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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심사 결과, 올해는 최우수상 없이 우수상 2명을 선정했다. 응모작은 총 72편으로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특정한 감독이나 작가의 세계를 파고드는 대신 유연하게 이론비평의 주제를 확장한 글들이 눈에 띄었다.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글의 수준과 다양한 주제 설정이 흥미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글은 없었다. 본심 심사를 맡은 <씨네21> 이주현 편집장, 김혜리 편집위원, 송형국·김소희 평론가는 최종적으로 김예솔비, 소은성, 임장혁, 서정 네명의 글을 놓고 고심한 끝에 김예솔비, 소은성씨에게 공동 우수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김예솔비, 소은성씨 모두 성실한 글쓰기의 태도, 정직하게 영화를 마주하려는 태도에서 믿음을 주었다. 우선 <퍼스트 카우> <스파이의 아내> <바쿠라우> 세편의 영화를 엮어 이론비평 ‘창문과 풍경의 어긋남이 말해주는 것’을 쓴 김예솔비씨의 글에 대해선 ‘닫힌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 우수상 김예솔비, 소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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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이 몇편의 사랑영화를 만들어왔나 헤아려보고 흠칫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는 대놓고 러브 스토리였고 조금 비밀스러운 데야 있지만 <스토커> <올드보이>도 여기 묶을 수 있다. 6부작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작 <헤어질 결심>에 이르러 관객이 박찬욱식 멜로드라마를, 혹은 그 변태성을 전에 없이 화제로 삼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건 이번 영화의 연인이 그나마 보편적으로 감정이입하기 용이한 인물들이라서일 수도 있다(동시대 인간이고, 헤테로섹슈얼이고, 근친이나 적이 아니다). 혹은 마침내 연애가 영화의 중심 사건이자 플롯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사랑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의 총화다. 욕망의 문답은 취조와 심문의 언어를 빌려오고 정의, 진실, 예의 같은 다른 범주의 인간 행위가 끌려들어온다.
송서
김혜리 기자의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스포일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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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보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서래(탕웨이)의 행동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낯선 행동으로 가득하고, 공감을 요구하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지만 이해가 안된 적은 없었다. 영화를 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야기의 전개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설명하는 다른 구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쥐>와 <헤어질 결심>의 포스터는 특별하다. 배우들의 모습을 요란하게 전시하는 다른 영화 포스터들과 다르게, 두 영화의 포스터는 영화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념 다이어그램 같은 느낌을 준다. 박찬욱 감독이 이런 방식을 생각의 도구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고, 영화가 만들어진 후 포스터가 제작되었을 테지만 이 두 포스터는 영화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시간, 혼돈 속에서 생각이 정리되는 바로 그 순간, 즉 개념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박쥐>의 포스터는, 태주(김옥빈)가 사제
윤웅원 건축가의 '헤어질 결심'의 공간 구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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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서래의 마지막 선택을 보고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결단의 놀라움에 대해 말하기 위해 글을 썼다.
누가 뭐래도 <헤어질 결심>은 언어의 영화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을 빼고는 도저히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시작은 하나의 단어다. “마침내”. 이 단어가 등장한 순간부터 영화의 말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마침내’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죽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을 서투르게 표현한 것인가? 기다린 결과가 도래했다는 시원함을 저도 모르게 발설한 것일까? 사극으로 한국어를 익힌 외국인의 독특한 언어 습관인가? 그 말(“마침내”)은 내뱉어진 순간부터 이리저리 갈라지며 여러 겹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서래(탕웨이)는 말한다.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서래는 후에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뜻이라고 정정했지만, 저 문장이 전하는 묘한 인상을 떨쳐내기 힘들다. 여기에는 서래가 처음 뱉은 중국어 소리와, 번역기가 변환
홍수정 영화평론가의 '헤어질 결심'의 다층적 언어와 서래의 결단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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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사랑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며, 누군가가 누군가를 의심했던 이야기다. 거기에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다. 바다 앞에서 하나의 진실만을 고집하면 안된다.
와이드스크린의 비율이 높을수록 사물의 왜곡이 일어난다. <타락천사>(1995)처럼 굳이 극한의 렌즈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시네마스코프의 주변부가 휘어져 보이는 현상은 피하기 힘들다. 막스 오퓔스의 <롤라 몽테>(1955)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오른쪽과 왼쪽에서 내려오는 신으로 시작한다. 샹들리에를 붙들고 내려오는 선은 직선처럼 곧아서 화면의 양쪽을 깔끔하게 분할한다. 그러나 이렇게 정교하게 찍은 영화에서도 서커스 천막을 버티는 기둥의 상단부가 휘어져 보이는 건 막지 못했다. 밀로스 포만의 <래그타임>(1981)은 아예 주변부를 왜곡하기로 결정한 경우다. 볼록렌즈로 바라본 양, 바깥쪽 기둥이 볼록하게 휘어진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헤어질 결심'이라는 이상한 누아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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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인연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영화와 나의 관계가 바뀐다. 많은 사람이 환호하는 걸작이 정작 나에게 시큰둥하게 다가온다고 이상할 건 없다. 아직 그 영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반대로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간 영화가 나만의 걸작이 되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다. 그렇게 자신만의 보석함을 늘려가는 즐거움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행복일 것이다.
