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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한번쯤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어디쯤 왔는지 길은 보이지 않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방향도 알 수 없어 삶이 정체된다는 느낌. 이제는 뒤돌아갈 수도 없건만 계속 앞으로 가자니 불안한 진퇴양난의 시기. 무엇보다 이 어둠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괴롭다. <파스카>의 안선경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이 시기를 그저 묵묵히 버텨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 결국 두 번째 장편 <파스카>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그녀는 당당히 뉴커런츠상을 수상하며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만든 첫 장편 <귀향>(2009)이 취리히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듯했지만 도리어 이때부터가 긴 터널의 시작이었다.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 답답했다.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이런 부분은 싫다, 이거는 좋았다, 라는 식으로 누군가는 이야기해줘야 하는
터널의 끝, 그리고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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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2008)을 만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영석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습작으로 만든 단편영화가 전부였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1천만원의 제작비를 ‘투자’받아 강원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찍은 <낮술>은 2008년 서울독립영화제를 시작으로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와 인디포럼 등 여러 영화제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CJ엔터테인먼트 콘텐츠 개발실은 그의 신작 <조난자들>(12월 개봉)을 재능있는 신인 감독을 발굴하는 버터플라이 프로젝트 지원작으로 선정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 날, 이른 아침에 만난 탓에 문을 연 카페가 없어 노영석 감독과 한 식당에 들어가 낮술을 마셨다.
-부산에서 <조난자들>을 본 관객 반응은 어땠나.
=폭발적이었다. (웃음) 그보다 먼저 갔던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도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조감독과 함께 갔는데 우리끼리 그랬다. 영화제 관객의 반응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부산에 갔더니 토론
고립된 공간의 공포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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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서, 영화의전당 근처에서 오가며 만난 모든 사람들이 <족구왕> 얘기를 했다. 영화제 특유의 진중하고 날카로운 작품들 속에서, 청춘의 긍정적인 ‘에네르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이 영화가 보는 이들에게 적잖은 활력소가 되었나보다. 모두가 학점 취득과 취업 준비로 바쁜 대학 교정, “족~구하는 소리하고 앉아 있네”라는 비아냥에도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독수리킥을 날리는 ‘족구왕’ 만섭의 모습이 “누가 뭐래도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우문기 감독의 뚝심과 겹친다.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단편들이 다 전체관람가 영화였다. (웃음) 언젠가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있다. 누가 나에게 <추격자> 시나리오를 주고 감독을 맡으라고 하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사람이 죽고, 보다가 눈 가리게 되는 잔혹한 영화들을 잘 못본다. 심각한 영화도 늘 극장에서 보다가 졸게 되더라.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 영화들이 아니다. 때론 유치하고, 때론 허무해도 보고 나면
전체 관람가 영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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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편의 한국 장편영화 관람, 열아홉 차례 관객과의 대화 진행, 그리고 극장과 극장 사이를 오가며 맞은 생애 최고의 서러운 태풍. 내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8일은 그렇게 남았다. 한달 전부터 점찍어둔 해외영화들은 거의 한편도 보지 못했으며, 그나마 짬을 내어 비디오룸에서 볼 수 있었던 몇편은 화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차라리 중도에 보기를 그만두었고 지인들이 강력 추천한 영화 단 한편을 극장에서 마침내 볼 수 있었으나 심신은 이미 그 어떤 감흥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적어도 내게 올해의 부산국제영화제는 온전히 한국영화를 위한, 한국영화에 의한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열다섯명의 감독들을 만났고 그보다 배는 많은 배우들을 만났고, 그보다 몇 백배는 되는 관객을 만났다. 이제 그 시간의 경험을 여기 풀어놓고자 한다. 내가 본 스무편가량의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와 비전 섹션, 그리고 뉴커런츠 경쟁에 오른 작품들이며, 대부분 부산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들이다
오직 한국영화만을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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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축제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을 것 같다. <씨네21>은 지난 10월12일 폐막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영화들을 돌아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특히 신진 감독들의 처음 혹은 두 번째 장편과 경쟁부문인 뉴커런츠에 소개된 영화들에 주목했다. 그들의 영화가 조만간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8일간 부산에 머물며 올해의 한국영화 상영작들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지켜봤던 남다은 영화평론가에게 에세이를 부탁했고, 그녀는 짐작대로 애정과 응원의 마음이 담긴 장문의 글을 보내왔다. 더불어 영화제를 마무리하자마자 여독을 풀지도 못한 채 <씨네21>의 인터뷰에 응했던 여섯 감독들과의 만남도 전한다. 여기, 한국 영화계의 미래가 있다.
