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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27일 개봉,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
(이 영화가 좋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그게 1페이지였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다시 거론하지 못했다. 그것도 걸린다. 다시 봐도 이 영화는 우리가 2페이지로 소개한 많은 영화들보다, 그리고 재론하면서 더 많은 페이지에 걸쳐 이리저리 뜯어본 몇몇 영화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영화에 대한 뒤늦은 찬사를 작성하는 일에 동원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영화 글쟁이가 쓴 해설을 읽고 싶은 기분은 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하는 삶의 피로와 허기,그를 실어나르는 시적 운율은 그 자체로 너무 명료해서 어줍잖은 주석을 초라하게 만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게 즐거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을 쓴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 쓰고 연출한 영화다. 그
<씨네21>이 틀렸다 - <그녀를 보기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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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청첩장’부터 잘못 읽은 영화였다. 우리말 제목이 붙기 전, 영화 원제와 광고 사진을 본 나는 무심코 카메론 디아즈가 줄리아 로버츠의 ‘베스트 프렌드’려니 짐작했다. 한술 더 떠, 단짝 친구의 예비 신랑과 벼락 같은 사랑에 빠진 줄리아 로버츠가 우왕좌왕하는 코미디겠지 넘겨짚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문제의 베스트 프렌드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였다. 저런, 헛짚었군. 그렇다면방랑 끝에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친구에게서 참사랑을 발견한다는 ‘파랑새’ 스토리?
음식평론가 줄리안(줄리아 로버츠)에게 옛 애인이자 9년지기 친구인 마이클(더모트 멀로니)이 결혼 소식을 알려온다. 우정이 사랑으로 승화되리라 믿는 줄리안은 결혼식 딴죽걸기에 나선다. 어딘가 귀익은 이야기다. 그런데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볼수록 이상하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발치에 펼쳐진 주단 깔린 평탄한 꽃길을 슬쩍슬쩍 피해간다.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줄리안은
<씨네21>이 틀렸다 -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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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10월31일 개봉, 감독 김기덕김기덕에 대한 오해는 유서깊다. 데뷔작 <악어>나 두 번째 영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평자는 많지 않다. 그의 두 영화를 지지했던 나는 김기덕의 세 번째 영화가 불만스러웠다. <파란 대문>에 관해 “주인공들은 너무일찍 화해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아는, 죽음 앞에 자위할 수 있는 도발적인 김기덕을 다시 보고 싶다”고 썼다. <섬>이 개봉한뒤 김기덕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파란 대문>에 대해 썼던 문장을 기억하며 낚싯바늘을 삼키거나 질에 넣는 가학과 충격의 영상이“너무 일찍 화해하지 않은 증거”라고 말했다. <섬> <실제 상황> <수취인불명>에 이르는 김기덕 영화를경험하고 <파란 대문>을 다시 봤다.그의 말이 옳다. <파란 대문>이 보여준 화해의 제스처는 타협이 아니다. <악어>에서 <수취인불명&g
<씨네21>이 틀렸다 - <파란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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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5월4일 개봉,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미션 투 마스>(2000)는 너무 느리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배우가 만들어낸 SF가 이처럼 속도의 계율을철저히 거스른다는 건 믿기 힘들다. “조용할 필요가 없는 장면에서도 왜 이렇게 조용한가”라고 불평한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대원들이 파손된우주선을 수리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마치 주어진 시간을 몽땅 써버리겠다고 작심한 것처럼 천천히 움직인다”고 썼다. 이건 물론 의도된것이다. 보급선이 화성에 착륙하는 대목처럼, 다른 SF에서라면 흥행포인트가 됐을 긴박한 장면들이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도할리우드 SF치곤 꽤 차분한 편이지만, <미션 투 마스>에 미치진 못한다. <콘택트>가 또박또박 걷고 있다면, <미션투 마스>는 게으르게 헤엄치고 있다.독창성은 늘 의심받았지만,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가엔
<씨네21>이 틀렸다 - <미션 투 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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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4월5일 개봉, 앤서니 월러 감독한편의 영화를 볼 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때로는 오락이나 쾌락이고, 때로는 성찰이나 자각이고, 때로는 그저 위로다. <무언의 목격자>에서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서스펜스’다. 그런 점에서 <무언의 목격자>는 후안무치하고, 또한 그 이유로 매혹적이다. <무언의목격자>는 장르의 심연에 파묻힌 것을 끌어내기보다는, 장르의 표면 위에서 위험한 서핑을 즐긴다. 파도가 덮치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여,찰나의 순간 자신의 근육을 긴장시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다. 그 절묘한 타이밍과 숙련된 테크닉은 충분히 만점을 받을 만하다.앤서니 월러는 거장이 아니고, 선댄스 키드처럼 재기넘치지도 않는다. <파리의 늑대인간>은 공포영화의 단골 캐릭터인 늑대인간을 즐거운상상력에 기반하여 매끈한 액션을 선보였지만, <더 길티>는 ‘우연적인 운명’을 요령부득으로 다루고 있다. 앤서니 월러의 영화는 별다른심층이 없다
