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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구현할 수 없는 아이디어라면 과감하게 버린다.” 언젠가 스탠리 큐브릭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디어를 마음먹은 대로 완벽하게 영화로 구현할 수 없다면, 단 1~2%의 결함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큐브릭의 1968년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예로 들어보자. CG 기술이 태동하던 시절, 세트와 열악한 시각효과 기술만으로 인류의 우주탐험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내야 했던 큐브릭은 자신이 구현할 수 있는 것과 구현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일례로 모노리스의 존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노리스는 고도의 발전된 존재로서 인류의 진화를 돕는 중요한 역할로 암시되지만, 제작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인해 그 활약상이 다소 단조로운 방식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풍부한 영화적 자원과 기술이 뒷받침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는 수십년 전 큐브릭의 영화가 재현하지 못했던 우주의 모습과 다양한 존재들을 보다 수월하
빅어처를 만드는 고집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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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정통한 이과생이 아니라면, <인터스텔라>는 한번의 관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우주 탐험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이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알기 쉬운 말로 전달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 행간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진다. 뇌과학자이자 블랙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정재승 박사에게 <인터스텔라>를 보기 전 미리 알면 좋을 네 가지 상식들에 대해 들었다.
1 웜홀
웜홀은 <인터스텔라>에서 시공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일종의 통로다. 정재승 박사에 따르면, 흔히 학계에서 말하는 웜홀은 멀리 떨어진 두 공간에 중력을 가해 공간을 휘어지게 만든 다음,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통로를 뜻한다. 웜홀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영화에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킵 손의 논문은 그 가능성을 물리학적으로 증명했다고 한다. <인터스
물리학을 포기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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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럽게 봉인되어 있던 블랙홀의 입구가 드디어 열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터스텔라>에 대한 국내외 반응이 뜨겁다. 사실 <인터스텔라>는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영화였다. <메멘토>와 <배트맨> 3부작, <인셉션>의 연이은 성공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어떤 기대감과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신이 스탠리 큐브릭과 리들리 스콧의 영향 아래 놓인 감독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아왔던 놀란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에이리언>이라는 SF 장르의 클래식을 구축한 선배들의 뒤를 따라 마침내 우주를 무대로 한 새로운 오리지널 SF영화를 만든다는 점 또한 팬들의 마음을 한껏 달아오르게 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비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미국의 유명 물리학자 킵 손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제작진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한 점들에 대해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소식은
과학과 영화의 웜홀을 통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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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우주 폭풍이 한국에 당도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가 11월6일 개봉한다. 놀란의 첫 우주영화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킵 손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은 이 영화는, 놀란의 전작들이 그랬듯 수많은 상징과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언론시사회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인터스텔라>의 면모를 짚어보고, 다각도로 읽어보는 특집을 준비했다. 영화를 보기 전 알아두면 좋을 과학적 정보와 LA에서 열린 <인터스텔라> 제작진과의 만남도 함께 전한다.
놀란호에 탑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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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무한궤도 <그대에게> MBC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 무한궤도 1집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발표
1990
1집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발표
1991
2집 ≪Myself≫ 발표
1992
N.EX.T 결성 / N.EX.T 1집 ≪Home≫ 발표
1993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O.S.T 발표
1994
N.EX.T 2집 ≪The Return of N.EX.T Part1: The Being≫ 발표
1995
N.EX.T 3집 ≪The Return of N.EX.T Part2: World≫ 발표
1996
라디오 <FM 음악도시> 진행 / <정글스토리> O.S.T 발표 / 윤상과 노땐스 (NODANCE) 결성 / ≪골든힛트≫ 발표
1997
N.EX.T 4집 ≪Lazenca-A Space Rock Opera≫ 발표
1998
3집 ≪Crom’s Techno Works≫ 발표
1999
신해철이 걸어온 음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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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기억하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갑자기 네가 생각났다. 기적 같은 시간의 도약이 단숨에 일어났어. 19년 전, 흐린 겨울날이었어. 코가 빨개지도록 몹시 추운 날이었지. 나는 너를 따라 잠실 어딘가에서 열린 N.EX.T 콘서트에 갔어. 1995년 송년 콘서트였지. 아마 네가 표를 샀을 거야. 콘서트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줄 서서 기다리는데, 하마터면 동상에 걸릴 뻔했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나는 너를 약간 원망하기까지 했어. 이런 고생을 하면서 신해철의 콘서트에 날 데려온 이유는 뭘까? 그러나 내색하진 않았어. 그냥, 너하고 콘서트 보러 갔다는 사실이 즐거웠으니까.
