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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는 메인스트림에서 주로 ‘한없이 후진 남성’ , 줄여서 ‘한남’을 연기한다. <붉은 달 푸른 해>의 아동을 학대하는 개장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회장 아들, <모범택시>의 불법 동영상을 유통하는 웹하드 회사 회장, <해피니스>에서 아파트 주민들을 모두 전염병에 걸리게 하려고 계략을 짜는 피부과 의사. 하나같이 현실에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극중 인물은 욕할지언정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날것의 연기를 하는 배우의 등장에 호기심을 가졌고, 그가 유명한 미술가이자 방준석 음악감독과 ‘방백’, 장영규 음악감독과 ‘어어부 프로젝트’로 활동하기도 한 음악가(에 더해 90년대 말 <씨네21>에서 김봉석과 듀나의 고정칼럼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를 직접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했다.-편집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백현진이 왜 연기를 하지? 근데 왜 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백현진, 완전 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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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배경에 테이블 하나 덩그러니 놓인 여느 시사 토크쇼 세트장.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에 짬이 나자 검찰 출신 보수야당 의원 차정원(배해선)이 상대 패널에게만 들리도록 배우자 학력 위조 문제를 꼬집는다. “전 진즉에 남편 분리수거했더니 이런 악재 터질 일이 이젠 없네요. 이런 걸 견제구라고, 몸속 깊숙이 찔러만 본 거니까 너무 쫄진 마시고. 내 직접 맞히진 않을게.” 차정원은 상대 패널의 가족 문제를 짚은 뒤 호탕하게 웃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당황한 상대는 녹화가 시작되자 차정원의 페이스에 말리기 시작한다. 차정원은 고수다. 상대방의 공격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기선 제압에 성공하는 정치 9단이다. 법정 싸움을 이기고 오느라 적잖이 세월을 까먹고 어느새 당내에선 비주류가 됐지만 ‘비주류 감성’만은 없다. 이길 수 있다는 배짱 ‘위닝 멘털리티’를 지녔기 때문이다. 배해선은 스스로의 캐릭터를 “자기 힘으로 성장하고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정치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요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배해선, 노력파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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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구경이>는 배우 조현철에게 오랜 기간 익숙한 작품이었다. “성초이 작가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라 몇년 전부터 열심히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라며 오경수를 소개했다. 대구 출신에 맨박스의 틀을 깨고 나오는 캐릭터라고, 드라마 <마인드헌터>의 FBI 요원 홀든처럼 연기하면 된다고 했다. 홀든 이야기가 미끼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웃음)” 조현철이 연기한 오경수는 NT생명 조사B팀에 속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여기며 나제희 팀장(곽선영)을 무시하고 B팀에서 실적을 쌓아 A팀으로 이적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구경이(이영애), 산타(백성철)와 함께 팀을 꾸린 뒤로 B팀에 잔류하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아직 맨박스에 갇힌 설정이라 여성인 나제희와 구경이에게 경계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틀이 깨지며 오히려 두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런 변
'구경이' 조현철, 가장 보통의 특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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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통틀어도 나보다 선배 편인 사람 없을걸.” 분노와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구경이(이영애)에게 토로하는 나제희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상대를 얼마나 믿고 지지해야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구경이>의 나제희는 NT생명의 조사B팀 팀장으로, 경찰 시절 같이 일한 선배 구경이에게 함께 보험 사기로 의심되는 사건들을 조사할 것을 제안하는 인물이다. “성초이 작가가 전한 두 페이지 분량의 제희의 전사가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제희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두루뭉술하게 살아왔다. 그러다 경찰 시절 뭐든 명확한 구경이 선배를 만나면서 그를 동경하고 전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이다. 제희의 분노도 구경이를 정말 아끼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나이 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게 버거워 구경이를 배신하고 용 국장(김해숙)의 편에 서기도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돌아와 구경이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곽선영은 나제희의 텍스트를 면밀히 분석해
'구경이' 곽선영, 딱 좋은 거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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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특정 순간은 배우의 얼굴로 기억되곤 한다. 익숙한 배우가 전에 없던 새로운 에너지를 내비칠 때, 혹은 잘 모르던 배우의 빛나는 눈빛을 발견할 때 더욱 그렇다. 2021년은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배우들이 많은 해였다. <씨네21>은 2021년 하반기 화제에 오른 드라마 <구경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지옥> 중 6명의 신스틸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맡은 캐릭터에 관해, 그리고 각자의 연기 철학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 <구경이>의 곽선영과 조현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배해선, 백현진, <지옥>의 김도윤, 김신록의 인터뷰를 전한다.
