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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이 시작된다. 다만 이번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려놓기 경쟁이다. <보스>는 한때 명절 극장가의 대표 장르라고 해도 좋을 조폭 코미디의 계보를 오랜만에 잇는다. 1990년 후반 ‘식구파’는 조직명 그대로 끈끈한 협력으로 지역을 접수한다. 순태(조우진), 판호(박지환), 강표(정경호)는 각자 싸움 기술을 발휘해 조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지만 세월은 조직폭력배를 원치 않는다. 중국집 요리사를 꿈꾸는 순태, 춤의 매력에 눈을 뜬 강표가 각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이 조직의 보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치열한 ‘보스 양보전’이 펼쳐진다. 추석 극장가의 ‘보스’였던 조폭 코미디 장르가 시대에 맞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웃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강력한 개연성으로 작동한다. 모난 구석이 없이 추석 극장가 공략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잘 뽑힌 오락영화다.
[리뷰] 추석과 조폭 코미디. 여전히 먹히는 공식으로 풀어낸 안전한 오락,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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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아닌, 그 옆에 있던 조연은 시간이 지나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작품 바깥을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원작 팬들에게 추억의 시간을 선물하듯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를 선사한다. 오직 하니의 라이벌로 기능하던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이제 고등학생이 된 두 사람은 보다 고차원의 주제로 싸운다. 특히 길거리 위를 달린다는 ‘에스런’ 경기를 새롭게 창조하면서 다채로운 액션, 경기를 긴장감 넘치게 만드는 변수, 하니와 애리가 균형을 이뤄야만 하는 개연성 등을 지혜롭게 보완했다. 중간중간 유아동 애니메이션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아쉬움을 남기지만 후반부 경기가 많은 것을 상쇄하기 충분하다. 노브레인 황현성이 음악감독을 맡아 스포츠물의 벅차오름을 고양시킨다.
[리뷰] 어쩌면 그동안 세상이 하니와 애리에게 주고 싶었던 것들이 마침내,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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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덴지는 전기톱의 악마와 계약한 후, 모든 것을 썰어버리는 막강한 힘의 ‘체인소 맨’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일본 공안 소속의 데블 헌터가 되어 각종 악마와 맞서 싸우고 있다. 한편 상사 마키마를 흠모하는 덴지는 자신에게 진정한 마음이랄 게 있는지 고민하는 중이기도 하다. 여기엔 제대로 된 사회의 보살핌 없이 자란 덴지의 성장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런 덴지에게 불현듯 찾아온 또 한명의 소녀, 보랏빛 머리칼과 신묘한 눈망울을 지닌 레제. 덴지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레제와 함께 설레는 시간을 보내지만, 뜻밖의 악마와 마주치며 잠깐의 사랑을 멈추고 결투를 시작한다. 동명의 인기 만화 중 한 에피소드를 극장판으로 만든 작품이다. TVA에서 명확히 살아나지 못했던 원작의 허무하고 충동적인 정서가 훨씬 더 잘 어우러지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일반적이지 않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덴지의 성격이 비약 없이 자연스레 드러나면서 <체인소 맨>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가
[리뷰] 물의 고요에서 불의 열망으로, 톱질도 순애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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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원소 3부작’을 완성하는 마지막 작품.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라우라(파울라 베어)는 남자 친구와 함께 내키지 않는 여정에 오른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이방인 베티(바르바라 아우어)와 시선을 주고받는다. 이윽고 불의의 사고로 남자 친구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라우라는 베티의 손길에 의식을 되찾는다. 라우라가 베티와 함께 머물기를 간청하면서, 그리고 베티는 마치 그녀를 오랜 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라우라를 집 안으로 들이면서 둘은 기묘한 돌봄의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베티의 보살핌 속에 먹고, 입고, 자전거를 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새로운 삶에 정착하려 한다. 그러나 그곳의 가구들은 어딘가 늘 고장 나며, 베티의 남편과 아들이 라우라를 대하는 태도는 이 임시적 모녀 관계에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미러 넘버 3>는 사고에서 깨어난 라우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표층의 서사와 베티 가족이 비밀스레 공유하는 상실의 기억이
[리뷰] 페촐트의 시네마일까. 우리의 인생일까, <미러 넘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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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핀천의 <바인랜드>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에서 시작하지만 읽어나갈수록 불안과 해방 사이에 놓였던 ‘반문화’의 60년대가 피어오르는 소설이다. 일찌감치 핀천의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같은 작가의 <바인랜드>에서 영감을 받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돌아왔다. 60년대와 80년대를 가로지르며 전개되었던 소설과 달리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이야기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재로 시대를 옮겼다.
