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3D로 제작된 <안젤름>을 한국에서는 2D 평면으로 관람하게 되지만, 영화에 내장된 입체감과 공간감은 우리가 아는 2D영화들을 앞지른다. 극장 스크린을 독일 신표현주의의 거장 안젤름 키퍼를 위한 전용 갤러리로 만들려는 빔 벤더스의 야심이 상영 형식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1945년생 동갑내기인 두 예술가는 나치 시대를 가까스로 피해 태어났으나, 평생 독일인 정체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각자의 작품에 투영해왔다. 영화는 키퍼의 예술을 차근차근 설명하기보다는 관객들이 그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치들을 영화-미술관 곳곳에 설치해놓는다. 아티스트 전기영화의 일반적인 문법을 기대한다면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두 거장이 이뤄내는 기묘한 합일에 몰입하다 보면 얻게 되는 미적 경험의 순간이 있다.
[리뷰] 두 거장이 이뤄내는 기묘한 합일, <안젤름>
-
알제리계 프랑스 고등학생 파티마(나디아 멜리티)는 어느 날 자신이 여자에게 끌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만난 한국계 여성 지나(박지민)와 교감하며 퀴어 정체성을 받아들이지만, 사랑하는 어머니와 언니들 앞에서 이 새로운 자아를 드러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프랑스 내 북아프리카계 이민자 서사에서 부모 세대의 보수적인 종교성과 현지에서 성장한 2세대의 자아 정체성 사이의 충돌은 늘 치열하게 다뤄지는 주제다. <파티마가 사랑한 계절>역시 이 지점을 파고드는 성장영화지만, 작품을 상위 궤도에 올려놓는 것은 두 주연배우의 연기에 있다. <리턴 투 서울>을 통해 세계 영화계에 처음 소개된 박지민은 방황하는 청춘으로 다시금 분하고, 이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나디아 멜리티는 매 순간 독보적인 퀴어니스를 발산한다.
[리뷰] 용기 있는 캐스팅, 독보적인 커플링, <파티마가 사랑한 계절>
-
인기 반려견 훈련사 하영(최승윤)은 반려견 훈련 캠프에서도, 일상에서도 완벽한 리더다. 그러나 단 한명, 동생 소라(김승화)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살인죄로 복역하던 소라가 출소 후 하영을 찾아오면서 자매는 같은 공간에 놓인다. 소라의 등장과 맞물려 인근 지역에서 들개로 인한 사고가 잇따르고, 하영은 캠프에서 탈출한 유기견 두부가 들개임을 직감한다. <훈련사>는 어린 시절 같은 사건을 겪었으나 현재는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자매의 심리적 갈등과 들개 포획을 얼개로 긴장감을 점화시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를 맡은 김승화의 예측 불가한 연기와 최승윤의 절제된 연기, 또한 등장한 모든 개들의 연기가 출중하다. 서은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 영화이며 밴쿠버국제영화제, 예테보리국제영화제 등에 공식 초청되었다.
[리뷰] 통제 속에서 돌출된 연기가 숨을 틔운다, <훈련사>
-
전설은 어떻게 계승되는가. 전 지구적으로 열광했던 마이클 잭슨(자파 잭슨)의 전기영화 <마이클>은 그가 유년 시절 형제들과 함께 일궈낸 가족 밴드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제 이름으로 우뚝 서고자 했던 독립과 저항의 시기까지 삶의 굴곡을 흥미롭게 그려나간다. 마이클 잭슨 하면 떠오르는 친숙한 일화는 물론, 어둡고 내밀하고 사적인 에피소드를 보다 보면 어느새 천재 예술가의 우수를 이해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삶과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조응해나갔는지 관찰할 수 있다. 다만 ‘마이클 잭슨’이라는 성역을 건들 수 없다는 듯 신격화된 설계는 그의 아버지 조 잭슨(콜먼 도밍고)의 악랄함만 부각시키며 단편적으로 끝을 맺는다. 입체감 없는 스토리가 아쉽지만 그럼에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과 무대는 여전히 불가역적으로 아름답고 역동적이다.