한편 어떤 영화는 시간과 함께 익어가는 운명을 타고난다. 시간의 풍화를 받지 않는 걸작을 다시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시대를 앞서간 영화가 당대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발굴되는 것 역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게 몇몇 영화는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정확히는 당신을 만나 새롭게 태어난다. 물론 모든 영화가 이런 행운을 거머쥐는 건 아니다. 그만큼의 깊이와 존재감, 그리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품고 있어야 가능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는 그런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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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들
비밀이 많아 보이는 여자, 그런 여자를 관찰하고 수사하는 남자. 마침내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 수사물의 미스터리에 로맨스를 교묘하게 얽어낸 <헤어질 결심>의 이야기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이뿐만 아니다. 고소공포증, 불면증, 관음증의 모티브, 크게 2부로 나뉘어 여인의 비밀을 파고드는 플롯, 파도치는 바닷가를 뒤로한 기암괴석에서의 대화,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주인공의 자태, 제임스 스튜어트의 멀끔함과 비슷한 해준(박해일)의 품위까지 영화 곳곳엔 <현기증>의 인장이 넘쳐난다. <현기증> 말고도 히치콕의 냄새는 <헤어질 결심> 곳곳에서 풍긴다. 해준이 서래(탕웨이)의 집 안을 몰래 들여다보는 <이창>의 구도, 수사 대상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형사 그리고 남편의 죽음이라는 <사보타주>의 서사. 또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속 러시모
'헤어질 결심'의 레퍼런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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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한국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조영욱 음악감독의 말에 쉬이 반대하기는 힘들다.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와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그리고 <헤어질 결심>까지, 절친한 친구이자 동업자로 20년 넘게 호흡을 맞추고 있는 둘의 영화 세계는 이제 떼놓을 수 없는 짝이 됐기 때문이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가장 직설적인 멜로 <헤어질 결심>에서 음악이 차지한 영향력을 몸소 느낀 관객이라면 더욱더 그의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다.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의 감정을 고스란히 살려내기 위해서 로맨스영화의 감정적인 음악을 최소화한 조영욱 음악감독의 역설적인 선택은 어딘가 뒤틀려 있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그들의 아이러니한 사랑을 완결했다.
- <올드보이>나 <
'헤어질 결심' 조영욱 음악감독 "멜로드라마의 고전적 음악 공식은 일부러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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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범 편집감독은 박찬욱 감독이 대학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부친인 고 김희수 편집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 때부터 해외에서 작업한 <스토커> <리틀 드러머 걸>을 제외한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을 편집했다. 본격적인 편집 작업에 들어가기 전부터 시나리오를 보면서 작품의 의도, 구체적인 구성을 논의한다는 박 감독과 김 편집감독은 이번 <헤어질 결심>을 “이견 없이 편집점에 관해 소통”하며 만들었다.
- 많은 멜로영화를 편집했다. 예전에 작업한 멜로영화와 <헤어질 결심>이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했나.
= 박찬욱 감독이 “이번엔 사랑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처음부터 선언하더라. 그런데 박 감독이 만드는 멜로는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알고 접한 멜로와 달리 굉장히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현대인이 따르는 규범이나 미의 기준
'헤어질 결심' 김상범 편집감독 "모든 결정은 멜로적인 부분을 부각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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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희 미술감독이 생각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무드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가 정의하는 무드란 “물리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의 공기나 정서까지도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극장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경험”이다. 극장 밖을 나와서도 감정과 이미지들이 내내 생동하며 영화가 계속된다고 느끼게 해준다는 평이 좋았다는 류성희 미술감독은 <헤어질 결심>에 펼쳐놓은 미술을 통해 그가 믿는 ‘클래식’의 가치를 또 한번 구현해냈다.
- 캐릭터의 사연과 감정을 염두에 둔 채 작업에 녹여내는 것으로 안다. 시나리오를 읽고 서래(탕웨이)나 해준(박해일)의 감정에서 떠오른 키워드가 있나.
