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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겨울서점에는 아주 진지한 주제의 영상이 올라갔다. 내가 삶에 근본적인 회의가 들 때 읽는 책을 소개하는 영상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삶의 의미에 관한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던 입장에서 사람들과 내밀한 경험을 나누는 의미 있는 영상이 될 것이었다. 내밀한 만큼 그동안 만들지 말지를 두고 고민한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서점의 상황으로 보든 시기적인 측면으로 보든 이제는 이런 영상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고, 비정기 시리즈로 영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영상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올린 지 5일 만에 10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고, 댓글은 400여개 이상, 좋아요는 5천이 훌쩍 넘어갔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책을 다루는 영상이 이 정도의 반응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사람들이 영상의 주제에 반응했고, 내용에 공감했다는 뜻이었다. 댓글의 내용도 하나같이 진지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절절한 진심과 경험을 털어놓았다. 서로가 서로의 댓글을 읽으며 위로받았고 힘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일침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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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파고> <시리어스 맨>,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얼굴을 비친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브 박은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잊을 수 없는 표정으로 각인된다. 그가 연기한 경찰서장의 셰프 네스카피에 경위는 두꺼운 안경 뒤 온화함을 장착한 프로페셔널. 스티브 박은 네스카피에에게서 남다른 영혼을 연상한 동시에 조용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고독을 발견했다. 그는 그 동화의 여정을 웨스 앤더슨 감독의 차기작 촬영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연결된 줌 화면을 통해 들려줬다.
<프렌치 디스패치>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세계에 첫발을 들였다. 시나리오의 첫장부터 검토했는지 당신이 출연하는 에피소드 ‘경찰서장의 전용 식당’부터 읽었는지 궁금하다.
사실 웨스와 <개들의 섬>으로 먼저 만났다. 일본식 악센트가 가미된 영어를 구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몇몇 캐릭터의 목소리를 녹음했었다. 최종적으로 내 목소리는 쓰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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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다 스윈튼이 분한 베렌슨 기자가 들려주는 ‘콘크리트 걸작’의 중반부, 희대의 미술상 줄리안 카다지오(에이드리언 브로디)는 홀연히 공기를 뒤바꾼다. 그는 매끄러운 언변으로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들을 사로잡는다. 수의 차림일 때나 턱시도를 갖췄을 때나 동일하게 냉철하다. 웨스 앤더슨 사단의 오랜 멤버인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이번에도 잘 짜인 세계의 뾰족한 일부가 되어 태연한 인생을 살다갔다. 그는 감독을 향한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프렌치 디스패치>의 시각적 완벽함을 설파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다즐링 주식회사> <판타스틱 Mr. 폭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이어 웨스 앤더슨 감독과 네 번째로 협업한 영화다. 감독의 다음 작품에도 출연한다고 들었는데, 웨스 앤더슨 감독의 어떤 면모가 배우로 하여금 계속 그와 함께하게 만드는가.
웨스에게 전화나 메일이 와서 무언가를 같이하자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황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완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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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의 전작이 그러했듯 <프렌치 디스패치>는 독특한 촬영 현장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미장센을 구축했다. 주요 촬영지를 베이스캠프로 활용하고 미묘한 차이를 잡아내기 위해 같은 장면을 수십번 촬영하는 등 감독의 집념 덕분에 프레임에 담기지 않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생겨났다. ‘블라제’라는 영화 속 가상의 도시부터 미치광이 예술가 모시스 로젠탈러의 ‘콘크리트 걸작’까지, 극에 재미를 더할 <프렌치 디스패치>의 공간과 미술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한다.
01. 웨스 앤더슨 감독은 프랑스 전역을 상징하는 가상의 도시 블라제를 설정했다. 마땅한 지역을 찾지 못해 고심하던 제작진은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 앙굴렘에서 우연히 블라제의 모습을 발견했다. 앙굴렘에는 다양한 경사로와 계단, 고가교와 교차로 등 독특하게 쌓아올린 수직 공간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많아 영상에 예쁘게 담겼고 한편으론 리옹, 파리와 같은 도시의 느낌도 들어 촬영을 진행하기에
잡지처럼,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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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지면 LOCAL COLOR (3~4p)
오언 윌슨 ┃저널리스트┃ 허브세인트 새저랙
고대 성당 뒤에 위치한, 언덕 뒤의 오래된 도시 엔누이쉬르-블라제의 구석구석을 취재하는 기자다. 좁은 골목 사이로 보이는 도시 주민들의 일상, 유흥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밤거리, 하층민의 생활, 도시의 쇠락 등을 자전거를 타고 구석구석 누빈다. <판타스틱 Mr. 폭스> <다즐링 주식회사> 등에서 웨스 앤더슨과 합을 맞춘 오언 윌슨이 연기한다.