드디어 관객이 입장하기 시작하고, 객석에는 기대와 설렘이 넘실댔어. 깜깜했어. 녹색의 팔찌들이 내는 반딧불 같은 빛이 춤을 추었어. 그 흔들림 때문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지. 신해철이 등장하자 너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의 비명이 소름 끼치게 귀를 찔렀어. 나는 깜짝 놀랐어. 그 함성과 열망의 중심에 신해철이 있었고,
우리의 어느 시절에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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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보니 고인을 만난 것은 열일곱해 전의 일이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에서 김덕수 선생의 음악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김덕수와 친구들≫이라는 앨범을 기획 중이었다. 여러 훌륭한 뮤지션들이 이 앨범에 참여했다. 신해철은 <난장부기>라는 곡을 헌정했다.
스튜디오에 그가 처음 오기로 한 날, 스탭과 엔지니어들은 살짝 긴장해 있었다. 레코딩 스튜디오는 유명인들이 허름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슬리퍼를 끌며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공간이기는 하나, 신해철은 당대의 슈퍼스타였을 뿐 아니라 음악하는 사람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뮤지션을 기다리는 스탭의 것이라기보다는, 록스타를 맞이하는 팬들의 마음에 더 가까웠을 것 같다. 이윽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고, 간단한 소개가 끝난 후 편한 모습으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지금은 널리 알려진 그 ‘입담’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가 사석에서 얼마나 격의 없이 따뜻한 사람인지, ‘거침없는 독설가’라는 이미지 뒤의 진짜
늘 한발 앞서 전력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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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더이상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이리 답답한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네 문화에서 고인에 대한 소소한 추억을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며 서로의 마음을 도닥이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하지만 특별한 사람에겐 그를 기억하는 팬들과 지인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런 시간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사실 난 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힘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릴까 했다. 남들도 알지만 자세히는 모르는 그 시작의 순간에 대해. 바로 <고스트스테이션>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이다.
2001년 3월 SBS 라디오 봄 개편을 앞두고 신해철과 나는 여의도 모 빌딩 1층 커피숍에서 만났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DJ와 PD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벼움과 허무맹랑함으로 키득거리며 구성을 짜봤다. 큰 틀은 이랬다. 우선 반말로 하자. 그리고 욕도 하자. 비방용 멘트, 브랜드명도 마음대로 말하자. 물론 전략은 필요했다. 공중파인 SBS 라디오는 비
어떤 사심도 없는 당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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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7일, 음악인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마흔여섯의 생. 그를 사랑했고 그의 음악을 아꼈던 이들에겐 너무 갑작스럽고 이른 죽음이었다.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를 부르며 음악이라는 궤도에 올라선 신해철은 솔로 활동과 밴드 N.EX.T 활동을 오가며 음악적 실험을 쉼 없이 해왔다. 마성의 저음과 자유로운 세계관, 거침없는 직설화법의 소유자로서 라디오 DJ로도 크게 사랑받았던 신해철.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라던 그대에게, 내 마음 깊은 곳의 그대에게 세명의 필자가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나에게 쓰는 편지이자 그대에게 쓰는 편지. 라디오 <고스트스테이션>을 함께했던 고민석 전 PD, 김홍집 영화음악감독, 음악가이기도 한 성기완 시인의 글을 여기 띄운다.
편히 잠드소서 우리의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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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과 간호사>로 멋진 메이저 상업영화 데뷔를 꿈꾸는 한 에로비디오 감독이 있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프로덕션 대표는 어차피 영화화가 힘들어 보이니 시나리오라도 팔라고 유혹하고, 유학파 감독을 더 선호하는 투자배급사는 그의 오랜 경력을 하찮게 생각한다. 심지어 옛 학교 선배는 그의 시나리오를 갈취해 멋지게 입봉한 상태. 그렇게 메인스트림과 인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생계를 위해 일단 에로비디오 시장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던 <레드카펫>의 에로비디오 감독 정우의 이야기는 실제 박범수 감독의 삶에서 왔다. ‘재미’와 ‘진정성’ 사이에서 행복한 결합을 꿈꾼 박범수 감독을 만나, 에로비디오 시장의 황제에서 상업영화 시장의 새내기 감독이 되기까지 그 오랜 이야기를 들었다.
