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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독립영화를 정리하는 영화제인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가 12월3일 폐막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독립영화의 축제는 성황리에 치러졌고, 이제 남은 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다. 개막작인 최승연 감독의 <스프린터>, 본선 장편경쟁부문 상영작인 김현정 감독의 <흐르다>, 오성호 감독의 <그 겨울, 나는>,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 상영작인 김미영 감독의 <절해고도>까지, 4편의 영화와 감독을 소개한다. 데뷔작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선보인 감독들.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국영화 혹은 한국 독립영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독립영화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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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대고 주접을 부리며 성장하기를 거부하던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가 사뭇 진지해지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는 예전의 가벼움으로 돌아와도 좋을 것 같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들은 늘 내게 어쩐지 덜 자란 어른이 꾸는 행복한 꿈, 혹은 망상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에 좀비, 로봇처럼 비현실적인 것들이 잔뜩 출몰하기 때문도 아니고, 주인공이 초인적인 액션을 가뿐하게 소화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늘 누군가 염원할 만한 ‘판타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서 좀비를 물리치고 여자 친구와의 행복한 일상을 되찾고 싶어 하고(<새벽의 황당한 저주>), 파트너와 함께 멋진 경관이 되고자 한다(<뜨거운 녀석들>). 친구들과 온 동네 맥주를 거덜내고 싶고(<지구가 끝장 나는 날>), 멋진 차를 타고 여자 친구와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다(<베이비 드라이버>). 얼핏 소박해 보이지만 삶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는 이
불온한 판타지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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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페데리코 펠리니를 떠올렸다. 펠리니 영화의 자전적 성향을 <신의 손>은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펠리니에 대한 오마주 그 자체로 보인다.
이 영화의 시작부는 다소 기이하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서 바라본 나폴리의 풍경이 나타난 이후, 카메라가 곧장 비추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파트리치아(루이자 라니에리)의 모습이다. 버스를 기다리던 파트리치아는 다소 몽환적인 상황을 겪는다. 그녀가 경험하는 사건 때문에 주인공 파비에토(필리포 스코티)의 가족들이 한데 모이지만, 그곳에서 파트리치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는 없다. 오직 파비에토만이 파트리치아가 어린 수도승을 만나서 두 시간이나 귀가가 늦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의 관전 포인트가 형성된다. <신의 손>은 훗날 감독으로 성장하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영화’이며, 욕망에 관한 자서전
화려한 만큼 정직한 욕망에 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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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끝자락에 선 기분이다. 매체가, 시대가, 삶이 바뀌고 있다. 저항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순응하며 살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두려운 와중에 몇편의 시가 나에게 왔다. 기꺼이 길을 잃을 각오로 몇편의 영화들을 더듬고 나니, 무릎 아래가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다. 이대로 주저앉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쯤에서 끝을 내야겠다. 여기가 끝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시작되는 영화들이 있다.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짓는 건 오로지 시작과 끝, 두개의 점이다. 연속된 삶의 어느 지점에 두개의 점을 찍을 때 비로소 이야기가 탄생한다. 현실을 이야기의 형태로 잘라낸다고 표현해도 좋겠다. 시작과 끝에 의미를 부여하고픈 창작자의 의지로 성립되는 또 하나의 현실. 그러므로 오프닝과 엔딩은 대체로 세계의 윤곽을 결정짓는 거대한 창문이다. 때론 창문 너머 비치는 세계보다 창틀 자체에 시선을 뺏기기도 하고, 창틀 너머 마주하는 첫 풍경이 모든 걸 결정짓기도 한다.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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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악기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한다. 여자가 서툴게 피아노를 두들기자 현란한 밴조 선율이 이내 따라잡는다. 현을 튕기는 이는 재혼한 여자의 새 시숙. 음악으로 말을 거는 그만의 방법일까 싶지만 피아노를 기다려주지 않고 놀리듯 앞서가는 밴조는 심술과 훼방의 도구일 뿐이다. 문을 젖히는 바람 소리가 끼어들어 한결 차갑게 들리는 2분가량의 기묘한 협연은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초반부를 대사 하나 없이 압축한다.
