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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지만 있는 듯, 괴물의 존재를 고려한 촬영
이와 동시에 호주의 특수효과업체 존 콕스팀에서는 애니매트로닉스(전자적으로 재현되는 로봇) 작업이 진행됐다. 애니매트로닉스는 <쥬라기 공원> 등에서 사용된 것으로, 크리처가 배우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등장할 때 CG가 아니라 실제 크기의 로봇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괴물>에서도 괴물의 입 부분이 애니매트로닉스로 만들어져, 괴물이 사람을 삼키거나 뱉을 때 등에 사용됐다. 한국에서도 괴물의 존재를 고려한 촬영이 진행됐다. 배우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괴물이 있는 듯 연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특수효과업체 퓨처비전은 존재하지 않는 괴물이 일으키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괴물이 물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드럼통을 정해진 각도로 빠뜨린다든가 하는 ‘프랙티컬 이펙트’ 작업이었다. 한편 한국의 CG업체 EON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의 CG를 만들기도 했다.
시각적인 요소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괴물이 일으키는 실감
<괴물> 속 괴물 제작 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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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칸영화제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마치고 7월27일 국내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국내와 해외의 매체를 통해 다채로운 찬사를 끌어낸 <괴물>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모으는 것은 ‘괴물’ 그 자체다. 그것은 괴수 캐릭터가 그동안 한국 주류 영화계에서 거의 등장한 적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고, 촘촘하게 영화를 만들기로 정평이 난 봉준호 감독이 만든 괴수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하다. <괴물> 속 괴물의 탄생과정을 되돌아보고, 여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다만, 마케팅 방침상 괴물의 스틸 이미지를 공개할 수 없다는 영화사의 입장으로 다소 동떨어진 이미지를 덧붙이게 된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킹콩>과 달리 <괴물>의 주인공은 괴물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괴물에게 물려간 딸 현서(고아성)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박강두(송강호)와 그 가족이다. 그럼에도
<괴물> 속 괴물 제작 과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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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오멘> 그 아인 악마의 자식이오!
[정훈이 만화] <오멘> 그 아인 악마의 자식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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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혼자 집 앞 골목에 나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달콤한 바다의 기억’, 비내리는 날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나의 기타소리 그리고 절친한 내 친구도 함께했던 우리 ‘트리오’. 여기까지의 묘사를 이미지를 그려보면 그것은 아련하고, 예쁘고,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시부야계 밴드 폴라리스의 2집 <Family>의 음악을 설명하자면 딱 그렇다. 처음 3개의 문장에서 작은따옴표로 표시된 것들은 <Family>에 수록된 노래 제목들이다.
폴라리스는 90년대 시부야계의 전설적인 밴드 피쉬만즈의 베이시스트 가시와바라 유즈루가 만든 밴드다. 이번 2집에 담긴 음악은 피쉬만즈의 색깔을 물려받으면서도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를 바탕으로 훨씬 간결한 팝을 구사한다. 드럼과 베이스가 가세한 3개 악기가 주연을 맡았고 노래마다 주·조연급의 악기가 등장한다. <심호흡>(深呼吸)에서는 재지한 피아노 선율
아련하고도 달콤한 낮잠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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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길모퉁이에서 로큰롤과 맞닥뜨리면 깜짝 놀라잖아. 보통은 그럴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맞닥뜨렸어. 위험한 거지.” 고만고만한 연애담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던 일본 소설들 사이에서 이사카 고타로의 책을 만나는 즐거움은 <사신 치바>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찔함을 동반한다. 이사카 고타로는 <칠드런> 한권만 국내에 소개된 작가지만, 무려 네 차례나 나오키상에서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하는 기대심리가 작용한 탓인지 <러시 라이프>(2002), <중력 삐에로>(2003), <사신 치바>(2005)가 각기 다른 출판사의 이름을 업고 일시에 출간되었다.
<러시 라이프>는 도시의 현실과 도시의 전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빈다. 표지 그림인 M. C. 에셔의 ‘상승과 하강’과 똑 닮은 구조로 처음과 끝이 연결되고 각 인물들의 상승과 하강이 역전된다. 무대는 일본 센다이(작가가 살고 있는 곳이다). 연
삶을 아찔하게 버무려내는 감각, 이사카 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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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글을 쓰게 된 이 코너의 이름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다. 유토피아란 말을 처음 안 건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꿈꾸기를 좋아해서 유토피아란 말을 널리 애용했다. 그런데 디스토피아란 말을 들은 건 불과 얼마 전이다. 그 사이 아마도 유토피아인 줄 알고 다가갔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유토피아를 온몸으로 야유하는 조어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디스토피아란 말을 만든 사람은 혹시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테크노피아를 표방한 가전회사의 전기장판에 엉덩이를 덴 사람이거나 홈토피아 건설회사의 아파트에서 날마다 옆집 부부 싸움을 청취해야 하는 사람.