[리뷰] 눈 깜빡하니 어느새 스타디움이 된 영화관, <마이클>
-
-
왕년의 할리우드 액션 스타 쟈니 케이지(칼 어번). 전매특허였던 가라테 액션이 시대에 뒤처진 뒤로 그는 매일 술에 기대 살아간다. 그렇게 무너져가던 그의 앞에 레이든 사부(아사노 다다노부)가 나타나 지구를 구할 마지막 전사로 선택받았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한편 샤오 칸(마틴 포드)에게 왕국을 빼앗긴 뒤 그의 양녀로 길러진 키타나 공주(아델라인 루돌프)는 복수심으로 가득 찬 채 채 토너먼트에 참가한다. 마침내 결전의 막이 오르고, 아웃월드 세력은 규칙마저 무시한 채 경기장 밖에서 상대를 제거하려는 계략을 꾸민다. 90년대 오락실을 주름잡았던 전설적인 격투 게임의 실사영화이자 리부트 <모탈 컴뱃>의 후속작이다.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은 잔혹한 ‘페이탤리티’ 연출을 한층 노골적으로 밀어붙이며 하드코어 액션의 쾌감을 전면에 내세운다. 새 캐릭터와 전작 인물들을 대거 복귀시켜 팬서비스에도 공을 들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인물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탓에 서사는 산만하게 흩어지고 감정
[리뷰] 과잉과 난잡함마저 오락으로 밀어붙이는 난폭한 팬서비스, <모탈 컴뱃 2>
-
세영여고 교생 은경(한선화)은 모교에 부임해 감개무량하다. 첫 출근날, 변함없는 교정을 걷고 옛 담임의 반까지 맡아 의욕이 솟지만 과한 열정 탓에 주의가 필요한 인물로 찍히고 만다. 앞으로는 몸을 사리겠다고 다짐한 것도 잠시, 빨간 망토를 걸치고 다니는 세 학생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학생들의 정체는 흑마술 동아리 ‘쿠로이 소라’. 동아리원 ‘아오이’ 지수(홍예지), ‘리코’ 샛별(이여름), ‘하루카’ 민지(이화원)는 전국 모의고사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들이다. 학생들이 요괴 이다이나시(유선호)에게 영혼을 바쳐 정답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은경은 제자들 걱정에 이다이나시를 직접 만나기로 한다.
<교생실습>이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아메바 소녀들’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라는 설명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김민하 감독은 첫 번째 작품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2024)을 쓸 때부터 시리즈화를 염두에 두고 거대한
[리뷰] 사탕을 문 호러의 에너지로 3편을 향하여, <교생실습>
-
홍상수 감독과 <씨네21>의 첫 번째 인터뷰. 홍상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대하여.
날짜 1996년 4월19일
장소 서울
사진 오계옥
[Archive]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인터뷰
-
성수동의 ‘무비랜드’는 일반 영화관과 다르다. 개봉작 대신 ‘이달의 큐레이터’로 선정된 아티스트가 직접 고른 영화를 상영한다. 코미디언 문상훈, 신우석 돌고래유괴단 감독, 배우 박정민·이제훈, 감독 엄태화, 가수 버논 등 다양한 분야의 큐레이터들이 그간 취향을 공유해왔다. 매주 목~토, 오후 1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운영되며 무비랜드의 1층은 매표소와 기념품 판매 공간, 2층은 예매자들의 대기 공간, 3층은 30개 좌석의 단관 극장으로 구성된다. 극장에선 매일 1편의 영화만 상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달의 큐레이터는 민희진 프로듀서로 <스플래쉬> <400번의 구타> <남과 여> <수영장> <나쁜 교육> 등 총 5편을 상영 리스트에 올렸다. 자세한 일정은 무비랜드 홈페이지 및 SN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태리차차 성수
무비랜드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골목 안쪽에 위치한 식당으로 정갈한 입구에 들어서
[씨네트립] 무비랜드
-
밥상 위에 히트곡이 너무 많아 접시를 비우기도 전에 다음 곡이 밀려온다. 영화 <마이클>은 127분의 러닝타임 중 절반가량을 노래로 채운 ‘히트곡 메들리’다. 놀라운 건 1988년까지만 다루면서도 <Man in the Mirror> <Smooth Criminal> <Rock with You> 등 수많은 대표곡을 미처 담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팝의 제왕이라는 수식어는 이것만으로도 완벽히 증명된다.
영화의 맹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어떻게 이 위대한 노래보다 더 위대한 삶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 노래를 만든 장본인의 삶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앤트완 퓨콰 감독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면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영화는 춤과 노래를 담는 데만 전심전력을 다한다. <마이클>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영화적 리듬이 뛰어나서라기보다 플레이리스트가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전반부까지는 비교적 잘 작동한다. 서
[커버] 온화하고 무해한 이미지로 방어하기 – 이병현 평론가의 <마이클>
-
영화에서 마이클 잭슨을 연기한 건 그의 형 저메인 잭슨의 아들, 자파 잭슨이다. 대중문화 역사의 얼굴이 되기로 한 어린 조카는 기꺼이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당사자의 생전 습관과 손짓의 각도, 음성적 버릇까지 많은 것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사실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팝의 아이콘을 연기하기란 혈연이라는 안정된 토대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혈연이기에 가족들로부터 훨씬 더 엄격하고 철저한 평가를 요구받았을 것이다. 모두가 기억하는 인물을 재현하기 위해 <마이클>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의상, 분장, 연기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끗을 올린 디테일을 들여다본다.
