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은 방에서만 볼 수 있다. <방의 역사>도 그렇다. 나체의 여자가 잠들어 있는 표지 때문에, 혹은 크기와 무게 때문에 마치 가구처럼 길보다 방에 어울린다. 무엇보다 내용이 그렇다.
조르주 뒤비와 더불어 <사생활의 역사>를 함께 집필한 미셸 페로의 <방의 역사>는 역사와 예술을 통해 보는 방의 이야기를 담았다. 예컨대 다수의 문학 작품은 모두 같은 곳, 즉 침실, 좀더 넓은 의미로는 집필실로 불리는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태어난다. 그곳은 사색과 회상의 장소다. 게다가 침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핵심 주제다.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땅굴”에 사는 정체불명의 동물의 머릿속에서는 침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침실을 꺼리는 만큼이나 고독을, 인적이 드문 공간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된 방도 있다. 왕의 방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왕의 침실이 단연 중요한 공간이 된다. 1785년 왕의 침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그 방으로 가자
-
귀농이 아니다. 도시 탈출이다.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은 3040 지식노동자들의 도시탈출기를 담았다. 책을 읽다 보면 일 때문에 지방에 가 살게 된 경우도 있고, 애초에 출퇴근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꽤 유혹적인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남들이 보기에) 가난을 택했고, (남들이 모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충북으로 이주한 뮤지션 사이의 말이 인상적이다.
[도서] 도시탈출기
-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교수라는 앤 트루벡이 작가들의 집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 진지함보다는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데, 이렇게 지적하는 식이다. “집이야말로 문학적 관음증, 숭배 혹은 더 거칠게 말하자면, 문학 포르노와 엮이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이탈리아 아레초 마을은 페트라르카가 태어난 집을 생가로 보존했지만, 페트라르카는 거기에 산 적도 없었고 생전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도서] 진지함보다는 유머 감각
-
촬영 김우형, 조명 임재영, 편집 김상범 등 기술을 미학으로 끌어올린 여덟명의 영화 예술가 이야기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씨네21> 주성철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글을 썼는데, 이들이 어떤 성장기를 통해 지금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일을 시작했는지,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에서는 어떻게 작업했는지 등 뒷이야기를 폭넓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필독서가 될 듯하다.
[도서] 여덟명의 영화 예술가 이야기
-
-
“영화의 세 아버지를 꼽는다면 에디슨, 베토벤 그리고 플로베르일 겁니다! 에디슨은 초기 영화의 모든 기술적 천재성을 대표합니다. 영화의 물질적/기계적/화학적 성질을 발명한 사람들 말이죠. 하지만 그보다 약 50년 앞서 플로베르 같은 작가들은 사실주의라는 개념을 발명했죠. 한편 플로베르보다 30년 전에 베토벤 같은 작곡가들은 강약법을 개발했습니다. 관현악의 구조를 과격하게 확장/압축/변형함으로써 커다란 감정적 힘과 울림을 뽑아낸 거죠.”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이 남자는 <대부> 3부작, <지옥의 묵시록> <잉글리쉬 페이션트> 등에서 필름과 사운드의 편집을 맡아 아카데미상을 세번이나 받은 월터 머치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편집하는 과정을 보게 된 원작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작가 마이클 온다치는 영화제작의 실제 과정에 흥미를 느끼고 월터 머치와 긴 인터뷰를 나누어 책을 펴냈다. <월터 머치와의 대화>(부제는 ‘영화
[도서] <대부> 뒷이야기
-
아내가 암에 걸렸다. 병에 걸린 아내를 남편은 돌봐야 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카르페 디엠>은 절절한 순애보, 흔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암에 걸린 아내를 둔 이 남편의 대처는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범주를 빗나간다. 남편은 지금 유방암에 걸린 아내의 병치레로 발목을 잡혔고, 그 보상심리로 딴 여자와 바람도 피운다. 자, 이제 당신이 그를 향해 비난을 퍼부을 차례인데, 여기서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이라면 이 남편에게 거리낌없이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네덜란드 작가 레이 클룬의 자전적 소설 <사랑이 떠나가면>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불행을 맞이한 이들에 대한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관찰기다. 암스테르담에서 잘나가는 사업체를 경영하고, 정열적인 아내 카르멘(캐리스 밴 허슨)과 결혼해 예쁜 딸과 함께 풍족한 삶을 살고, 아내 몰래 쾌락의 욕구까지 충족하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남자. 스테인(배리 아츠마)에게 아내의 유방암 판정은 단순히 감상이
죽음 앞에 체념하다 <카르페 디엠>
-
이 집안의 복잡한 가계도를 설명하려니 좀 난감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전부 <빅 웨딩>의 주인공들이니 피할 순 없다. 미시(아만다 시프리드)와 알레한드로(벤 반스)가 결혼을 약속하자 결혼식을 위해 가족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런데 구성원이 좀 특이하다. 알레한드로의 아버지(로버트 드 니로)가 핵심이다. 그는 10여년 전에 아내(다이앤 키튼)와 이혼했고 지금은 오래된 연인(수잔 서랜던)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헤어진 아내 사이에는 자녀 셋을 두고 있다. 알레한드로가 그중 하나다. 그래서 이혼한 아내도 결혼식에 온다. 그런데 알레한드로는 사실 입양한 자식이다. 그래서 알레한드로는 자기를 낳아준 친어머니도 함께 부른다.