이 칼럼의 코너명이 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서로 반대 의미인 두 단어의 관계는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했다. 첫째는 두 단어가 대등한 병렬관계로, 세상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단순히 질문하는 경우이다.(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둘째는 디스토피아가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관계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If 유토피아, Then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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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동안 볼 섹스신을 칸영화제 시작, 이틀 만에 다 봤다. 주인공들은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섹스를 하곤 했다. ‘거두절미’라는 표현은 물론 약간의 뻥이 섞인 것이지만, 어쨌건 빈도 면에서나 강도 면에서나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미처 못 봤지만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는 영화 한편으로 1년치 섹스신은 다 보여준다고들 했다. 그런 상황이니 섹스신을 보는 것만으로 인물들간의 관계와 상황 전개를 대략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아, 이것이야말로 심도깊은 예술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인가!). 로우예의 <서머 팰리스>에서 중국 내 정치상황의 변화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거칠게 삽입된(원래 이 말이 이렇게 야한 표현은 아니었다, 맹세한다) 베를린 붕괴나 천안문 시위 장면 등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보다 여주인공의 성적 분방함이 도를 더해가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느끼면’ 된다. 교르기 팔피의 <박제> 첫 에피소드에서, 남자주인공이 놓인 극한
[오픈칼럼] 흡연유발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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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좋아했던 후배는, 단편집 <임신 캘린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대체로 취향이란 명백한 것이다. 나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별로였다. 잘 쓴 소설인 것은 분명하지만,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는.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임신 캘린더>를 읽었다. 빨려들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빛이라면, <임신 캘린더>는 어둠이었다. 온다 리쿠의 말처럼 ‘자기가 쓸 또 하나의 소설’을 본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과거의 한 장면과 직면했다. 가끔 그런 소설을 만나면, 한동안 멍해진다. 고등학교 때, 김성동의 소설을 읽고 그랬던 것처럼.
<임신 캘린더>는 일종의 악몽이다. 그 악몽은 공포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건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는, 불면의 밤을 지새다가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볼 때의 절망감 같은 것이다. 결코 원하지 않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지만, 반드시 겪
[B딱하게 보기] 빛까지 감지하는 어둠의 포착, <임신 캘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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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국정홍보처의 ‘공식’ 견해에 따르면, “다이내믹 코리아!”뿐이다. 위성채널을 돌리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CNN> 같은 외국 방송에 멈추게 되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한국어 방송으로 돌리려는 순간, 우연히 한국 홍보 광고를 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익숙한 화면이 스친다. 남대문시장 앞에서 난데없이 난타공연을 벌이다가, 양복 입고 휴대폰‘질’하는 아저씨가 등장했다가 아니나 다를까 월드컵 응원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무리 멘트, “There is only one word to describe this place. Dynamic Korea!”