Scene Stealer. 마음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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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라는 뜻이다. <절해고도>의 인물들은 먼 바다의 외로운 섬처럼 살아간다. “기본적으로 관계의 시작 또한 절해고도 같은 사람들의 만남이 아닐까.” <절해고도>는 40대의 조각가이자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윤철(박종환)이 19살 딸 지나(이연),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영지(강경헌)와 관계 맺는 과정을 차분한 호흡으로 따라가는 영화다. 조각가라고는 하나 하고 싶은 예술만 할 상황은 되지 못하는 윤철은 자신을 닮아 미술에 재능을 보이지만 학교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다 결국은 속세를 떠나 출가하기로 결정한 딸 지나를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세계의 오지를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영지를 만나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관계를 통한 성찰. 김미영 감독이 <절해고도>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내 모습을 나는 제대로 직면하고 있나?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
길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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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지지난해, 오성호 감독의 ‘그 겨울’에서 시작됐다. “건설 노동 현장에서 작업하다 어금니가 깨졌다. 치과 갈 생각에 속상해하며 집에 가는데 그날따라 배달 라이더의 오토바이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더라. 그때 돈 없는 청년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겨울, 나는>은 연인인 경학(권다함)과 혜진(권소현)의 관계를 다룬다. 공무원 수험생인 경학이 엄마의 빚을 갚기 위해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와중에 혜진이 취업에 성공하면서 두 사람은 점점 다른 길을 걷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 왓챠상, 올해의 배우상(권다함)을 수상한 <그 겨울, 나는>은 겨울의 문턱에 열린 서독제에서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났다.
영화에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시험 준비를 하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물들의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오성호 감독은 “배달 라이더 업체들을 찾아가 족발에 술 한잔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공무원 수험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한 타인과의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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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생인 진영(이설)은 어머니와 가까운 반면 아버지와는 소원하다.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어머니가 사라진다면 이 가족은 어떻게 될까. <흐르다>는 어머니의 공백 이후로 불거진 진영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부녀 관계는 김현정 감독이 오랜 시간 염두에 둔 주제였다. 샤워를 한 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 문득, 김현정 감독은 ‘이 상황이 부녀 이야기의 적절한 시작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흐르다>는 진영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며 진영과 아버지의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암시한다.
진영은 성실한 가운데 어딘가 무기력한 인상이다. 오랜 취업 준비로 지친 기색이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인물의 감정을 절제하는 김현정 감독의 연출 또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어머니의 죽음은 감정을 가장 고조시켜 보여줄 법한 사건임에도 영화상에선 장례식과 주변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 “진영과 가족이
불안과 결핍을 영화 곳곳에 세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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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독제 개막작 <스프린터>는 육상 100m 단거리선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스포츠영화다. 영화는 국가대표 선발전의 출발선에 나란히 선 세 선수의 이야기를 매끄럽게 모자이크해 그들 각자의 녹록지 않은 처지를 보여준다. 30대의 현수(박성일)는 한때 한국 신기록을 두번이나 갈아치웠지만 지금은 소속도 없이 홀로 훈련을 이어가고 있으며, 고교 최고 기록을 세운 뒤 제자리걸음 중인 10대의 준서(임지호)는 육상부 해체에 직면해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20대의 정호(송덕호)는 기록에 대한 압박감으로 약물에 손을 댄다. 운동선수들의 고민이 사실적이고 생생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체육인인가 싶었지만, <스프린터>는 공명, 맹세창 주연의 <수색역>(2015)을 만든 최승연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최승연 감독은 “뭔가 하려고 열심히 시도는 하는데 잘되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하려고 여러 아이템을 찾다가 자연스럽게 육상이라는 소재를 만났다”면서 “운동선수로서
누구에게나 '끝과 시작'이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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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독립영화를 정리하는 영화제인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가 12월3일 폐막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독립영화의 축제는 성황리에 치러졌고, 이제 남은 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다. 개막작인 최승연 감독의 <스프린터>, 본선 장편경쟁부문 상영작인 김현정 감독의 <흐르다>, 오성호 감독의 <그 겨울, 나는>,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 상영작인 김미영 감독의 <절해고도>까지, 4편의 영화와 감독을 소개한다. 데뷔작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선보인 감독들.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국영화 혹은 한국 독립영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독립영화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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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악기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한다. 여자가 서툴게 피아노를 두들기자 현란한 밴조 선율이 이내 따라잡는다. 현을 튕기는 이는 재혼한 여자의 새 시숙. 음악으로 말을 거는 그만의 방법일까 싶지만 피아노를 기다려주지 않고 놀리듯 앞서가는 밴조는 심술과 훼방의 도구일 뿐이다. 문을 젖히는 바람 소리가 끼어들어 한결 차갑게 들리는 2분가량의 기묘한 협연은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초반부를 대사 하나 없이 압축한다.