제인 캠피언 감독이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자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파워 오브 도그>는 토머스 새비지의 1967년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두 형제와 두 모자의 불편한 동거를 그린 심리 스릴러로서 시동을 건다. 이들이 처음 만난 곳은 1925년 미국 몬태나, 남편을 잃은 로즈(커스틴 던스트)가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와 함께 운영 중인 식당. 이곳에서 버뱅크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② '파워 오브 도그' - 웨스턴이 갱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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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국제영화제는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감독의 작품으로 줄리아 뒤쿠르노의 신작 <티탄>을 선택했다. 가장 마지막에 호명해야 할 황금종려상을 무대에 오르자마자 공개해버린 심사위원장 스파이크 리 감독의 실수로 폐막식 내내 혼란스러웠다는 뒤쿠르노 감독은 심사위원이었던 샤론 스톤을 껴안고 “역사처럼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샤론 스톤은 웃으면서 “자기야, 이건 역사가 맞아”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티탄>은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형식이 필연적으로 조응한다. 창조를 위한 파괴,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괴물의 탄생을 긍정하기 위해 전통적인 작법을 탈피하고 장르와 규범을 초월한다.
붉은 캐딜락이 포효한다. 흥분한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밀어내고, 나체의 댄서는 축축한 몸으로 차체를 쓰다듬는다. 틈 없이 가까워진 댄서와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점점 격렬하게 리듬을 맞추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댄서의 이름은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① '티탄'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괴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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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제74회를 맞이한 칸국제영화제는 지금까지 단 두명의 여성감독에게 황금종려상을 수여했다. 1993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언 감독이 여성감독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지 28년 후, 스파이크 리 감독을 필두로 한 심사위원단은 영화제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깨고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에 최고상을 안겼다.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부터 뜨거운 논쟁을 견인했던 <티탄>과 제인 캠피언 감독이 12년 만에 내놓은 신작 <파워 오브 도그>가 비슷한 시기에 관객을 만난다. 의도적으로 3막 구조를 탈피한 <티탄>에서 가장 파격적인 대목인 자동차와 인간의 성관계는 영화 시작 15분 즈음 일찌감치 등장한다. 에로틱 스릴러로 시작해 슬래셔, 블랙코미디, 가족 드라마로 노선을 트는 <티탄>은 어쩌면 21세기의 예수 탄생극을 의도한, 새로운 인류의 탄생 신화다. 1967년작 소설을 영화화한 <파워 오브 도그>는 14장을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①~② 다르고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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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웨이브가 ‘정치, 블랙코미디, 시트콤’ 성격을 띤 오리지널 드라마 제작을 위해 윤성호 감독에게 손을 내민 것은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영화 <은하해방전선>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이른바 ‘웹드라마’라는 단어가 낯설던 2010년 인디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내놓은 이후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길고 짧은 영화와 드라마를 유연하게 선보여온 그는 언제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는 창작자였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는 “로컬의 디테일이 중요한” 윤성호식 코미디가 어떻게 그 특수성을 바탕으로 보편적 재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 증명한 작품이다.
극 초반 “정치가 도대체 뭐길래”라는 절규가 등장한다. 정치를 어떻게 다루고 싶었나.
기획안에 맨 처음 쓴 문장이 “고작 우리 마음 얻으려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많은 경우 그걸 얻으려는 과정에 천착하는데,
"현실 정치를 공부할수록 공무원들을 리스펙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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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경고하겠는데 ‘이모저모’라는 말은 쓰지 마.”
문체부 디지털 소통팀 여민구 팀장(김현명)은 브이로그 담당 신입 직원 맹소담(김예지)에게 당부한다. 썸네일에 ‘요절복통’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더 안 보더라는 서글픈 경험도 덧붙인다. “우리 제발 일만뷰라도 넘겨봅시다”라고 애원하는 그는 ‘이날치’로 조회수 대박나서 어깨에 뽕 찬 관광청 홍보팀이 부러워 어쩔 줄 모른다. 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대사는 <이상청>의 작가들 모두 정부 부처 브이로그를 구독하며 관찰한 결과 탄생했다. 모든 공공기관이 유튜브를 비롯한 SNS 홍보에 경쟁적으로 뛰어든 시대상의 반영이다.
“정은씨 하는 짓거리 보면 완전 한남인데 한남! 완전 지가 한남이면서 뭐가 이렇게 잘났어!”
