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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월드 뮤직은 없다’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세계 음악’일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세계 각 지역의 독특한 자기표현 수단으로서의 개별 ‘폴크로리크’ 음악이 ‘월드 뮤직’이라는 개념으로 묶일 수 있을까.그렇게 된 건 우선적으로 서양의 제국주의적 인류학의 산물이다. <라디오 프랑스>나 의 ‘오디오 자료’ 서가에는 각국의 민속음악들이 이잡듯 수집되어 있다. 그 방대한 규모의 ‘디스코테크’는 살아 있는 음악의 보고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곳은 표본들의 공동묘지다. 그 음악들은 등에 핀이 꽂히고 방부처리된 채 액자 안에 영원히 전시되어 있는, 파브르의 곤충들과 다를 바 없다. 서구의 근대적 기획은 그렇게 런던, 파리 등의 핵을 중심으로 전세계를 줄세우는 일을 했다. 모더니즘은 시간적으로 가장 앞선 서양의 심장 속에 ‘세계’라는 과거를 전시한다. 미래의 인공낙원에 그들이 먼저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시작된 그 줄세우기의 일환으로 월드 뮤직에 대한 연
우리 것처럼 대해야 할 남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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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영화가 따로 있긴 있는 것 같다. 앵글이나 미장센의 정교한 선택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영화들을 보면 말이다. 비주얼은 먼저, 그리고 화려하게 다가온다. <내츄럴시티>도 그렇다. 그러나 그게 다는 물론 아니다. 의외로, 비주얼이 기억 속에 박히는 작용은 비주얼 바깥의 어떤 것들과의 결합 속에서 훨씬 강렬하게 이루어진다.<내츄럴시티>는 SF영화이다. SF 중에서도 사이보그나 리플리컨트, 그리고 사람이 섞여 등장하는 영화들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으레 <블레이드 러너>나 <토탈 리콜> 같은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내츄럴시티>는 특히 <블레이드 러너>를, 내용이나 미장센에 상관없이 상기시킨다. 아마도 그 설정들 때문에 그러리라. 그래서 음악 역시 그쪽 분위기로 가지 않을까 하는 선입관을 가지기 쉬울 것이다. 알다시피 <블레이드 러너>에서 들려준 반젤리스의 앰비언트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는 심플하고 절제된, 어딘지
미래적 일상의 서정성,<내츄럴시티>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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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자신을 믿어주는 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시기가, 인생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쳐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을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자신을 믿어주는 누군가의 마음이 있다면 살아낼 수 있다.“깨닫지 못할지라도,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답니다”는 부제가 붙은 요네쇼 마야의 <learn to love>는 러닝타임 3분의 단편이다. 1985년부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온 요네쇼 마야의 표현양식은 서서히 구상에서 추상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컷아웃애니메이션, 클레이애니메이션, 3D애니메이션, 퍼핏애니메이션 등 온갖 기법을 넘나들던 작가는 이윽고 추상적인 표현양식을 선택했다. 캐릭터와 스토리, 대사에 의존하는 대신 문양과 색, 운동을 통해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작가가 컴퓨터로 직접 만들어낸 단순한 음향과 일본인에게는 생경한 소리로 들리는 타국의 언어가 첨가된다. 하나의 화면에서 다양한 프레임을 보여주는 효과를 내
당신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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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은 불운하다. 작품이 막 피어날 때면 여지없이 잡지가 폐간된다. 폐간의 상처를 채 추스르기도 전에 새로운 연재에 돌입해 작품을 망칠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작품마다 편차가 크다. 심지어 한 작품 내에서도 밀도있는 연재부분과 연재없이 완성된 부분이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유정은 여전히 한국 만화의 미래를 기대하게 해주는 작가며, 다른 작가와 다른 자신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실험하며 진보하는 작가다. 이번에 단행본 1, 2권이 출간된 <미나>는 전작의 불안한 행보를 추스르고 안정된 완성도를 보여준 연재작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도 연재되던 잡지 <영점프>가 폐간되는 불운과 마주하게 된다.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미나>는 이유정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과 직면한 공포, 나를 다스릴 수 없는 공포는 결국 내면의 상처를 만든다. 이 거대한 트라우마는 아프게 인간을 파괴한다. 목숨을 걸
아프냐,아프냐,아프냐,이유정의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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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무덥지만 마음속에 이미 여름이 끝나버린 지금, 변변히 휴가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떠올려 보는 ‘내 인생의 영화’라니…. 이 얼마나 고독한 풍경이란 말이냐!
