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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나온 영화로 <제3의 공포>가 있다. 중저 예산의 덜 알려진 외국영화가 한국에 소개될 때 간혹 엉뚱한 번역 제목을 다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중에서도 도가 지나치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The Stuff>다. 그 뜻은 물건, 어떤 것, 무엇인가를 말한다. 3이라는 숫자도 없고 공포와도 관련이 없다. 영화를 보면 극중에서 사람들이 간식으로 먹는 생크림처럼 생긴 음식에 ‘The Stuff’라는 제품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제품명으로 사용된 고유명사라고 보고 제목을 ‘스터프’라고 붙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2022년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영화 제목도 그대로 한국에서 공식 제목으로 쓰는 시대이니, ‘스터프’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은데 1980년대에는 굳이 번역한 제목을 썼다. 번역을 하더라도 적당히 ‘물건’이나 ‘그것’ 같은 제목을 붙였다면 통할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뜬
[곽재식의 오늘은 SF] 활기찬 제3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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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중의 두 번째 영화 <컨버세이션>(2021)은 제목에 충실하다. 영화 전체가 2인 이상이 모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누군가의 진솔하고, 실없고, 애틋하고, 어이없는 대화를 듣기 위해 러닝 타임 전부를 할애한다. 전작 <에듀케이션>(2019)에서도 대화는 중요한 도구였지만, 성희(문혜인)와 현목(김준형) 두 사람의 만나질 리 만무한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종종 어그러졌다. 이에 비해 <컨버세이션>은 다양한 인원과 대화하는 사람들의 친밀한 관계 여부와 그들의 감정에 넓게 포진함으로써 세밀한 감정 변화에 집중한다. 시간을 공유하고 공동의 경험을 간직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 영화의 대화는 호기심과 관심과 헤아림을 동반한다. 하지만 조각난 신 구성으로 인해 관객들은 대화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온전히 대화에 안착할 수 없다. <컨버세이션>은 대화로 이루어진 영화를 넘어서 영화가 된 대화라고 말할 수
[비평] ‘컨버세이션’ 무주산골영화제 한국장편영화경쟁부문 ‘창’ 섹션 초청작 비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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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화제가 끝나고 난 뒤
2022년 6월 6일.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시상식이 끝나고 김종관 감독님께서 핫도그에 맥주 한 잔을 사주셨다. 함께 먹으며 비가 갠 쾌청한 하늘 아래 무주등나무운동장에서 잠시 느껴본 여유. 낮 12시. 가장 많은 도움을 주셨던 이슬비님은 김종관 감독님을 태우고 대전 터미널로 향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기 전 혼자서 벤치에 앉아 아이들의 캐치볼을 멍하니 봤다. 나를 무주로 초대해주신 조지훈 프로그래머님이 다가오셨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시며 커피를 선물로 주셨다. 그렇게 영화제를 뒤로하고 향한 무주 터미널에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김세인 감독님을 우연히 마주쳤고 버스가 오기 전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영화제의 모든 순간은 꿈처럼, 스크린에 잠시 머물다 흩어지는 영화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대사 하나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평] ‘비밀의 언덕’ 무주산골영화제 감독상·관객상 수상작 비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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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주인공 영태(박송열)와 정희(원향라)는 30대 부부로 현재 일정한 직업이 없다. 영태는 영상작업자, 정희는 초등학교 특활교사지만 경력을 살려 일하기가 쉽지 않다. 생활을 유지하느라 둘은 공사장, 택배, 대리운전, 마트, 식당 등 가리지 않고 ‘알바’를 해왔다. 육체적으로 지옥을 맛보거나 심리적으로 자존감이 무너지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영태는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 다리를 다쳐 이제 막 회복된 참이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대화의 내용은 암담하다. 부부는 좁은 부엌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집주인이 재계약 때 전셋값을 올릴까봐 걱정한다. 경제적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급기야 정희는 사채를 쓰고 영태는 믿었던 선배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넘지 말자 했던 ‘선’들을 넘게 된다.
