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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훌쩍 넘은 폴 버호벤 감독에게는 필생의 프로젝트가 남아 있다. 마흔 이후로, 그는 예수에 대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성경은 물론 예수에 관한 어떤 서적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1986년부터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예수 세미나’에 참여해 공부했으며, 20년간 세미나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예수의 역사적 초상>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권두에 자신은 “신학자도 아니고, 기독교 신자도 아닌 영화감독”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비종교적이거나 과학적으로 복음서에 접근했다”고 밝힌다. 성경 속 장면이 “특수효과를 사용해야만 찍을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하면서. 현재 버호벤은 이 저서를 원작으로 예수의 역사적 발자취를 좇는 차기작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예수의 신성함을 믿을 수 없다”는 버호벤의 선언이 따끔하고 파격적인
다음 주인공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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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가장 큰 적이야.” <베네데타>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은 영화 초반 슬며시 고개를 든다. 수녀원에 갓 입성한 어린 베네데타(엘레나 플론카)가 유니폼의 불편한 옷감을 지적하자 수녀원장 펠리시타(샬럿 램플링)가 건네는, 옷을 편히 입으려 하지 말라는 충고와 더불어 말이다. 하나 어른이 된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의 몸에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의 몸에 동료 수녀와의 사랑은 쾌락을, 예수님의 환영은 고통을 새긴다. 몸은 그 자체로 신성과 악마성의 증거가 된다. 17세기에 실존한 한 수녀의 삶은 역사학자 주디스 C. 브라운의 책 <수녀원 스캔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으로 알려져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로 재탄생했다. 책이 100쪽에 가까운 주해와 증언들을 첨부해가며 당대 가톨릭 사회의 시스템과 동성애 인식을 해부해 베네데타를 기록했다면, 영화는 성녀이자 레즈비언이었던 베네데타의 다중성을 골고루 묘사하는 작업에
예수를 꿈꿨던 성녀, 혹은 협잡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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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컬처의 재미는 각자 보고 싶은 대로 의도를 넣어 해석하는 과정에서 빚어지기도 한다.
맞다. 팬들이 만들어가는 세계가 있다. 사실 원작자의 의도는 그리 중요치 않다. <스타워즈>만 봐도 새로 만들면 팬들이 반발하지 않나. 해석은 소비하는 사람들의 것이고, 원작자의 의도가 너무 강하면 오히려 즐기는 데 방해가 된다. <지옥> 웹툰이 책으로 출판됐을 때 작가의 말을 써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최규석 작가가 독자들의 해석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쓰지 않았다. 완전히 동의한다. 인터뷰를 통해 작품에 대해 떠들곤 있지만 부디 최소한이길 바란다. 이런 유의 작품은 원작자의 손을 떠난 순간 이미 시청자들의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비로소 흥행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낡은 아파트와 연립주택, 미로처럼 오래된 골목 등 연상호가 사랑하는 공간들이 나온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 좋다. 허름한 곳이 찍으면 멋있게 나오는 것도 좋
6. 해석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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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사자들의 디자인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다. 캐릭터의 외견은 폐타이어를 두른 것 같은 질감에 고릴라 같은 움직임을 보여준다. 약간 조악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취향이 반영됐다고 볼 수도 있다. 키치적인 요소랄까. 90년대 일본 B급영화들의 살짝 조악하고 기괴한 이미지를 좋아한다. 일종의 특수촬영물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매끈한 CG보다는 특수효과의 아날로그적인 질감, 실오라기가 보일 것 같은 감성에 대한 동경이 있다. 이미지 작업은 감각에 지배받는 거라 어렸을 때 받은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걸까. (웃음) 의도하지 않아도 결국 만들어놓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집합이 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옥의 사자들이 시연할 때 과도한 폭력을 전시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육체적인 학대를 행사한다. 대로변, 집 안, 강가, 세팅된 무대까지 폭력을 시연하는 공간도 다양하다.
설정상 지옥의 사자들은 갑자기 등장한
5. 지옥 사자들과 천사의 탄생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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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자로서 연상호는 워낙에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걸로 유명하다. 배우가 캐릭터에 부피를 만들어내는 건 그만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연출 방식 덕분이기도 하다.
캐릭터와 연기라는 분야에선 배우들이 전문가이니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당연하다. 캐스팅을 할 때 캐릭터에 필요한 이미지도 있지만 그 밖에 내가 필요한 재능들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모시려 한다. 각자 다른 톤의 연기를 모아서 재밌는 그림을 만든다고 할까. 예를 들어 민혜진 변호사 역의 김현주 배우는 그동안 쌓아온 신뢰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다. 동시에 4화 이후에는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도 선보이고 싶었다.
이번 현장도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었다고 배우들이 입 모아 말했다.
