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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인기배우 오다기리 조는 패션을 메시지라 정의했다. 한국 버전의 한나(<미녀는 괴로워>)는 어울리지 않는 패션은 악, 진심은 내면이라 말했고, 한국의 27% 여성들은 남자들의 스키니가 꼴불견 패션 1위(모 쇼핑몰 설문 결과)라고 주장했다. 패션에 대한 세개의 독설. 이를 종합해보면 패션은 몸의 메시지며, 그 메시지는 진심이여야 하고, 그 진심은 몸을 배반해선 안 된다. 패션의 외모결정론설. 결국 패션은 외모를 중심으로 돌고, 진심은 외모의 변주로 읽힌다.
오다기리 조의 요지는 간단하다. 자신의 생각을 패션을 통해 전달한다는 것. 수상후보에 오르지 못한 서운함은 여고생의 양 갈래 삐친 머리로, 히피에 대한 갈망은 노숙자 스타일의 의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한국 버전의 한나는 패션과 메시지는 일정 정도의 ‘어울림’을 전제로 해야 한다며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다분히 자기 고백적인 주장. 뚱뚱한 여자의 새틴 드레스는 섹시해 보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섹시할 수
[오픈칼럼] 타인의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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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반려동물(伴侶動物)은 없지만 반려물건(伴侶物件)은 있다.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빨간색 엠피스리(MP3) 플레이어, 그것이 언제나 내 곁을 지키는 반려물건이다. 우리는 2006년에 만났다. 그해 최고의 구매는 MP3였고, 최악의 구매는 디지털카메라였다. 그리하여 서른다섯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사랑한 것은 역시나 음악이었다고, 소리에 매료되니 ‘그놈 목소리’에 집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MP3 플레이어는 한 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의 성실한 동반자요, 님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의 유일한 동행이다. 그분을 만나고 못 만나는 일은 하늘의 뜻이지만, 그분을 못 만나도 그것이 있으니 위로가 없진 않았다. 집을 나서서 처음으로 꺼내고, 집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가방에 넣는, 나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그래서 휴대폰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MP3 플레이어가 없으면 불안하다. 불만은 위로받지 못하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번잡한 길에서 이어폰을 꽂으면 아늑한 고립이 찾아
[이창] 반려물건(伴侶物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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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 춘추시대에 묵적(墨翟)이란 사내가 있었다. 성은 묵이요 이름은 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다섯 가지 형벌 가운데 ‘묵형’이란 게 있었는데, 얼굴에 죄명을 먹과 침으로 찍어 넣는 비인도적인 신체형이었다. 묵적의 성 ‘묵’은 그가 묵형을 받은 뒤 이를 자기 성으로 삼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높여 묵자(墨子)라 불렀다.
그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사상사에서 매우 독특한 획을 그은 사상가다. 이천 몇 백년 전에 활동한 그는 오늘날 읽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사해동포주의를 제창했다. 어버이처럼 가까운 이부터 사랑한 뒤 이를 넓혀나가라고 가르친 공자의 인(仁)을 그는 ‘차별적인 사랑’(別愛)이라고 비판했고,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두루 사랑하라”(兼愛)고 가르쳤다. 그가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묵경>(墨經)에는 “여자 노예도 사람이다. 여자 노예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남자 노예도 사람이다. 남자 노예를
[영화읽기] <묵공> 되살아난 묵자의 이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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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겨서 죄송한 사람이 있다면 잘생겨서 억울한 사람도 있다. 최근 <디파티드>와 <블러드 다이아몬드>, 그리고 비디오로 <셀러브리티>를 빌려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바로바로바로바로~(재용아, 누나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디파티드>를 보면서 ‘짜식 연기 좀 하네’, ‘나도 이제 연기파라 이거지?’ 하다가 <셀러브리티>를 보면서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우리 디카프리오는 원래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해보면 바짝 마른 몸의 정신지체아 어니(<길버트 그레이프>)일 때부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연기파 소년이었다. <배스킷볼 다이어리>나 <토탈 이클립스>를 찍을 때만 해도 그에게는 반항아 이미지를 지닌 핸섬가이이면서 동시에 실력있는 젊은 배우라는 타이틀이 놓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모든 것을 망쳐(!)놓은 게 <타이타닉>이다. 이 영화 이후 그는 핸섬가이의 아이콘에
[투덜군 투덜양] 그래도 멋있게 남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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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가끔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뭐야, 이거 TV드라마 같잖아.” 이럴 때 TV드라마란 말은 영화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허황된 스토리의 영화를 보면서 “이거 만화네. 만화”라고 말할 때처럼. 그러나 만화나 TV드라마가 수준 낮다는 인식이 옳은 것은 아니다. 만화가 독자적 대중예술장르인 것처럼 웬만한 영화보다 나은 TV드라마도 존재한다. 특히 최근 국내 방영되는 미국 TV드라마는 근자의 할리우드영화보다 흥미로울 때가 많다. <CSI>를 보면서 영화로 만든 요즘 범죄스릴러물이 오히려 시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케이블채널에서 <CSI 데이>를 시청하느라 하루를 보내다 보면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제 영화의 시대가 끝난 것 아닌가?
