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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sonaten/ Autumn Sonata
1977년, 출연 잉그리드 버그만, 리브 울만, 레나 니만
베리만의 세계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재능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받으면서도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가을 소나타>의 세 모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원하게 지내오던 큰딸 에바와 어머니 샤를로테는 어떤 새로운 국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7년 만에 재회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증오해왔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황망히 헤어질 뿐이다.
베리만의 많은 영화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을 소나타>에서도 비명을 동반하는, 죽어가는 자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묘사된다. 샤를로테와 에바가 서로의 증오심을 고백하는 그 시간에 <외침과 속삭임>의 아그네스처럼, 죽음을 기다리는 또다른 딸 헬레나는 침실 바닥에 뒹굴며 애타게 그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가을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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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kningar och rop/ Cries and Whispers
1971년, 출연 하리엣 안데르손, 리브 울만, 잉그리드 툴린, 카리 실반
베리만적인 세계에서 여성들이 배제된다는 것은 알모도바르적인 세계에서 그런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 베리만을 두고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모든 여성들이 나를 감동시킨다”고 언젠가 베리만이 고백한 것처럼, 그의 우주가 많은 부분 여성들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은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들을 경이로워하는 눈으로 관찰하며 보듬을 때 베리만의 영화들은 특히 미묘하고 불가사의하며 또 매혹적인 것이 되곤 한다. <외침과 속삭임>은 <페르소나>(1966)와 함께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로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네명의 여자들, 즉 죽어가는 아그네스를 거쳐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 언니 카린, 그리고 하녀 안나까지 차례대로 옮겨가며 그녀들 감정을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외침과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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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som i en spegel/ Through a Glass Darkly
1961년, 출연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하리엣 안데르손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다루지 않는 드라마는 흥미가 없다.” 유진 오닐의 이 말을 자주 인용했고 또 그것에 동의했던 베리만은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과 믿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천착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든다. 흔히 ‘신앙 3부작’이라고 불리곤 하는 그 영화들은, 베리만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믿음의 ‘위축’이라는 주제로 한데 묶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두운 유리를 통해>는 <겨울빛>(1962)과 <침묵>으로 이어지는 바로 그 3부작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작가인 아버지 다비드, 그의 딸 카린과 남편 마르틴, 그리고 카린의 남동생 미누스, 휴가차 외딴 섬을 찾은 이 네명의 가족에게만 전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 <어두운 유리를 통해>는 우선 가족 드라마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베리만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어두운 유리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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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gfruk llan/ The Virgin Spring
1959년, 출연 막스 폰 시도, 군넬 린드블롬
북구의 중세 전설을 토대로 만든 <처녀의 샘>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제7의 봉인>과 “신은 과연 침묵하고 있다”고 p>말하는 <침묵>(1963) 사이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이건 <처녀의 샘>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역사적 시기의 측면뿐 아니라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의 측면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처녀의 샘>은 부조리하게도 순결한 영혼이 오히려 고난을 겪어야만 하고 그런데도 신은 그저 방관하고만 있는 이 사악한 세상을 통탄할 것처럼 진행된다. 순정한 영혼을 지닌 소녀 카린은 교회에 가던 도중 양치기 형제들을 만나 그만 겁탈을 당한 뒤 살해당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안 카린의 아버지 퇴레는 양치기 형제들을 모두 죽인다. 퇴레의 이 ‘잔인한’ 복수는 과연 침묵하고 있는 신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처녀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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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ultronst llet/ Wild Strawberries
1957년, 출연 빅토르 시외스트룀, 비비 안데르손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경력에서 1957년은 특별한 한해였으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자신의 대표작이자 세계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제7의 봉인>과 <산딸기>가 모두 이 한해에 공개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외형상으로는 확연히 다른 이 두편의 영화는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둘다 ‘탐색’(quest)의 로드 무비라는 점이 그렇다. <제7의 봉인>에서 기사 블록의 귀향기가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산딸기>에서 이삭 보리 교수의 여정은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여정이었다. 다시 말해, 그 두 주인공의 여행이란 공히 물리적 이동이라기보다는 영혼으로의 침잠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의 것인 셈이다.