<염력> 이후 대본 리딩을 한번도 안 했다. 실제 연기랑은 다르지 않나. 일종의 세리머니, 불필요한 의식 같다. 대신 콘티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루나 이틀에 걸쳐 한다. 명확한 계획을 공유하여 영화의 조감도를
4. 연상호의 연출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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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고지를 당한 박정자 역의 김신록 배우다.
예전에 한 단편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그땐 그렇게 강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방법> 때 김용완 감독이 김신록 배우를 추천했는데 ‘나는 잘 모르니까 연출자가 판단하시라’고 했다. 그런데 드라마 1화를 보는데 너무 잘하는 분이 있는 거다. 그게 김신록 배우였다. 매 장면 캐릭터를 압도하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지옥> 첫 촬영이 유아인 배우와 커피숍에서 만나는 장면이었는데 두려우면서도 부끄러웠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애매할 수 있는 표현인데 잠시 생각하더니 내 머릿속에 있던 경직된 그림을 단번에 깨부술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다. 이론과 실전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현장에서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흔드는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사실 지옥의 고지를 받는 전반부의 박정자와 후반부의 튼튼이는 둘 다 기능적인 캐릭터다.
2화 초반에 새진리회가 박정자의 집을
3. 박정자, 튼튼이, 유지 사제, 그리고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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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까지가 묵직한 이야기였다면 4화부터는 뜨거워질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전반부가 신의 의도와 인간의 죄, 지옥의 유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4화에서부턴 선택의 문제가 두드러지는데.
처음에 썼던 대본은 영화 한편 정도의 분량으로 모든 내용이 뒤섞여 있었다. 본래는 애니메이션 <지옥>처럼 새진리회가 대세가 된 설정에서 출발했는데, 최규석 작가가 큰 전환을 해보자고 해서 일종의 프리퀄처럼 아예 새진리회의 첫 시작으로 돌아가서 다시 썼다. 그렇게 대본에 있는 요소들을 분해하고 재조합해서 지금의 1~3화가 나왔다. 그 과정에서 탈락된 소재가 아기 튼튼이의 시연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웹툰 연재를 하다 보니 뺐던 소재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남은 재료들을 가지고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야기에 살을 보탰고 4, 5, 6화가 만들어졌다. 쓰는 입장에서는 4, 5, 6화를 더 재밌게 썼다.
1~3화까지는 정진수 의장(유아인)과 민혜진 변호사(김현주),
2. 민혜진과 정진수, 소도와 새진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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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콘텐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현재 영화와 시리즈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결국 상영시간이다. 만화책 1권을 1~3화, 2권을 4~6화로 나눴다. 여타 시리즈와 비교하면 매화의 완결성도 높은 편이다. 총 6부작 구성으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넷플릭스의 가이드는 따로 없었다. 몇 부작으로 할지도 전적으로 창작자에게 맡긴다. 드라마 <방법>을 할 때는 12부작, 매화 50분 안팎의 이야기를 짜야 한다는 명확한 틀이 있었다. 반면 넷플릭스는 상영시간과 외적인 조건에서 자유롭다. 내 역량의 문제도 있고 6부작 이상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매 에피소드가 영화 같은 느낌이 있길 바랐다. 내겐 영화가 그런 것 같다. 좀더 압축적이고 느슨한 부분이 없는 매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알차게 담아내고 싶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시리즈까지 거의 모든 플랫폼을 다 경험한 감독은 많지 않다.
플랫폼에 맞춰나간다는 의식은 딱히 없다. <지
1. 마이너 감성으로 전세계를 와이드로 공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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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걸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걸 하는 길. 얼핏 비슷하게 들리지만 둘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반드시 잘하리라는 법은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꽤 많은 경우 창작의 괴로움은 능력과 욕망이 불일치할 때 피어나기 마련이다. 연상호 감독이 이를 해결한 방식은 영리하다. 할 수 있는 걸 꾸준히 하되 그걸 잘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가는 것이다. 데뷔작은 물론 장편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 근작인 영화 <반도>(2020)를 거쳐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까지 연출자로서 연상호는 늘 마이너한 길을 걸어왔다. 작품이 흥행했을 때도 연상호의 취향이 바뀐 적은 없었다. 그저 마이너한 그의 감성이 대중적으로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대가 만들어졌을 따름이다. 기획자로서의 감각도 빼어난 연상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부산행>(2016) 이후 연상호는 서브 컬처 기반의 마이너한 소재들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폐허가 '되어가는' 공간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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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이 꼽은 명장면: 역 앞에서 고니를 기다리는 정 마담
고니와 아귀가 배에서 마지막 화투판을 벌이기 직전, 정 마담이 역 앞에 고니를 마중나가 기다리는 장면이 있다. 정 마담이 “우리는 무조건 돈만 챙긴다”고 하면 빨치산은 “고니는요?”라고 묻는다. 그때 카메라는 정 마담의 고민이 담긴 표정을 3, 4초간 보여주며 정 마담의 뒤로 빠져 트랙아웃한다. “그게 하나도 명장면은 아닌데… 그때 정 마담은 아마 갈등하고 있었을 거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지만 고니를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느낌이 나길 바랐다. 그 아무렇지 않은 트랙아웃, 카메라가 정 마담에게서 멀어지며 뒤로 빠지는 순간이 자주 생각난다. 그 순간을 더 잘 표현했으면 좋았을걸, 카메라가 좀더 천천히 빠졌으면 어땠을까, 더 멀리 빠졌어야 하나 더 들어갔어야 하나.” 최동훈 감독은 <타짜>가 개봉한 이후에도 “그때의 정 마담을 어떻게 하면 더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계속 생각했다고 한다.