담당 지면 Arts and Artists (5~34p)
틸다 스윈튼 ┃저널리스트┃ J. K. L. 베렌슨
J. K. L. 베렌슨은 현대미술 분야를 취재하는 문화예술 전문 기자이자 현대미술 평론가다. 그는 켄자스 아트센터의 강단에서 예술가 모시스 로젠탈러의 ‘콘크리트 걸작’에 관해 소개한다. 모시스가 살인죄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계기와 그의 뮤즈 시몬과 함께한 작업 과정, 모시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큐레이터 줄리안 카다지오에 관한 일화를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를 만든 사람들: 캐릭터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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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디스패치>는 20세기 초 프랑스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 블라제를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에 영감을 준 실제 매체와 저널리스트들이 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고등학교 때부터 <뉴요커>를 즐겨 읽으며 잡지가 인도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웨스 앤더슨이 사랑했던 <뉴요커>와 멋진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타국의 문화(특히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프렌치 디스패치>는 잡지 제작 시스템과 당시 시대상을 이해할 때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을 정리해보았다.
헤밍웨이, 샐린저, 하루키가 글을 쓰는 잡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가 궁극적으로 입사하고 싶었던 곳 역시 <뉴요커>였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뉴요커>는 1925년 창간 이래 매해 47권의 잡지를 만드는 미국의 주간지다. 처음엔 맨해튼을 중심으로 한 15센트짜
힙과 전통 사이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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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 시사회가 열리던 날, CGV용산에 도착하자마자 깨달았다. 볼펜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것을. 근처 편의점에서 300원짜리 모나미 볼펜을 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왜 항상 볼펜을 빠뜨리는가. 영화 기자는 눈으론 영화를 보며 손으론 스크린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정보를 수첩에 메모한다. 리뷰를 쓸 때 종종 주인공 이름 철자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므로 메모는 필수다. 특히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온갖 지명과 인명, 인물의 사연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을 정신없이 따라가야 하는 영화를 볼 땐 더더욱 그렇다.
잡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프렌치 디스패치>는 한권의 ‘보이는 잡지’를 지향하는 영화다. 이번 영화는 웨스 앤더슨 감독이 어릴 때부터 즐겨봤던 잡지 <뉴요커>와 그가 사랑하는 프랑스에 헌정하듯 만든 작품이다. 이를 알고 있던 편집장은 지난주 편집회의에서 <프렌치 디스패치> 특집을 여는
‘프렌치 디스패치’의 폐간을 막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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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에 대한 변태적인 집착, 엉뚱한 상상력과 인공적인 세트. 웨스 앤더슨은 특정 장면만 잠깐 보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비주얼리스트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개인의 취향을 고집 있게 드러낸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배경인 프랑스의 앙뉘 쉬르 블라제는 가상의 도시이며 ‘더 프렌치 디스패치 오브 리버티, 캔자스 이브닝 선’이란 매거진은 실재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작품이 ‘68혁명’이 일어났을 즈음 프랑스를 배경으로 했고 잡지 <뉴요커>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웨스 앤더슨은 고등학생 때부터 <뉴요커>를 탐독하며 수백권의 과월호까지 구입할 만큼 잡지의 세계에 매료된 팬이었다. 그는 잡지의 섹션을 나누듯 에피소드를 쪼갠 앤솔러지 형식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매체와 전설적인 저널리스트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매
웨스 앤더슨이 재창조한 아름다웠던 잡지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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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칸토: 마법의 세계>는 <주토피아>를 만든 바이런 하워드와 재러드 부시 감독 듀오와 뮤지컬 <해밀턴> <인 더 하이츠>의 작곡가이며 <모아나>의 노래를 만든 린마누엘 미란다가 함께한 디즈니의 60번째 애니메이션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교차로”라고 불리는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엔칸토: 마법의 세계>는 마법의 축복을 받은 마드리갈 일가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갖지 못한 소녀 미라벨(스테퍼니 비어트리즈)이 위기에 놓인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자처하는 ‘디즈니 히어로’ 이야기다.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화려한 색채와 비옥한 자연, 힙합에서부터 민속음악까지 아우르는 스펙트럼 넓은 린마누엘 미란다의 뮤지컬 넘버, 선악으로 대립하지 않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등 <엔칸토: 마법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다섯 가지 키워드를 준비했다.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화상으로 진행된 기자회견과 인터뷰가 바탕이 됐다.