- 01 -
영화 캐스팅 초기 단계에 자파 잭슨이 주연 후보로 거론될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삼촌과 놀라우리만큼 닮았다는 말이 종종 나오긴 했지만 마이클 잭슨의 타고난 재능을 구현해내는 건 도전을 넘어 책임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파 잭슨도 말한다. “나는 배우를 꿈꿔본 적도 없다. 오히려
[커버] 부활의 방정식 - 마이클 잭슨을 구현한 의상, 분장, 연기 디테일
-
만약 누군가가 도대체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말문부터 막힐 것이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조금 대담하게 말해보자. 그는 21세기 사람들이 흔히 ‘팝’이라고 부르는 장르 아닌 장르를 개척해 완성한 사람이다. 종잡을 수 없는 대중과 까다롭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평론가들의 입맛 모두를 평등하게 사로잡아버린, 장르·인종·국경의 벽을 넘어 달콤하고 완전한 팝의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사람. 그가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마이클 잭슨의 존재감을 ‘산소와 중력’에 비유한 잡지 <롤링스톤>의 반응은 결코 호들갑이 아니다. 수천만을 넘어 억 단위로 올라가야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기록적 판매량이나 후대에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굳이 셈할 필요도 없다. 팝 음악의 역사는 마이클 잭슨 전과 후로 나뉜다는 게 음악 업계의 정설이다. 그는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 사이 인종의 벽을 부수고, 아무도 넘지 못할
[커버] 마이클 잭슨이 그렇게 대단해? - 마이클 잭슨의 대중문화적 영향과 의미를 담은 <마이클> 속 장면들
-
포털사이트에 ‘팝의 황제’라고 검색하면 제일 먼저 마이클 잭슨 위키 사이트가 나온다. 기묘한 일이다. ‘팝’은 마이클 잭슨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황제’ 또한 오직 그만을 위한 수식어가 아닌데 두 키워드가 조합됐을 때 인터넷 세상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그에게 인도한다. 언뜻 보기에 누구에게나 갖다 붙일 수 있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표현이지만,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딱 한명만 가리키며 고정돼버린 것이다. 따라서 팝과 마이클 잭슨의 운명적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전기영화 <마이클>의 핵심을 간파하는 것에 가깝다. 팝이라는 장르에서, 더 넓게는 대중음악의 카테고리 안에서 마이클 잭슨이 점유한 것은 무엇인가. 세기를 압도하는 그의 장악에는 어떤 사회적 함의가 포함돼 있나. 유행이나 트렌드같이 단편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로는 턱없이 모자란, 길고 오래된 역사적 맥락이 하나의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다.
<마이클>은 어린 마이클 잭슨(줄리아노 크루 발디)이 형제들과 함
[커버] 음악을 디딘 독립, 자유, 해방감 - <마이클>이 정의한 마이클 잭슨의 혁명
-
팝의 황제, 대중음악의 아이콘, 무대 위의 혁명가. 그 어떤 수식어를 떠올려도 실제 현실에서 마이클 잭슨이 쌓아올린 문화적 변혁과 정점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지 않아 세계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시절에도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20세기 대중문화의 원형이자 진정한 의미의 월드 스타. 오직 무대에서만 펼쳐지는 마이클 잭슨의 예술적 페르소나를 사랑한 이들은 검은 바지에 흰 양말, 한쪽짜리 장갑과 무심한 페도라 등 그의 시그니처 패션을 따라하며 그가 되길 원했다. 대중음악사에서 이제는 하나의 장르이자 클래식이 되어버린 사람. 영화 <마이클>은 마이클 잭슨의 자전적 일대기를 발판 삼아 그가 오랫동안 지녀온 억압과 속박, 책임과 지배를 속절없이 고백한다. 마이클 잭슨은 지구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상징과 의미를 되새기고, 이 모든 것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 <마이클>이 고군분투한
[커버] 팝의 전설, 영원히 - <마이클>을 통해 다시 보는 마이클 잭슨의 대중문화예술적 의미부터 분장·의상 제작기까지.
-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은 옛말일까. 사회경제적 이유로 아이 하나를 낳기도 주저되는데, 마을 전체가 아이 한명을 양육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까. 위 문장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보수당이 광부 공동체를 탄압한 1980년대 영국. 분노와 무기력 속에 신음하던 더럼카운티의 탄광촌에 발레 유망주 빌리 엘리어트가 등장한다. “이 마을엔 희망이 없다”고 냉소하는 발레 강사 미세스 윌킨슨도, 파업의 여파로 함께 굶주리던 노동자 조합원들과 (노조의) ‘배신자’도, 기약 없는 잿빛 미래 속에 불꽃을 내뿜는 소년에게 어떻게든 앞길을 내주려 십시일반으로 돈을 그러모은다.
한편 이야기 바깥에서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어른의 지원으로 완성된다(어린이 배우를 훈련시키는 프로덕션의 커리큘럼은 <씨네21> 1553호, 스티븐 돌드리 감독 일대일 인터뷰를 참조해도 좋다). 빌리가 수많은 발레 포지션과 탭댄스를 유려하
[culture musical] <빌리 엘리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