돌이켜보니 영화라는 존재가 로맨틱한 무엇으로 자리잡은 때는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고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불어반에 가입했던 나는 프랑스 문화에 대해 각자 조사하고 발표하는 시간에 ‘프랑스의 주요한 영화사조: 누벨바그’를 소개했다. 당시 나의 유일한 영화교과서였던 <스크린>과 <로드쇼>에서 베껴쓰고 오려붙여 만든 B4 크기의 발표지를 복사해서 나눠주고 발표 간간이 라디오에서 녹음한 영화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 열의와 선진 영화문화에 대한 혜안(!)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졸음 가득한 눈초리를 떠올리면 아마도 ‘지루한’ 프랑스영화에 대한 선입견만 길러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마저 인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 <귀여운 여도적>이나 <까미유 끌로델>이 ‘'누벨바
로맨스에 눈뜰 때, <트루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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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의 세포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분열해. 그럼 하나의 세포가 두개로 늘어나느냐? 아니지.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거야. 생각해봐. 두개의 세포가 모두 살아남으면, 인간은 곧 거인이 되겠지. 즉 다른 한쪽이 상대적으로 작아지면서- 그 속에 분열과정에서 생긴 노폐물과 독소가 모두 담기는 거야. 즉, 자멸이지. 바로 그 때문에 살아남은 세포는 청결한 세포,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거야. 이걸 바로 리프레시먼트(refreshment)라고 부르지.물론 리프레시먼트 따위를 내가 알 리는 없고, 의사인 내 친구(그래, 앞으로 이놈을 똑똑이라 부르자)가 술자리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이유는 알 수 없고, 얘기를 듣는 순간- 문득 뭔가 그런 과정을 겪어봤음직한 기분이, 나는 들었다. 글쎄,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은 어땠을까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튼 분열과정에서 생긴 노폐물과 독소- 그런 것들로 침수된 사춘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즉 한마디로, 나는 살기가 싫었다. 물론 아주
죽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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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중산, 파주 운정, 용인 기흥, 다시 파주 교하…. 지난 몇해 동안 내가 산 곳들이다. 남보다 게으르게 살지 않았지만 일가친척을 다 뒤져 당장 돈 500만원 빌릴 데 없는 알량한 배경을 가진 내가 그런 형편인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은 단지 정직하게 일한다고 집을 마련하거나 돈을 모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자로서 예수를 좇는 사람으로서 내 그런 형편에 만족한다. 아내는 나와 열세해 동안 살면서 열세번 이사를 다녔다. 유랑 생활은 아무래도 여자쪽을 더 고단하게 만들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남편을 공경하는 봉건적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집이야 오르면 다른 데로 옮기면 되고 돈이야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정도면 되지만, 같이 사는 인간이 돈이나 명예 따위에 자존심을 내주는 꼴은 볼 수 없어서다. 내가 개혁과 진보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잘 나가는 지식상품의 행보를 접을 때도 그는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아내는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대화할 때 아내는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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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이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이유는?건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고, 도망노예의 미학 사무라이를 떠올리다어느 날 당신이 노예로 팔려간다고 치자. 당신의 주인이 된 자는 포악한 지배자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신은 주인의 권력을 전복시킬 만한 힘이 없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주인 앞에서는 아부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노예끼리 모여서 뒷담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일상의 반복. 하지만, 이 이중적 태도를 몸에 밴 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비열한 술수로 느끼는 자의식 강한 노예가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이중적 태도에 대한 자기검열의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 노예의 자리에서 온전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인가.이 난해한 문제를 인상적으로 해결한 두 종류의 인물이 있다. 흑인 노예 ‘엉클 톰’은 엄연히 존재하는 주인과 노예의 경계를 휴머니즘이란 지우개로 지워버렸다.
도망노예의 미학 사무라이를 떠올리다,<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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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하고 있고,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있지.” 차가운 냉소를 감추며 이제 갓 소실로 입적할 한 풋내기 처녀에게 게임의 규칙을 한수 가르쳐주는 여주인공 조씨 부인의 말대로, 한때 대한민국에서는 ‘모두들 보고 있고, 모두들 만들면서도 모두들 못 본 척한’ 장르가 하나 있었다. 바로 토속 에로물. 1980년대 대표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 장르는 대개 두 종류의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영화 <산딸기>나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처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여자에 대한 환상으로, 전형적으로 산골 출신의 무지렁이인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소유한 남자들을 따라 인생 유전을 거듭한다(놀랍게도 안소영이 주연한 영화, <산딸기>의 이야기 구조는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영화 <말레나>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 구조는 이들과는 반대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여자에 대한 환상
