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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농장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이리스가 제법 규모가 큰 집으로 들어가면 할아버지를 포함해 부모와 고모들, 청소년기 사촌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알카라스에 사는 이 대가족의 면면은 여느 농가의 정경과 비슷하다. 아이들은 무료함을 달래려 복숭아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10대 남매 중 오빠는 무표정하게 농가 일을 돕다가 저녁이면 친구들과 댄스파티를 벌이며, 부쩍 화장에 관심을 보이는 언니는 둔덕에서 친구와 요염한 춤을 추거나 이성의 눈길을 끌려고 애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리스의 아버지는 밤이면 복숭아를 훔쳐 먹는 토끼를 사냥하고 묵묵히 복숭아를 수확하며, 어머니는 문이 열린지도 모른 채 시아버지의 흉을 본다.
영화는 부침 없는 한 농가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 태평해 보이기만 하는 이리스 가족은 하나같이 마음속에 근심과 불안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다. 지주의 요구로 곧 집을 내놔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부모의 부양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
[리뷰] '알카라스의 여름', 불행의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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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우(오동민)가 경찰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 기거하는 원룸은 정작 수험 대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일러가 고장난 탓에 샤워를 하면 벌벌 떨며 이불을 둘러야 하고, 옆집 커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거나 한낮에 휴대폰 알람을 울리는 식으로 소음을 내 방해한다. 그렇다고 주변 환경만 탓할 순 없다. 시험공부에 매진하기보다 점심으로 주문한 볶음밥을 소분하는 데 열심이고, 오후쯤 잠깐 수험서를 뒤적이는 일정을 보자면 올해도 합격은 요원하다. 공무원시험 지원서를 작성하던 찬우는 친구에게 응시료를 빌리려다 얼결에 술자리에 합석한다. 간만에 입으로 들어간 소주에 찬우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뜬다. 옆집 404호에서 눈을 뜬 찬우의 팔뚝엔 피멍이 들어 있고, 침대 옆엔 웬 남자가 낭자하게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작품은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둘러싼 실내극에 가깝다. 공간은 제약이 아니라 긴장과 긴박함을 쌓는 최적의 장소다. 영화가 시작한 뒤 10여분 동
[리뷰] '옆집사람', 공들여 세공하고 재치 넘치는 사건의 연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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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정일우)와 지숙(김슬기) 부부는 두 아이 은이(서이수), 택(박다온)과 함께 고속도로 위에 산다. 기우는 고속도로 휴게소 방문객에게 사기를 치며 2만원씩 갈취하고 가족들은 그 돈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휴게소 등지에서 노숙하며 살아가는 기우의 가족 앞에 어느 날 중고 가구점을 운영하는 영선(라미란)이 나타난다. 일전에 기우 가족에게 사기를 당한 적 있는 영선은 그들을 경찰에 신고하고 이미 다른 범죄 전력이 있는 기우는 구속된다. 영선은 오갈 데 없이 남아 있는 임신부 지숙과 그의 아이들을 자신의 가구점에 거둔다.
<고속도로 가족>은 인연을 맺을 리 없어 보이는 두 가족이 한 가정으로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상처를 딛고 두 가족을 하나로 잇는 캐릭터 영선은 영화에 따뜻한 휴머니즘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영선을 통해 형상화하는 영화의 선량함을 마냥 믿으며 넘어가기엔 몇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존재한다. 선의와 자비엔 아무 잇속이 없어야 마땅하지만
[리뷰] '고속도로 가족', 영화에 따뜻한 휴머니즘을 불어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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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마을 늪지대에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마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청년 체이스 앤드루스(해리스 디킨슨)가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들은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습지 소녀라 불리며 야생에서 문명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여성 카야(데이지 에드거존스)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다. 카야의 전사는 구구절절 슬프다. 카야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가정폭력범인 아버지를 두고 카야를 떠났다. 아버지마저 카야를 떠나 집에 돌아오지 않자 카야는 방치된 채 자연을 벗 삼아 자생한다. 그런 카야에게 두명의 남자가 나타난다. 카야에게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주고 카야의 생물학자로서의 가능성을 일러준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와 대학 진학을 이유로 습지를 떠난 테이트 다음으로 카야의 곁에 다가온 체이스가 그들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밀리언셀러 기록을 달성한 바 있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뷰]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습지와 늪을 정밀하게 담아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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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병수(권해효)가 미술하는 딸 정수(박미소)와 함께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 선생(이혜영)이 관리하는 건물에 찾아온다. 김 선생에게 정수를 소개하며, 그에게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할 요량이다. 테이블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김 선생의 안내로 2층에 위치한 식당과 옥탑까지 건물 곳곳을 소개받는다. 셋은 이윽고 지하 작업실에서 와인을 곁들인 대화 자리를 갖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수가 영화사 대표의 연락을 받고 자리를 비우면서 김 선생과 정수만이 어색하게 남는다.
