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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 CJ문화재단의 ‘Project S’ 지원작 선정을 위한 면접 심사장. 심사위원들은 평범한 한 대학생에게 눈길이 쏠렸다. 카메라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는 힙합 키드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했고, 심사위원들은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랩을 한번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한때 힙합 키드였으나 지금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청년이라. 연출자의 이력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기획안 자체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심사위원들의 짓궂은 질문 앞에서 평범한 외모의 수줍음 많은 청년이 끝내 주저했다면, <투 올드 힙합 키드>(9월13일 개봉)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만든 다큐멘터리로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 및 우수작품상을,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관객상까지 차지한 정대건(26) 감독. “눈빛은 음흉하지만 힙합을 굉장히 긍휼히 여기던 대한의 건아”는 어찌하여 ‘영화’라는 새로운 꿈을 품게 된 것일까. ‘투 올드 시네마 키드’로 변신한
[정대건] 자격지심이 영화를 찍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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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소장용’이라고 부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용이 좋아서, 혹은 필요해서 두고두고 봐야 할 경우가 그 첫째, 물건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애착을 갖게 된 경우가 두 번째, 작가에 대한 애정이 특별한 경우 등. 가장 좋은 경우는 그 모두가 이유일 때다. 국립예술자료원이 기획하고 수류산방이 펴낸 예술사구술총서(시리즈 1권은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 박용구 편이었다) 다섯 번째 책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그렇다. 소설가 박완서의 사진자료를 포함한 그의 인생의 매 순간에 대한 정리,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 사회활동까지를 정리했다. 집으로 더듬어보는 작품의 궤적과 딸 호원숙의 참고 구술도 실렸다. 어디까지나 구술을 기본으로 한 기록물이기 때문에 그 읽는 맛을 살리기 위해, 오른쪽 페이지에 구술이 흐르는 동안 왼쪽 페이지를 구술 내용과 연관된 각주로 처리했다. 예술사구술총서가 소장용으로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풍부한 각주 때문으로, 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다시, 박완서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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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가 듣는다면 조금 서운해하겠지만 내게 있어 가장 위대한 ‘멜랑콜리아’는 진은영의 시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진은영, <멜랑콜리아>의 일부)라는 마지막 구절을 읽고서 몇번이나 그 구절을 소리내어 읽었던 경험이 아직도 생각난다. 다시 떠올려도 그건 가장 보편적인 서정이 슬픔과 우울에 대한 감정과 세계를 확장시키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새 시집 <훔쳐가는 노래>는 어떤 기억과 대상에 대한 가장 선명한 노래처럼 들린다. 여전히 그녀가 내려놓은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사이에 무수한 감정들이 쏟아지지만 이번 시집은 좀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생생한 감정들이 뭉치고 흩어지면서 유려하게 흘러간다. “금지된 일터로부터 망명한 당신/ 다시 돌아가기 위해 26년을 기다리게 될 당신/ 이보오 올해가 그 마지막 해라오/ 힘을 내요 당신은 꼭 돌아가게 될 것이오.”(진은영, <Bucket List-시인 김남주가
[도서] 진은영의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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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8월30일∼10월28일
장소: 국립극장
문의: 02-2280-4115~6, www.ntok.go.kr
‘올여름 더위는 축제 덕에 그나마 버틴 걸로’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10여개로 늘어난 대중음악 페스티벌에 4년에 한번 돌아오는 올림픽까지. 그 열기가 18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폭염을 눌렀으니 말이다. 축제의 열기는 공연계에도 뜨겁다. 코미디 연극 5편을 모은 코미디페스티벌의 뒤를 이어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이 한창이다. 6회째인 이번 축제는 5개국 15개 작품을 통해 예술가들의 끊임없는 탐구대상인 사람과 삶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폐막작인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의 <블랙워치>(사진)다. 이라크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2006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초연 이후 22개의 상을 휩쓴 수작이다. 이번이 아시아 초연이다. 중화예술의 꽃인 경극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중국 대표 경극배우 리하이옌이 선사하는 <숴린낭>을 권한다.
[공연] 15가지 골라 보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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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0월28일까지
장소: 대학로 아트원시어터 1관
문의: 1577-3383
막이 오르기 전, 무대는 그야말로 텅 비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격자무늬의 바닥과 벽이 전부다. 배우들이 하나둘 무대로 등장한다. 모두 모이자 바람소리, 풍경소리와 함께 배우들이 제자리를 찾아 달리기 시작한다. 뮤지컬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은 수백년 전 조선시대로 거슬러 흐른다.