태풍처럼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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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노종면의 뉴스바
YTN 해직 언론인 1호이자 <뉴스타파>의 앵커로 맹활약했던 노종면 기자의 국민TV 데뷔작.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 ‘아침에 듣는 정통 시사프로그램’을 그리워하던 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인기의 비결은 역시 노종면 기자. 그는 방송이 끝난 뒤에도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에 지박령처럼 틀어박혀서 계속 뉴스를 검색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나는 꼼수다> 열풍이 사라진 뒤 시사토크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은 팟캐스트. 특히 총감독 역할을 하는 이작가의 째지는 듯하면서 칼칼한 목소리가 아주 훌륭한 콘텐츠다. 최근 정치 이슈는 물론 현대사와 일제 강점기를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이 특징. 종종 공개방송을 하는데 출연자와 관객의 친밀도가 그 어느 것보다 진하다.
상담
법륜스님 즉문즉설
팟캐스트 속 상담은 리버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많거나 또는 그런
이 MSG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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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하는 거 좋아하세요? 두개 중 하나 골라주세요. 자주 한다. 가끔 한다.” 이 색스러운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만원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으로 듣는 느낌이 어떤 줄 아십니까? 정말 짜릿합니다. 인기 팟캐스트 <원나잇 스탠드>에서 진행자가 마광수 교수를 찾아가 던진 질문입니다. 여기서 뒤로 한다는 것은 후배위가 아니라 애널섹스를 말하는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할 수 있는 팟캐스트. 이 단어는 더이상 생소한 단어가 아닙니다. 아마도 <씨네21>을 즐겨 보시는 독자라면 더욱 자세히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팟캐스트는 일종의 개인인터넷방송국입니다. 십수년 전 인터넷방송이 처음 국내에 소개됐을 때만 해도 개인인터넷방송국이 많았지만 방송용 장비를 갖추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 뒤 아프리카TV처럼 개인인터넷방송국을 가능케 하는 웹사이트가 많이 출현했지만 팟캐스트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의
팟캐스트, 이 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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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그래비티>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주에 중력(gravity)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구에는 중력이 있어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산다. 중력 없는 곳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들이 필요하고 그것의 도움을 받았을 때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게 될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선보인 블록버스터 우주오페라(space opera) <그래비티>는 이와 같은 원초적인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이미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있었고 우주인들의 훈련에 관한 뉴스도 전해지고 있어 전혀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우주복을 입고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6천km 지구 상공에서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는 우주인들이 어떻게 작업을 수행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비티>는 관객도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체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차별화된다. 인류
삶과 죽음의 무한도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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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사랑한 남자>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개인적인 취향과 인간에 대한 관심, 고전에 대한 향수를 반영한 영화이다. 소더버그는 <쇼를 사랑한 남자>에서 자신이 몰두했던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 한다. 미국 엔터테인먼트계의 스타였던 리버라치(마이클 더글러스)와 그의 동성 파트너 스콧 토슨(맷 데이먼)의 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스타의 이면과 사생활’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전통적인 전기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소더버그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기보다 좁고 깊게 들어간다. 리와 스콧이 만난 뒤 약 10년에 집중하면서 이 기간 동안 변화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4가지 국면을 통해 기술하고 있다. 영화의 기원은 마이클 더글러스와 소더버그가 미국과 멕시코 접경지대의 마약 커넥션을 소재로 한 멀티 플롯 드라마 <트래픽>(2000)을 촬영하던 13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1970년대를 풍미한 게이 피아니스트 리버라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소더버그는 특정
컴온, 미스터 쇼맨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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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의 성공에 이어 <철인들>의 대종상 작품상 수상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나는 다음해 10여개 영화사의 연출 의뢰를 모두 사양한 채 당시 여러 감독들의 경합이 붙어 있던 소설 <적도의 꽃>을 세 번째 작품으로 하고 싶었다. 충무로 지하 다방에서 원작자인 최인호 형을 만나 작품에 대한 내 열정을 보이자 형은 “네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허락할 수밖에 없다”며 나와 의기투합하였다. 도시의 아파트 문화로 확산된 소통 부재와 익명성의 시대에 미스터 M이라는 남자의 편집증적 사랑의 파멸을 그린 <적도의 꽃>은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그해 흥행 1위를 하였고 잇따라 형과 함께 <고래사냥>을 만들었다. 실어증에 걸린 창녀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아웃사이더들의 여정을 그린 이 로드무비는 당시 군사정권의 억압적 시대 분위기가 무거운 공기처럼 깔려 있던 답답한 시대에 많은 젊은이들의 해방구가 되어주었다. 1985년 나
영화를 이해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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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껄껄.” “허허허.”