<탑>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미니멀하다는 인상을 가져온다면, 그 이유는 이야기가 오직 한 건물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하부터 옥탑까지 층계로 이어진 건물과 그 주변에서 모든 대화와 상황이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전작 중 호텔 방에 홀로 묵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강변호텔>이나, 한 카페를 중심으로 그곳을 오가는 인물들의 대화를 담은 <풀
[리뷰] '탑', 실존과 실종을 오가는 숨바꼭질, 끝없는 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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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2년 언론진흥기금 인권증진보도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어느 신인 작가의 고백: 2022 한국 신인 영화감독・시나리오 작가의 불공정 계약 현황에 대한 보도’를 공개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인권증진보도 지원사업은 인권 침해 사례 및 해결 방안을 심층 취재・보도하는 뉴스 콘텐츠 발굴을 목표로 한다. 〈씨네21〉은 한국의 신인 영화감독・시나리오 작가가 각본 계약 시 처하는 불합리한 처우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할리우드의 각본 계약 시스템을 취재했다. 보도물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인터랙티브 형식의 웹페이지로 구현했다.
기사는 세 챕터로 구성되었다. 첫 챕터 ‘계약서 게임’은 독자가 신인 작가의 입장에서 계약서 내 독소 조항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장이다. 두 번째 챕터 ‘A 감독과 87인’은 씨네21이 한 신인 감독으로부터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불공정 계약 사례를 취재한 내용에 87인의 신인 감독 및 시나리오 작가에게 각자의 불공정 계약
씨네21, 언론진흥재단의 인권증진보도 프로젝트 ‘어느 신인 작가의 고백’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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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려고 무법지대에 발을 들인 남자. <몸값>의 고극렬은 이 모순형용을 설득해야 하는 캐릭터다. 부자들이 신장이식 우선권을 독점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법 장기매매 세계에 발을 들인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돌연한 대지진으로 인신매매단의 주거지가 끔찍한 아포칼립스로 탈바꿈하면서 극렬은 선의와 광기, 폭력과 이타심이 공존하는 복잡다단한 동물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진화한다. 배우 장률이 지닌 특유의 애상적이면서 섬뜩한 기운은 의도적 비현실성을 갖고 노는 <몸값>을 납득 가능하도록 논리를 완성한다.
-전우성 감독이 연극 <마우스피스>를 관람한 이후 출연을 제안했다고 들었다.
=당시 <마우스피스> 재공연을 보러 왔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내게 작품을 제안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마우스피스>의 데클란과 <몸값>의 고극렬 사이에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발견하셨던 게
[인터뷰] '몸값' 장률, “효자, 지옥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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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 알 수 없다. 원조교제 상황극에서 경매까지 능수능란하게 진행하는 냉정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콩팥을 구하기 위해 쩔쩔매는 효자 극렬(장률)을 가엾게 여기는 연민도 숨기고 있다. 반전 상황의 묘미를 극대화하며 깔끔하게 종결되는 단편영화 <몸 값>과 달리, 시리즈 속 <몸값>은 “사장 다음으로 여기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 나”라고 말하는 여자, 주영(전종서)의 사정을 좀더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 배우 전종서는 이 무너진 미궁에서 한번쯤 믿어보고 싶은 눈빛의 소유자인 동시에 문득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야생동물이 되어 화면 안팎을 축지법하듯 쌩쌩하게 오간다.
-단편영화 <몸 값>을 시리즈화한 대본에서 어떤 매력에 설득되었나.
=원작 소설이나 단편영화 등 그 포맷, 그 길이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것 같은 작품들이 있다. 사실 나에겐 단편영화 <몸 값>이 그랬다. 처음엔 ‘어떻게 시리즈화될 수 있지?’ 하고 의아해했는데
[인터뷰] '몸값' 전종서, “깨지고 쏟아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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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값>에서 가장 억울한 건 형수가 아닐까. 성매매 단속을 위해 주영(전종서)과 호텔에서 접선했을 뿐인데 어느새 본인의 장기들이 경매대에 올라 있다. 호텔이 갑작스레 무너진 뒤론 자신을 ‘내가 판매·구매한 장기’로 인식하는 이들과 한 공간에 갇히게 됐다. 이 기막힌 상황에서도 형수는 꽤나 영민하게 암투를 벌이며 생존 방식을 터득한다. 배우 진선규는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서 익힌 노련함으로, 끝이 가늠되지 않는 형수의 탈출기를 막힘 없이 끌고 간다.
-원작 단편을 재밌게 봤다고. 이를 장편화한 <몸값>의 시나리오는 어땠나.