무장혁명단체 ‘프렌치 75’에서 폭발물 제조를 담당하는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억류된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급습 작전에 동참한다. 조직의 핵심 인물이자 누구보다 급진적인 철학을 지닌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는 작전 도중 군인 스티븐 록조(숀 펜)를 성적으로 모욕한 후 생포하면서 그에게 충동과 분노를 동시에 산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프렌치 75는 이후로도 미국 도심
[리뷰] 미국이라는 더러운 유산에 새로운 점화를 외치는 PTA의 ‘진짜’ 21세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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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간 이어져온 <트론>시리즈의 세계관 내 사건, 사고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월트디즈니 스튜디오는 장편영화 <트론><트론: 새로운 시작>외에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단편영화와 비디오게임, 애니메이션 등을 제작하면서 세계관 설정을 이어왔다. <트론: 아레스>역시 같은 세계관 내의 인물과 사건이 이어진다. <트론: 아레스>를 만나기 전 <트론>시리즈에서 벌어진 사건과 <트론> 세계관에서만 통하는 용어를 예·복습해보자.
<트론> 시리즈 연표
1979년
엔컴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케빈 플린, 비디오게임 <스페이스 파라노이드>개발하다.
엔컴의 프로그래머 에드 딜린저가 케빈 플린의 게임 기술을 자신의 발명품이라고 속여 출시한 뒤, 부사장으로 승진하다.
1982년(<트론>)
에드의 지시를 받던 흉포한 프로그램 마스터 컨트롤에 의해 케빈이 사이버공간 그리드에 갇히다.
[커버] <트론> 세계관 총정리 – 시리즈 연표부터 용어 해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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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다. 20세기 후반 디지털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상을 이야기와 형식 모두에 접목시킨 영화 <트론>시리즈의 세 번째 신작 <트론: 아레스>가 개봉한다.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를 도입해 시각특수효과의 지평을 넓힌 1982년작 <트론>, 가상 세계의 스펙터클을 3D와 아이맥스 상영으로 업그레이드한 2010년작 <트론: 새로운 시작>에 이어 이번에는 인류 최대의 혁명적 난제인 AI를 내세운다. 복잡한 트론의 세계에 갇히지 않으려면 세계관의 설명서는 필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소개한다.
디지털 세계로 이끈 트론의 탄생
필름과 컴퓨터가 만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시작점에 <트론>이 있었다. 1982년 <트론>이 만들어지던 때에는 영화의 특수효과에 컴퓨터그래픽 이미지가 쓰인다는 것이 낯설고 도전적인 과제였다. 애니메이터 출신 신인감독 스티븐 리스버거는 이제 막 태동하기
[커버] 새로운 <트론> 시리즈를 기다리며, <트론: 아레스>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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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스트 라이브즈>의 오스카 캠페인 도중 <트론: 아레스>의 오디션 제안을 받았다고.
처음엔 <트론>시리즈와 내가 딱 들어맞는 배우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주저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전작인 <패스트 라이브즈>가 고요한 작품인 동시에 나와 닿은 부분이 많은 독립영화였고,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연기를 요했으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에 출연하자니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런데 지난 연기 인생을 돌아보면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할 때 늘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경험을 믿으며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우선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유서 깊은 시리즈에 아시안 여성이 주인공으로 선다는 의미가 컸고, 이 정도 스케일의 작품을 해본 적이 없어 관심이 갔다. 마침 몸을 쓰는 연기를 갈망하던 차였다. 그래서 오디션을 보러 갔다. 다른 배우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지만 나는 오디션 보는 걸 꽤 즐긴다. (웃음) 오디션이야말로 감독이나 제작자와 함께 캐릭터의 방향성을 그릴 수
[인터뷰] 할리우드적 모먼트에 존재하기, <트론: 아레스> 배우 그레타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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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너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그레타 리)은 이 한마디에 24년의 그리움을 응축한다. 어쩌면 이 대사는 <패스트 라이브즈>로 그레타 리를 비로소 인식했을 전세계 관객들이 그에게 전하려던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많이들 그레타 리의 대표작으로 <패스트 라이브즈>를 거론할 테지만, 그의 얼굴과 정신은 디아스포라 멜로의 애절한 노스탤지어에만 갇히길 거부한다. 그는 <러시아 인형처럼><더 모닝 쇼><더 스튜디오>등의 시리즈에서 무엇으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돌출된 연기를 선보였고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등 대형 스튜디오 영화에서도 비중을 넘어서는 존재감을 발휘했다.
지금 우리는 그레타 리에게 한번 더 “와, 너다”라며 놀랄 차례다. 그가 새로 꺼내 보일 얼굴은 10월8일 개봉을 앞둔 <트론: 아레스>에 있다. 그레타 리는 15년 만에 돌아온 <
[커버] 항상 문을 열어둘게, <트론: 아레스> 배우 그레타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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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CFM)에 참여한 국가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홍콩관이다. 홍콩무역발전국에서는 매년 3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 영상마켓인 홍콩국제영화TV마켓(이하 홍콩필마트)을 개최해왔다. 올해는 그 흐름의 파도가 이어져 홍콩 기관들의 공동주최로 부산에서 ‘홍콩 시네마 @ 부산 2025’ 캠페인을 진행했다. 한동안 한국 관객들로부터 멀어졌던 홍콩영화의 파도가 다시 찬찬히 밀려오고 있는 가운데, 한국을 방문한 조니 왕, 테런스 최 프로듀서를 만나 홍콩영화의 오늘과 함께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물었다.
