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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세살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 소프는 타락한 천사라고 불리곤 했다. 거대한 성기를 드러낸 흑인 남자들, 음부처럼 피어난 꽃잎, 불경한 사도마조히즘의 관계. 천사의 곱슬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은 그런 사진들을 찍으며 스스로 악마에 가깝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도 그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패티 스미스, 스물한살에 뉴욕 길바닥에서 그를 만나 한때 연인이자 평생 친구로 남은 그녀는 달랐다. 그를 위한 추모곡에서 그녀는 노래했다. “작은 에메랄드 빛 영혼/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작은 에메랄드 빛 새/ 작별 인사를 해야만 할까.”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힘을 얻을 때까지 서로 떠나지 않기로 맹세했던 어린 영혼들. 그 하나를 먼저 보내고 20년이 지나 스미스는 <저스트 키즈>를 썼다. 그 시절 스미스는 뮤지션이 아니었고 메이플소프는 사진작가가 아니었다. 서점에서 일하며 시를 쓰던 스미스 곁에서 메이플소프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과 소품을 모아 콜라
당신이 그 수줍은 포르노그래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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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 없는 문장은 길을 잃는다. 어딘가 응시하고 있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문장이 처한 위치가 어둠뿐인 암전 상태의 극장이어도 좋고 끝이 없이 빙빙 돌아가는 미로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주어는 종종 생략된다. 책은 목차가 없으며 소제목 없는 몇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단락 사이의 여백이 주네와 자코메티가 함께 보낸 시간을 가늠케 할 뿐이다. 책 속의 문장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작품은 조각가이자 화가인 자코메티의 것이다. 여기 있는 문장이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그’로 지칭되는 자코메티다. 그외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조각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모델들인 작가의 아내 아네트와 동생 디에고, 그리고 자코메티에 관한 글을 남긴 샤르트르 등이다.
눈을 감고 더듬어보는 조각상
이 책에서 ‘우리는’이라는 주어는 이렇게 처음
우리는 빛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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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뒤러의 모습은 자화상으로 기억될 것 같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이라는 세부 장르를 개척한 뒤러답게, 그의 자화상은 여러 편 있지만, 특히 1500년에 발표한 세칭 ‘뮌헨판’(뮌헨 고미술관 소장) <자화상>이 가장 유명하다. 긴 머리, 정면을 쳐다보는 형형한 눈빛, 여기서 뿜어나오는 엄숙한 분위기는 28살 뒤러가 누구를 가슴에 품고 있는지 한눈에 알게 했다. 그것은 청년 예수로, 말하자면 뒤러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전야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삶을 혁신의 초상인 예수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다시 태어나다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도상해석학(Iconology) 연구로 유명한 독일의 미술학자이다. 도상(Icon)의 의미에 대한 풍부한 이해, 더 나아가 도상의 역사적 관계를 읽는 도상해석학은 지금도 서양미술의 수수께끼를 푸는 비밀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짧게 말해, 도상학(Iconography)이 ‘무엇’에 대한 질문이라면, 도상해석학은 ‘왜’에 대한 탐구이다.
책을 덮고, 자화상을 그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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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은 넘쳐나지만 정작 예술을 제대로 접하긴 어려운 시대다. 쉽게 소비되고 쉽게 잊히는 사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새삼스레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해보고자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책들을 살펴봤다. 미술, 음악, 사진, 문학, 건축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영감과 아름다움을 전한 위대한 예술가들은 삶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예술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한 알브레히트 뒤러, 실존과 고뇌를 새겨 넣은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도발적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 악성 루드비히 반 베토벤,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 오노레드 발자크, 건축의 성자 안토니 가우디, 6인의 예술가들이 남긴, 그들의 작품 이상으로 아름다운 삶이 여기에 있다.
모두가 예술이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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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29일 CGV강변점에 인디영화관이 처음 문을 열었다. 2008년, 인디영화관은 무비꼴라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10년 사이 상영관은 19개관 2019석으로 늘었다. <우아한 거짓말> <한공주> <마녀> 등에 투자•배급도 했다. 무비꼴라쥬가 독립 영화계와 어떻게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에 지원하지 않았다.
=큰 기업인 CGV가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것이 적합한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또 독립예술영화 의무상영일수(219일)를 자발적으로 지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원하지 않았다.
-2004년 CGV인디영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08년부터 무비꼴라쥬로 명칭을 변경했다. ‘독립’이 아닌 ‘다양성’에 더 방점을 찍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름이다.