중년 이후의 최인호의 웃음소리와 잘 어울리는 의성어다.
“호호호.”
예나 지금이나 최인호의 아내 황정숙 여사의 웃음소리.
“하하.” 배창호의 웃음은 이렇다.
“에~헤헤헤.” 안성기의 애매한 웃음소리.
“히히힛.” 만년 소년 김수철의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
“씩.” 쪼개는 건 이명세의 썩은 미소다.
“낄낄낄.” 젊었을 때, 최인호는 이렇게 웃으며 200자 원고지를 메웠다. 대화를 많이 집어넣으면 원고지 칸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아도 원고료를 쉽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9월25일 고인이 된 최인호와 영별의 조문이 있었던 강남성모병원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서울고등학교 동창들, 특히 16회 동기들, 그리고 문인들, 영화인들 등등 평소에 그를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두 왔다가 돌아갔다.
유독 김수철, 안성기, 배창호, 이명세가 첫날부터 마지막 미사까지 4일을 계속 영결식장을 지켰다. 평소 최인호를 좋아하기보다 집착했
천재 인호야! 세상이 너무 거칠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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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별이 졌다. 지난 9월25일, 최인호 작가가 세상을 떴다. 2008년 5월 침샘암이 발병해 5년간 투병 생활을 하다 향년 68살로 별세했다. 과거 최인호, 이장호, 배창호라는 이름의 삼각형은 197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어떤 상징과도 같았다. 한국 문학사상 최초로 10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인 최인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돼 1974년 개봉 당시 46만 관객을 동원한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 작품이었다. 이후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85), 곽지균 감독의 <겨울나그네>(1986) 등 그의 작품이 영화화된 것은 무려 20편에 이른다. 특히 ‘최인호-배창호-안성기-장미희’로 이어지는 황금 조합은 198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언제나 한국 대중문화의 중
시대와 호흡한 청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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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 이후 10년 만의 작품이다. 워낙 개성 강한 데뷔작을 직접 쓰고 연출했었기에 <화이>의 어떤 점에 매료됐는지 궁금하다.
=뭐랄까, 시나리오가 정말 술술 읽혔다. ‘여기에 뭔가 있다’는 느낌이 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연출하겠다고 하면 안된다. 그것을 세련되고 강렬하게 표현하려면 감독 입장에서 굵게 만져지는 맥이 있어야 한다. 그로부터 한달 동안 고민했고, 만져지는 맥이 분명하게 있었다. 석태는 도대체 왜 그랬는가, 화이는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나 스스로 찾고 싶었다. <화이>를 고쳐 쓰고 촬영하고 최종적으로 내놓기까지는 바로 그걸 찾기 위한 시간들이었다.
-<지구를 지켜라!>와 <화이> 사이에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다. 굳이 두 영화 사이의 개인적인차이점을 찾는다면 그것이다.
=맞다. 그 사이에 가족이 생겼고, 그것이 <화이>를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웃음
사람이 많이 죽는다고 더 슬픈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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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2005)의 선우(이병헌)가 강 사장(김영철)에게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라고 물었던 것처럼,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의 화이(여진구)도 아버지(라 불리는) 석태(김윤석)에게 묻는다. “아버지, 왜 절 키우신 거예요?” 자신의 과거도 모른 채 여러 명의 아버지들에게 길러진 화이는, 어느 순간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지구를 지켜라!>(2003)로부터 무려 10년, 장준환 감독은 그로부터 멀고도 또한 가까이 다시 한번 ‘소년’의 혹독한 성장담을 그린다. 애타게 신작을 기다려온 <지구를 지켜라!>의 컬트 팬들과 새로운 젊은 관객 사이에서, 그리고 장르적 컨벤션과 변칙 사이에서 장준환 감독은 자신의 위치를 어디쯤 두었던 것일까. ‘화이를 지켜라!’라는 마음으로 긴 시간 <화이>를 매만져온 장준환 감독을 만나 물었다.
데뷔작의 눈부신 재능은 오랜 세
장준환표 성장영화 버전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