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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마천루 안에서 양복차림은 모두 백인이고, 청소하는 이들은 대부분 히스패닉이나 흑인이며, 그 사이를 질주하는 택시기사 열에 아홉은 인도며 러시아에서 넘어온 이민자다. 패션과 개성과 자유의 도시 뉴욕은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가장 도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뉴저지 출신 애니(스칼렛 요한슨)가 얼떨결에 뉴욕 상류층 ‘X 가족들’ 외아들의 유모로 ‘발탁’된 이후의 고군분투를 그린 <내니 다이어리>는 그런 뉴욕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바라본다. 영화의 오프닝은 뉴욕 자연사박물관. 아마존과 사모아 원주민의 양육행태를 보여주는 밀랍인형 옆으로 뉴요커가 전시돼 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인류학도를 꿈꾸는 애니에게 있어, 기를 쓰고 가정을 꾸린 뒤 온갖 명품으로 치장하고도 쇼핑에 피부관리, 자선사업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X부인(로라 리니)과 불륜이 일상인 X씨(폴 지아매티)의 모습은 인류학적 고찰의 대상이란 뜻이다.
2002년 첫 출간 이후 스테디
교훈극의 판타지 <내니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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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는 오로지 남자만이 설 수 있다는 법령이 지켜지던 영국의 한 시대에 키니스톤(빌리 크루덥)은 당대에 가장 아름다운 연극 속 여성으로 사랑받는 남자배우다. <오델로>에서 여자주인공 데스데모나를 연기하는 그의 마지막 대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미모와 여성스러움에 언제나처럼 매혹된 관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이름을 외치며 막이 내리기 전 이 연극이 사실상 끝난 것임을 인정해버린다. 그런 그를 늘 무대 뒤편에서 지켜보는 키니스톤의 보조 메리(클레어 데인즈)는 배우가 되고 싶어도 길을 발견할 수 없어 애태우는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이다. 그러던 그녀가 하층민들이 찾는 허름한 주점에서 불법으로 무대에 올라 <오델로>의 데스데모나를 연기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연극에 관심이 많은 왕의 애인이 그리고 언젠가 키니스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는 권세 높은 귀족 하나가 우연히 그녀의 재능을 밀어주고 메리는 마침내 “무대 위의 여자 역은 여자만이 할 수 있다
식상한 성공기 혹은 러브스토리 <스테이지 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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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시 칙스는 여성 뮤지션으로서 최고의 음반 판매량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컨트리 뮤직의 언니들이다. 이들이 거침없이 인기가도를 달리던 2003년,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우기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때마침 런던에서 공연 중이던 딕시 칙스. 메인 보컬인 나탈리가 관중을 향해 외쳤다. “미국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게 부끄럽군요.” 이 한마디,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 말이 이들의 인기에 제동을 걸었다. 대부분이 공화당 지지자들인 컨트리 뮤직 팬들은 딕시 칙스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고,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국은 딕시 칙스의 노래를 틀지 않았다. 이들의 논지는 단 하나, 대통령을 모욕하는 자는 국가를 모독한 자라는 것이다. 부시의 지지율이 사상 최대로 높았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비난과 위협은 ‘다양성’을 노래하는 미국의 끔찍한 이면을 엿보게 한다.
영화는 2003년 문제의 발언 이후,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미국의 끔찍한 이면 <딕시칙스: 셧업 앤 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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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일종의 복수극이지만 피 한 방울, 가벼운 주먹 한번 날리는 일 없이 매우 조용하고 서정적으로 복수를 치러낸다. 복수란 단순히 대상을 없애버리거나 신체에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그려진 작품을 수시로 접했던 관객에게는 이 영화 속의 복수는 다소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음악 학교에 입학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멜라니(데보라 프랑수아)는 심사위원인 아리안(캐서린 프로트)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느라 주위를 분산시키는 바람에 실수를 하게 되어 시험에 떨어진다. 그 뒤로 피아노 치는 것을 그만둔 멜라니는 10년 뒤 아리안의 집에 보모로 들어가 그녀의 커리어와 가족 관계 그리고 아들의 장래까지 모두 망쳐놓고 홀연히 그 집을 떠난다. 파리콩세르바투아르 출신 음악가로, 파리 플레이엘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기도 했던 드니 데르쿠르 감독은 음악가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짚어낸다. 극복할 수 없는 무대 공포증,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할 기회 상