부부의 상황만 놓고 보면 빈곤의 우울과 그에 대응된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영화는 코믹한 톤과 거리를 둔 차분함을 결코 잃지 않는다. 여러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는
[비평]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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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6~2020년 <씨네21> 최장수 연재 작가
- 영화 패러디한 제목의 두쪽 만화에 언어유희 등 기발한 웃음과 함께현실 풍자, 약자에 대한 연민 녹여내,
2021년 말부터 백혈병 투병
<씨네21> ‘정훈이 만화’의 정훈 작가가 5일 별세했다. 향년 50. 정 작가는 1996년부터 2020년까지 25년간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두쪽짜리 만화를 연재하면서 영화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고인은 2021년 말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아 투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창원에서 자란 정훈 작가는 군인을 꿈꾸며 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하다가 입시에 실패한 뒤 만화가로 진로를 바꿨다. 1995년 만화 잡지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한 뒤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기자의 제안으로 영화 패러디 만화 연재를 시작한 게 ‘정훈이 만화’의 시작이
‘남기남’ ‘씨네박’ 탄생시킨 만화작가 정훈 별세…향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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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어디로 튈지 몰라 극적인 긴장감이 팽배해지는 사이, 김택록(이성민)의 건너편에서 이야기의 무게추를 침착하게 조정하는 건 다름 아닌 국진한(진구)이다. 의심과 추궁이 갈지자로 무한히 뻗어나갈 때 배우 진구는 <형사록>만이 그려낼 수 있는 형사의 진면을 생각했다. 이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잘하는 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조정해온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진짜 형사’를 그려내고 싶었다. 누가 진범인지 추리해가는 과정에서 한시도 의심을 놓을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이야의 균형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그게 형사의 중심이니까.”
-국진한의 첫 등장이 강렬하다. 택록이 한창 범인을 추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사건에 개입한다.
=사실 대본 속 첫 등장은 느슨했다. 지나가듯 잠깐 나타나서 나중에야 아까 그 사람이 진한이었다는 걸 알게끔 하는 정도였는데 현장에서 조금씩 바뀌었다. 생각보다 달리기도 오래했다. 그 추격 장면만 찍는 데
[인터뷰] '형사록' 진구, “진짜 형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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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머리를 바짝 민 헤어스타일, 부릅뜬 눈매에서 서늘한 매서움이 풍긴다. 이성민은 오랫동안 낡은 외투와 큰 바지를 입어온 사람처럼 거리감 없이 <형사록>의 김택록이 되었다. 50여편의 영화와 30여편의 드라마를 찍었지만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영화나 드라마가 공개되기 전날이면 잠 못 들고 뒤척인다. 인터뷰 날도 새벽 2시쯤 간신히 잠들어 이상한 꿈에 뒤척이다 세 시간 만에 깼다고 했다. 술도 즐기지 않고 몇 가지 운동을 하러 가는 것 외에는 집 밖을 잘 나가지 않는다는 그에게서 외골수 형사 택록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택록이 이야기 끝에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낼 거라고 믿는 것처럼, 이성민의 말을 들으면 스크린을 통해 앞으로도 꾸준히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그가 말한 대로, 평생 연기했고 지금도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로버트 드니로처럼.
-<형사록>의 원래 제목은 <늙은 형사>였다고.
=제목의 ‘늙음’ 때문에 힘들었다. 극
[인터뷰] '형사록' 이성민, “노련한 승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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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살인자 누명을 쓴 30년차 배테랑 형사 택록(이성민). 그를 함정에 빠뜨린 협박범 ‘친구’는 게임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친구’를 잡아야 끝나는 이 게임의 단서는 택록의 과거 속에 있다. 택록은 자신이 해결한 사건들 속에서 ‘친구’를 쫓을 단서를 추적하고 동시에 자기 인생도 돌아보게 된다. 그가 몸담고 있는 금오서에 신임 수사과장으로 온 국진한(진구)은 택록을 의심하면서도 ‘친구’를 잡기 위해 공조한다. 퇴직을 앞둔 늙은 형사와 물불 안 가리는 젊은 후배 형사의 티격태격하는 케미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나쁜 녀석들><38사기동대> 등 장르물에 장기를 가진 한동화 감독이 연출을 맡아 속도감에 쾌감을 더한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완성했다. 시청자 역시 ‘친구’가 제안한 게임을 거절할 수 없다. 택록의 기억과 진한의 여정을 따라 풀어나가는 미스터리,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형사록>의 재미를 이성민, 진구 두 배우에게 직접 들었다.
* 이
자, 거절할 수 없는 게임을 제안하지 : 디즈니+ <형사록> 이성민, 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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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 영화 <YMCA 야구단> 촬영 현장의 송강호. 포즈만큼은 에이스다. 영화 촬영 시점은 봄이었지만, 야구 팬에게 있어 한해의 마무리는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열고 닫는다. 올해도 공은 던져졌다!
[ARCHIVE] 공은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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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넷플릭스 시리즈 <다머>
에반 피터스가 실존 인물인 미국의 연쇄살인범을 연기하는 <다머>. 워낙 기다리던 작품이라, 9월21일 넷플릭스 오픈일에 맞추어 하루 만에 다 보았다.
