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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여자에게 사랑을 구걸한다. 여관방에서 자지러지듯이 웃으며 “사랑? 사랑?”이라고 조롱하는 여자. 이후 욕지거리와 난투극 끝에 남자에게 처참하게 교살당하는 그녀. 건조하고 차가운 롱테이크로 찍힌 <소름>의 선영(장진영)은 한국 영화사에 기억될 만한 기묘하고 강력한 팜므파탈로 남았다. 장진영은 네 번째 출연이며 첫 주연작인 <소름>에서 그렇게 배우로 다시 태어났다. 이 영화를 보면 그녀가 “촬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고 말하는 대목이 실감나게 와닿는다.
운명처럼 그의 여덟 번째 출연작 <청연>에서 그 연출자 윤종찬 감독과 그 배우 장진영은 재회했다. 저예산영화에 스탭들은 컵라면으로 연명하고 마지막 촬영날까지 제작비 조달에 허덕였던 <소름>. 강행군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청연>은 4개국 로케이션, 3년의 제작준비 기간, 촬영만 1년이 걸린 대작이다. 호사가들이 ‘충무로 3대 재앙’이라고 씹
그리고 감독은 배우를 창조했다, <청연>의 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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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없이는 세상을 알 수 없다
남재일 글을 읽을 때마다 두 가지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개별적인 대상을 냉혹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하나고, 나머지는 대상을 모르는 아주 맹목적이고 강한 그리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 그리움의 지향 혹은 정체가 뭘까 궁금합니다.
김훈 그건 아마 결핍일 겁니다.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나잖아요?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마초 소리를 듣고 사는데, 근데 그 마초라는 것이 그 남자가 갖고 있는 결핍을 말해요. 자기가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이 숙명적인 결핍이고 그 결핍의 힘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해나가는 거지. 내가 충만하고 결핍되지 않고 아무런 그리움이 없는 자라면 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거잖아요. 그건 결핍의 힘이야. 헌데 결핍은 ‘경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뭘 결여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지. 사실. 여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 본래 그 무엇이 결핍된 채 태어나지 않나. 그런 것들이 아마 세계를 이해하는 내 감성의
몽당연필을 든 무사, 김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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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더럽혀지는 인간들이 아름답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그를 만나고 싶었다. 3주 전 나온 김훈의 새 소설 <개>는 맞춤한 핑계가 돼주었다. 2002년 계간지 <문학인>을 통해 김훈과 인터뷰(<밥벌이의 지겨움>(2003) 말미에 전재된 인터뷰)한 바 있는 남재일 대중문화평론가에게 다시 한번 질문자가 되어주길 청했다.
<개>는 수컷 진돗개 보리의 목소리로 사람살이의 꼴을 말한다. 칼이 베고 현이 노래하듯, 개는 물어뜯고 짖는다. 잡고 휘두르는 칼을 지나, 사람의 손끝과 부벼져 울림을 만드는 현(絃)을 거쳐, <개>에 이르기까지 김훈은 살아 있는 살덩이에 자꾸 다가섰다. <개>에서 문장과 문장 틈의 계곡은 얕아졌고 지상에 납작 엎드린 <개>의 후각과 촉각은 확고부동하다.
작가는 무릇 건강해야 하고, 그 건강함이란 홀로 시간을 독대하는 힘이라 믿는 김훈은 일산의 자택 바로 건너편
몽당연필을 든 무사, 김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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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장’이 기본적으로 춤추기 위한 곳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춤추는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며 시종일관 빠른 템포의 댄스음악만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보통 댄스 클럽에는 칠아웃 룸(chill-out room)이란 별도의 작은 공간이 있다(그러니까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이른바 테크노클럽을 말하는 것이다). 클러버(clubber)들이 플로어에서 열띤 춤과 무아(無我)의 세계를 탐닉하다 자리를 옮겨 ‘열기와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바로 칠아웃 룸이다. 그러니 이 공간에 차분한 일렉트로닉 음악이 흐른다는 점은 굳이 가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 앰비언트니 다운템포니 칠아웃 뮤직이니 하는 세세한 구분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겠고.
