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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에 대한 경탄은 감독과 배우가 조용히 공들인 서사 바깥의 시간에 맞춰진다. 이는 감독이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새삼스럽다. 링클레이터는 이미 배우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작업 방식으로 유명하다. 허구의 인물인 메이슨과 배우 엘라 콜트레인의 성장은 영화의 상영과 동시에 일어나며 상영이 끝난 뒤 남는 것은 한편의 다큐멘터리다. 픽션과 메이킹 필름을 동시에 보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보이후드>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한데, 영화 외적인 것이 영화 내적인 것을 초과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이후드>의 내적 서사와 외적 서사의 관계를 좀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링클레이터는 매년 15분 분량을 촬영했다. 15분이라는 시간은 1년에 해당하는 365일을 프레임 수인 24프레임으로 나눈 숫자다. 그러므로 <보이후드>의 15분이라는 시간은 축약된 1년이다. 이런 제작 방식은 매
<보이후드> 어떻게 소년은 영화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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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슨의 얼굴은 정직하다. <보이후드>에서 그의 얼굴은 개인의 역사가 기록되는 영화적 공간이다. <보이후드>에 대한 지지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 속 얼굴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한편의 영화에서 배우의 현재 모습과 노인이 된 모습을 동시에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대신 슈퍼히어로 시리즈가 멀티플렉스를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감독이 아니라) 영화 산업과의 공고한 관계 속에서 (늙지 않을 뿐 아니라) 불멸하는 캐릭터를 목도하게 되었다. 히스 레저의 죽음 이후에도 조커의 영화는 계속된다. 이곳에서 대체 불가능한 것은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캐릭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여전히 얼굴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홀리모터스> <맵 투 더 스타> <언더 더 스킨>은 동시대 얼굴에 관한 서로 다른 세개의 영화적 사유이다.
<홀리모터스>에서 오스카(드니 라방)의 연기는 출근 전과 퇴근 후에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마주한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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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회를 맞이했다. 때마다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비평의 위기’라는 풍문 속에서도 참 잘 버텨왔다. 1996년 1회 영화평론상을 시작으로 매년 한두명씩의 새로운 목소리를 만났고 새삼 되돌아보니 적지 않은 수의 평론가를 배출했다. 미지와의 대면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며 비평의 장을 개척해온, 평론가들의 비타협적인 기질에 우선 감사를 보낸다. <씨네21>을 중심으로 활약했고, 활약 중인 여러 평론가들은, 우리는 물론 한국영화계에도 소중한 선물이다. 이제 새로운 20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올해의 당선자들을 소개한다. <씨네21>이 제공하는 것은 평론가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과 소통의 장이다. 젊은 평론가들의 열정과 열망으로 이 공간이 더욱 활기를 띨 것을 기대하며 그들의 첫걸음을 전한다.
심사평
먼저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올해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우수상을 각각 수상한 최민과 이우호는 모두 가명이었다. 알고보니 그 주인공은 바로
진심 어린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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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은 김성제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2013년 6월에 촬영을 마쳤으니 개봉(6월24일)까지는 꼬박 2년이 걸렸다. 그간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그중 가장 크게 회자된 건 대략 이렇다. 영화 속 철거민 투쟁이 마치 2009년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고 이에 부담을 느낀 당시의 배급사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개봉을 차일피일 미루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다. 영화의 운명은 알 길 없고, 풍문만 무성했던 <소수의견>은 얼마 전 시네마서비스로 배급사를 옮기며 개봉까지 급물살을 탔다. 개봉 전부터 혹독한 감독 데뷔전을 치르며 속이 새까맣게 탔을 김성제 감독을 만났다. 그의 말을 통해 <소수의견>이 어떤 영화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개봉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축하한다.
=도시 재개발을 다룬 이 영화가 꼭 재개발의 기나긴 투쟁사를 닮은 것 같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웃음) 무엇보다도 관객이 재밌게 봐주면 좋겠다.