<산딸기>는 이삭 보리라는 한 노회한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산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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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 sjunde inseglet/ The Seventh Seal
1957년, 출연 막스 폰 시도,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나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갈구합니다…. 나는 신이 당신의 손을 내밀며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고 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어떤 상(像)을 만들어내서는 그걸 신이라고 부릅니다.” 헛되었던 10여년간의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이 원한 것은 이 고통스럽고 가혹한 세상에서 신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요구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과연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제7의 봉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향하는 기사 블록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종의 로드 무비이다. 그의 여정이란 곧 ‘질문의 여정’이다. 자신 앞에 불쑥 나타난 ‘죽음’에 블록이 체스 게임을 제안한 것은 심연의 공포로서의 죽음을 피하거나 미뤄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제7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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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arnattens leede/ Smiles of a Summer Night
1955년, 출연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에바 달벡
지나치게 침울했고 또 지나치게 예민했던 베리만은 어려서부터 유머 감각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건 아득한 절망의 끝까지 다가가는 그의 많은 영화들을 보고 나면, 굳이 그 자신의 술회를 직접 듣지 않더라도 손쉽게 유추해낼 수 있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쾌활함의 기질이라곤 전혀 없었을 듯한 그 베리만이 어울리지 않게도 코미디영화를 만들 때도 있었다. 50년대 초·중반, 자신의 말에 따르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그는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여름밤의 미소>는 베리만의 그런 가벼운 초기 영화들 가운데에서 단연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중년의 변호사인 프레드릭은 자기 아들 연배의 젊고 사랑스런 안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그녀와는 아직도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 <한여름밤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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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3월24일부터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려
영화를 ‘예술’이라 칭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머뭇거림을 지워주었던 영화 철학자 잉마르 베리만. 그의 영화 7편이 오는 3월24일부터 4월12일까지 하이퍼텍 나다의 감독 주간 영화제를 통해 필름으로 상영된다. <한여름밤의 미소>(1955)부터 <가을 소나타>(1978)까지, 북구에서 날아온 ‘일곱개의 봉인’을 미리 뜯어본다. 편집자
잉마르 베리만(1918∼)은 자신의 창조력은 유년기와의 대화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창조력의 기반으로서 베리만의 과거로 돌아가보면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루터교 목사인 엄격한 아버지는 죄지은 아들을 따끔하게 벌하고자 그 아들을 벽장 속에 가둬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못된2 아들은 벽장 속 괴물이 혹시 발가락을 뜯어먹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다. 아마도 베리만은 이처럼 지워지지 않는 유년기의 한 장면 속에서
잉마르 베리만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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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혁명 전까지 외국에 배급된 이란영화는 몇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주로 배급한 나라가 프랑스였다. 이란영화가 소개된것은 베니스나 칸, 베를린, 로카르노와 같은 국제영화제에서였고 메흐르지의 <암소>나 샤히드 살레스의 <정물>과 같은 다수의 영화들이 수상했다.프랑스에 본격적으로 이란영화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바흐람 베이자이, 샤히드 살레스, 아미르 나데리,파르비즈 키미아이와 같은 주요 이란감독의 영화들을 상영하는 사이클이 조직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비평가들이 이란영화를 발견하게 되고이란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또 시네필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이후 낭트 제3대륙영화제에서 프랑스 배급사(마레 필름)가 나데리의<수색>를 수입해 81년 배급했다. 칸영화제에서도 R. 푸야의 <민중의 옹호를 위해>가 큰 성공을 얻어 영화제 뒤 파리에서 개봉되었다.이후 86년 낭트 제3대륙영화제
이란영화가 알려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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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향기>에서 <천국의 아이들>까지, 이란영화는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나 모흐센 마흐말바프에 따르자면 이란에는 2만명의 시인과 15만명의 갸페(이란의 카펫) 만드는 이가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15만명의 갸페만드는 이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모두가 예술가라고도 하였다. 각기 자신의 디자인대로 갸페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이란영화를 이해하는 첫걸음에 불과하다(우리는 이란의 문화 전반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80년대 이후 이란영화가 세계무대에서 각광받는이유는 이란영화의 저변에 깔린 페르시아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80년대 중반, ‘유럽영화는 죽었다’고 하였을때, 세계영화계가 발견한 새로운 신천지는 중국과 이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과 이란영화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게 나뉘고 있다. 중국영화는몇몇 뛰어난 작가의 출현에 머물렀지만, 이란영화는 영화사를 뒤흔드는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2000년
이란영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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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
오디션을 할 때 지나 데이비스가 참 잘 대해줬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별 근거없이 내가 선택될 것 같았는데, 그 예감이 적중했다. 그리고 난 해냈다.
