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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절박했던 아침을 종종 떠올린다. 11월의 찬 공기 속으로 뿜어져 나가던 입김, 발 아래 깔려 있던 회색 보도블록의 무늬, 응원가를 부르던 고등학생 무리와 담장 앞에 줄지어 기도하던 어머니들. 내 인생이 오늘 여기서 결정되는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비장함을 넘어 일종의 성스러운 기분이 피어올랐다. 그날은 내 두 번째 수능 시험일이었다.
12년, 아니 13년이 흘렀다. 물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조자룡 혹은 장판교 위의 장비에 버금갔던 비장함이 무색하게도, 내 인생은 수능 성적표에 찍힌 백분율과 상관없이 흘러갔다. 대입과 동시에 평생 다시는 시험공부 따위 하지 않으리라 치를 떤 결과, 내 졸업 평점은 상당히 좋은 시력 정도에 불과했고 변변한 토익 성적은 물론 그 흔한 운전면허도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지만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한번 얻지 못하고 달려온 길의 끝에는 모든 종류의 공부에 대한 거부반응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최지은의 TVIEW] 안판석-정성주 콤비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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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몇몇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태어나서 처음 본 콘서트가 화제에 올랐다. 그 자리에는 1970년생부터 1981년생까지의 남녀가 모여 있었는데, 처음으로 본 콘서트가 어떤 것인지로 세대와 지역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생인 친구가 처음 본 공연은 들국화였다. 한살 차이가 나는 후배는 장필순이었고, 더 어린 남자 후배 한명은 이치현과 벗님들이었고(겉늙은 거야!) 가장 나이 어린 여자 후배는 김건모였고, 나보다 두살 어리고- 어리다고 해도 올해 나이 마흔!- 서울 근교에 살던 여자 후배가 처음으로 본 콘서트도 김건모였다.
내가 맨 처음 본 게 어떤 공연이었더라 잠깐 생각하다가 “아마 롤러코스터였을걸”이라고 하자, 1970년생이자 나와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현재는 작가로 활동 중인 친구가 곧바로 수정해주었다. “너 들국화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같이 보러 갔잖아.” 아, 그랬나? 그랬구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기억력이 형편없는 사람이 기억력 좋은 친
[김중혁의 No Music No Life] 뽕끼 한 방울의 환각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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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종말의 광경을 상상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여기서 종말이란 말 그대로 세상의 끝, 인간이 사라지고 역사가 중단되는 순간이다). 중요한 건 대체 그 종말의 광경을 영화로 불러들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인류 멸망의 위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목록을 굳이 꼽아보지 않더라도- 만약 그렇다면 제법 긴 목록이 될 것이다- 종말은 대개의 경우 지금/이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범용한 감각을 문제삼기 위해 스크린에 호출된다는 걸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종말영화’를 지탱하는 건 무엇보다 현재에 대한 감각의 문제인데- 이런 영화들이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곧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 영화가 경이의 스펙터클로 그려내는 대상(외계인 침공, 소행성, 환경 재해)이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의 드라마나 그도 아니면 정치사회적 암시(냉전, 포스트 9·11)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이는 관객의 탓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지금, 이곳에 찾아온 고요한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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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의 말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배우가 있고,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배우가 있다면 <토리노의 말>의 말은 전자다.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와 자웅을 겨룰 만한 신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으로서의 배우를 발탁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벨라 타르 감독은 루마니아의 국경 근처에서 그를 찾아냈다. 그가 니체의 일화 속 말처럼 주인이 아무리 거세게 채찍을 휘둘러도 끄떡하지 않을 만큼 센 고집의 소유자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에겐 별다른 훈련도 필요없었다. 깊은 우울증에 빠진 듯 “유독 슬픈 눈을 가진” 그를 타르는 그저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오기만 하면 됐다. 그가 마구간에서 먹기를 거부하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부와 마부의 딸이 빛도 소리도 없는 세계 속으로 가라앉기에 충분하리라. 마부가 집을 버리고 떠나려는 장면에서는 자연히 그를 대신해 마부의 딸이 짐수레를 끌게 됐다. 바람에 맞서기조차 힘겹다는 듯 게으르게 이끌려
마치 한장의 사진처럼 멈춰서다 / 연기를 안 하는 듯 하는 듯… / 스코시즈가 반한 사랑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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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링>의 시라소니
우리는 이미 질풍이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티끌 한점 없는 순수한 영혼이었으나, 냉혹한 사회에서 괴물이 됐고, 결국 시스템에 의해 패퇴하고 마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 말이다. 죽음을 맞는 순간, 누군가의 친구였던 시절을 떠올리는 질풍이의 눈빛에 살인 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초록물고기> 속 막동이의 모습을 겹쳐본다면 어떨까. 지칠 줄 모르는 육체로 질주하고 또 질주하는 괴물의 이미지로 본다면 <황해>의 구남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질풍이를 묘사하는 늑대개 시라소니의 연기 또한 내적 고통을 육체적인 감각으로 드러내는 하정우의 연기와 닮아 보인다. 스크린을 정면으로 육박하는 속도와 몸무게를 실어 상대배우의 몸을 제압하는 타격감에 관객은 압도당했다.