- 코로나19 이후 아시아 영화산업의 지형도는 실시간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테런스 최 한국 영화시장은 언제나 관심 대상이 다. <기생충>(2019)이 나 <파묘>(2024)처럼 주목 할 만한 성공 사례들이 꾸준히 나온다. 시장의 트렌드를 선도할 만한 영화들이다. 전주
[인터뷰] 홍콩의 이야기와 기획, 한국의 기술력이 어우러진다면, 조니 왕, 테런스 최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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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씨네21’상은 <아코디언 도어>의 손경수 감독에게 주어 졌다. 시상은 9월25일 오후 7시부터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비전의 밤에서 진행됐 다. 씨네21상은 영화 전문 미디어 <씨네21>이 후원하며, 비전 부문의 한국 장편영화 중 독창적인 시선과 과감한 도전을 보여준 영화 1편에 1천만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상이다. 비전-한국 섹션에 초청된 <아코디언 도어>는 손경수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기억의 공백과 성장통을 겪는 한 소년이 전학생 소녀를 만나면서 일상의 균열과 기묘한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아코디언 도어>에 대한 손경수 감독의 상세한 인터뷰는 <씨네21> 1526호에서 읽을 수 있다. 손경수 감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얼떨떨하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시간이 선하다. 앞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영화를 하고 싶은 데, 어떻게 하면 될지 잘 모
[국내뉴스] 영화를 계속 만들 힘,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씨네21상 <아코디언 도어>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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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행복의 나라>의 추창민 감독이 차기작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는 배우 로운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왈패가 된 시율(로운)은 함께 청렴한 관리가 되자고 약속했던 친구 정천(박서함), 장사에 소질이 있는 최은(신예은)과 뜻밖의 인연으로 묶인다. 로운은 <탁류>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유는 명확하다. 내가 28살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로맨스 장르의 백마 탄왕자님이 아닌, 자신의 결핍에서 시작해 세상을 바꾸고자 나아가는 왈패 시율이 되어 로운은 <탁류>를 이끈다. “내 연기 인생에 찾아온 하나의 변곡점 같은 작품이다.” 30대의 시작을 앞두고한 단계 올라선 배우 로운과 <탁류>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 <혼례대첩> <연모> 등 이미 사극에 주연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시율만큼 거친 인상을 보여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탁류>에 합류하게 된 계
[인터뷰] 인물의 결핍에 집중하다보면, <탁류> 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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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교: 디텐션>의 쉬한창 감독은 2020년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부맹백 배우의 연기에 감명받아 많이 울었다”는 촬영 비화를 전했다. 진중한 연기로 감독을 울린 부맹백이 맡은 역할은 1960년대 대만 군사독재 시기, 학생을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캐릭터 해석을 두고 깊이 고민했다. “시대적 상황과 주어진 설정을 조화롭게 풀고 싶었는데, 촬영 도중에도 어딘가 막힌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과 프로듀서, 제작자와 머리를 맞댄 끝에, 장 선생님은 오히려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에서 ‘그다움’이 나온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작품을 통해 부맹백은 자신만의 연기관을 정립했다. “앞서 생각을 많이 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몰입했을 때 나오는 감정을 중시할 것. 내가 곧 그 인물이라는 자신감이 좋은 연기를 만든다.” 영화 <마지막 구절>(2017)은 그에게 제52회 금종장 ‘미니시리즈 또는 TV영화 부문’에서 최우수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는 주인공
[인터뷰]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배우 부맹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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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째 이어진 인연의 자연스러움이란 이런 걸까. 차이밍량 감독이 인터뷰 테이블 중앙에 놓인 쿠키를 집자, 이강생은 어느새 접시째 그의 앞에 밀어두었다. 대화의 흐름에도 막힘이 없었다. 차이밍량이 진지한 대답을 마치면 경청하던 이강생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고, 이강생의 흩어진 기억은 차이밍량이 슬그머니 메워주었다. 부산국제 영화제가 30주년을 맞는 동안 여러 차례 영화제를 찾아온 두 영화적 동지는, 올해 <안녕, 용문객 잔>(2003)이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 섹션에 선정되며 다시 부산을 방문했다.
2023년 한국의 원주 아카데미 극장 철거를 취재했을 때, 올해 서울 대한극장의 폐업 소식을 접했을 때 <안녕, 용문객잔> 속 복화극장을 떠올렸다. 두분에게도 단골 극장이나 오래된 극장이 문을 닫은 경험이 있나.
=차이밍량 내가 다니던 과거의 수많은 극장이 떠오르고 그곳들에 대한 기억을 <안녕, 용문객잔>에 담았다. 알다시피 예전 극장의 규모
[인터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 배우 이강생, 차이밍량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