영화 <회오리바람>
장건재 감독의 <회오리바람>. 2009년 영화인데 촬영 중 숙소에서 보게 되었다. 영문 제목이 ‘Eighteen’이듯이 말 그대로 열여덟의 치기 어린 사랑을 제대로 접한 기분이었고, 배우의 저돌적인 연기 바이브가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시나리오
최근 영덕에서 영화 <발레리나> 촬영을 마쳤다. 이제 다음 작품을 위해 다시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가수 저넬 모네이
저넬 모네이는 예전부터 즐겨 듣던 가수. 요즘 다시금 그녀의 음악을 듣는다.
예쁜
[LIST] 배우 전종서가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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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
디즈니+
이탈리아 베로나, 몬테규 가문의 로미오가 달빛 창가에 선 여인에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관객의 통념상 사랑의 수취인은 줄리엣이어야 맞지만 어쩐지 로미오가 줄기차게 외치는 이름은 로잘린이다. <로잘린>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로미오의 첫사랑으로 등장하는 줄리엣의 사촌 로잘린의 시점에서 재서술한 코미디다. 원작과 달리 <로잘린> 속 로잘린은 자신이 없는 틈을 타 잠수 이별 및 환승 연애를 저지른 로미오에 분노해 새 커플의 파경을 도모한다. <로잘린>의 재해석은 현대적이다. 영화는 원작의 16세기 배경을 유지하며 <귀여운 여인>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음악을 천연덕스럽게 사용한다. 또한 로잘린은 귀족 영애의 모든 인습에 저항하며 원작의 성차별적 시선을 냉소하고 주인공들의 풋사랑을 염려한다.
<키미>
웨이브
키미는 인공지능 이름이다. 아믹달라사의 음성
[OTT 추천작] ‘로잘린’ ‘키미’ ‘웬델 & 와일드’ ‘프롬 스크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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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궁 안팎을 휘젓고 다니는 중전 임화령(김혜수). 내명부 실세인 대비(김해숙)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던 화령은 맏아들 세자(배인혁)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후계 구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비와 본격적으로 맞서게 된다. tvN 드라마 <슈룹>의 5회. 대비가 움직인 대신 수십명이 대전 앞에 엎드려 폐세자를 청하며 왕을 압박하자, 그 자리에 나서 중신들 하나하나를 지목해 이들의 무리하고 부당한 요구에 반박하는 화령의 위엄은 정말로 대단한 볼거리였다. “이리 개떼처럼 몰려와 이 지랄을 하는 것은 세자를 살리기 위함입니까, 죽이기 위함입니까!”
한데 배우의 연기에 전율하는 것과 별개로, 드라마의 설정 구멍을 극중 인물이 변명하거나 지적할 때 느끼는 민망함도 있다. 애초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세자가 병이 났다고 폐세자를 논하는 과정 자체가 무리수였다. 물론 공식 홈페이지의 ‘관전 포인트’에선 ‘시대만 과거, 현대와 매
[유선주의 드라마톡] ‘슈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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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 감독 폴 피그 / 각본 데이비드 매기, 폴 피그 / 출연 소피아 앤 카루소, 소피아 와일리, 샤를리즈 테론, 케리 워싱턴 / 플레이지수 ▶▶▷
언제나 공주처럼 살 길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소피(소피아 앤 카루소)와 마녀의 자질이 보이는 아가사(소피아 와일리)는 가발돈 마을의 절친한 외톨이 소녀들이다. 공상처럼 살지 못하는 현실에 울적해진 소피는 동화 세상 속 선과 악의 균형을 위해 지어진 선과 악의 학교를 알게 된다. 선의 학교에 입학하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한 소피는 아가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학교에 입학할 의지가 없던 마녀의 딸 아가사는 선의 학장 도비(케리 워싱턴)가 이끄는 선의 학교에, 그 누구보다 동화 속 공주의 자질을 타고났으며 선의 학교 입학을 갈망한 소피는 악의 학장 레소(샤를리즈 테론)가 이끄는 악의 학교에 배정된다.
도비와 레소는 소녀들이 부정하는 각자의 정
[OTT 리뷰] 넷플릭스 '선과 악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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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걸 철칙 삼아 사는 남자, 이 사람은 현실에서 유죄일까? 무죄일까? 이탈리아 출신의 배우이자 패션 모델, 199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그러나 어떤 인연인지 프랑스 배우로 오해받는 일이 잦은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가뭄>의 각본을 쓴 프란체스카 아르키부지 감독의 새 영화가 관객과 만난다. <벌새>(Il colibrì)는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 후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지 1주일도 안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벌새>에서 의사이자 한 가족의 아버지인 마르코 카레라의 삶은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놓친 우연, 놓친 기회, 놓친 길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아내 마리나는 강박적으로 바람을 피우고, 그녀가 어렸을 때 해변에서 만난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여성 루이사와 바람을 피웠다고 남편을 비난한다. 그녀의 말은 맞는 걸까? 이 영화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잊어라.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다”라며
[로마] 산다는 것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