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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있다. 남자가 무엇인가 물었고 여자는 귓가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본다. <인터뷰>의 메인 이미지로 선택된 사진에서 배경이 되는 파리 센강의 풍경은 식별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마치 ‘여기가 파리라는 사실은 잊어도 된다. 이 아름다운 남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시선과 실루엣 만으로 이국의 풍광을 압도하는 그들은 심은하와 이정재다. 모름지기 배우라면 존재만으로 스펙터클이 되는 게 당연하지만 둘의 조화가 이루는 시각적 쾌감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만남에서 더하거나 뺄 것 없는, 구질구질한 삶 저 너머에 있을 것 같은 낭만적 신화를 예감한다. 영화제목이나 내용을 몰라도 그런 이미지가 노크할 때 무의식의 문은 쉽사리 빗장을 연다. 영화의 성패는 두고볼 일지만 둘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에 눈길이 오래 머무는 건 당연하다.
심은하
보통 빛은 어둠에서 돋보이지만 그녀의 환함은 맑고 투
그들, 삶 저 너머의 낭만적 신화, <인터뷰>의 심은하·이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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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은하간 범죄 인도 협정’이 체결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이로 인해 나와 스컬리 요원은 FBI가 수십년간 좇던 문제의 범인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범인의 심문은 극비리에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이 공표되었을 때 지구인들이 받게 될 엄청난 충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문 막바지에 피해 당사자로부터 탄원서가 날아왔고, 범인을 은하계 바깥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수사는 종결되었다. 이 심문 기록은 ‘협정’에 의해 24시간 내에 자동소각될 것이다.
멀더: 당신은 지금까지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 중 가장 선량한 종족으로 알려져왔다.
E.T: 나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선하게 보든지 그러지 않든지 하는 것은 당신들의 판단일 뿐이다.
멀더: 스스로 기만적이라 여기지 않았나? 그렇게 착한 눈빛으로, 그 어린 소녀의 몸 속에 끔찍스런 독소를 주입하다니.
E.T: 운이 없었을 뿐이다. 아니 바보처럼 나의 꾐에 넘어갔던 그녀의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포이즌 배리모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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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모 대학 교양국어 교과서에 ‘디즈니 만화의 여성상 분석’과 ‘멜로 영화 비판’에 대한 글을 실어도 좋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내 글이 무슨 신경숙의 <풍금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굳이 교과서에 영화 글을 실을 때야, ‘아버지의 업보를 탈피하라’ 라든가 ‘끔찍이 잘해주는 남자를 찾는 것이 못되게 구는 남자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여성을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만들어간다’하는 소리들이 뭔가 이야기거리가 되긴 되었나보다. 그래서 드는 생각.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영화 평론가라는 업을 가지고 카산드라의 머리카락을 뻗치고 살면서도 이 땅의 남성을 향해 얼굴을 돌린 적이 없구나. 남자들도 땅 좁고 사람 바글바글대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왜 아직까지 관심이 없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요즘 한국영화의 기류 속에 남성 주인공들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
한때 멜로 영화의 홍수 속에 ‘한석규, 박신양’으로 대표되는 ‘잘해주는 남자’가 여성관객의 영원한 오빠
최근 한국영화들에 나타난 남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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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린 버냄양.
아니 아네트 베닝씨.
<아메리칸 뷰티>에서 당신을 만나뵙고 난 뒤, 저는 자위란 무엇일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도직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줌마에게 <아메리칸 뷰티>는 자위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레스터 버냄, 그러니까 케빈 스페이시는 그 영화에서 두번이나 딸딸이를 칩니다. 한번은 샤워하면서, 한번은 마누라인 당신 옆에서.
그런데 당신은 한번도 치지 않았습니다.
물어보고 싶습니다. 안치고 싶을까?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에 묘사된 자위의 두 장면이 생각납니다.
하나는 청춘남들의 ‘떼 딸딸이’였습니다. 공장다니는 10대들이 기숙사 방에 누워 호르몬을 분출하기 위한 내기를 합니다. 딸딸이 쳐서 누가 더 멀리 정액을 쏘나. 요이 땅. 열심히 칩니다.
하나는 주인공의 누나인, 형편없는 조연인 영희의, 아주 문학적인 ‘춤2입니다. 혼자, 남몰래, 오메 누가 볼라 부끄러워라 은밀히 추
[아줌마, 극장가다] 버냄양, 안 치고 싶어요? <아메리칸 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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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기억 가운데 아주 끔찍했던 장면이 있다. 시시때때로 나오는 반공드라마에서 인민재판을 하는 모습이었다. 반공 청소년으로 커가는 데 밑거름이 된 그 장면을 보며 몸서리친 이유는 순전히 죽창이 몸을 뚫는 잔인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인민재판 자체가 끔찍한 것이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오늘날 흔히 이지메라 부르는 이것은 집단이 개인을 통제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방법이다. 꼭 죽창을 쓰지 않아도 이지메를 당한 자의 영혼은 피눈물을 흘린다.
