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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불현듯 찾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변화는 충분히 숙성된 욕구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변화를 열망하는 환경이 갖추어졌을 때 적절한 물꼬를 터주는 첫걸음이 중요하다. 최근 극장과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다큐멘터리도 전통적인 개념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인천다큐멘터리포트는 최근 다큐멘터리 시장의 변화를 보여주는 결과물이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시도다. 아시아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마켓을 기치로 내걸고 공공지원과 투자, 구매의 결합을 시도하는 이 새로운 개념의 마켓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다큐멘터리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한다. 22편의 국내외 다큐멘터리가 프로젝트를 공개하고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줄 파트너와 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중 한국 다큐멘터리 피칭에서 공개되는 10작품은 향후 몇년간 회자될 한국 다큐멘터리의 미래이자 현재를 움직이는 동력이라 할 만하다. 강상우 감독의 <김군>,
Documentary abou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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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를 보고 나서 <웨이킹 라이프>를 다시 봤다. <웨이킹 라이프>는 <보이후드>의 최초의 시작점 2002년으로부터 몇년 전에 이미 만들어진 영화지만 <보이후드>의 엔딩에서 새로 시작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웨이킹 라이프>의 회상 신에 <보이후드>의 처음처럼 어린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반갑게도 주인공 소년과 대화를 나누는 소녀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딸 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나온다(로렐라이는 <보이후드>에서 메이슨의 누나로 출연, 12년의 성장사를 같이 보여줬다). 그녀는 영화 시작에서 <웨이킹 라이프>의 주인공과 미래를 점찍는 게임을 하고 주인공 소년에게 “꿈은 운명이다”라는 점괘를 준다. 그리고 소년은 고단한 10대의 성장사를 담은 <보이후드>의 시기를 지나며 수많은 상실을 겪고 <보이후드>의 엔딩이자 <웨이킹 라이프>의 시작점
여행자의 시점에서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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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포(before)여야만 했을까? ‘비포’ 시리즈로 불리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다시 보고 든 의문이다. 텍스트를 재독한 결과가 제목에 대한 단상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앞서, 한 가지 전제부터 밝혀야겠다. 어떤가 하면 나는 두번의 반복은 우연일 수 있지만, 세번 이상의 반복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그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예컨대 영화 제목에 ‘~전에’라는 뜻의 비포가 거듭해서 쓰이고 있다면, 특정한 전치사가 내포한 시제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포를 고수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감독처럼 보인다. 그는 끝을 출발점으로, 시작을 종결점에 두고 시간을 사유한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제목에 비포 대신 애프터(after)가 사용되어, 이 영화들은 어쩌면 우리에게 애프터 시리즈로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가령 비포 시리즈의 첫 번째
그는 비포를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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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릿속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이름과 가장 가까이 붙어다니는 몇개의 단어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랑, 시간, 성장 그리고 변화(혹은 이 단어들을 조합한 변주들). 축을 달리해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스러운 대사들, 엔딩 크레딧을 빼곡하게 채운 음악들, 그리고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배우들도 떠오른다. 그의 최근작 <보이후드>를 보고 있으면 실제로 링클레이터와 함께 머릿속을 떠다니는 저 ‘아이템’들이 그를 읽어내는 ‘만능열쇠’란 생각을 굳히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잠깐만, 1991년 <슬래커>로 시작한 링클레이터의 필모그래피 속엔 이 만능열쇠가 잘 맞지 않는, 그래서 슬쩍 뒤로 밀쳐놓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이 ‘당혹스러움’의 가장 끝에 놓인 것이 바로 몇편의 코미디영화들이다. ‘내 인생의 링클레이터’란 이름으로 이야기하긴 머쓱하지만, ‘조심스러운 추천작’ 정도로는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들이랄까?