=처음엔 말 그대로 ‘인디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라는 의미로 네이밍을 했다. 이후 브랜드 공모를 통해 무비꼴라쥬라는 이름이
‘다양한’ 영화에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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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스토리가 북악산과 인왕산을 병풍처럼 두른 서촌 한복판에 둥지를 튼 것이 1998년. 조용하기만 했던 이곳이 맛집이 즐비한 ‘뜨는 동네’가 되기 직전이었을 10년 전의 독립영화와 10년 전의 인디스토리에 대해, 곽용수 대표에게 물었다. “피부에 와닿는 어려움은 없었던 때다. 최초의 제작작품이자 조영각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팔월의 일요일들>을 준비했다, 망했지만. (웃음)” 제작•배급작을 돌아봄에 있어 ‘망했지만’은 필수 어휘목록 첫 번째. 그래서인지 10년 전 개봉했던 <송환>을 떠올리는 목소리가 유난히 밝다. “극장 관객이 2만명 이상 들었고 공동체 상영 시도도 성공적이었다. 계속 단편 배급을 하다가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로 장편 배급을 시작한 게 2000년이었는데, <송환>은 인디스토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람과 위안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대기업의 지원 없으면 안정적 운영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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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부터 탓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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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말이 눈앞의 실체마저 흐릴 때가 있다. 다양성, 예술, 저예산영화와 독립영화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독립영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두가 독립영화를 말하지만 그럴수록 의문은 더해진다. 독립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꾸준히 고민해온 변성찬 평론가를 만나 독립영화비평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물었다.
-거두절미하고 묻겠다.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답하면 독립영화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영화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출범할 때부터 논의되어왔던 문제인데 소극적으로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 정의했다. 적극적으로 의미를 확대하자면 다른 무엇보다 정서적 독립이 중요하다. 예산, 제작방식, 배급경로는 다양할 수 있지만 만드는 쪽의 태도가 분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제작 여건만 놓고 본다면 전국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다 독립영화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그들 모두가 독립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핵심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각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 그 긴장관계를 놓
너무 많이 아는 굳은 머리를 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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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선긋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만드는 사람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 아닐까.” 독립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우문에 대한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조영각 집행위원장의 현답이다. 다양성, 저예산, 예술영화 등 여러 용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편의상 자의적으로 용어를 섞어 쓰는 사이 감내해야 하는 첫 번째 불편은 독립영화의 테두리가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하도 여기저기 ‘독립’ 두 글자를 필요할 때만 가져다 쓰다 보니 진짜 독립영화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서독제를 가보면 된다. 사실 영화제만큼 확실하고 선명한 노선을 드러내는 집단도 드물다. 한해의 경향부터 장기적인 방향까지 쌓여온 시간들이 기록으로 증명된다. 오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겹쳐만들어진 서독제는 그 단단한 결기로 뭉치고 연대하며 독립영화의 어제와 오늘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11월27일부터 12월5일까지 9일간 개최
‘어떻게 만들까’에서 ‘어떻게 보여줄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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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고 있는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식당을 차리기 전까지는 떠돌이 요리사로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 내 레시피를 선보이는 것이 뭐 어떤가요. 먹는 사람이 맛있다면 된 거 아닐까요. 전 떠돌이 요리사로 지내는 게 즐거워요.” <은하해방전선>(2007),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0), <도약선생>(2010)으로 독특한 윤성호식 세계관을 만들어낸 윤성호 감독의 이후 행보는 다소 뜻밖이었다. 영화감독이 시트콤(<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을 연출하겠다고 했을 때 세상은 조금 시끌시끌했다. 그 뒤 윤성호 감독은 차례로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2013), <썸남썸녀>(2014), <출중한 여자>(2014)를 연출했고, 대중은 그가 무엇을 하겠다고 말하든 더이상 의아해하지 않게 됐다. 윤성호식 “레시피”가 대중의 입맛에 맞은 모양이다.
-그런데 왜 “떠돌이 요리사”를 자처하나.