변화는 오래전에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중·후반부터 불어닥친 미디어 기업간의 인수, 합병은 거대 미디어 그룹의 탄생을 재촉했고 영화와 방송은 뗄 수 없는
[편집장이 독자에게] TV드라마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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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 넘버 원, 엄정화와 박용우. 커플 넘버 투, 한채영과 이동건. 그리고 커플 넘버 쓰리와 포? 영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의 캐스팅이 확정됐다. 극 중에서 두 부부는 서울과 홍콩에서 상대 파트너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 인연은 이후 새로운 연애로 발전한다. 김선미 작가의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1990년대 후반 씨네2000과 씨네21의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이다. 이후 2003년부터 작품을 다시 개발하고 김진 작가의 각색을 거쳐 현재의 이야기구조가 형성됐고, 작년 가을에 정윤수 감독이 연출하기로 결정했다.
일부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스와핑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결혼한 두 남녀가 각자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씨네2000측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결혼한 두 부부가 한 공간에서 같이 만난 후, 다른 공간에서 재회하는 구조의 이야기다. 본
엄정화, 박용우, 한채영, 이동건, 한 영화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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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부활한 태권V와 무서운 할매들이 맞붙었다. 1976년작을 복원한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가 맥스무비를 제외한 예매 사이트 세 곳에서 1위를 차지했다.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V>는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175개관에서 개봉하며 극장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로보트 태권V>의 과감한 배급전략은 예매에서 일단 긍정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맥스무비 김형호 실장은 “지난주보다 전체 예매량이 감소하는 분위기다. 따라서 박스오피스 전체가 20% 내외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시장이 비수기로 들어서면서 초반 예매율이 높은 영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이다. <로보트 태권V>는 유난히 초반 예매 관객이 많다. 영화를 보통 두명이 본다는 걸 가정하면, 1인당 예매량은 통상 2매가 기준이 된다. <로보트 태권V>는 2.7매 정도다.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이 2.5매 수준인데 2.7~8매는 매우 높은 수치다. <로보트
<로보트 태권V>, 예매시장에서 선전, 1월 3주차 예매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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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로젠봄을 포함한 유명 평론가들의 ‘2006년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작품은 놀랍게도 1969년 영화 <그림자군단>의 복원판이다. <사무라이>를 넘어서는 장 피에르 멜빌의 최고 작품의 위치에 <그림자군단>이 오른 건 필연적인 결과다. 멜빌의 영화와 삶을 규정짓는 ‘고독’, ‘멜랑콜리한 분위기’, ‘숙명적 배신과 인간에 대한 불신’, ‘염세적 세계관’ 같은 특징들은 바로 전쟁의 경험에서 나온 것인데, 이름조차 레지스탕스 시기에 바꾼 것을 평생 유지한 그가 전쟁의 기억을 쏟아넣은 영화가 <그림자군단>이기 때문이다(그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말했다”고 했다). 레지스탕스 시절 멜빌이 감명받았던 두권의 책은 이후 그의 영화인생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둘 중 <바다의 침묵>으로 데뷔한 멜빌은 25년의 준비를 거쳐 경력의 정점에서 <그림자군단>을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서두를 장식한 글귀- ‘나쁜
[해외 타이틀] 멜빌의 세계관을 완성한 전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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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17살 소년 요스케. 음악에 막 빠진 소년의 기타는 매일 같은 멜로디를 반복했다. 17살 소녀 유. 소년이 기타를 연주할 때면 소녀는 멀찌감치 앉아 같은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가을. 음반 영업사원인 34살 요스케 앞으로 34살 유가 찾아와 오래된 멜로디를 연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노래뿐 아니라 가슴속에 숨겨둔 말을 끝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좋아해>라는 제목이 너무나 평범해 금방 잊혀질 것 같았는데, 원제목 뒤에 찍힌 쉼표에 눈길이 머문다. 그들의 겨울이 어떨지 궁금해진 건 그 다음이다. <좋아해>는 별다른 스토리없이 두 사람의 여린 심리에 맞춰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다. 그래서 몰입하는 게 쉽지 않지만 힘겨운 걸음 마지막에 감독의 진심이 전해진다. 진중한 사적 영화를 만든 이시카와 히로시가 향후 같은 영역의 가와세 나오미만큼의 경지를 보여줄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기엔 <좋아해> 한편으로 충분하다. 영상과