시간 순서 말고 당혹스러움의 순서대로 보자면
웃픈 남자들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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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해도 아이들 앞에선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엄마, 알코올에 중독돼 항상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새 남편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엄마. <보이후드>의 주인공 메이슨(엘라 콜트레인)과 그의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별 탈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도 그들 옆에 항상 씩씩한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올리비아를 연기한 패트리샤 아퀘트의 주름은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늘었다. <보이후드>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처음 작업한 패트리샤 아퀘트를 지난 2월, 베를린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12년 전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들은 훌륭했다. ‘이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라면 정말 신날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웃음)”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12년 전이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앞으로 12년 동안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계속 일을 구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그가 12년 동안 매
“성장한 두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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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브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연기 연출을 둘러싼 반복되는 오해 중 하나였다. 그의 영화 속 모든 장면들은 일상의 한순간을 솜씨 좋게 베어낸 듯 감쪽같았기에 어디까지가 연출이고 실제인지 관객은 궁금했다. 그러나 링클레이터로 말하자면, “나쁜 연기는 나쁜 시나리오의 다른 말”이라고 믿는 감독이다. “느슨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꼼꼼하게 구축되어 있을 뿐이다. 임기응변을 통해 정확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는 그의 촘촘한 영화 설계도에 애드리브를 위한 자리는 없다. 느슨함을 연출하는 치밀한 구성의 레시피를 완성하는 것은 “첫째는 시나리오고 둘째는 리허설”.
배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대사를 완성함으로써 캐릭터를 넘어 영화 전체의 주인이 되도록 독려하는 것은 <슬래커>부터 이어진 그의 연기 연출법이고, ‘비포’ 시리즈를 거치면서 이는 그의 영화론으로 발전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어떻게 셀린느를 기차에서 내리게 할 것인가 등을 두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
그들 모두가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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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 텍사스를 포위한 산불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1천여채가 넘는 주택이 전소한 가운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집도 화마를 피해갈 수 없었다. 수많은 시나리오와 제작노트들이 한줌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무엇보다 <보이후드>에 대한 몇몇 기록들과 앞으로의 진행에 대한 아이디어가 날아간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을 것이다. 6살 소년이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 12년의 이야기를 매년 15분씩 카메라에 담기로 했던 무모한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우려했던 대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친 것처럼 보였다. 일정 부분 방향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질문에 그러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이런 게 인생이지.”
링클레이터가 영화의 리얼리티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
<보이후드>는 얼핏 인생의 불확정성을 담아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12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건 감독의 야심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다. 안정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상
당신도 <보이후드>의 일부가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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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목격한다.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기록이자 그 시절에 대한 당신과 나의 기억이며 한 영화가 클래식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12년이란 시간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보이후드>는 단순히 걸작이란 말 안에 가두기 힘든 영화다. 그저 상찬하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와 관객, 나와 시간 사이의 공명을 채 설명할 수 없다. 제작과정을 제외하곤 얼핏 여타 성장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나이 들어가는 경이로운 체험의 끝에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사유를 발견한다. 불가능해 보였던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뚝심에 경의를 표하며, 전혀 다르게 체험되는 영화의 발견에 감사를 보내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에게 말을 걸어본다. 당신의 지금은 어디입니까. 이제 영화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언제나 지금 여기 우리 함께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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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영광은 <디판>에 돌아갔다. 프랑스영화의 오늘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인 자크 오디아르는 매번 놀라운 영화를 선보여왔고 이번에도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상이 반드시 권위를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칸영화제의 주인공이라면 충분히 되돌아볼 만하다. 다만 <예언자>(2009)의 충격과 <러스트 앤 본>(2012)의 생생함과 비교한다면 <디판>은 다소 어정쩡해 보인다. 물론 <디판>은 충분히 아름다운 영화다. 내전을 피해 망명한 이민자들의 불안한 내면에 대한 접근도 치밀하고 자크 오디아르 특유의 스타일과 인장들도 그 파괴력이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이 영화에 마냥 동의하긴 어려웠다. “칸의 자국영화 사랑이 함량 미달의 프랑스영화까지 경쟁부문에 포함시켰다”는 일부 외신의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디판>의 수상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