탐미적 에로티시즘에서 피어난 조화,<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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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한 친구에게 당시 자신이 느끼고 있던 참담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네. 창작을 하지 않는다면 난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 감옥에 있을 때에도 내 인생에는 나아갈 방향이란 게 있었지. 극복해야 할 현실이 있었으니까 말야. 지금의 나의 삶이란 건 죽음보다 못하다네.”파라자노프는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64)라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걸작을 가지고 세계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당대의 새로운 재능이었지만 소련이 봤을 때 그는 퇴폐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영화, 한마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식적인 창작 원칙과 위배되는 영화를 만드는 위험인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파라자노프의 다음 프로젝트가 될 시나리오들은 당국에 의해 연이어 거부당했고 오랜만에 완성된 차기작(<석류의 빛깔>, 1969)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재편집된 형태로,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경로를 통해서만 공개될
이미지와 음악의 드라마트루기,<수람 요새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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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처녀 이레나는 4살 때 헤어진 오빠 폴과 조우한다. 이상하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폴에게 영문도 모르는 채 불편함을 느끼던 그녀는 동물원 관리인 올리버와 사랑에 빠진다. 분노한 폴은 이레나에게 자신들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캣 피플이라며, 동족끼리만 짝짓기를 할 수 있다고 폭로한다. 인간과 섹스하면 표범으로 변하게 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려면 상대방을 죽여야만 한다는 끔찍한 사실 앞에 이레나는 경악한다.걸작도 아니고 이른바 문제작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오랫동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아주 개인적인 컬트의 제단 위에서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 되는 특정영화들이 있다. 폴 슈레이더의 <캣 피플>이 그런 영화다. “날 죽이거나, 날 해방시켜줘.” 신화 혹은 악몽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치명적으로 불편한 러브스토리, 아름답고 날쌘 표범의 음험한 매혹, 육질의 느낌으로 끈적하게 휘감아 들어오는 비정상적인 쾌감. 80년대 인구에 회자되던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의 실체를 ‘무
에로틱 공포영화의 수작,<캣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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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킹> 스페셜 버전은 DVD 타이틀의 모범적인 예로 기록될 만하다. 먼저 본편에는 5분가량의 새로운 시퀀스가 선보인다. 무파사의 비서인 자주가 전날 정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속전속결로 브리핑하는 노래 <Morning Report>가 바로 그것. 각각의 캐릭터에 걸맞게 꾸며진 게임들, 그리고 삭제장면과 더불어 사장됐던 무수한 아이디어들이 ‘코끼리 무덤’이라는 위트있는 제목하에 선보인다. 뿐만 아니라 구약과 셰익스피어의 <햄릿>까지 참조했던 스토리 창작과정, 제작 초기단계에 2주간 아프리카의 케냐를 답사했던 자료사진과 촬영화면들, 아트디렉터의 상세한 해설, 뮤지컬 <라이온 킹>을 연출했던 줄리 테이모어와 함께하는 뮤지컬 버전 탐구, 엘튼 존과 한스 짐머의 음악해설 등 ‘<라이온 킹>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장대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무엇보다 월트 디즈니에서 극장용 사운드를 가정용 5.1 홈시어터 시스템에 맞도록 새롭게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준다,<라이온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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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두야! 학교 가자> KBS2TV 월·화 밤 10시KBS가〈대장금〉과 〈왕의 여자〉에 대적하기 위해서 집어든 카드는 ‘비’가(그리고 ‘빈’이) 나오는 코미디다. <상두야! 학교 가자>의 줄거리는 복잡하다. “상두의 옛 애인인 공효진의 남자친구인 이동건은 상두를 좋아하는 한 여자가 상두에게 상두의 딸이라고 말한 백혈병 걸린 아이의 담당의사 선생님….” 〈해피투게더〉에 출연한 비, 빈과 이동건이 〈상두야! 학교 가자〉에서 이동건의 역을 설명하는데 위와 같은 내용이 자막처리되어야만 했을 정도다.여기에 덧붙이자면 “상두에게 그의 딸이라고 말한 백혈병 걸린 아이의 엄마는 상두의 첫사랑이자 학교선생님인 공효진의 새어머니가 공효진의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낳은 아이로 그 아이를 아버지 집 앞에 버려두고 온 뒤 못내 잊지 못하는 아이”가 사이드 스토리로 붙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두야! 학교 가자〉는 “상두(비)의 삼촌은 상두를 아이 잃은 부잣집 문 앞에다 놓아두고 가
상두가 왜 학교에 갔냐고?<상두야! 학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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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향기가족끼리 절대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 운전교습! 류승진 감독의 (35mm/ 2003년)는 아버지에게 운전교습을 시키는 아들을 묘사한다. 아버지의 연이은 실수에 아들은 짜증을 내고, 왜 그가 이제야 운전을 배우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측은지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한번도 단둘이 여행을 한 적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여행을 권한다. 아버지는 낯설게 운전을 해 교외로 차를 몰지만, 차는 지방국도에서 멈춰서버린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자동차 앞에서 망연자실한 아버지를 뒤로 하고 어머니는 화사한 봄풍경을 응시한다. 어렵게 떠난 여행에서 둘은 그동안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로운 4월의 향기를 맛보는 것이다.하준원 감독의 <One Fine Day>(35mm/ 2003년)는 기묘한 분위기의 단편이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내몰린 가장 H. 갈 곳 없는 H는 하루종일 집안에만 머물며, 줄넘기를 하거나 면도를 한다. 하지만 아내와 딸 모
[단편 · 독립영화] <4월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