쉼표처럼 끝내지 못한 두 사람의 마음은?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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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세계 영화계를 흔든 인상적인 전쟁영화 두편은 사실 장르영화와 멀리 위치한 작품이다. 굳이 두 영화의 공조를 역설하고픈 건 혹시 있을 법한 부당한 평가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스타일 면에서 켄 로치 영화로서도 새로울 게 없으며, 유머라는 로치의 미덕을 제거한 무뚝뚝한 얼굴로 지루한 민족주의를 강의하는 듯하고, 심지어 일부 평론가로부터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을 지적받기도 했다. 그러나 비슷한 갖가지 오해에서 벗어나 감독의 본질을 되살렸을 때에야 <그림자군단>이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처럼 <보리밭을…>이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영웅을 찬미하며 역사를 고쳐 쓰려는 전쟁 스펙터클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영화의 진정한 의미가 발견된다. 밝히자면 <보리밭을…>은 지금도 살아남아 자유와 평등의 씨를 말리고 있는 제국주의를 저주하는 영화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다 로버트 조이스의 시에 가슴이 뭉클하더라도 울
켄 로치가 사수한 신념을 보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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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가 웃고 울고 화를 낸다. 길게 뻗은 선과 수줍게 찍힌 점, 그 사이를 메운 좁은 여백을 들여다보면 손글씨가 품고 있는 각양각색의 대담한 표정들이 느껴진다. 감정을 전달하는 손글씨, 캘리그래피(calligraphy)의 심장은 그것이다. “감성적인 글꼴이죠. 캘리그래피는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이기에 감정을 담고 있어요.” 캘리그래퍼 강병인씨는 말한다. “손글씨, 서법, 서예 따위의 단어들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아요. 손글씨나 서예의 범주에 속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자인적인 요소가 가미된 상업적인 글씨니까요.” 그의 말대로 손글씨, 서법, 서예라는 명사 곁에 감성적, 상업적, 디자인적 등 몇 가지 형용사들을 함께 늘어놓으면 조금 더 정확한 의미의 캘리그래피가 완성된다. 손글씨로 표기하기엔 그 범위가 무한히 넓고 서예라고 단언하기엔 너무 대립적인 개념인 셈. “서예는 작가주의적인 예술이지만 캘리그래피는 타인을 대변해요. 가수 성시경의 앨범 재킷을 작업한다 하면 정말 성시경처럼 보이도록 써
영화 포스터부터 의상 패턴까지, 캘리그래피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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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On Painting전> 1월31일까지 | 국제갤러리 | 02-735-8449
회화에 관한 한 더이상 새로운 논쟁이 없을 것 같은 이 시대에 회화에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이유로 여전히 작업을 멈추지 않는 현대의 회화작가들에게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회화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세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Part I: On Painting전>은 어느정도 이런 갈증을 해소해줄 기회다. 공교롭게도 각각 1960, 70, 80년대생인 이광호, 노충현, 문성식 작가가 회화작업을 통해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인물과 공간’. 회화의 고전적인 관심사라고 할 만한 소재를 작가의 개성에 맞게 엮어냈다.
‘Inner-View’라는 주제로 연작 시리즈를 내놓았던 이광호 작가는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진 인물화를 선보인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모델과의 소통을 시도한 작업과정은 작품과 함께 비디오로
회화에 대한 세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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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의 <사랑의 갈증>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통속소설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그랬듯 단순히 도덕이라는 잣대로 재기 힘든 한 여자의 삶과 그 속내를 섬세하게 발라낸다. 그리고 묻는다. ‘편견이 아닌 도덕이 있을까?’ 거기에 대한 교과서적인 답안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미시마 유키오는 주인공 에쓰코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의 문제를 기가 찰 정도의 천연덕스러운 문장으로 풀어간다.
에쓰코는 시댁 식구들과 살고 있다. 에쓰코의 남편 료스케는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미 상당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 그는 아내에게 여자 관계를 숨기는 정도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한 마음이 든 에쓰코가 두 번째로 음독을 시도하려한 날 밤 남편은 병이 드는데, 며칠이 지나 장티푸스임이 밝혀져 병원에 갔을 때 남편은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신혼 이후 처음으로 에쓰코는 행복을 맛보지만, 남편의 여자들이 하나씩
그녀의 스캔들 그리고 나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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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 1월20일(토) KBS2 밤 12시35분
악에는 악으로 대항하라. ‘개종 또는 죽음’을 강요하는 네크로몬거의 반대편에 선 것은 성웅이 아닌 최악의 범죄자 리딕.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의 근육질 전사들 틈새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권력자의 아내 데임 바코다. “한 나라가 망하는 걸 지켜보는 건 늘 멋져”라 나긋하게 읊조리는 자태가 사나운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그녀는 탠디 뉴튼. 영국과 짐바브웨의 피가 섞인 뉴튼은 잠비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했다. <청춘 기숙사>으로 데뷔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하녀로 살짝 등장한 그녀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제임스 아이보리의 <대통령의 연인들>에 출연하면서다. 흑인 노예이자 토머스 제퍼슨의 정부로 분해 호평받은 뉴튼은 <미션 임파서블2>에서 톰 크루즈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크래쉬>에서 백인 경찰
[앗! 당신] 검은 것은 아름답다, 탠디 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