걸작과 범작 그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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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11:00
여행 첫날은 미신주의자가 된다. 온갖 사소한 일을 ‘조짐’으로 받아들인다. 출발은 덜컹거렸다. 객차 짐칸에는 내 슈트케이스를 둘 자리가 없었고 새 신발의 밑창은 너무 딱딱했다. 기차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리는 동안 <보이후드>를 다시 보면 제격일 것 같아 챙겨왔으나 KTX가 영화보다 15분 먼저 종착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퍼트리샤 아퀘트가 “난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단다”라고 흐느끼는데 영화를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나는 매우 호사스런 처지다. 제일 중요한 업무가 아홉명의 관객과 더불어 내가 선택한 여섯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시네마 투게더’ 프로그램이니 미안스러울 지경이다. 함께 관람할 영화를 고르고 보니 거장감독 작품 3편과 데뷔작 2편, 그리고 노장과 신인이 공동 연출한 작품 하나다. 프로그램의 첫 영화는 내일 오후 1시 해운대에서 상영되는 아이슬란드 화가 다큐멘터리 <지평선의 화가 게오르그 구드나손
부산 극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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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
2013 <사냥> 연출
2009 <목구멍의 가시> 연출
2008 <태백, 잉걸의 땅> 연출
2007 <가족 초상화> 연출
2003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연출부
2013년 영도대교 재개통 직후 ‘점바치골목 활성화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영도 점바치골목도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땅에 살던 이들은 하나둘 영도를 떠났다. 가게터 주위엔 철거 작업용 철조망이 둘러졌고, 조선소가 있던 자리는 녹슬어 폐허가 되어갔다. 주인 없는 빈집엔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더 앞선 3년6개월 전부터 “영도의 곳곳을 알리고 싶어” 영도를 찍기 시작했던 김영조 감독은 제작비 조달이 힘에 부쳐 슬슬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점바치골목 활성화사업이 시행되었고, 감독은 영도가 더 많은 모습을 잃기 전 카메라를 고쳐잡았다. 작은 땅 영도에마저 휘몰아친 재개발 광풍. 그
영도의 기운을 육화한 사람들을 담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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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흔들리는 물결> 연출
2001 <와니와 준하> 연출부
“시나리오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쭉쭉 가는구나 싶었는데 영화 한편 만드는 데 7년이나 걸릴 줄이야. (웃음)” <흔들리는 물결> 시나리오는 김진도 감독이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썼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나리오 전공 졸업작품이다. 당시 그는 마감날을 한달도 채 남겨두지 않았는데 아이템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두 가지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하나는 병원 방사선과 기사가 방사선 사진을 보는 이미지였고, 또 하나는 그 남자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미지였다. “방사선 하면 죽음이 떠오르지 않나. 이 두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쓰면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룰 수 있겠다 싶었다. 지도 교수였던 이창동 감독님께서도 그전에 냈던 아이템 모두 ‘가짜 같다’고 하시다가 ‘이 얘기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청년필름의 이선미 프로듀서가 이 아이템을 마음에
“써놓은 장편 시나리오가 11편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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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스틸 플라워> 각본, 연출
2014 <들꽃> 각본, 연출
2013 <찡찡 막막> 촬영
2009 <뭘 또 그렇게까지> 제작부
스틸 플라워. 박석영 감독의 전작 <들꽃>을 봤다면 그 제목의 의미를 ‘여전히, 꽃’(Still Flower)이라 짐작하겠지만 <스틸 플라워>는 ‘강철 같은, 꽃’ (Steel Flower)이다. 메마른 땅 위에 홀로 선 세 소녀의 이야기 <들꽃>의 막내로 출연한 정하담이 홀로서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들꽃>의 하담이 곧 <스틸 플라워>의 하담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만일 같은 인물이라 가정한다면, 하담은 <들꽃>의 언니들로부터 약간의 시간을 두고 버려진 아이다. 자기 손으로는 수습하기도 힘든 무겁고 번거로운 짐을 안고 하담은 홀로 부산의 어느 바다에 당도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지, 짐의 무게에 휘둘리는 건지 <스틸 플라워>의 오
“영화는 저 스스로 만들어지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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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공부의 나라>
2013 <내일도 꼭, 엉클 조>
2012 <미스터 선거왕>
2009 <다큐프라임-삼동초등학교 180일간의 기록>
2008 <전설의 대물 돗돔을 찾아서>
2007 <영혼의 퍼포먼스 굿> 외
“<공부의 나라>로 국내 매체와 갖는 첫 번째 인터뷰다. 관심 가져줘서 정말 고맙다.” 최우영 감독이 웃으면서 꺼낸 첫마디가 꽤 아프게 들린다. 극영화에 비해 다큐멘터리가 관심을 덜 받아온 게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다큐멘터리 한편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이가 들인 시간과 애정의 크기를 짐작해본다면 쉽게 넘기기 어려운 말이다. <공부의 나라>는 최우영 감독이 햇수로 5년을 쏟아부어 완성한 프로젝트다. 영화는 고3 수험생들이 수능 준비로 정신없는 전 과정을 2년에 걸쳐 따라가 수능 당일과 그 이후 아이들의 모습까지도 담았다. ‘Reach for the SKY’라는 영화의 영문 제목이
아이들의 감정을 따라 입시 제도를 돌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