한여름 밤 궁궐 안, 중전이 술로 긴 밤을 버티고 있다. 그 쓸쓸함도 잠시, 보모상궁의 외마디 비명에 궁궐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세자마마가 사라졌다.”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 시작한다. 배우들은 바람소리와 함께 또 달린다. 이번엔 뒤로 달린다. 앞에 본 장면으로 되감기된다. ‘플래시백’이다. 되돌린 장면에서는 중전의 말동무를 하고 있던 나인 자숙이 중궁전에서 나와 한 사내를 만난다. 동궁전 내관 구동이다. 이어 그 둘을 각각 우연히 맞닥뜨린 감찰상궁, 눈을 피해 만난 구동
[공연] 기발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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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제 아울 시티의 새로운 작업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새 앨범에는 이번에도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울 시티의 익숙한 음악이 담겨 있다. 앨범 제목에 ‘여름’이 들어가 있지만 여름의 낭만과도, 가을의 정취와도 잘 어울린다. 편안함과 익숙함이 더해지면 음악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지만, 하나의 배경음악으로는 충분하다.
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일전에 <Fireflies>로 크게 한방 터뜨렸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큰 반응을 얻었던 화사한 전자음을 어느 정도 자제하고 록, 팝, 클럽음악까지 조금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노래를 구성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말하자면 ‘효과’와 거리를 두고 ‘전형’에 충실해지는 과정이다. 변화와 발전을 꾀하는 작업방식은 보기 좋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미와 흥미가 대폭 축소되는 결과.
최민우/ 음악웹진 ‘웨이브
[MUSIC] 상상한 딱 그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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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영화노트] <대학살의 신> 치졸한 싸움
[올드독의 영화노트] <대학살의 신> 치졸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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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더 한심한 것 같은데. 그때는 그래도 어렸으니까….” 누나의 핀잔에 대건은 히죽거리기만 한다. 힙합에 빠졌을 때, 대건은 ‘그래도’ 열여섯 중학생. 그랬던 대건이 벌써 스물여섯살이 됐다. 철이 들고도 남을 나이다. 그런데 이번엔 영화를 찍겠다고 법석이다. 대건의 엄마는 “수입이 없는데 (영화감독이) 무슨 직업이냐?”며 “그렇게 게을러서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아들을 타박한다. 가족의 “무시와 멸시와 괄시와 등한시”를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왕년의 힙합 키드 대건은 카메라를 들고 함께 꿈을 먹던 힙합 키드들을 찾는다. 지조는 10년째 데뷔 앨범을 준비 중이다. JJK와 허클베리 피는 언더그라운드에서 꽤 유명한 뮤지션이 됐다. 지훈은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고, 기현은 공대 대학원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우는 유학을 다녀온 뒤 잘나가는 회계사가 됐다. 지조의 데뷔 앨범 기념 공연날, 그들은 함께할 수 있을까.
특별한 삶을 즐기는 이들은 꿈을 삼켰고, 평범한 삶으로 갈아탄
“행복해?” 아니면 “불안해?” <투 올드 힙합 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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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지식이 필요한 영화가 있고 없어도 무방한 영화가 있다. 스페인에 소재한 세계 일류 레스토랑 엘 불리와 수석주방장 페란 아드리아를 다룬 요리 다큐멘터리 <엘 불리: 요리는 진행 중>은 전자다. 분자요리에 대해 모르면, 그들이 요리를 하는 건지 과학실험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될 수도 있다. 엄밀한 물리화학적 측량술을 기반으로 한 이 요리법은 가히 해체주의적이다. 재료의 형태는 온데간데없고, 재료에서 추출한 무언가가 모여 새로운 형태의 요리로 탄생한다. 2009년, 요리의 ‘개념’에 접근하고자 페란이 선택했던 그 무언가는 ‘물’이다. 그와 그의 멘티들은 6개월 동안 레스토랑 문까지 닫고 바르셀로나의 빌라에 틀어박혀 생선, 버섯, 고구마 등에서 추출한 액상 샘플 중 최적의 재료들만 가려냈고, 그를 바탕으로 새 시즌 코스를 ‘창조’해냈다.
제목에서 방점은 현재진행형에 찍힌다. ‘완성’이라는 도달 불가능점을 향해 그들은 부단히 전진할 따름이다. 재개점 뒤에도 서른개가 넘는
‘요리계의 스티브 잡스’ <엘 불리: 요리는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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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뎁이 아니었다면 소설 <럼 다이어리>는 헌터 S. 톰슨의 집 지하창고에서 먼지를 뒤짚어쓴 채 썩고 있었을지 모른다. 조니 뎁이 <럼 다이어리>의 원고를 본 건 1998년이었다. 1950년대에 톰슨이 집필했으니 무려 40년 만의 구출이다. 그 자리에서 영화화를 약속한 조니 뎁은 자신의 영화사 창립 작품으로 <럼 다이어리>를 선택했다. 촬영장엔 고인을 기리는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앞서 조니 뎁은 톰슨의 원작을 토대로 한 테리 길리엄의 영화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1998)에 출연한 바 있다.