=지하로 떨어지니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흥미로웠다. 거기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나 형수와 주영, 극렬(장률)이 시도하는 각자의 탈출 방식도 재밌었고.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감독님이 원테이크로 간다고 하셨을 때 마음이 많이 움직였다. 또 언제 3시간짜리 롱테이크 형식의 시리즈물을 찍어볼 수 있겠나. 좋은 도전이 될
[인터뷰] '몸값' 진선규, “악인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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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현 감독의 동명의 단편영화를 확장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몸값>은 매화 30여분간 야심찬 롱테이크 신이 이어진다. 단편영화에 등장했던 내용은 1화 초반부에 빠르게 진행되고, 갑작스러운 대지진이 인신매매단의 본거지를 습격하면서 모텔 건물은 생존을 향해 분투하는 끔찍한 아포칼립스가 된다. 긴 호흡으로 엔지 없이 정확한 연기를 이어가려면 높은 집중력이 요구되는 만큼 배우에겐 솔깃하면서도 큰 부담으로 다가올 만한 프로젝트다. 성매매업자들을 잡기 위해 손님으로 위장한 형사 형수 역의 진선규, 원조교제 상황극으로 형수에게 미끼를 던지는 흥정 전문가 주영 역의 전종서, 그리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형수의 신장이 절실하게 필요한 극렬 역의 장률은 ‘도전’을 결단한 배우들이다. 이들은 짧게는 5분, 길게는 10~15분에 이르는 숏들을 실수 없이 연기하기 위해 긴 연습과 리허설을 거친 후 촬영에 들어갔다. 생동하는 현장에 몸을 맡기며 충만한 쾌감을 느꼈다는 세 배우와의 만남을 전한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팔릴 것인가 : 티빙 <몸값> 진선규, 전종서, 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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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감독으로 만난 문근영. 20년 전 국민 여동생을 응원하던 삼촌 팬의 팬심으로 한번 더 소환해본다. “감독도 좋지만 배우로서 많은 활동 부탁드려요.”
[ARCHIVE] 자주 보고픈 ‘국민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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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 앤 카슨 지음 / 윤경희 옮김 / 봄날의책 펴냄
<메모리얼 드라이브> 나타샤 트레스웨이 지음 /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펴냄
시인 나타샤 트레스웨이의 <메모리얼 드라이브>의 부제는 ‘딸의 비망록’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혼한 두번째 남편에게 마흔살에 살해당했다. 거의 30여년이 지나, 트레스웨이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살해당한 사건을 둘러싼 기억을 책으로 썼다. 1부에서는 아직 위기를 피할 수 있을 듯 느껴지지만 2부에 이르면 어머니가 폭행당한 사실에 대한 경찰 조서를 비롯해 파국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굉음을 낸다. 살해당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얼마나 법적 조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는지부터 사후의 재판 기록까지 글이 이어지는 동안,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외친 “안돼, 안돼, 안돼”라는 소리를 상상하는 비통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앤 카슨의 <녹스>는 192쪽의 종이가 아코디언처럼 하나로 이어진 형태의 책. 장인들의 수작업을 거
씨네21 추천도서 - <녹스>, <메모리얼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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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골프
요즘 내 마음의 안식처다. 스포츠를 워낙 좋아해서 축구, 야구, 테니스 다 하는데 요즘은 특히 골프의 섬세함에 빠져 있다.
아랍어 주문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랍어 주문. 주문을 외우며 스스로를 좀더 성찰하고 바라보려고 한다.
쳇 베이커
재즈를 사랑한다. 그중 최애 가수는 쳇 베이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겠지만 가장 마음에 와닿는 사랑의 형태는 쳇 베이커의 목소리다.
자동차
그냥 탈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곧 자동차의 움직임이 된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좋다.
영화
요즘 꽂힌 영화는 <달콤한 인생>과 <나이트 크롤러>.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힘, 그 자체를
[LIST] 배우 박정우가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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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 맨>
넷플릭스, 왓챠
전기톱 악마와의 계약으로 반악마적 삶을 살게 된 소년 덴지가 악마 세력과 맞서는 이야기다.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삼았다. 유혈이 낭자한 액션과 소년 성장물의 외피는 마치 <기생수>나 <간츠> <헬싱> <디 그레이맨>의 일부를 이식한 듯하다. 또 최근 등장한 <도로헤도로>의 그로테스크한 신체 결합 비주얼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체인소 맨>의 핵심은 이처럼 자극적인 장르적 외형과 표현에만 있지 않다.
외려 후루야 미노루의 <시가테라> <두더지> 등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바둥거리며 살아야 하는 소년의 내밀한 반성장기가 중심이다. 즉 다소 저급하고 선정적인 B급 코미디와 건조한 연출 태도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런 원작의 성격이 다소 퇴색된 애니메이션의 연출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웰컴 투 더 클럽>
디즈니+
‘디즈니+ 데
[OTT 추천작] ‘체인소 맨’ ‘웰컴 투 더 클럽’ ‘기예르모 델 토로의 호기심 방’ ‘웨어울프 바이 나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