볼 때는 짜증스럽지만, 어느새 따라하게 되는 광고 카피가 있다. 아무 생각없이 붙인 카피인 것 같은데, 어쩌다 현실에 딱 맞아서 자꾸 웅얼거리게 되는 문구가 있다. 내겐 “다이내믹 코리아”가 꼭 그랬다. 누군가 하는 짓을 보다가,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웅얼거린다. “다이내믹 코리아
[이창] 다이내믹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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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의 사라 코너나 <매트릭스>의 트리니티, <킬 빌>의 브라이드,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 같은 여전사 주인공 영화들을 볼 때마다 경탄과 함께 탄식이 나온다. 아∼ 나도 저렇게 싸움을 잘했으면…. 근육질 여성의 섹시미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에서다. 밤 늦게 골목길을 걷더라도 괜한 두려움에 떨 일 없고, 택시나 길거리에서 마초 폭탄을 만났을 때 감동적인 교훈을 줄 수도 있고, 싸울 때마다 바락바락 대드는 남편과 긴 시간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요가 따위를 하기보다는 <킬 빌>의 우마 서먼이나 <걸파이트>의 소녀처럼 다이어트도 되면서 진정 삶에 ‘힘’이 되는, 권투나 격투기 같은 운동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남자주인공의 액션영화는 또 다른 깨달음을 주는 데 진정한 액션영웅이 되기 위해서 굳이 매일 푸시업 100번씩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확실
투덜양, <미션 임파서블3>에서 액션영웅 애인이 부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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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CJ CGV가 발표한 5월 통계에 따르면 한국영화 점유율이 33.9%라고 한다. 올해 1월 77.6%까지 치솟았던 수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1월엔 <왕의 남자>가 관객몰이를 했고 5월엔 <미션 임파서블3>과 <다빈치 코드>가 휩쓸었으니 이런 점유율이 나오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극장업계엔 희소식인 것이 할리우드영화 두편 덕에 올해 5월 관객 수가 여름 성수기인 지난해 7월의 관객 수보다 많다는 점이다. 여름 성수기가 일찍 시작된 탓이지만 이런 추세가 6, 7월로 넘어간다고 꺾일 것 같진 않다. <포세이돈>이 개봉일 관객동원 신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올 여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위력은 굉장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이어 개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극장가를 잠식하는 가운데 7월1일부터 스크린쿼터도 축소된다. 일부에선 당장의 한국영화 점유율을 들어 쿼터 축소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지금 상
[편집장이 독자에게] 대박 아니면 쪽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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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성(性)은 동물적 본능에서 비롯되거나 원초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역학관계를 전제로 발동하며, 지극히 정치적으로 작동한다. 즉 우발적인 (성)폭력에 의해 강자와 약자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 이전에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며, 강자는 (성)폭력을 통해 자신의 힘을 행사한다. <구타유발자들>은 이러한 폭력의 정치적 속성에 주목한다. 목소리 큰 교수가 손을 떨자 폭력이 시작되는 것처럼, 여자가 성폭행 도중 도망쳤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성폭행이 재기되는 것처럼, 영화는 약자임이 확인되는 대상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정치적 속성을 세밀히 그린다.
영화의 폭력에 대한 발언 내용은 분명하다. 첫째,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 봉연은 제가 당한 대로 소년에게 행하고, 맞던 소년은 더 큰 폭력을 시도한다. 둘째, 그래봤자 한번 약자는 영원한 약자이다. “때리던 놈은 경찰되었는데, 맞던 놈은 졸라 맞지?”처럼 피해자는 강자의 벽을 넘지 못하고, 구타를 ‘유발’하다
평론가 황진미가 <구타유발자들>을 비판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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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유발자들>은 무척이나 불친절하고, 불편하다. 대체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할까? 유일하게 여자인 인정? 지독한 폭력의 희생자인 고등학생 현재? 하지만 그들에게도 원죄는 있다. 인정이 교수인 영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외진 강가까지 따라온 이유는, 뮤지컬 오디션에 힘을 써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권력에 타협한 것 역시, 죄다. 현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지만,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동일한 폭력을 휘두른다. 개인적으로는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건 현재는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스스로 갇혀버렸다. ‘구타유발’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그들에게는 맞을 만한 최소한의 이유가 있다. 타인이 때리고 싶어질, 뭔가 근질근질한 원인제공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 누가, 누구를 구타하는 것일까? 초반의 가해자는 시골 양아치들이다. 도시에서 온 영선과 인정은 야만스러운 그들에게서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한다. 영선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던 인정 역시, 그들과 같이
평론가 김봉석이 <구타유발자들>을 지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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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앎에 대한 사랑
소설로서의 <다빈치 코드>는 몰아치는 한번의 숨결, 즉 단숨에 읽는다는 표현이 적합한 소설이다. 기호학이 대중화된 지식으로 전화하면서 상용화된 몇개의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코드와 인코딩, 디코딩과 같은 것이다. 또 기호학자 소쉬르가 이론화하고자 했던 유대교 카발리스트 전통에서 비롯된 아나그램(철자 수수께끼 맞히기)이다. <다빈치 코드>는 기호학과 예술품의 독해 그리고 여신과 남신이 함께 우주적 기호의 완성을 이루는 이교의 전통을 ‘매 장면이 서프라이즈로 가득 차게 하라!’는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따라 숨가쁘게 뒤섞는다. 소설을 읽다보면 각장이 반전의 연속이다. 특히 이 수수께끼가 예수와 그의 12명의 남자 제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명의 기원의 전복이라는 것을 달성해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이 베스트셀러를 일부 구원하는 기제다. 말하자면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기원 전복의 결정적 코드 제공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다빈치
<다빈치 코드>의 전복적 매력과 치명적 허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