시라소니는 집념과 인내심을 키워드 삼아 질풍이란 캐릭터에 몰입했다. 연기에 앞서 그가 제일 먼저 연마한 것은 고독감을 참는 것이었다. 텅 빈 도로 위에 홀로 남겨진
나는 액션배우다 / 내 눈을 바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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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호스>의 조이
집단지능을 연기론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물론 영화란 집단노동의 산물이기에 어느 영화배우나 협업을 통해야만 최상의 연기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워 호스>의 조이는 14마리의 조이‘들’이 합심해 1마리의 조이를 탄생시켰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집단지능의 소산이다. 수석 조련사 바비 로브그렌이 서러브레드, 안달루시안, 웜블러드 혈통을 이어받은 배우들 중에서 외모가 비슷한 14마리를 선발했고, 분장팀이 동물에 무해한 페인트로 그들의 눈과 눈 사이에 다이아몬드를, 손목과 발목에 흰 띠를 똑같이 그려넣어 싱크로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모든 장면에는 적합한 성품과 능력을 지닌 조이들이 둘씩 대기해 한 마리가 지치면 다른 한 마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 결과 개별 조이들의 연기력의 합을 초월하는 ‘기적의 말’ 조이가 태어났다.
팀플레이의 센터는 로브그렌이 직접 에이전트를 맡고 있는 파인더였다. 2003년, 전설적인 경주마 이야기를 다룬 영화
14마 1역의 환상적 팀웍 / 이런 발연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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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인물을 끄집어내는 게 유행이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위대한 유산’의 이름을 동물영화 목록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래시 어디 갔어? 벤지 어디 갔어? 하고 부르면 눈썹을 휘날리며 그들이 달려올 것 같지 않은가.
동물배우, 그중에서도 연기견 하면 역시 래시와 벤지의 이름이 앞다투어 튀어나온다. <래시 컴 홈>(1943)으로 처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콜리종의 래시는 이후 영특하고 용감한 개의 표본이 되었다. 래시를 연기한 강아지의 이름은 팔이었는데, 팔은 <선 오브 래시>(1945), <용감한 래시>(1946) 등 1951년까지 MGM사가 제작한 6편의 래시 시리즈에 출연했다. 당시 래시의 인기는 <래시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제작될 정도로 대단했는데, 공연을 위해 출장을 갈 때면 호텔 특실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였다고 한다. 팔은 1958년에 사망했지만 이후 팔의 후손과 다른 콜리종의 개들이 영화와 TV시리즈에서 래시를 연기했
아기곰 ‘두스’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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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류멸망보고서'는 '멸망'의 화두를 직접 다룬 인류멸망 SF로 오는 4월 개봉 예정이다.
[김지운] ‘인류멸망보고서’,"6년간 개봉 포기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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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동물배우를 향한 감탄은 한국의 동물배우들을 궁금케 했다. 한국에서도 어기 정도의 연기력을 갖춘 동물배우가 있을까? 그들은 어떤 훈련을 받고, 어느 정도의 출연료를 받을까. 자기가 키우는 동물도 배우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동물배우에 대한 사사로운 질문들을 모았고, 몇몇 전문가들에게 답을 구했다.
<하울링>에 출연한 늑대개 시라소니.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 출연했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도 얼굴을 비췄다. 현재 조성희 감독의 <늑대소년>에 출연 중이다. 사람에게 안기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듯한데, 눈을 보고 있자니 좀 무서웠다.