뒤늦게 <혈의 누>를 보면서 가물가물했던 인민재판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감독의 말로 확인한 바는 없으나 김대승 감독 또한 인민재판의 끔찍한 이미지에서 <혈의 누>를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희생자의 몸이 나무에 꽂혀 있는 장면이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찢겨나가는 장면은 한국전쟁의 상처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잔인함이 흥행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생각하
[편집장이 독자에게] 군대는 선, 국적 포기는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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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8일
난 손수건 이름표를 단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가게는 시내 중심부인 금남로에 있었다. 5월1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이제 막 자신의 가게를 차린 아버지는 휴일이라도 쉬지 않으셨던 것 같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친구도 없던 난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게에 갔었고, 금남로 5가의 4거리에 있는 유명약국(이름대로 정말 광주에선 유명한 약국이었다)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개머리판으로 한 남자를 무자비하게 짓이기는 것을 봤다. 꽤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무섭진 않았다.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였나.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몰라서였나. 정말 오랫동안 지켜봤다. 이튿날엔 늦잠을 잤던 것 같은데 부모님은 날 깨우지 않았다. 학교에 안 가도 된다고 했고, 그저 집에서 꼼짝말라고 했다. 저녁 늦게 들어온 부모님이 어느 골목길에서 멍석에 둘둘 말린 시체를 보았다는 말을 잠결에 들었다. 그런 날들이 일주일 넘게 계속됐다.
[오픈칼럼] 5·18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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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나쁜 건지, 내가 나쁜 건지, <에쥬케이터>라는 영화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만약 내가 나빴다면 <에쥬케이터>를 보는 나의 시선이 경직된 페미니스트의 것이어서인지, 정반대로 완전히 남성중심주의에 포획된 건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헷갈린다.
<에쥬케이터>를 보면서 나는 몇년 전 <씨네21>에 씹었던 <태양의 눈물>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는데 이 말 들으면 감독이 무지 열받을 거다. <태양의 눈물>은 안톤 후쿠아라는 감독의 이름이 무색하게 쌍팔년도 스타일로 막 달려가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열받았던 이유는 여주인공 모니카 벨루치 때문이었다. 그녀는 영화에서 지적인 여의사로 분하지만 행동은 질질 싸서 모든 걸 망치고 꼬이게 하는 주범이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터질 듯 끼는 상의 윗단추는 항상 서너개씩 풀어헤쳐 ‘나 섹시하지?’를 외치고 있었다. 여성 캐릭터를 수동적이다 못해 사고뭉치로 만듦으로
[투덜군 투덜양] 여자가 ‘무뇌충’이야? <에쥬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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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보다 지갑으로 말해야 하는 날, 날, 날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그동안 산천은 수백만 가지 초록으로 뒤덮였는데, 내 지갑 속의 초록은 자취도 없어졌다. 그놈의 날들만 없었으면 5월이 얼마나 더 푸르렀을까. 아, 챙기느라 내가 죽을 날들이여, 산산이 부서지는 지폐여!
그러다보니 느끼는 건데, 달력도 그때그때 청소하고 빨래해줘야 한다. 어린이날이라든가 어버이날이라든가 스승의 날 따위는, 말하자면 달력의 묵은 때다. 이젠 날 정해서 애들 챙겨주고 부모님 공경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됐으니깐 말이다.
어버이날 전날 변영주 감독을 만났다. 가족모임을 앞두고 비싼 카네이션 꽃을 사, 말아, 고민하던 끝이라 무심코 “자기는 카네이션 안 사?” 하고 물었더니 눈을 똥그랗고 뜨고는 “내가 마약을 했어요, 도둑질을 했어요? 이만큼 살아주는 것도 고마운 거지”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자식들이 이런 쿨한 철학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봉투업계는 속상할지 몰라도, 마음만은 훨씬 더
[숏컷] 챙기느라 내가 죽을 ‘날’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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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섭, 임수정 주연의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DVD 출시일과 사양이 공개됐다.
등장인물들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로 ‘미사폐인’들을 낳으며 인기몰이를 한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방영이 종료된 지 반년이 다 된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드라마.
7장의 디스크로 구성될 DVD 세트에는 총 16부작의 본편과 함께 제작과정, 인터뷰 등의 부가영상이 수록될 전망이다. 또한 연출가 등이 참여한 음성해설이 1부와 마지막 16부에 포함되는데 소지섭 등 주연배우들도 참여할지는 아직 미정이다. 기본적으로 본편은 4:3 스탠더드 화면비와 돌비 디지털 2.0 음향을 지원하고 있으며, 1부에 한해 와이드 화면 버전이 별도로 수록된다.