제인 캠피언 감독이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자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파워 오브 도그>는 토머스 새비지의 1967년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두 형제와 두 모자의 불편한 동거를 그린 심리 스릴러로서 시동을 건다. 이들이 처음 만난 곳은 1925년 미국 몬태나, 남편을 잃은 로즈(커스틴 던스트)가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와 함께 운영 중인 식당. 이곳에서 버뱅크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② '파워 오브 도그' - 웨스턴이 갱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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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국제영화제는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감독의 작품으로 줄리아 뒤쿠르노의 신작 <티탄>을 선택했다. 가장 마지막에 호명해야 할 황금종려상을 무대에 오르자마자 공개해버린 심사위원장 스파이크 리 감독의 실수로 폐막식 내내 혼란스러웠다는 뒤쿠르노 감독은 심사위원이었던 샤론 스톤을 껴안고 “역사처럼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샤론 스톤은 웃으면서 “자기야, 이건 역사가 맞아”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티탄>은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형식이 필연적으로 조응한다. 창조를 위한 파괴,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괴물의 탄생을 긍정하기 위해 전통적인 작법을 탈피하고 장르와 규범을 초월한다.
붉은 캐딜락이 포효한다. 흥분한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밀어내고, 나체의 댄서는 축축한 몸으로 차체를 쓰다듬는다. 틈 없이 가까워진 댄서와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점점 격렬하게 리듬을 맞추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댄서의 이름은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① '티탄'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괴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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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제74회를 맞이한 칸국제영화제는 지금까지 단 두명의 여성감독에게 황금종려상을 수여했다. 1993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언 감독이 여성감독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지 28년 후, 스파이크 리 감독을 필두로 한 심사위원단은 영화제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깨고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에 최고상을 안겼다.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부터 뜨거운 논쟁을 견인했던 <티탄>과 제인 캠피언 감독이 12년 만에 내놓은 신작 <파워 오브 도그>가 비슷한 시기에 관객을 만난다. 의도적으로 3막 구조를 탈피한 <티탄>에서 가장 파격적인 대목인 자동차와 인간의 성관계는 영화 시작 15분 즈음 일찌감치 등장한다. 에로틱 스릴러로 시작해 슬래셔, 블랙코미디, 가족 드라마로 노선을 트는 <티탄>은 어쩌면 21세기의 예수 탄생극을 의도한, 새로운 인류의 탄생 신화다. 1967년작 소설을 영화화한 <파워 오브 도그>는 14장을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①~② 다르고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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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웨이브가 ‘정치, 블랙코미디, 시트콤’ 성격을 띤 오리지널 드라마 제작을 위해 윤성호 감독에게 손을 내민 것은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영화 <은하해방전선>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이른바 ‘웹드라마’라는 단어가 낯설던 2010년 인디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내놓은 이후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길고 짧은 영화와 드라마를 유연하게 선보여온 그는 언제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는 창작자였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는 “로컬의 디테일이 중요한” 윤성호식 코미디가 어떻게 그 특수성을 바탕으로 보편적 재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 증명한 작품이다.
극 초반 “정치가 도대체 뭐길래”라는 절규가 등장한다. 정치를 어떻게 다루고 싶었나.
기획안에 맨 처음 쓴 문장이 “고작 우리 마음 얻으려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많은 경우 그걸 얻으려는 과정에 천착하는데,
"현실 정치를 공부할수록 공무원들을 리스펙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