=2000년대 영화계는 나쁘
영화계라는 생태계에서 건강히 생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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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이 ‘독립영화의 조상을 찾아서’인가? 이런 인터뷰를 하려면 머리 희끗한 그런 사람을 찾아가야지 이렇게 젊은 날 찾아오면 어떡하나. 내가 비록 머리는 하얗지만 이거 조금 버텼다고 벌써부터 원로 취급이라니 억울하다.” 포장이 거창하다며 투덜댔지만, 이송희일 감독이 지금껏 밟아온 길이 한국의 독립극영화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독립영화 창작자 인터뷰를 하는데 “왜 또” 자신을 찾아왔느냐는 타박 아닌 타박의 한편엔 쓸쓸함도 묻어 있다. “외롭고 지겹다. 처음 나와 같이 영화 시작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독립영화를 떠났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건 결국 자기증명을 놓아버린 게 아니겠나. 젊은 감독들은 많지만 남아 있는 또래 감독이 이젠 거의 없다.” 그의 말대로 십여년 이상 독립영화 한길만을 오롯이 걸어온 창작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송희일 감독이 소속돼 있던 영화창작집단 ‘젊은영화’의 구성원들 중에서도 이송희일 감독이 가장 늦게 영화 연출을 시
어떻게 관객을 모을까, 마케팅에 눈뜰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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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당의 2014년 3월 집계에 따르면, 지금 한국에서 ‘독립영화를 상영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스크린 수는 모두 60개다. 이 통계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을 받는 영화관과 영진위의 지원은 받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예술영화관이라고 인식되는 영화관들(대표적으로 씨네큐브), CGV의 다양성영화관 무비꼴라쥬, 롯데시네마의 예술영화관 아르떼, 그리고 독립영화전용관을 모두 합한 것이다(집계 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다. 영진위의 지원을 받는 영화관만 집계하면 25개이며, 최근 결과가 발표된 2014년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을 기준으로 20개다). 그렇다면 이 스크린들에서 한국 독립영화가 상영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독립영화를 상영할 가능성이 있는 스크린’은 2013년 말 기준으로 전체 스크린 2184개의 2.7%다. 한국영화의무상영일수가 20%인 것을 감안해보면, 독립영화가 상영될 가능성은 전체 스크린 수 대비 0.5% 이하인 셈이다. 독립영화 관
0.5%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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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선 한 뭉텅이의 명함이 쏟아졌고, 입에선 속사포 랩과 다를 바 없는 대구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명함을 뭘로 드릴까요? 영화계 명함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국숫집 명함 하나 드릴까? 만복국수가 현업입니다. 그들(아마도 박근혜 정부)이 ‘시장으로 가라’ 해서 시장으로 갔고, 잘 벌고 있습니다.” 국숫집 사장님으로부터 명함을 받고서야 독립과 가난, 두 단어가 꼭 쌍으로 붙어다니라는 법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대구 동성아트홀, 예술영화전용관 지원사업에서 탈락하다
“망하니까 (날) 찾네.” 면목 없지만 그의 말이 맞다. 남태우 대구동성아트홀 프로그래머는 최근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나는 친박이다-시즌3> 32회 ‘문성근의 민주집권 대망론’ 편에서, 대구 동성아트홀에서 6개월째 월급을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형편이 걱정됐다. 악덕 극장주가 돈을 떼먹어서가 아니다. 동성아트홀이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2014년 예술영화전용관 운영 지원 사업’
문화로 시작해 문화로 끝내는 방법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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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일,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 심사 결과가 나왔다. 독립영화인들의 오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힘빠지는 결과였다. 지원 사업에서 탈락한 대구 동성아트홀의 남태우 프로그래머에게 먼저 괜찮냐고 물었다. 그는 지난 4월부터 월급을 못 받고 있다고 했다. <송환> <워낭소리>를 배급한 인디스토리의 곽용수 대표,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서울독립영화제의 조영각 집행위원장, 20년간 독립영화감독으로 살아온 이송희일 감독에게도 차례로 안부를 물었다.독립영화라는 땅이 더 비옥해질 수 있도록 10년 이상 힘써온 4인의 독립영화인들에게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곧 현재의 독립영화가 짊어지고 있는 근심과 걱정일 것이다. 물론 깨달음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독립영화 영화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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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연출 전공으로 동국대 영상대학원에서는 이론을 전공했다. 단편영화를 대여섯편 찍었고 <인사동 스캔들>(2009) 제작 초기 연출부 막내로 들어가 일하던 중 제작이 무산되어 나온 경험도 있다. 영화는 한참 뒤 새로운 스탭을 꾸리면서 완성됐다. <씨네21> 영화평론상은 2011년, 2012년 최종 본선까지 올랐다. 수상자 발표 심사평에도 내 이름이 언급됐었기에 좌절이 컸다. (웃음) 작품비평과 이론비평 모두 미국영화로 결정하는 게 전략상(?)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솔직하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써보자고 생각했다.
-연극 연출가로도 데뷔했다고.
=지난해 연극 <거짓말 게임>을 연출하며 데뷔했는데, 처음에는 희곡만 쓰고자 했다가 제작사인 ‘블루 바이씨클’ 대표이기도 한 김준삼 교수가 ‘하는 김에 연출까지 할래?’ 권유하셨다. (웃음)
-그들 영화와 감독을 선택한 구체적인 이유는 뭔
“직관을 합리로 풀어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