. 그게 가족의 사랑이든 부부간의 사랑이든 조금 더 넓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배경이 6인용 병실이 되는데 그것도 비슷한 차원에서였나.
= 좀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그놈 목소리> 이후 내가 관객을 부담스럽게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사회적인 목적이든 뭐든 뭔가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진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그러다 보니 때로 선동도 해야 했다. 관객이 이런 데 부담을 갖는 게 아닌지 고민이 됐고 나 스스로도 부담이
[박진표] 실화에 대한 강박관념은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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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표 감독의 네 번째 장편 <내 사랑 내 곁에>는 외견상 그의 전작들과 달라 보인다. 실제 노인 커플을 출연시킨 <죽어도 좋아!>, 에이즈 걸린 여성과 농촌 총각의 이야기를 다룬 <너는 내 운명>, 이형호군 유괴사건을 극화한 <그놈 목소리>까지 그는 실화를 소재로 삼아왔다. 방송사 시사교양 프로듀서 출신답게 그는 실화를 매개 삼아 사회적 반향이 강한 메시지를 던져왔던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한 메시지 또한 담지 않은 영화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와 완전히 결별했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세련미있게 가공되지 않은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 세상의 순정함에 대한 믿음, 영화적 스타일보다는 배우 연기의 극대화 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종우(김명민)와 지수(하지원)가 있다. 감각과 의식은 멀쩡한데 육신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는 이제 막 마지막 혈육인 어머
<내 사랑 내 곁에> 죽음과 정면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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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은 유난히 연휴 기간이 짧다. 그렇다고 이 특수를 겨냥한 영화들의 관객 쟁탈전이 미지근한 건 아니다. 올해 추석 시즌을 겨냥해 개봉하는 영화는 9월24일과 10월1일 개봉작을 모두 합쳐 12편이다. <페임>이나 <게이머> <써로게이트> 같은 외화들의 위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올해 또한 추석 시즌의 한국영화 강세라는 전통은 이어지는 듯하다. 이중에는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졌지만 톡 쏘는 개성을 자랑하는 <나는 갈매기> <날아라 펭귄> <지구에서 사는 법>도 있지만, 아무래도 규모나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박진표 감독의 <내 사랑 내 곁에>와 김용균 감독의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대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나란히 시사회를 통해 알맹이를 공개한 두 영화를 감독의 입을 통해 살펴본다.
보름달이 뜨면 전쟁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