“‘염치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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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제 감독의 데뷔작 <소수의견>(2015)이 촬영을 끝낸 지 2년 만에 정식 개봉(6월24일)한다.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 <소수의견>을 원작으로 하는 법정 드라마다. 영화는 철거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서울 북아현동 재개발 현장에서 두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려는 변호사들의 진득한 법정 공방이 이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소수의견>을 미리 살펴봤다. 그리고 김성제 감독을 직접 만나 개봉을 앞둔 심정과 영화의 안팎을 둘러싼 이야기에 대해 들어봤다.
<소수의견>은 픽션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를 두고 굳이 픽션이라고 재차 말하는 건, <소수의견>에 대한 보다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소수의견>은 개봉 전부터 2009년 1월에 실제로 벌어진 ‘용산참사’에 바탕한 영화, 보다 나아가서는 실화에 근거한 영화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시감을 느낀다면 당신도 이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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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택 감독의 12번째 장편영화 <극비수사>는 감독의 전작들과 여러모로 다르다. 그가 형사영화라는 장르에 도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장동건(<친구>), 정우성(<똥개>), 주진모(<사랑>), 권상우(<통증>), 김우빈(<친구2>) 같은 스타성을 앞세운 남자배우들을 조련해왔다면 김윤석, 유해진, 장영남, 송영창, 이정은 등 이른바 연기 선수들로 출연진을 꾸린 것도 새롭다. 기자시사회에서 첫 공개된 뒤 반응이 좋았던 까닭일까.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곽경택 감독은 인터뷰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자시사회에서 첫 공개됐다. 반응이 좋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착한 영화 한편 만들려고 출발한 작품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들은 유괴다, 뭐다 하면 뭘 자르고, 부수고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 영화에는 잔인한 장면이 없어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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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점으로 되돌아가 정공법으로 출발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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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택 감독의 신작 <극비수사>(6월18일 개봉)는 1978년 부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초등학생 유괴사건을 소재로 했다. 형사 공길용(김윤석)과 도사 김중산(유해진)이 힘을 합쳐 아이를 33일 만에 되찾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두 사람이 사건을 해결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곽경택 감독이 두 사람의 숨겨진 사연을 듣고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자극적이거나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긴장감을 부지런히 쌓아올리는 형사영화이면서도 범인을 잡는 데서 오는 장르적 쾌감이 없는 독특한 형사영화다. <친구2>(2013)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뒤, 형사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곽경택 감독과의 인터뷰도 덧붙였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부산 사는 초등학생 2학년 성은주양이다. 불량식품 쫄쫄이를 좋아하는 예쁘장한
1970년대를 제대로 재현해낸 어느 형사영화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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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적인 여성 캐릭터로 손꼽히는 <에이리언>의 리플리, <터미네이터2>의 사라 코너와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는 너무 많이 봐온 과거의 이름이다. 지금의 관객에게 보다 친숙할, 2000년대의 외국영화가 선보인, 가장 주목할 만한 여성 캐릭터 20선을 소개한다.
<판타스틱 소녀백서>(2000) 이니드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세상을 바꿔라’라는 표어는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이니드(도라 버치)와 가장 멀리 떨어진 말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 가지는 것들이 영 하찮고 의미없게 느껴지는 소녀 이니드는, 기꺼이 세상의 규칙을 거부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다. 세상에 대한 수많은 불평과 저항으로 가득한 이 10대 소녀의 일대기는 미국 주류 문화에 대한 귀엽고도 의미심장한 저항이라 할 만하다. 자동차와 치어리더로 대변되던 미국 하이틴 청춘에 대한 묘사에 ‘빅엿’을 날리는 작품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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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사라 코너는 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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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버틀러에 의하면, 여성은 늘 영화 제작에 참여해왔다. 하지만 여성영화에 대한 사유는 영화가 발명된 지 70여년이 지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이때는 페미니즘이 영화를 비롯한 문화 전반과 여성이 처한 삶의 조건 전면에 영향을 끼친 시기였다. 존 버거는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1972)에서 보고 보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남자는 행동하고 여자는 출현한다. 남자는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보이는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여자와 여자 자신 사이의 관계까지 결정한다. 그녀 자신에게도 여성의 감찰관은 남성이다. 즉 여성은 감시 당한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자신을 대상으로,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바꾼다”라고 말이다. 초기의 페미니즘 영화이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그들의 목표는 남성적 시각으로 구성된 영상을 분석함으로써 영화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성차별
페미니즘영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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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은 이 영화의 마지막 세 장면이다. 일영(김고은)이 우희(김혜수)를 찌르는 마지막 장면은 보스 자리를 이어받아 새로운 ‘엄마’로 거듭나는 일종의 계승 의식이다. 이 장면은 피 칠갑을 하고 일영의 목에 칼을 들이대던 첫 장면과 정확히 조우한다. 한데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영화가 친절하게 뒤에 세 장면을 덧붙인다. 하나, 밀입국한 중국 여자로부터 ‘워 하이즈’라는 말이 ‘내 아이입니다’라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어서 우희가 남긴 코인로커에서 입양 서류를 확인하다. 마지막으로 우희를 찔러 죽인 그 자리에서 향을 피우며 망자를 애도한다.