키워드로 미리 보는 애니메이션 '엔칸토: 마법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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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신선한 공기와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없어도 절대 살아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는 것.” 요 네스뵈의 <킹덤>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 가족의 사랑에 대한 범죄소설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말이 가족의 범주를 정하고, 내부를 지키기 위해 외부를 배척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을까. 요 네스뵈는 두 형제를 중심으로 범죄자의 심리를 추적해간다. 요 네스뵈의 대표작인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스탠드 얼론’, 즉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는 소설 <킹덤>은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로위’라는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로위는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친구, 애인, 이웃, 지역, 국가 모두를 앞세우는 가치가 바로 가족이라고 교육받는다. 로위는 동생 칼을 잘 돌보려고 노력하는데, <킹덤>은 초반부터 로위의 세계가 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씨네21 추천도서 <킹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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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전 대법관의 독서 에세이. 어린 시절에 읽은 소설들에서 시작해,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 작가들을 지나, 현대인의 삶을 담아낸 이야기들에 도달하는 <시절의 독서-김영란의 명작 읽기>는 개인의 성장사이자 생애사가 책을 통해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저자의 삶이 중심에 있고 책이 거드는 방식이 아니라, 독서 목록을 재구성하면서 개인사가 살짝 언급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저작이 비소설을 포함해 다수 남아 있게 된 이유에는 남편 레너드 울프가 출판업자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문학사를 위해서는 너무나 행운이지만 버지니아는 마치 몸에서 뽑아낸 거미줄로 집을 짓는 거미처럼 작품 속에 자신의 인생을 온전하게 녹여넣는 방식으로 글을 써왔으므로 글 밖에서는 온전한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런 버지니아 울프의 구심점이 된 것이 바로 블룸즈버리그룹이었는데, 저자 자신은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발을
씨네21 추천도서 <시절의 독서-김영란의 명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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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의 개> <세브린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등을 연출한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자서전. 그는 1900년 2월22일 태어나 1983년 7월29일 세상을 떠났는데, <루이스 부뉴엘: 마지막 숨결>이 처음 출간된 해가 1982년이니, 영화의 초기 수십년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까지의 이야기는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후 초현실주의를 접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관을 정립해나가고 영화를 만든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해나간다. 1900년대 초반 성장기에 대한 회고에서는 이후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가 보여주는 어떤 정서(특히 욕망에 대한)가 어떻게 그 안에서 뿌리내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기술된다. 당연하게도, 책의 중반부는 20세기 유럽의 예술사(미술과 영화)를 대표하는 인명사전 수준이 되는데, 르네 마그리트와 그의 부인과 식사를 하고, 앙드레 브르통은 트로츠키를 만난 경험을 들려주고, 만 레이, 루이
씨네21 추천도서 <루이스 부뉴엘: 마지막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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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쓴 세권의 소설에는 모두 무언가를 잃는 사람이 등장한다. ‘나’가 사는 세계에서는 매일 무언가 하나씩 소멸, 삭제된다. 어느 날은 상자를 묶는 리본이, 어느 날은 새가, 다음에는 장미가, 어느 날에는 향수가 사라진다. 물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과 그것을 칭하던 단어까지 삭제된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기억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비밀경찰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어디론가 끌려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 <은밀한 결정>의 내용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가 사고 후 기억하는 기능을 잃어버리듯 <은밀한 결정>의 사람들도 기억을 강제로 빼앗긴다. 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홀로 추억하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은둔하며 사물을 기억하는 ‘나’의 엄마는 향수 냄새를 기억하고, 단어를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엄마는 사라진 것들을 왜 그
씨네21 추천도서 <은밀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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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이거 <첫 맥주 한 모금>이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18페이지에 두둥! 하고 그 글이 나와버렸다. 1999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후 절판되어 나 역시 몇년 전 도서관에서 겨우 빌려 읽었던 바로 그 책! 중고 서적으로 구매할까 했지만 원래 책 가격의 열배나 비싸게 팔고 있기에 포기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쓰다 보니 무슨 홈쇼핑 광고 같은데, <첫 맥주 한 모금>은 제목만으로도 궁금해서 헌책방을 뒤지게 만들던 책이었다. 맥주는 첫 모금이 가장 맛있는데, 그걸 아는 프랑스인이라면 그 에세이는 더 볼 필요도 없이 재밌지 않겠는가. 게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류의 수필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어머, 이건 꼭 사야!’ 하는 책인 것이다. 재출간되면서 책 제목은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으로 바뀌었다. 맥주에서 크루아상으로, 주류에서 베이커리로 제목을 바꾸고 표지에는 가을 스웨터와 강아지풀 그림이, 내지에도 소재에 걸맞은 귀여운 삽화
씨네21 추천도서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