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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이하 예술극장)이 문을 열었다. 개관 페스티벌을 위해 준비된 33편의 작품 중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하고 이들의 작품을 만나러 광주로 갔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과 차이밍량의 <당나라 승려>, 두 작품의 감상기와 함께 감독들의 인터뷰를 전한다. 예술극장의 이모저모도 짧게 알아봤다. 영화가 무엇인지, 나아가 예술이 무엇인지 새삼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시간,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현주소를 만나고 싶다면 광주로 가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 말은 유리와 같아 다룰수록 조심스럽다. 조금만 소홀히 해도 금이 가고, 깨진 후엔 날카로운 파편에 다치기 쉽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의 말미에 언급한 이 유명한 명제는 세계와 실제로 대응하지 않는 언어의 한계를 짚어낸다. 체험하지 않으면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음에도 막연히 추상화시켜 규정하는 사이 의미가 손상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동시대 작가를 만나자, 광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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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은 몇달 전 논현동에 그림픽처스의 사무실을 오픈했다. 새 영화 <밀정>의 프로덕션을 진행하기 위한 1차 세팅이다. <화양연화>의 o.s.t가 흐르는 아담한 작업실에는 <밀정>의 크랭크인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빼곡했다. 영화 속 밀정 이정출의 스타일과 여러 복장을 한 배우 송강호의 프로필 사진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책상 위에는 오디션에 참여한 배우들의 사진이 한가득 놓여 있다. 한달 후인 10월22일 크랭크인을 앞두었기에 스케줄 보드가 하루도 비는 날이 없다. 중국 상하이와 한국의 헌팅 작업을 마치고 지금은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강행군 탓에 한층 수척해진 얼굴이다. 김지운 감독이 이렇게 한국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건 <악마를 보았다>(2010)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밀정>은 1920년대 말 독립군 의열단과 일본인 밀정 사이에서 벌어지는 누아르물. 다른 프로젝트들에 앞서 그가 지금 <밀정>에
차가운 공기를 입은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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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루멧 감독은 저서 <영화 만들기>(Making Movies)에서 “신은 감독에게 매일 아침 소피아 로렌을 보는 기쁨 대신 믹싱이라는 지루한 벌을 주었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홍상수 감독이라면 “하늘은 감독에게 영화라는 환상적 작업을 허락한 대신 인터뷰라는 수난을 주었다”고 고쳐 쓰지 않을까? 물론 과장 섞은 우스개였지만, 홍상수 감독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질문의 답을 말이나 글의 형식으로 받을 때마다 나는 “조금 전까지는 완전했었는데”라고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함춘수처럼) 유감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을 그려보곤 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에는 불완전한 대로의 쓸모가 있으리라. 현재 홍상수 감독은 올여름 서울에서 촬영한 제목 미정의 신작을 편집 중이다.
-예고편이 특별히 재미있습니다. 보통 영화를 거꾸로 돌리는 것은 모종의 ‘역전’ 효과를 주는 것이 목적인데 예고편의 함춘수(정재영)와 윤희정(김민희)은 원래 영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맑고 개운한 감정을
지금, 여기, 내 앞에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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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 알았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러 간 관객은 극장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떠오르는 제목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를 보고 내심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약 56분 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표제로 영화가 새롭게 시작할 때 다시 놀라는 동시에 납득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하! 우리의 머리는 부쩍 분주해지고 감각은 고양된다.‘지금’은 언제고 ‘그때’는 언제지? 뭐가 다르지? 뭐가 틀린 거지? 오랫동안 그래왔듯 홍상수 감독은 이 개념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못박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연을 포함해 생동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고정할 수 없는 기운을 끌어들여 영화를 방어한다. 그리하여 ‘비대칭 데칼코마니’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모퉁이에는 따뜻한 감동이 기다리고 있다.