<차이나타운>은 ‘엄마’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출발하는 영화다. “모성애는 생각지 않고 연기했다”는 김혜수의 말처럼 이 영화는 기존 누아르영화의 공식과 뼈대를 답습하되 두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익숙한 모성과 여성성을 역전시키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클라이맥
여성은 증발하고 환상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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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가장 자주, 널리 쓰인 한해로 기록될 것이다. 일례로 올봄 SNS를 강타했던 주요 해시태그 중 하나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문장이었다. 지난 1월 이슬람국가(IS•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에 가입하겠다며 터키로 떠난 것으로 알려진 김모군이 실종되기 전 트위터에 남긴 글,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라는 말은 인터넷상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의 불씨를 지폈고, 한 패션지에 기고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해 “무뇌아적인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라고 일갈한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글은 SNS상에서 페미니스트 선언 운동을 촉발했다. 초여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전하다. 6월10일 현재 352만 관객을 동원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페미니즘영화인가에 대한 토론이 인터넷상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지난 6월
혐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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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올해 상반기 SNS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해시태그 중 하나였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둘러싼 페미니즘 논쟁은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상반기 영화계에서 오가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이슈 중 하나다.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올해만큼이나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된 적은 없었다. 궁금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페미니즘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또 한국영화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 얼마나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을까. 이어질 글은 페미니즘과 관련된 질문들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질문의 방향에 대한 길잡이에 가까울 거다. ‘페미니즘’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은 지금 막,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영화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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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거창한 이야기는 잘 안 쓰게 되던가.
=<회오리 바람> <잠 못 드는 밤>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준비하기 전에 늘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드라마의 힘도 있고, 장르적인 요소도 강한 작품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준비하던 영화들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서 ‘미완의 프로젝트’ 폴더에 들어 있던 작품들이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됐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도 나라국제영화제로부터 갑자기 제안받아 시작한 프로젝트다. 준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무리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만들려고 했다. 그게 지금까지 만든 세 영화들의 공통된 작업 목표이기도 했다.
-원래 준비하던 것은 어떤 작품들이었나.
=박민규 작가의 팬인데, <회오리 바람> 전엔 박민규의 소설 <핑퐁>을 영화화하려 했다. 언제가 됐건 <핑퐁>은 무조건 내가 영화로 만들 생각이다. 영화로 만들기엔
“이 땅의 삶, 질감을 영화에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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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나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었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었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길 위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란 점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1995)와 비교되곤 한다. <비포 선라이즈>만큼 주인공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신비롭고 로맨틱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로맨스영화로 한정짓고 보지 말자. 이 영화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니까. 장건재 감독은 전작 <회오리 바람>(2009), <잠 못 드는 밤>(2012)보다 더욱 간결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완성했다. 장건재라는 이름은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통해 확실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
장건재 감독은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공기를 담아내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엔 거창한 담론, 굴곡진 서사, 스펙터클한 연출, 스타배우가 없다. 화려하지 않은 고백처럼 그의 영화는 꾸밈이 없어서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8월의 밤, 우연의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