<씨네21>이 틀렸다 - <무언의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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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12월30일 개봉, 서극 감독서극은 오우삼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 오우삼이 할리우드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해외에서는 오우삼을 훨씬높게 평가했지만, <영웅본색>의 기획자였던 서극은 <동방불패>와 <황비홍> 등 홍콩영화의 흐름을 바꿔놓은 위대한히트작을 꾸준하게 만들어냈다. 그는 프로듀서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일류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서극은 많은 영화를, 그것도 너무 다양한 장르와스타일로 걸작에서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졸작까지 무차별적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만 10여편이 훨씬 넘는다. 단지 유행이 바뀌었기때문에 새로운 장르로 옮겨가는 왕정 같은 감독과는 다르지만, 서극의 영화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의도’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서극의 영화를 특징짓는 하나는 ‘재현’이다. <촉산>에서 전통적인 중국 무협지의 휘황한 액션을 ‘재현’하려 했던 서극의 시도는 할리우드의특수효
<씨네21>이 틀렸다 - <서극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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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의 개>는 개봉 당시 그리 평가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감수성의 영화’라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씨네21>에서도 '웃기지만 아리송한 질문을 남기는 이상한 코미디'라고 평했다. 현실과 영화를 진지하고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만화적 상상력’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단하는 시선은 분명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단한가? 단지 다르게 바라본다는 것이? <플란다스의 개>는 자신이 서 있는 ‘지금 이곳’에 천착하는 구세대와는 달리, 지금 이곳을 이탈하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상상력에 기울어져 있다. 범인을 잡으려는 현남의 시선 혹은 상상력에서 요동치는 가공의 관중이 내지르는 환호성은, 새로운 세대의 이상향이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만은 주인공이,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망. <플란다스의 개>는 그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인물들을 몰고 간다. <
<씨네21>이 틀렸다 - <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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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압니다. 영화 주간지의 일주일은 비교적 행복한 1/2과 비교적 불우한 1/2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수요일 밤은 <씨네21>의 일주일 중 불면과 한숨의 1/2이 문을 여는 순간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개봉작 리뷰 기사와 함께입니다. 관객과 상견례를 앞둔 영화를 한발 먼저 만나 품평하는 작업. 그것은 <씨네21>에 온갖 형식으로 담기는 영화 저널리즘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영화기자로서 갖는 기쁨과 곤혹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씨네시사실’ 기사를 위해 영화를 보고 쓰는 시간만큼은, 우리는 삶이 영화보다 몇배 중요하고 흥미롭다는 진리를 잠시 잊습니다. 시사회에서부터 딱한 안간힘은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배우의 눈가에 맑은 물기가 번질 때, 감동적인 음악이 스크린에 출렁일 때, 정교하게 디자인된 시퀀스에 숨이 막힐 때에도, 영화의 타고난 본성인 미혹에 지지 않으려 자세를 추스르며 기억해야 할 대사와 프레임을 머릿속에 베껴냅니다. 그러나 뱃사람이라고해서 바다의
<씨네21>이 틀렸다-미안해, 영화야 늦은 사과를 받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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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증가에서 질적 도약으로.”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유길촌)가 ‘2001년 한국영화 진흥사업’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지난 4월20일 영진위는 제13차 위원회 회의를 열어 ‘2001년 영화진흥사업계획 및 시행공고’안을 출석위원 7인의 찬성으로 수정·의결했다. 영진위가 펼친 사업들이 한국영화의 편수를 늘리는 등 양적 지원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면 올해는 금융자본을 비롯 영화계에 흘러들어오는 자본이 늘어난 시장상황을 고려해서 투자 자본을 안정화하고 독립, 단편영화, 애니메이션 등 기존 상업영화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던 분야에 역점을 두기로 한 것이 특징. 매번 문제가 됐던 판권 담보 융자 사업은 폐지됐으며, 장편 애니메이션 개발 지원 사업이 추가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용관 부위원장, 김홍준 위원 등이 지난 회의에서 긴급 제안한 미디어센터 설치 운영에 관한 안건도 상정되어, 올해 미디어센터 사업을 영진위의 정책 사업으로 확정하고 위원회 내에 소위원회의 기능을 담당하는 (가)영상미디어
새로운 계획, 질적 도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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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올 여름 체코의 보헤미안의 중심지역에서 한국영화회고전이 크게 열린다. 프라하공항에서 버스로 두 시간 남짓 북서쪽으로 가자면 온천장과 생수로유명한 카를로비 바리가 몇 세기에 걸쳐 쌓아올린 건축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이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에서 한국영화회고전이8일에 걸쳐 열릴 참이다.인구 10만도 못 되는 카를로비 바리에는 수도 프라하에도 없는 전통 깊은 재즈 음악주간과 영화제가 있다. 올해 36회를 맞는 세계 8대 A영화제의하나인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가 그것이며 행사 시기는 7월5일부터 14일까지다. 그리고 7월6일부터 13일까지 한국영화회고전이 ‘최근 한국영화의역동성과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8일간 열린다.올해 서른여섯 번째로 치러진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의 시작은 194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2년 뒤 공산주의 정권이 등장하면서 정부나당의 선전기구가 됐고 1953∼55년에는 영화제가 단절되기까지 했다.그럼에