<흐르는 강물처럼>
내가 연기한 캐릭터 폴의 치명적인 결함은, 아닌 척 괜찮은 척 위장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다. 폴은 절대 평화와 자유에 다다르는 길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방황하다가 내면의 모순과 갈등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가을의 전설>
영화에서 내가 어떻게 등장하리라는 걸, 그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 거라는 걸,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들판을 가로질러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내 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다. “저런, 그랬구나.”(“Oops, I see.”)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과연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브래드 피트 [2] - 브래드 피트가 말하는 ‘나의 출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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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에서 <스내치>까지
할리우드의 연인에서 연기자로 변모해가는 배우 브래드 피트
1999년 11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할리우드 파워맨 100인 리스트에서 오랜 단골 브래드 피트를 떨궈냈다. 96년부터 내리 3년간 온갖 장르와 캐릭터를 갈지자로 오가며 부진한 성적을 보인 브래드 피트는 케빈 코스트너와 더불어 졸지에 ‘지는 별’이 돼버렸다. 결정적으로 당시 개봉작 <파이트 클럽>의 흥행 성적이 저조해, 배급사인 폭스를 실망시킨 탓이 컸다. 그러나 당사자인 브래드 피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리우드가 그의 남은 상품가치를 측량하며 배우로서의 생명력을 의심하고 있을 때, 그는 유유히 영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의 감독 가이 리치의 새 작품에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흥정하지 않았다. 배역의 비중도, 성격도, 개런티도 논외였다. 무조건 출연하기만 하면 됐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
브래드 피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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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용 아저씨는 춘천 육림극장의 영사기사다. 원래 나이는 쉰일곱, 호적 나이로는 쉰넷. 초로의 나이지만 열여섯에 시작한 영사기사 경력이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를 만나러 육림극장을 찾아가는 길.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남짓,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찾아간 육림극장은 닭갈비 골목이 있는 춘천시내 명동, “개고기 팝니다” 팻말이 즐비한 중앙시장 옆에 있었다. 흰 페인트칠이 돼 있는 오래된극장 외벽에는 아직도 사진 대신 그림 간판이 걸려 ‘상영프로’와 ‘다음프로’를 알리고 있었고, 극장 안 어둑한 매점에는 오징어, 팝콘,바나나우유가 그늘 속에 놓여 있었다. 예쁜 제복의 여자직원 대신 매표구에도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떡 하니. “심상용 영사기사 아저씨를 만나러왔는데요”, 말을 물으니 올라가보라 한다. 영사실은 어디에 있을까. 일요일 낮인데도 관객은 별로 없고, 어둠 속에 몇번인가 발길은 계단턱을더듬는다. 영사실 창에선 예의 빛다발이 쏟아져나오는데 그곳으로 가는 문은 어디
마음은 언제나 꼬마 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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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였을까? 마천동, 5호선 열차가 몇 안 되는 승객을 내뱉고 잠시 쉬어가는 종착역. 남한산성 아래 있다는 그의 집을 찾는 길에, 비가내렸다.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부터 최근작 <내 마음의 풍금>까지, 태동하던 이 땅의 영화가 나고, 옹알이를 하는 모습, 걸음마를 떼는순간,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거쳐 든든한 청년이 되기까지. 긴 세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국영화의 성장을 지켜보았던 배우 박광진(77)은,그러나 더이상 청년이 아니다. 마치 손자에게 키를 나누어 주어 점점 키가 줄어든다 했던 <축제>의 동화 속 할머니처럼….초등학교를 따라 뻗은 길,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한복차림의 노인의 볼은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 대한 반가움 때문인지 오랜만에 홍조를띠고 있었다. “배우집이라 부잣집일 줄 알았을 텐데…, 이런 누추한 곳에서 두 노인네만 살아요.” 몇개의 골목을 지나 들어선 곳은 붉은벽돌의 빌라 지하방. 손자가 만든 조잡한 종이 카네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