다소 밋밋한 스릴러 <페이지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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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의 한 아파트에서 남성 포르노 스타의 시체가 발견된다. 저명한 정치가 아버지는 사실상 포르노 사이트의 단골 고객이다. 딸 나탈리는 몬트리올의 명문대에 다니는 집안의 자랑거리다. 이러한 무관해 보이는 사실들이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을까. 캐나다영화 <마이 걸, 마이 엔젤>은 겉으로 보기엔 모범적이고 평온한 중산층 가정이 서서히 포르노 산업에 관련되며 겪는 균열상에 미스터리를 섞어 만든 영화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신이 은밀히 보던 포르노에 자신의 딸이 나오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풍요롭고 화목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모범생 나탈리가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자마자 아무런 자의식없이 포르노 산업에 발을 담근 것. 그러나 그녀는 가난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길티 플래저(guilty pleasure)로서 포르노를 즐기는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이러한 영상물이 나날의 일상이 되어버린 나탈리 세대에 죄책감이란 없다. 어릴 때부터 그러한 영상물들을 여과없이 보고 자란 세대가
음란물 노출로 인한 감각적 마비 <마이걸, 마이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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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맞은 스티븐(에이드리언 브로디)은 오랜 꿈이었던 복화술사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 아직 독립하지 못했고 애인도 만나지 못한 그의 친구는 다혈질적인 성격의 친구 패니(밀라 요보비치)와 복화술 공연 파트너인 ‘나무왕자’ 인형뿐이다. 어느 날 구직상담소를 찾은 스티븐은 그곳에서 복화술사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이야기에 호감을 보이는 로레나(베라 파미가)를 만난다. 하지만 대책없이 나서기 좋아하는 패니의 작전지시는 스티븐을 스토커로 몰리게 하고 그는 가족에게 더욱 바보 같은 존재로 찍혀버린다.
<스위트 보이스>는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플라모델 조립에 빠져 있는 스티븐의 아버지나 언제나 자식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사는 어머니, 가수가 되고 싶지만 언제나 제 성격에 못 이겨 팀원들을 다그치기 바쁜 팬고라, 역시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누나 하이디, 그리고 죽은 애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로레나까지 등장인물들은
서른살 남녀의 성장담 <스위트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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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그대로 역시 재미있는 영화다. 시리즈 3편은 게임 원작 팬들이 좋아할만한 요소와 각색의 결과물이 두루두루 합쳐지면서 많은 볼거리를 쏟아낸다. 팬들은 <레지던트 이블>시리즈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진 않는다. 화끈한 액션과 좀비들이 벌이는 피범벅 광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대부분 만족한다. 특수효과는 더 좋아졌고 유혈 낭자한 폭력의 수위도 한층 더 강화되면서 보다 세련되게 변화했다. 특히 1,2편이 총격전 위주의 싸움이었다면, 이번 3편에서는 밀라 요보비치의 섹시한 칼질이 큰 볼거리다. 전작을 흥미 있게 보았다면 지나칠 수 없는 속편이다.
김종철/ 익스트림무비(extmovie.com) 편집장
[전문가 100자평] <레지던트 이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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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하고 육감적인 영화 <영 아담>을 만든 데이빗 맥킨지 감독의 차기작 <어사일럼>은 1950년대 영국의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불륜'영화이다. 1990년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클로저>의 작가 패트릭 마버와 유명한 작가 스티븐 킹의 손길이 닿은 시나리오는 과연 밀도 높은 플롯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치우침이 없다는 점이다. 어느 캐릭터나 적당한 이상성과 정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에드가는 멀쩡한데 갇혀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미친 악당도 아니다. 피터 역시 부성적인 의사도 아니고, 모든 것을 조정한 사악한 자도 아니다. 스텔라도 그저 사랑에 빠진 순진한 유부녀라고 보기도 어렵고, '미친년'이라 보기도 어렵다. 에드가는 어느 정도 '위험한' 남자였고, 피터도 조정의 욕구가 있었지만 그의 음모가 시종 먹혀든 것은 아니며, 그녀는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 속에서 순간순간 나쁜 선택을 하는 여자였다(인생이 다 그렇다). 따
[전문가 100자평] <어사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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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0월 2일 오후 2시
장소 서울극장
이 영화
서까래에 목을 맨 채 죽은 한 궁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녀의 이름은 월령(서영희)이다. 여러 정황상 자살로 보이는 죽음이지만, 시체를 검시한 내의녀 천령(박진희)은 그녀가 살해됐다는 증거와 함께 궁 안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자칫 궁궐이 소란스러워 질 것을 예감한 감찰상궁은 월령의 죽음을 자살로 은폐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자신도 한때 궁녀였고, 몰래 아이를 낳아 버릴 수밖에 없던 상처를 겪었던 천령은 독자적으로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사건의 배후에는 궁녀들만의 음모, 질투와 함께 여러 인물들이 엮여있다. 죽은 월령과 한방을 썼던 말 못하는 궁녀 옥진(임정은)과 원자를 낳아 왕의 총애를 받은 후궁 희빈(윤세아), 월령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정렬(전혜진) 그리고 천령과 아이를 배신한 한 남자. 하지만 조금씩 진범에게 다가가는 천령에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위기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
왕의 여자들이 벌이는 아귀다툼, <궁녀>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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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 최대의 축제'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오는 10월 4일부터 12일까지 개최된다.