한국영화의 향기, 동유럽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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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회고전에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을 말할까 한다. 앞으로 외지에서 나처럼 개인 차원으로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싶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다. 카를로비 바리 회고전은 내가 개발한 세 번째의 프로젝트다. 처음 것은 1994년 “독어권 지역의 한국영화 순회상영”이었다. 독어권 지역은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를 뜻하며 각국에서 2개월씩 상영기간을 가져 6개월 동안 3개국을 돌면서 스위스 16개 도시, 독일 14개 도시, 오스트리아 4개 도시에서 12편의 한국영화가 ‘새로운 물결’이란 주제로 상영됐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를 한번도 상영한 바 없는 도시가 대부분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쪽의 옛 영화진흥공사(이하 영진공)와 해외공보관의 후원과 스위스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가능했고 스위스 시네클럽의 전국 조직체인 시네리브르의 실무자들의 협조로 한국영화를 알리는 기초작업에 성공했다. 더불어 한국영화에 대한 독어판 책자도 하나 출간했다. 취리히에서 있었던 개막식에는 영진공의 윤탁
회고전 가는 길의 몇 가지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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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영화음악을 맡기로 한 계기는? 어떤 점에 마음이 끌렸나.1년 전 영화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웃나라에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게 기뻤고 베이징에서 김성수 감독을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해야겠다는생각이 들었다. 감독을 만나기 직전 시나리오를 받아봤는데 시나리오도 좋았다.기존에 했던 영화음악들과 달리 역사극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일본TV에서 역사드라마의 음악을 한 적은 있지만 영화로 시대극을 해본 적은 없다. 그 점이 흥미를 끌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사>가좋았다. <무사>의 음악은 사실상 김성수 감독으로부터 나왔다. 영화음악은 그냥 음악이 아니라 화면에 새겨넣은 음악이다. 감독이 무엇을원하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나는 그가 원하는 걸 하는 것이다.아무리 김성수 감독의 영화지만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난 사운드트랙은 감독의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셀린 디옹의 음반이나 서태지의 음반은 셀린 디옹과 서태
사기스 시로 영화음악 프로듀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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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찍을 때 보니까 다들 고생이 심한 거 같더라. 12월 말에 촬영을 마쳤는데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이번에는 오히려 담담했다. 4번째 작품을 찍으면서 영화 촬영 마칠 때마다 나름대로 감격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랬는데 <무사>는마지막 촬영을 하고나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영화를 완성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촬영하는 순서만 끝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어렵고 위험한 촬영도 많았기 때문에 촬영 들어가서는 그저 무사히 끝나기만 바랐는데 어쨌든 무사히 끝내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엄청난 분량을 찍어 와서 편집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30만자 필름을 텔레시네 떠서 아비드 편집기에 입력하는 데만 한달 가까이 걸렸다. 5주 동안 편집을 했는데 감독 입장에선 찍은 장면을 충분히살리지 못한 게 아쉽다. 찍으면서 영화가 길어질 거란 예상을 해서 편집 때 잘 정리해보자 생각했는데 편집하면서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도 버리기싫었다. 배우와 인물
김성수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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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의사운드작업 현장, 시드니에 가다적도를 지날 때는 안내방송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비행기는 남반구에 있는 거대한 섬,호주의 남쪽 끝에 이르렀다. 시드니, 오래 전 지리 시간에 세계 3대 미항 가운데 하나라고 일러준 그곳은 4월의 햇살이 눈이 부셨다. 푸르고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 곧게 뻗은 길과 장난감처럼 예쁜 집들이 11시간 비행의 피로를 금방 씻어간다. 공항에 마중나온 <무사>제작부장 최정화씨가 제작진이 한달 전부터 이곳에서 작업중이라고 일러주자 ‘오, 이제 제작진이 지옥을 떠나 천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4달 전 중국 씽청의 토성 촬영현장을 찾았을 때가 새삼 떠오른다. 히말라야 등반대처럼 눈, 코, 입만 내놓고 두터운 옷을 입은 채 펭귄처럼걷던 제작진들, 그들은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곤함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새옹지마라고 했나? 영하 20도를 넘는 강추위를 견디며 밤새 영화를찍던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
<무사> 후반작업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