= 시나리오를 읽을 때 보물 지도를 보듯 뿌려진 키워드들을 수집한다. 처음 읽었을 때 목소리라는 키워드가 생각났다. 물론 대면해 취조하는 장면도 있지만 두 사람이 언어적으로 대화하기보다 서로 음성을 녹음해 듣는 것이 굉장히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헤어질 결심' 류성희 미술감독 "고유의 파장을 지닌 소리와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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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국제영화제 감독상(Prix de la Mise en Scène)은 프레임을 구성하는 미장센의 결과물로 주어지는 상이다. 김지용 촬영감독은 “카메라와 조명뿐 아니라 훌륭한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잘 조율된 점”이 평가의 결과라고 말했다. <헤어질 결심>은 그에게도 “마음에 드는 숏 하나가 아니라 좋은 이미지가 잘 연결되어 아름다운 신을 가진 영화”다. 김지용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다음 프로젝트인 <HBO> 드라마 <동조자>에서도 함께한다. <동조자>의 첫 헌팅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헤어질 결심>의 촬영과 미장센에 대해 들었다.
- 촬영 컨셉을 잡아가는 과정은 어땠나.
= 고전영화를 많이 봤다. 감독님이 안개 낀 바닷가 장면이 있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이나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권해줬다. 클래식 필름의 예스런 질감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고, 처음부터 감독님은 애너모픽렌즈를 썼으면 하셨다. <리
'헤어질 결심' 김지용 촬영감독 "시점숏을 통해 훔쳐본다는, 은밀한 느낌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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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에도 여성성, 아이다운 천진함, 동화적인 아름다움, 낙관주의, 설렘, 감사하는 마음, 쓸데없는 공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면 그건 정서경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내게서 나온 아이디어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조차도 정서경에 의해 일깨워진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 각본집 서문에서 박찬욱 감독은 정서경 작가와의 협업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두 사람이 모니터 한대에 키보드 두개를 연결한 후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를 번갈아 입력하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작업한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창작자로서 영감을 주고받으며 거의 뇌를 공유하듯 글을 쓰는 관계이다 보니 당연히 박찬욱 감독에게서 출발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정서경 작가에게서 비롯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서래(탕웨이)의 죽은 남편 기도수(유승목)가 말러의 음악을 들으며 산을 올랐다는 설정은 말러의 팬이라 고백한 박찬욱 감독이 아닌 정서경 작가의 순간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 정서경 작가 "'헤어질 결심'은 100% 관객에게 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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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본 것인가. <헤어질 결심>은 보는 이들을 당황하게 할 영화다. 무언가를 보았지만, 끝내 무엇도 보지 못했다. 감춰졌기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투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너무나 선명해서 도리어 낯설다. 미스터리 없이 미스터리하고, 비밀 없이 비밀스럽다. 그러다가 마침내 감정을 서서히 퍼뜨린다.
복수, 비밀, 구조. 박찬욱의 영화에서 범죄보다 중요한 건 복수였고, 복수보다 중요한 건 비밀이며, 비밀보다 중요한 건 비밀이 드러나는 구조였다. 박찬욱은 이를 통해 관객이 끊임없이 자신의 예측을 수정해야 하는 게임을 세팅하는 데 능했다. <올드보이>에서 플래시백을 통해 비밀이 누설되면서 피해와 가해, 복수의 주체와 객체는 자리를 바꾼다. <아가씨>에서 3막 구조 속에 각자의 시점과 비밀이 누설되면서, 정보는 수정되고 범죄의 설계는 무력해진다. 어쩌면 그의 영화는 관객이 이야기 구조가 선사하는 반전에 속아 넘어가는 기쁨을 교육해왔다.
반면,
김소희 평론가의 '헤어질 결심' 세팅을 교란하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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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최고 평점(영미권 공식 데일리 <스크린> 기준)을 받으며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걸작으로 거론됐던 <헤어질 결심>이 드디어 공개됐다. <씨네21> 전문가 별점도 평균 8.71점을 기록하는 등 국내 평단의 반응도 뜨겁다. 지난호(1362호) 박찬욱 감독과 탕웨이, 박해일 배우의 인터뷰에 이어 <헤어질 결심>을 심도 깊게 파헤치는 특집을 준비했다. 먼저 김소희 영화평론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헤어질 결심>이 성취한 의미를 분석했다. <헤어질 결심> <일장춘몽>으로 연달아 박찬욱 감독과 작업한 배우 박정민은 ‘우상’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왔다. 정서경 작가, 김지용 촬영감독, 김상범 편집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조영욱 음악감독과의 인터뷰는 정밀한 세공술로 숏마다 밀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장인들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김지용 촬영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의 현장 스케치는 프로덕션 과정에서
'헤어질 결심' 만나기 전에도 헤어진 뒤에도 이토록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