펑샤오강의 전쟁영화 <집결호>로 문을 열고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으로 문을 닫는 이번 영화제의 특징은 한마디로 '싱싱함'이다.
그 싱싱하고 많은 상영작 가운데 씨네21 추천작 중 7편의 필름 클립과 2편의 부산 최초 공개 한국영화를 영상에 담았다.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양한 만찬을 미리 만나보길 바란다.
[PIFF2007]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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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운명> <그놈 목소리>의 박진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을 만났다. 박진표 감독은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1998년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이 영화를 “스무번도 넘게” 보면서 영화감독이 되기를 희망했던 박진표 감독은 데뷔작 <죽어도 좋아!>를 갖고 2002년 부산영화제를 찾았고, 이때 부산의 한 커피숍에서 허진호 감독과 대면했다. 서로의 영화에 대한 호감에서 출발한 이 세살 터울 두 남자의 관계는 이내 형-동생이 됐고, 짬이 날 때마다 영화와 삶, 그리고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소곤거리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렇게 마음이 통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수백명과 인터뷰를 했던 박진표 감독의 경력 덕인지, 좀처럼 자신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던 허진호 감독은 한 장면을 만든 배경에서부터 깊은 고민까지 이야기해줬다.
박진표 어제 형 영화 잘 봤어요.
[박진표-허진호 대담] 도대체 왜 행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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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혼란이 왔다. 너무 쉽다. 너무 단순하다. 천사표 여자가 아픈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고 병을 고친 그 남자는 결국 그 여자를 배신하고 떠난다.
사랑은 그렇게 씁쓸하고 경박하며 부질없는 것이다.
그게 다인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단순히 그게 다인가?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 착한 여자의 캐릭터에 극단적인 선악구도에 약초 캐는 날 하필이면 비가 오는 손쉬운 설정하며…. 전형적이며 통속적인 멜로의 문법을 당혹스러울 만큼 노골적으로 차용한 이유가 뭘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허진호 감독이. 감독 자신의 최고 장점인 탁월한 심리묘사와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대사의 힘만으로 황정민과 임수정이라는 두 거목의 발군의 연기력만으로 그 당혹스러움이, 그 진부함이 커버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감독조차도 ‘통속적인 멜로’를 하고 싶었다고 배수의 진을 쳤지만, 관객이 찾아내주길 바라는 뭔가가 분명히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엔딩 크레
<행복> 에세이 3. 은희만의 소박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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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허진호 감독은 줄곧 남녀간의 사랑을 탐구해왔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전작들과는 좀 결이 다르다. 간이 굳어가는 남자와 폐에 고름이 잡히는 여자가 요양원에서 만나 빈집에서 함께 산다. 거기에 대고 ‘행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잃을 게 목숨밖에 없는 삶의 막장에서 동병상련의 연대로 만난 두 남녀의 사랑은 투명한 단순성 때문에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생활 속에서 행복을 유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아닐 게다. 이 영화의 전언이 ‘소박한 일상 속에 행복이 있다’는 따위의 김빠진 설교는.
실제로 두 남녀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한다. 병세가 호전된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병이 악화돼 죽음을 맞는다. 남자는 다시 그들이 만났던 ‘희망의 집’으로 돌아온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조강지처 버린 자는 벌 받는다’는 신파극 같다. 혹자는 70년대 호스티스영화를 요양원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것 같다고 한다. 설마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이건 아닐 테지.
<행복> 에세이 2. 은희는 사랑을 알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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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두 사람이 서로 호감을 갖고 감정을 발전시켜나가는 부분이다. 농담과 배려, 시치미, 오해 등 앙증맞은 톱니들이 돌아가는 소리와, 정념의 낙차가 만들어내는 그래프 곡선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있을까 싶다. 연애 이야기에서 더 흥미로운 지점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합일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공간이 최초로 찢어지는 순간이다. 우리가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주인공을 통해 사랑의 충만감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찢어짐의 순간을 매번 다시 경험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두 사람의 연애를 지지하는 만큼 두 사람의 이별을 갈망한다.
나는 영수(황정민)가 은희(임수정)에게 “너 밥 천천히 먹는 거 안 지겹니? 난 지겨운데”라고 묻는 순간이 좋았다. 둘 중 한 사람만의 건강이 호전되자, 다른 한 사람이 보여준 이중적인 태도가 좋았다. 그것은 내가 어느 소설의 문장, ‘아름다우면서 진실한 것
<행복> 에세이 1. 진실을 견디려는 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