노르웨이 출신의 일렉트로니카 듀오 로이크솝(Royksopp)의 데뷔작 <Melody A.M.>(2001)은 표제처럼 밤의 열기보다는 밤새운 뒤의 아침에, 플로어보다는 칠아웃 룸이나 침실에서 각광받은 음반이다. 신스팝과 하우스
어젯밤 파티는 너무도 뜨거웠지, 로이크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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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다이어리]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시리즈를 만들어 주세요~
[헌즈다이어리]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시리즈를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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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고의 물음은 짧고 분명하다. “헤어진 남자친구 제리와 ‘그냥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눈썹 짙고 팔다리 짧은 3등신의 주인공으로 연애만화를 그린다는 것부터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만, 그 하나의 멜로디 라인을 변주하면서 독자들을 질리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반복되는 멜로디의 조금씩 틀어지는 부분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그 사소함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감격하게 된다.
<남자친9>는 토마의 첫 만화책이지만, 그녀는 이미 <선생님과 나> <크래커> 등의 인터넷 만화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그녀가 보여주는 낙서처럼 가볍지만 정갈한 선, 원색에서 한톤 다운된 부드러운 컬러, 신경쓰지 않은 듯 잘 배치된 패션 소품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은 최근의 일러스트레이션 경향과 통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친근하고 예쁜 이미지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공감이 소소한 생활의 묘사로부터 우러나오고, 그로 인해 우
그냥 친구와 남자친구 사이, 토마의 <남자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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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브라질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에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으며 히피문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후 <연금술사>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11분> 등의 소설을 썼고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오 자히르>는 다른 코엘료의 근작처럼, 영적 체험과 사랑을 찾아 먼길을 떠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런데 분량이 조금 만만치 않다. 4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코엘료가 제안하는 신비로운 여행을 접한다.
<오 자히르>는 보르헤스의 단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한다. 책의 서두에서 포부르 생 페르가 인용하는 보르헤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히르’는 “이슬람 전통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눈에 보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일단 그것과 접하면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나가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사물 혹은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신성
지금까지의 너이기를 그만두고, 너 자신이 돼라, <오 자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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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마흔살이 되어서도 사회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 20년 전에는 참 널리도 퍼져 즐겨 사용되곤 했던 이 격언은 지금 고어(古語)이거나 사어가 되어버렸다. 이 표현이 몹시도 생소할 젊은이들을 위해 간단한 해설이라도 붙여야 하겠다.
대개 마흔 줄에 들어선 사람들에 의해 2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용되었다. 위압이 앞서는 분위기보다는 회유가 앞설 때 흔히 사용된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나 안기부 지하실, 각경찰서의 대공과 취조실 뭐, 이런 곳들에서 대공혐의자들을 수사 및 지도할 때 간혹 양념처럼 사용했다. 검찰수사관 입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는 보직 교수들이 이 말을 사랑하기도 했다. 사회지도층, 수사층, 정보층 외의 일반인들 중에서도 자신을 반공보수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후일 마흔이 되어 골이 없어진다면 스물의 심장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라는 투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머리보다는 심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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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인지 한달째 목소리가 들락날락한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 중간중간 음절들이 목구멍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내 귀 안에서만 공명한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군데군데 이빠진 묵음들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듣는 셈이다. 냉방병일까, 말하기가 부끄러워 생긴 증세일까 갸웃거리다가 <여고괴담4: 목소리>를 봤다. 바로 이거야! 영화 주인공처럼 실제로 나는 이미 죽었고 착한 가족과 동료의 기억 덕택에 산 사람 흉내를 내왔지만 마침내 사람들의 기억이 희미해진 거군. 이 새로운 가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듣는 둥 마는 둥이어서 내 심증은 굳어졌다.
어쨌거나 <여고괴담4: 목소리>가 보여준 아이디어는, 영화의 소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누구나 “영화 보러 간다”고 말하지 “영화 들으러 간다”고 말하지 않지만, 영화 관람은 청각적으로도 대단히 특별한 체험이다.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된 소리가 공들여 층을 쌓고 사방팔방에서 귀를 자극하는 사태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오픈칼럼] 사운드 오브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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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사건 때문에 시끄럽다. 아무리 시끄러워봤자, 도청 테이프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는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재벌기업과 언론사가 거론되었지만 그것도 유야무야 넘어갈 것이다. 어차피 그 ‘도청’이란 것도 지배집단 내에서의 암투일 뿐이고, 사실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FBI의 후버 국장은 백악관에도 도청장치를 설치했고, NSA는 세계의 모든 통신을 검열하는 것으로, 비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다. 전화나 e-메일에서 폭탄 같은 금기단어가 쓰이는 것을 모두 검색하고, 이론적으로는 모든 도청이 가능하다고 한다. 원하기만 한다면. 이미 <에너미 오브 스테이츠> 등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정의가 승리하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정리가 되던, 정보기관의 도청이나 개인 정보 수집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보조직의 필수적인 임무이자, 생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정보조직을 만드는 것은 자신, 이를테
[숏컷] 조직이 무엇이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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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인기 드라마 시리즈 <춤추는 대수사선>이 한정판 컴플리트 박스로 오는 11월 25일 일본에서 출시된다.