DVD 발매 예정일은 오는 6월 28일이며, TV에서는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포함한 ‘감독판’으로 선보일 전망이어서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충분히 보답할 것으로 기대된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출시일, 사양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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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는 ‘브로커’를 자처하는 몇몇 친구들 덕분에 국제워크숍에 참석차 뜻하지 않게 미국을 갔다 왔다. 그 워크숍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일단 참석자를 정확하게 발표자와 토론자와 필수적인 사람들로 제한해서, 개인적인 관심으로 찾아온 대학원생조차 ‘내쫓는’ 것이 처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토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초청된 사람만으로 참석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참석한 우리는 4일 동안 줄곧 꼼짝없이 워크숍에 붙잡혀서 토론을 해야 했다. 참석자가 서로 얼굴을 피하기 힘들 정도로 제한되어 있으니 힘들다고 중간에 빠져나가거나 늘어져 쉴 수도 없었다. 게다가 발표자나 토론자로 외국에서 초청되어 참석한 처지에선, 토론에 제대로 참석하기 위해선 새벽부터 일어나 관련된 글을 열심히 읽고 준비해야 했다. 덕분에 토론회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 참석자 제한은 충분히 그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좀더 인상적인 것은 그 회의에 참석한 한 노인이었다. 작은 체구에 단단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좋은 스승이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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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라이선스 발매된 일본 보사노바 듀오 나오미 앤드 고로(Naomi & Goro)의 <Presente de Natal>은 작은 화제를 낳은 바 있다. 한편으로 한여름(!)에 발매된 ‘보사노바 캐럴(!)’ 음반이었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 한국 인디 밴드들의 겨울 노래를 담은 EP <Winter Songs for Nostalgia>가 보너스로 실려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좋은 반응을 얻었던 보너스 EP의 히든 트랙 <Novaless>의 주인공, 티어라이너가 최근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박성훈의 원맨 밴드인 티어라이너의 데뷔작은 특이하게도 2종으로 나뉘어 동시 발매되었다. 하나는 국내에서 홈레코딩으로 만든 <작은 방, 다이어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녹음한 <Letter from Nowhere>(이상, 파스텔뮤직 발매)이다. 먼저 <작은 방, 다이어리>. 어쿠스틱 기타 소품인 첫곡 <Lubl
파스텔톤 우울, 처연한 서정, 티어라이너 데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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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만큼이나 꼼꼼한 음성해설로 유명한 정성일 평론가와 김기덕 감독의 ‘대담’인 <빈 집>의 코멘터리는 장면의 상황과 구도 등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사소한 동작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간혹 평론가의 어렵고 심각한 질문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찍었죠’라는 식의 간단한 대답을 들으면 역시 보는 쪽과 만드는 쪽 입장의 차이를 재확인하는 것 같아 재미있다.
물론 두 사람이 정확한 의견일치를 보는 부분이 딱 한 군데 있기는 하다. 극중의 인물에게라기보다 관객에게 영화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의도가 선명했던 교도관의 대사다. 너무나 작위적으로 보이는 이 대사의 해설을 들으면, 결국 감독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보다 더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선혈과 폭력이 낭자하여 ‘불편하다’는 소리를 듣곤 했던 전작들보다 훨씬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았던 <빈 집>을 말하면서 조차 말이다.
영화를 닫으면서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이 인
<빈 집> 영화 만드는 감독 vs 영화 읽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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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제이 보고서>는 킨지에 대한 보고서다. 영화의 중심에는 킨지의 보고서보다 인간 킨지가 서 있다. 킨지의 성생활은 킨지의 연구활동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당근’ 연구활동보다는 성생활에 관심이 쏠리는 관객에게 매우 유익한 텍스트였다. 킨지의 고통과 희열은 나의 그것과 겹칠 수도 있으며, 인터뷰 대상자들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킨제이 보고서>는 킨지에 대한 보고서일 뿐 아니라 나에 대한, 우리 사회에 대한 보고서다. 게다가 <킨제이 보고서>는 하나의 보고서로 세개의 텍스트를 읽게 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선물했다. 미국의 오늘날, 한국의 현실, 그리고 나의 경험이 바로 그 세개의 층위다.
킨지 보고서는 ‘미완의 혁명’
벌써 반세기도 넘었다. 킨지 보고서가 세계를 뒤흔든 때로부터. 그러나 그 성혁명은 영구혁명으로 남아 있다. 영구히 완수되지 못한 혁명 말이다. 반대파의 저항이 매우 교묘하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혁명과 반
아는 척 마라, 당신도 그들과 같다, <킨제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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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의 신작 프로젝트 <괴물>(감독 봉준호, 투자/제작 청어람)이 주요배우들 캐스팅을 완료했다. <괴물>은 90억 이상의 대작 프로젝트로 ‘한강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물로부터 생존하려는 한 가족의 사투’라는 간단한 시놉만 공개된 상태다.
이번에 캐스팅이 확정된 주요 배우들은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 변희봉 등으로 배두나를 제외하면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 봉준호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는 <괴물>에서 정체불명의 괴물과 사투를 벌일 한 가족으로 출연한다. 그밖에 고아성, 이재응, 김뢰하, 박노식, 윤제문 등 개성 강한 조연들도 <괴물>에 얼굴을 비친다. <괴물>은 6월달에 촬영을 시작해 1년여동안의 작업기간을 거쳐 내년 초여름에 개봉할 예정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 캐스팅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