배우
"감독님 천재인가? 감독님 천재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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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 이후 15년, 그동안 이 작품이 내게 미친 영향은.
최동훈 원래 그렇게 리얼리즘적이지 않은 감독인데 <타짜>는 내가 했던, 할 수 있었던 리얼리즘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음껏 놀아도 되겠다며 바로 유턴을 해서 <전우치>를 찍었다. 이후 홍콩에서 해외 배우와 함께 영화를 찍고 싶다며 <도둑들>을 찍었고, 원래 <타짜> 이후에 찍으려고 했던 <암살>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도둑들> 다음에 도전했다. 15년 전에 <타짜>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 <타짜>를 만들었을 것이다.
조승우 원작 캐릭터를 전혀 다른 이미지의 배우가 연기해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는데, 허영만 선생님의 만화를 봤던 팬들이 거부감을 느끼기보다는 또 하나의 캐릭터로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나만의 성취감이 있었다. 앞으로 배우 생활을 하면서 이만큼 파급력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또 만나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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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보는 조승우와 얘기 중인 백윤식과 최동훈 감독(왼쪽부터).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는 김혜수. “당시의 나는 그리 시야가 넓지 않아서 현장에 가면 감독님과 배우들에만 집중했는데, 끝나고 보니 <타짜>의 모든 스탭들이 진심으로 영화에 애정을 쏟고 애를 많이 썼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타짜>는 좀더 특별했다. 지금도 <타짜>의 스탭들을 만나면 강도 높은 애정을 느낀다.”(김혜수)
배우들에게 디테일하게 연기 시범을 보이는 최동훈 감독. “그저 배우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대화한다.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은 4~5% 정도일까. 그들을 관찰하고 동선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배우의 시선이나 말하는 속도나 분위기가 나온다. 그외에는 모두 배우들이 각자의 호흡대로 연기하는 거다.”(최동훈)
백윤식의 손에서 마법처럼 화투 9가 나오는 장면을 찍기 전. “유유자적한 듯 보이는 저 사람(평경장)은 늙은
각자의 호흡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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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렬은 <타짜>의 밀도를 높이는 인물이다. 첫 등장부터 쉴 새 없이 고니(조승우)의 옆에서 조잘대는 그는 긴박한 사건이 터지지 않을 때에도 영화를 가속하고, 장면의 빈곳을 꼼꼼하게 채워간다. 도박판에서는 상대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귀가 따갑도록 딴소리를 하지만, 고광렬의 촐랑대는 혀는 139분 러닝타임을 쏜살처럼 흐르게 보는 이를 몰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타짜>에서 누구보다 많은 웃음을 책임졌던 유해진은 이후 <타짜> 시리즈를 관통하며 유기성을 책임진 장본인이기도 하다.
데뷔 이래 50편 넘는 영화에 출연해온 유해진에게도 고광렬은 특히 각별한 존재다. 유해진은 지금까지 연기했던 캐릭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고광렬을 꼽아왔다. 관객이 정말 사랑했고 배우 유해진에게도 큰 변화를 줬던 그는 단순히 재미있는 감초가 아니다. 고니의 가족이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어설프게 둘러대는 마음 씀씀이가 따뜻하고
웃음과 진지함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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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귀와 악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었다. <타짜>의 세계 속 중심에는 고니가 있다. 영화는 정 마담의 목소리를 빌려 관객에게 고니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고니가 어떻게 도박판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아귀는 고니와 악연으로 얽힌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고니를 둘러싼 모두가 아귀의 정체에 관해 언급하길 꺼린다. 아귀는 <타짜> 세계 속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타짜 중 가장 존재감이 무거운 타짜였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평경장도 정 마담도 고광렬도 아귀를 무서워하거나 멀리한다. 고니가 도박판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상대해야 할 최종 보스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최동훈 감독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영화 경력이 많지 않았던 배우 김윤석에게 덜컥 맡겼던 것일까. 캐스팅 당시만 해도 출연 제의를 받은 본인조차 당황했을 정도다. “내게 아귀를 맡길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아귀는 전라도 출신이라는 설정인데 나는 경상도
"아귀를 데리고 춤 한번 추겠다, 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