홍상수 영화의 숙련된 관객이라 자부하는 당신은 무엇을 보고 듣게 될지 얼마간 ‘알고’ 객석에 앉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날 것이고,
生活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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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1일부터 10일까지 열린다. 전세계 75개국 304편의 영화가 초청된 올해 영화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20’이라는 숫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게 된다. 특히 올해의 부산에선 세계 각지에서 당도한 매혹의 영화들과 더불어 영화제의 스무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다양한 기획전과 행사들이 마련되어 있다. 지난 1020호 특집 기사로 소개한 ‘아시아영화 100’선 중 1위부터 10위까지의 작품이 상영될 예정이며 60년대 한국영화의 숨은 걸작들을 알아보는 회고전과 ‘내가 사랑한 프랑스영화’ 특별전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지난 1회부터 부산영화제의 변화하는 모습을 충실히 담아왔던 <씨네21> 또한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의 전당 비프힐 1층에서 영화제의 지난 19년을 추억하는 사진전을 열 예정이니 10월 초 부산행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길. 더불어 올해도 어김없이 부산에서의 관람 여정을 도울 30편의 추천작을 엄선했다. 여섯개 구획으
부산영화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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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이게 더 코미디 같은데?” <서부전선>의 제작과정을 회상하던 세 사람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현장이, 오늘의 대담이 얼마나 코미디였는지. 이건 결코 욕이 아니다. 천성일 감독의 말처럼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사는 게 다 코미디”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웃을 일이 더 많이 필요하니까. <서부전선>은 드라마 <추노>(2010)의 각본가이자 영화 <7급 공무원>(2009),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 2014) 등의 시나리오작가로 유명한 ‘이야기꾼’ 천성일의 감독 데뷔작이다. 한국전쟁 종전을 3일 앞둔 1953년, 남한의 늙은 병사 남복(설경구)과 북한의 소년 병사 영광(여진구)의 이야기인 <서부전선>은 코미디를 경유해 전쟁의 비극에 다다르는 작품. 멋부리지 않았으나 멋있는 대사,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두 배우의 연기 케미스트리, 몸개그부터 엇박의 상황 코미디까지 관객의
그 탱크 좀 짠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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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집과 아기 포대기를 동시에 둘러멘 남자들. <탐정: 더 비기닝>의 주인공 남자들은 가사노동에 지친 아내를 위해 그리고 친구의 우정과 자아실현 등을 위해 가사와 수사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우는 아기 달래랴, 도망치는 살인자 뒤쫓으랴, 잘하는 거 하나만 집중해도 어려울 텐데, <쩨쩨한 로맨스>(2010)로 데뷔한 김정훈 감독은 코미디와 스릴러를 접목시킨 독특한 분위기의 버디무비를 들고 돌아왔다. 물론 섣부른 선입견은 금물. 제작자인 정종훈 대표도 “로맨틱 코미디 쓰던 김 감독이 이렇게 잘 쓸지 몰랐다”며 입술이 닳도록 칭찬 중이다. 살인 누명을 쓴 친구를 위해 사건 수사에 뛰어든 탐정 강대만(권상우)과 베테랑 형사 노태수(성동일)가 서로의 이득을 위해 잠시 동맹을 맺는데 개성 강한 캐릭터의 부조화가 웃음을 유발한다. 공교롭게도 모두 의젓한 가장이 되어 만난 배우 성동일과 권상우는 스타로서의 매력에 꼭 맞는 탐정과 형사 캐릭터를 함께 만났다. 길고 긴 시리즈도
알차게 찍고, 알차게 먹고, 또 뭉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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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사도가 뒤주에 갇힌 8일과 과거 플래시백을 정교하게 교차시키며 정치 이전 부자관계로 엮인 영조와 사도의 관계를 조명한다. 이미 익숙한 소재지만 이 과정을 통해 다른 시각과 관점을 제공해준다. 치열한 영화 뒤에는 더 치열한 고민과 노력들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제작자 및 작가 3인의 땀과 눈물, 그리고 술은 <사도>를 탄생하게 해준 일등 공신이다. 사료들을 뒤지고 잠도 없이 난상토론을 벌이며 <사도>를 견인해낸 주인공은 이준익 감독과 15년의 세월을 함께해온 타이거픽쳐스의 오승현 대표, 같은 제작사의 전 대표였던 조철현 작가, 그리고 <사도>로 ‘이준익 사단’에 새로이 합류한 이송원 작가다. <황산벌>(2003)로 기존 사극의 전형을 깨뜨리고 <왕의 남자>(2005)의 천만 관객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과 <평양성>으로 흥행의 고배를 맛보
벼랑에서 떨어졌다 함께 지옥불로 뛰어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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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쌍천만영화를 흥행시킨 2015년 여름 극장가의 열기도 어느새 가을바람에 식어가는 중이다. 바로 이어서 또 한번 전국 극장가에 기운을 불어넣을 추석 시즌이 다가오는 가운데, 여름 극장가 열기를 뛰어넘기 위해 준비 중인 영화들이 베일을 벗었다. 바로 3편의 한국영화, <사도> <탐정: 더 비기닝> <서부전선>이 그것이다. 이들 영화는 장르와 소재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탄탄한 연기력과 티켓 파워를 지닌 남자배우 투톱 체제의 영화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꼼꼼한 역사 고증을 거쳐 전 국민이 아는 시대의 비극을 영화화한 이준익 감독과 시리즈로 만들어도 손색없을 만큼 탄탄한 캐릭터 콤비를 탄생시킨 김정훈 감독, 각본가 출신으로서 자신의 첫 연출작임에도 다소 진중한 전쟁을 소재로 영화화한 천성일 감독까지 누구 하나 뻔한 답안이 보이는 쉬운 길을 걸어가려 하지 않았다. 과연 올해 추석 관객은 어떤 영화의 열정에 먼저 화답하게 될까? 영화만큼이나 전혀 다른 색깔을
추석영화 대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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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Straight Outta Compton, 이하 <SOC>)의 기세가 놀랍다. 198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며 시대를 뒤흔든 힙합 그룹 N.W.A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현재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 중이다. 영화에 대한 평 역시 좋은 편이다. ‘로튼토마토’의 신선함 지수가 90%라면 참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호평 뒤에는 ‘드라마’의 힘이 있다. <SOC>는 정공법으로 충실하게 밀어붙인 영화다. N.W.A 멤버 각자의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그들이 모이게 되는 과정, 그룹 내에서의 역할 분담, 성공의 요인, 명곡의 탄생 동기, 갈등과 위기, 끝내 무산된 재결합까지 사실에 근거해 밀도 높게 담아냈다. 힙합을 모르거나 심지어 싫어하더라도 매력적으로 느끼게끔.