조니 뎁이 톰슨의 작품 중 <럼 다이어리>를 선택한 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소설은 <타임>에서 해고당한 20살 톰슨이 유배지로 택한 산후안에서의 자전적 경험을 기초로 한다. 1960년대 미국의 거대 자본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잠식하던 당시, 신참 기자가 겪는 정서적 혼란은 톰슨이 창시한 ‘곤조 저널리즘’의 핵심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의식 찾기 <럼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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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첼(콜린 파렐)은 교도소에서 나온 뒤 새로운 인생을 살려 한다. 그런 그가 하게 된 일은 세상과 담을 쌓고 집 안에 숨어 지내는 인기 여배우 샬롯(키라 나이틀리)의 보디가드다. 무례한 파파라치들과 싸우면서 미첼과 샬롯 사이에는 애틋한 감정이 생긴다. 한편, 미첼의 실력을 탐내는 갱스터 보스 갠트(레이 윈스턴)는 새 출발을 하려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 자극한다. 하지만 미첼의 태도는 단호하다. “당신과 절대 일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묻지 마세요.”
<런던 블러바드>는 <킹덤 오브 헤븐>(2005), <디파티드>(2006), <바디 오브 라이즈>(2008) 등의 시나리오를 쓰며 주목받고 현재 <씬 시티2> 시나리오에도 참여하고 있는 윌리엄 모나한의 연출 데뷔작이다. 이야기보다 심리의 흐름에 치중하는 연출은 ‘사건’보다 ‘무드’로 승부수를 던진다. 그런데 시나리오작가가 아닌 감독으로서 그의 역량은 부족해 보인다. 콜린 파
‘쿨한 누아르’ <런던 블러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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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전원 마을, 나무가 있는 그림 같은 집에서 부부와 네 아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던 가장 피터(아덴 영)의 사고사로 행복은 종결된다. 네 아이를 데리고 이제 황폐해진 풍광을 헤쳐나가야 하는 건 오롯이 엄마 던(샬롯 갱스부르)의 몫으로 남았다. 남은 자가 안고 가야 할 고통의 터널은 생각보다 깊고 처절하다. 여덟살 딸 시몬(모르가나 데이비스)이 찾아낸 해결책은 집 앞의 무화과나무다. 나무 안에 죽은 아빠의 영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어린아이의 지나친 상상력에 불과해 보이지만, 병들어 있는 가족의 마음엔 이 순진한 믿음이 점점 절실해진다.
애석하게도 이 이야기는 나무를 가꾸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다. 가뭄이 닥치면서 커다란 나무뿌리는 던의 집뿐만 아니라 이웃집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가족이 살자면 나무를 잘라야 한다. 호주 소설 <나무에 살고 있는 아빠>를 원작으로 한 <더 트리>는 상실과 극복의 문제에 관한 상징적인
무화과나무 안의 아빠 <더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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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팅 패밀리>는 직장 내 임신부들의 차별 대우에 대해 말하는 두편의 중편 <인 굿 컴퍼니>와 <해마 가족>을 엮은 옴니버스영화다. 김성호 감독의 <인 굿 컴퍼니>는 출판사를 배경으로 한다. 영진기획은 최근 대기업의 사보 제작을 맡았다. 임신 8개월인 지원(최희진)만 빼고 직원들은 매일 야근이다. 지원은 “양수가 터지기 직전까지” 일할 수 있다고 의지를 밝히지만 팀장 철우(이명행)는 사장의 지시대로 지원에게 권고사직서를 내민다. 임신을 이유로 해고하는 건 불법이라며 지원의 편에 서서 파업을 시작한 직원들은 그러나 각자의 사연과 논리로 업무에 복귀한다.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끌고 가는 건 장면 사이사이 삽입된 인물들의 인터뷰다. 다큐멘터리처럼 편집된 인터뷰 영상은 인물들의 속마음을 들춰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시작한 영화는 급하게 사건을 봉합하고 만다. 부조리한 세상을 보여주려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뒷맛
직장인 임신부를 위해 <화이팅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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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평안남도의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진광소학교, 오산학교, 평양 숭실대에서 공부를 마친 청년은 민족과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 “근본적으로 정신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기로 한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그는 신의주에 부모 없는 아이들의 삶터인 보린원을 세우고,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전도 교회를 세운다. 이후 선교사 밥 피어스와 함께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을 창설하고, 베트남 피난민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주도하고,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1992년엔 한국인 최초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다. 바로 고 한경직 목사의 이야기다. “이 세상 살아갈 때 좋은 씨를 많이 뿌려라.” 한경직 목사는 척박한 땅에 좋은 씨 뿌리는 일을 한평생 업으로 삼은 인물이다.
한경직 목사 탄생 110주년을 맞아 기획된 다큐멘터리 <한경직>은 존경받는 성직자 한경직의 일대기를 그린다. 생애
존경받는 성직자의 일대기 <한경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