<공공의 젖>과 <해준대>, 그리고 <타이탕닉>과 <싸보이지만 괜찮아>. <레드카펫>에는 극장가의 ‘천만영화’와 작가영화를 가리지
방송국 담당자님, 명절에 제 영화 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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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부터 상영까지 모든 단계에서 외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이 영화는 결국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와 언론인 이상호의 진심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이종인 대표가 워낙 여론의 난타를 당했고, 나 역시 이른바 영리에 눈멀어 팽목항을 찾은 업자의 소개자가 된 형국이었기에 사람들이 온전히 우리의 마음을 알아줄까 하는 걱정이 컸다.” 그들의 진정성은 영화 속 두 남자의 눈물이 잘 말해준다. 한편으로 이상호 감독은 “영화 제작을 방해받았다는 사실보다도 가치가 전도되는 상황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사실과 진실을 찾아 헤매는 일이 업이라 소설과 영화는 잘 보게 되지 않는다던 이상호 감독은 생각보다 더 뜨거운 가슴을 지닌 기자였다.
-팽목항에 있을 당시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몸 상태는 좀 어떤가.
=화병이다. 인터넷 매체(<GO발뉴스>) 하면서 잠 못 자고 1인 다역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뇌가 정지하더라. 지난해 11월에 처
“세월호 얘기 그만하라는 사람이야말로 영화 꼭 봐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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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몰락’하고 있는 우리의 현재를 보여준 사건이다. 사건 이후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한 ‘국가’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방해하는 ‘권력’이 그려낸 또렷한 사실은 이 ‘몰락’이 단지 4월16일에만 멈춰 있지 않은 현재진행형 ‘악몽’임을 또한 확인시킨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반복되어오던 불안한 질문의 끝이 결국 이런 파국으로 실현되다니, 이 공동체에 대한 깊은 절망에 한동안 ‘세월’이라는 단어도 쉽게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든 이 ‘악몽’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절망의 실체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됐다. 특히나 기울어진 배가 바닷속으로 거칠게 빨려들어가고 결국 애절하게 떠 있던 배의 끝부분까지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실시간 HD 방송으로 목도한 사람들의 충격은 저 차가운 TV화면과는 다른 영상, 즉 ‘진실’에 근접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절실한 기대로 이어졌다. <다이빙벨>은 그렇게 ‘악몽’과도 같은 격한 현실이 빚어낸 ‘세월호
더 오래, 더 깊이 기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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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벨>은 세월호 참사 발생 후 보름 동안 있었던, ‘다이빙벨’ 투입과 관련된 구체적인 정황과 논란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GO발뉴스>의 이상호 기자와 알파잠수기술공사의 이종인 대표가 ‘다이빙벨’ 투입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과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그 과정을 철저하게 두 당사자(이상호 기자와 이종인 대표)의 시선과 입장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굳이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척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와 수사는 지극히 논쟁적이다. 그것을 주관적이거나 일방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관성과 감정은 당시 현장에서 어떤 넘을 수 없는 벽과 마주하여 절망하고 분노했던 사람들의 그것이고, 지금까지 세월호 유가족들이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것이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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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6일부터 분노심과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온갖 통각이 날을 세워 편안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더러 편안한 날이 찾아왔고 더러 친구들과 낄낄대며 가벼운 수다를 떠는 날이 찾아왔다. 더러 4월16일을 잊게 되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느냐는 진심도, 반드시 기억하리란 각오도, 시간이 약이 된다는 진리에 무릎을 꿇어갔고 이에 대해 굴욕감이 찾아왔다. 그런 때에 <다이빙벨>을 보았다. 통각이 다시 날을 세워, 분노와 수치와 죄책을 회복할 수 있기를 다만 기대했다. 영화가 끝나자 박수조차 시원하게 칠 수 없었다. 통각이 일제히 다시 솟구쳐올랐고 더 세차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박수는 뜨겁지 않았지만 눈물은 뜨거웠다. 통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망각이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이런 영화가 우리 앞에 나타나주어서, 고마웠다.
영화의 의도일 리는 없겠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다시 한번 깨달아야 했다. 해경과
슬픔으로 분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