물론 어쩔 수 없이 ‘미화’ 논란도 있기는 하다. 닥터 드레가 1991년에 여성 힙합 저널리스트 디반즈를 폭행한 사실, 또 닥터 드
“우리는 컴턴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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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_<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을 두고 도끼는 “힙합 그 자체”란 평도 했는데, 다른 힙합영화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재밌었나.
더 콰이엇_영화적으로 짜임새가 좋은 것 같다. 초반에 복선도 잘 깔아두었고. 음악영화로서 스케일이 큰 것도 강점이 되는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해서 많이 보는 편인데, 지금껏 본 힙합영화 중에서 공연 장면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김봉현_부귀영화도 좋아하시고. (웃음)
더 콰이엇_부귀영화 좋아한다.
도끼_영천영화도 좋아하고.
더 콰이엇_자주 가는 고깃집 이름이다. 이래저래 영화 마니아다.
도끼_처음 영화 봤을 때 울컥한 장면이 있었는데, DJ 일을 하고 50달러를 벌어온 닥터 드레한테 엄마가 그런 푼돈 벌어서 어떻게 살 거냐며 잔소리를 한다. 나도 어릴 때 비슷한 얘길 들었다. 드렁큰 타이거 음악에 참여해서 70만원을 벌어왔는데, 엄마가 70만원을 크게 생각 안 하셨다. 그래서 그
진짜 힙합은 진짜 힙합대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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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E,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를 주축 멤버로 한 N.W.A(Niggaz With Attitude). 1986년에 결성돼 1991년에 해체된 올드스쿨 힙합 그룹 N.W.A의 이야기를 그린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의 미국 내 흥행 성적이 의미심장하다(3주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힙합은 이제 더이상 미국 게토 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거대하고 강력한 문화로서 대중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에도 힙합이 깊숙이 침투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봉현은 말한다. “도끼의 음악은 멜로디컬하지도 않고 ‘뽕끼’도 없다. 어떤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멜론에서 1위를 한다. 먹방이 콘텐츠가 된 시대, 이제 대중은 래퍼들의 자기자랑도 하나의 콘텐츠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젊은 세대가 힙합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헬조선’이란 표현도 생겨났듯, 그 어느 때보다도 젊은 세대가 힘든 시대다. 그런
THIS IS 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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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이야기를 풀되 영조, 사도, 정조 삼대의 이야기로 영화화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궁금하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 처음에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조철현 작가가 묻더라. ‘정조가 영화, 문화, 학계에서 재론될 때마다 사도는 늘 정조를 이야기하기 위한 대상으로서만 말해왔다. 온전히 사도를 주체로 그린 적이 있었나.’ 그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은 개인의 내면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증명돼야 한다. 아버지 영조로 인해 생긴 원인과 결과,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사도와 영조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설명해보고 싶었다. 헤겔의 변증법적 정반합(正反合)을 적용시키려는 의지도 있었다. 영조로부터 시작됐으니 그가 정, 그 반작용인 사도가 반, 정조가 합이다. 영조가 업을 쌓았으니 사도가 덕을 베풀고 정조가 그 복을 받는 거다.
-사도를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건 왜인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는 인
“<사도>가 텍스트로 온전하게 전달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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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개봉 9월16일)를 들고 이준익 감독이 돌아왔다.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갈등, 이어지는 사도의 죽음, 그리고 왕이 된 사도의 아들 정조까지. 무려 삼대에 걸친 30여년의 시간을 125분의 러닝타임 안으로 운반해왔다. 언어로 유희하며 역사의 이면을 들춰냈던 <황산벌>(2003)과 <평양성>(2010), 신명나는 마당극에 광대를 뛰놀게 했던 <왕의 남자>(2005)와 비교해봐도 <사도>는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 가운데서도 가장 묵직한 대설(大設)이다. 유희적 인간에 대한 탐구를 줄기차게 해오던 감독이 구중궁궐 왕족의 세계로,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비극의 역사로 시선을 옮긴 것이다. 그러니 이준익 감독의 <사도>가 궁금해질 수밖에. 감독과 그의 오래된 영화적 동지들인 <사도>의 시나리오작가 조철현, 이송원, 오승현의 말을 빌려 <사도>에 대한 짧은 글을 전한다
이유를 따지는 대신 정서를 공유하는 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