완간서 경찰들의 좌충우돌 활약상을 그린 <춤추는 대수사선>은 1997년 오리지널 TV 시리즈가 종결된 이후에도 스페셜 방송이 꾸준히 제작될 정도로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 이미 두 편의 극장판이 제작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오다 유지가 연기한 형사 주인공 아오시마는 물론 조연 캐릭터들까지 덩달아 사랑을 받아, 그들을 주연으로 한 스핀오프 영화들까지 나올 정도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시리즈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발매된 <춤추는 대수사선> 관련 DVD를 한데 묶은 이번 박스세트는 오리지널 TV 시리즈를 비롯해 각종 스페셜 방송, 그리고 두 편의 극장판 모두 담은 타이틀로 디스크 장수만 무려 16장에 달한다. 이 가운데서도 2003년 일본에서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두 번째 극장판 <춤추는 대수사선 2 -
<춤추는 대수사선> 컴플리트 박스 일본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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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씨네21> 513호에 실린 김소영 교수의 <친절한 금자씨> 평에 따르면 나는 ‘친절한 금자씨’과가 아니라 찌질한 종두씨(<오아시스>)과다. 또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과가 아니라 희멀건 두부과다. 성능은 떨어져도 무조건 예쁜 총을 선택하는 금자씨가 아니라 ‘그까이꺼’ 대충 싸구려 꽃다발 달고 임대아파트로 털레털레 걸어가는 종두가 내 친구였던 것이다. <오아시스>를 그리 재미있게 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임대아파트 또는 서민아파트에 대한 나의 친연성은 꽤나 유서 깊다. <소름>이나 <강원도의 힘>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은 내가 임대아파트과인 탓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잡는 트집인데 나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의 방이 등장하는 순간 허걱했다. 얼룩말 무늬를 연상케 하는 검붉은 벽과 어둡고 기하학적인 무늬의 이불, 뭐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임대아파트에 어울려
[투덜군 투덜양] 뭐든지 아름다워야 한다고? <친절한 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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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이크는 널리 알려진 촬영기법 가운데 하나다. 오랜 시간 컷을 나누지 않고 찍는 이 기법은 지루한 예술영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오해가 무조건 부당한 것은 아니다. 의미없는 롱테이크만큼 효과만점인 자장가도 드물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롱테이크는 가장 단순한 촬영기법이다. 널리 아다시피 뤼미에르가 만든 최초의 영화는 롱테이크로 찍은 것이다. 컷을 잘게 나누고 편집을 하는 것은 좀더 나중에 개발됐다. 초기 영화의 발달사는 지금 현재 어떤 개인이 영화를 배운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롱테이크는 편집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자연스런 선택이다. 그러던 롱테이크가 대가들의 전유물이 된 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기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장들의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시간과 감정의 결정체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롱테이크는 지루하다는 말을 믿을 필요는 전혀 없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 도입부에 롱테이크로 촬영한 장면. 넓은 들에서 시체가
[편집장이 독자에게] 어떤 롱테이크, 정성일과 박찬욱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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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출시되어 팬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던 <죠스> 30주년 기념판 DVD가 유니버설을 통해 9월 중 국내에서도 선보인다.
개봉 30주년을 맞아 부록과 사양을 보강하여 새로 출시한 <죠스>는 기 출시된 DVD에 1시간으로 단축 수록된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2시간짜리 원판으로 복원했으며, 각각 별도로 발매되었던 돌비 디지털 5.1과 DTS 사운드를 한 장으로 합쳤다. 이외에도 500여장에 이르는 테마별 이미지 갤러리, 1974년의 촬영 현장을 기록한 영상, 삭제 장면 등 다양하고 충실한 부록을 담고 있다.
또한 유니버설에서는 30주년 기념판의 출시와 함께 총 4편으로 구성된 <죠스> 시리즈 전편을 모은 DVD 박스 세트도 함께 내놓을 예정이다.
<죠스> 30주년 기념판 9월 국내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