Q. 한국에도 동물배우 에이전시가 있을까?
에이전시를 다른 말로 하면 소개업이다. 일반적으로 동물 에이전시는 동물을 수입대행해서 필요한 곳에 공급해주는 회사를 뜻한다. 현재 한국에서 동물배우들을 관리하고 연기를 가르치는 회사들은 대부분 ‘훈련업’
Q: 우리 개를 <아티스트>의 어기처럼 키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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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는 그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종합적인 영화이다. 서사의 표층에 드러난 바, 거기에는 퀴어시네마의 요소에, 성장영화의 요소, 뭉뚱그려 말하면 사회 현실을 생(生)질료로 삼은 리얼리즘 영화의 요소가 두서없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영혼의 안쓰럽고 쓸쓸한 궤적은, 흔하지는 않아도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삶의 한 양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과론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내러티브 조각들을 주제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함께 엮는 복합 내러티브 영화로 <줄탁동시>는 그 백미를 보여준다. 영화는 둘 또는 셋으로 나뉜 내러티브 조각들이 그들 각각의 사건을 주관하는 캐릭터와 사건들을 독립적으로 소유하면서 느슨하게 얽힌 형태를 취하고 있다. 비선형 복합 플롯은 몰래카메라 형식을 차용한 픽션과 논픽션의 복합 구조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김경묵의 장편 데뷔작 <얼굴 없는 것들>(2005)과 에피소드의 분절화를 통해
[전영객잔] 오디오비디오적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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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축가도 있다. 마을에 목욕탕이 필요하다는 주민들의 말에 아예 마을회관을 목욕탕으로 만들어버린 사람. 시공 자리에 서 있던 나무를 보호하려고 그 나무를 감싼 건물을 만드는 사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와 ‘기적의 도서관’ 설계로 유명한 고 정기용 건축가다. 그는 “건축은 근사한 형태로 만드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말로써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연을 담아 건물을 지어올렸던 그는 한국 건축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말과 흙의 건축가였다. 그는 지금 세상에 없지만, <고양이를 부탁해> <태풍태양>으로 ‘공간의 영화’를 만들어왔던 정재은 감독이 그의 마지막 나날들을 동행하며 기록한 <말하는 건축가>를 만들었다. 정기용 건축가와의 만남은 장편영화 프로젝트에서 벗어나 다큐멘터리에서 활력을 찾길 원했던 정재은 감독에게도 큰 전환점이 됐다.
-3월11일이 정기용 건축가 사망 1주기다. <
[정재은] “이 영화를 통해 소통하는 법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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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l에서 최초로 울트라북이 등장했다. Dell의 고급 라인업인 XPS를 등에 업은 XPS 13이다. 1.36kg의 무게와 가장 얇은 부분은 6mm의 두께라 울트라북에 부합된다. 울트라북으로서는 평범하지만 Dell의 기존 제품에 비해 꽤 파격적인 스펙이다. 카본파이버로 제작된 노트북 하단부와 고릴라 글래스를 채용한 디스플레이가 인상적. 2세대 인텔 코어 i프로세서를 채용, SSD 128G와 256G는 옵션으로 선택이 가능하다. i3 모델의 경우 999달러이며 i5, i7모델이 있다. 문제는 Dell 최초의 울트라북이라 하지만 울트라북치곤 비교적 사양이 평범하다는 것.
[gadget] Dell 최초의 울트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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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2230만 화소, DIGIC 5+ 이미징프로세서, 6Fps 고속촬영, ISO 100~25,600
특징 캐논의 풀프레임 DSLR 5D의 세 번째 버전
과거 풀프레임 카메라에 목숨 걸던 시절이 있었다. 크롭보디에 염증을 느낀 기존 DSLR 사용자들의 요구는 소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풀프레임 DSLR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밀레니엄을 지나며 출시된 몇몇의 풀프레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것은 캐논의 ‘1Ds’였다. 캐논의 최상위 모델이었던 1Ds는 뛰어난 성능을 지녔지만 그에 버금가는 뛰어난 가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수의 프로페셔널에게만 사용되던 제품. 물론 DSLR을 사용하는 유저들의 목표이자 지향점은 바로 1Ds였다. 이들의 목마름이 다소 광적일 정도까지 갈 뻔했던 것을 잠재운 것은 다름아닌 캐논의 5D. 풀프레임 대응 CMOS 기술에 노하우가 있었던 캐논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제품이 5D였다. 비록 기존 중급용 DSLR보다 가격이 비쌌지만 풀프레임 DS
[gadget] 꿈의 DSLR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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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4분기는 동물배우 연대기의 한 챕터를 채울 게 분명하다. 관객은 스타의 얼굴보다 동물의 표정과 행동에 더 크게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중이다. <아티스트>의 어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지정좌석을 배정받을 만큼 신드롬을 일으켰고, <워 호스>는 명마 조이의 여정으로 관객을 감동시켰으며 한국에서는 <하울링>의 질풍이가 사람배우 못지않은 스타덤에 올랐다. 이 밖에도 <비기너스> <휴고>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등 동물배우가 작품의 이야기와 정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 넘쳐났다.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빅 미라클> <더 그레이> 등 실제 동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동물캐릭터를 만든 영화들도 사례에 포함될 것이다. 가히 전 지구적이라고 할 만한 동물배우들의 전성시대를 맞아 한국의 동물배우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과 그들을 훈련시키는 조련사들에게
강아지와 고양이의 시네마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