이정은의 사연을 팔아 작가로 거듭나려던 김성남은 이정은이 화를 내며 원고를 삭제해버리자 소파에 몸을 던지며 울부짖는다. 백현진이 인스타그램에 쓴 표현에 따르면 “한없이 후진 남성=한남”의 상징 같은 김성남이 여성을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명장면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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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을, 웨이브로부터 ‘정치, 블랙코미디, 시트콤’이라는 세개의 키워드를 건네받은 윤성호 감독은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가장 먼저 구상했다. 주인공인 여성이 청와대를 바라보며 ‘이렇게 된 이상 저기까지 간다’라고 결심하는 모습이었다. <정치 블랙 21> <열린 장관실과 그 적들> <나라와 권세와 영광> 등 가제가 몇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그 아이디어만큼은 접지 않았던 감독은 첫 대본을 웨이브에 보내기 직전, 제목이 ‘노잼’으로 보일 것 같다는 우려와 ‘어차피 나중에 청와대 보면서 끝나니까’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제목을 적어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라는 제목은 이말년 작가의 웹툰 <이말년 씨리즈> 등장인물들이 뜬금없이, 그러나 호기롭게 파국을 향해 달려가기로 의기투합하며 외치는 바람에 밈으로 유명해진 대사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청>은 스포츠 스타 출신 초보 정치인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는 꼭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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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근 감독이 데뷔작 <심장이 뛴다> 이후 10년 만에 스릴러영화로 돌아왔다. <유체이탈자>는 기억을 잃은 정보요원 이안(윤계상)이 12시간마다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신이 누군지, 몸은 또 어디 있는지 찾던 이안은 악당 박 실장(박용우)과 아내 진아(임지연)를 만나면서, 그들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간다. 한양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윤재근 감독은 졸업 후 광고감독으로 활동하다 1996년 밴쿠버필름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와선 <꽃피는 봄이 오면>과 <순정만화>에 참여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함께 영화관을 쏘다녔던 동갑내기 친구, 고 류장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윤재근 감독은 각본을 써서 완성한 작품들이었다. 군대 선임 허진호를 영화감독으로 이끈 고인은 윤 감독에게도 “영화적 동지”였다. 비록 류장하 감독이 영화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유체이탈자>는 현재 극장가에 활력을
오리지널이라는 자부심, 할리우드판 '유체이탈자'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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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변적 변수로 인식되어온 음악을 주연으로 만든다. 작곡, 작사, 연출, 연주, 노래까지 두루 아우르는 음악 창작자들을 조명하는 콘서트, 대한민국영화음악페스티벌(KCMF)이 올해로 2회를 맞이했다. 감독과 배우, 작가의 예술이 아닌 작곡가의 예술로 돌아보는 영화는 스크린이 아닌 무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서울그랜드필하모닉예술단, KCMF, 그리고 <씨네21>이 주관하는 이번 공연에는 이장호, 김한민, 오성윤 감독 등이 자문위원으로, 조성우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자문위원장으로 합류했다. 서울그랜드필하모닉의 60인조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을 통해 한층 더 웅장한 음향을 구현하며 조성우, 이지수, 심현정, 최승현, 홍대성 작곡가가 엄선한 대표곡들(<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실미도> <늑대소년>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등)을 만날 수
무대 위의 영화음악, 창작자를 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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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상상력과 기관의 의지가 더해질 때 좋은 콘텐츠가 빚어지곤 한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극적으로 그린 창작 뮤지컬 <세종, 1446>(연출 김은영, 극본 김선미, 작곡 임세영·김은영)은 민과 관의 협력으로 탄생했다.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내 극장 ‘용’에서 초연된 <세종, 1446>은 현재 전국 순회공연에서 전석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연예술계가 활력을 잃었을 때조차 <세종, 1446>은 비대면으로 관객을 만났다. 지난해와 올해 한글날 네이버 TV로 생중계된 무대는 전세계 17만명이 시청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세종대왕릉을 품은 여주시는 세종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뮤지컬 제작을 공모하였고, 그 과정에서 인물 중심 뮤지컬을 다수 제작한 HJ컬쳐와 협업해 작품을 완성시켰다. <세종, 1446> 제작과 공연의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여주세종문화재단의 김진오 이사장과 이종금 문화공연팀 팀장을 만나
한국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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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드라이버>(2017) 이후 4년 만의 컴백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2004), <뜨거운 녀석들>(2007),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 <베이비 드라이버> 등 재기 넘치는 장르영화를 연출해온 영국 감독 에드거 라이트의 신작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각기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펼쳐낸 호러영화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대도시 런던에 온 엘리(토마신 맥켄지)는 매일밤 꿈속에서 1960년대 소호에서 활동하는 가수 샌디(애니아 테일러조이)를 만난다. 샌디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려는 엘리의 의욕은 샌디가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하면서 무너진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근사하면서도 어두운 이 영화는 화려하지만 어두운 맨살을 드러내는 1960년대 소호에 바치는 애가이자 런던에 처음 당도해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다가 샌디의 당당한 삶을 동경하는 여성 엘리의 성장담
"과거를 낭만적으로만 포장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