그렇게 해서 알레한드로는 세 어머니, 그러니까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키워준 어머니, 지금의 어머니와 같이 식장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빅 웨딩>은 이 가족들 사이의 한바탕 소란을 다룬다.
배우들의 이름을 보고 나면 은근한 기대감이 생긴다. 로버트
복잡하고 흥미로운 가계도 <빅 웨딩>
-
얼굴을 찌푸리거나 뜬금없이 고함을 친다. 상황에 맞지 않는 욕설을 내뱉거나 자잘한 경련을 일으키며 갑작스런 신체 움직임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틱장애라고 알고 있는 투렛증후군의 증상이다. 행동이 통제가 안되므로 증상이 심한 경우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겉보기엔 훤칠하고 잘생긴 빈센트(플로리안 데이비드 피츠)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냉정한 아버지로부터 받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투렛증후군을 앓게 됐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흔적에 집착하는 빈센트를 요양원에 넣어버리고, 빈센트는 요양원에서 거식증 환자 마리(카롤리네 헤어퍼스)와 강박장애가 있는 알렉산더(요하네스 알마이어)를 만난다. 빈센트와 마리와 알렉산더는 충동적으로 원장의 차를 훔쳐 이탈리아의 바다를 찾아 떠난다.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실제로도 투렛증후군 병력이 있는 플로리안 데이비드 피츠가 쓴 각본과 그의 연기다. 작위적인 부분이 없이 자연스럽고 담백하다. 종종 “저능아” 취급을 받을 만큼 순진하고 우직한 매
미성숙한 세 친구의 관계맺기 <빈센트: 이탈리아 바다를 찾아>
-
SNS 계정 중에 ‘촬영장 옆 대나무숲’이 있다. 익명의 영화계 스탭들이 촬영장에서 겪은 억울한 일들을 보고하는, 일종의 해우소다. 이 계정에서나 볼 법한 황당한 사건들이 연속되는 영화가 <힘내세요, 병헌씨>다. 예를 들면 영화의 첫 장면은 슬레이트 치다가 설사가 나와서 화장실에 다녀온 연출부 이병헌이 “연출부는 사람 아니야.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어”야 한다는 된서리를 맞으며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 이병헌은 늦깎이 영화감독 지망생이자, 그 꿈 하나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고 있다. 그의 주위에는 데뷔 못한 PD, 데뷔 못한 촬영기사, 대표작 하나 없는 배우 일색이다.
<힘내세요, 병헌씨>는 데뷔 못하고 번번이 미끄러지는 인물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페이크다큐멘터리다. <인간극장>을 연상시키는 방송팀이 이병헌 감독(아직 입봉 준비 중인)을 취재하는 방식이 큰 틀이다. 힘겹게 쓴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물색하지만 문전박대 당한 영화 속 이병헌 감독은
고군분투 영화제작기 <힘내세요, 병헌씨>
-
포성이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마을.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대가족 집안에서 자란 하잘(합시아 헤지)은 자유로운 삶을 동경한다. 하잘은 영국인 남자친구 매튜(톰 페인)와 교제 중임을 들키는 바람에 동네에서 창녀 취급을 당하고, 큰오빠 마즈드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하잘이 가족과 남자친구, 전통과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각각의 식구들에게도 힘든 순간이 연거푸 찾아온다. 마즈드의 부인 사미라는 보수적인 아랍권 가정의 규율을 철저하게 따르느라 딸들과 갈등을 빚는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나 임신이 안돼 고통받는 여인도, 남편에게 폭행당하면서도 아무런 저항을 못하는 여인도 있다.
사미라를 연기한 히암 압바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과 톰 매카시 감독의 <비지터>로 눈에 익은 배우다. 몇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있으며, <인헤리턴스>는 그녀가 연출한 첫 장편영화다. 아랍문화권 가정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핍박을 전하려
이스라엘 안의 팔레스타인인들 <인헤리턴스>
-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가를 호령하는 젊은 재벌 에릭 패커(로버트 패틴슨)는 초호화 리무진을 타고 뉴욕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도심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시위대로 들끓고 있고 그들 중 누군가는 패커를 모욕하거나 죽이고 싶어 하지만 그는 어딘지 자기만의 고민에 빠져 있다. 그는 엉뚱하게도 머리를 깎고 싶을 뿐이고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그 허름한 이발소에 가고 싶을 뿐이다. 패커와 관련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차 안으로 초대되어 대화를 나누거나 섹스를 나눈다. 패커의 회사 부하 직원들, 경제이론가, 사회학자, 경호원 등등. 그러는 사이 패커는 자신의 투자가 대실패했음을 알게 된다.
<코스모폴리스>는 미국의 유명 작가 돈 드릴로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캐나다의 거장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영화화하기 까다로워 보이는 소설의 내용을 단 며칠 만에 각본으로 탄생시켰고 그 결과 시종일관 기괴함이 흐르는 영화 한편이 태어났다. 기괴함의 진원지는 의외로 이런 것들이다. 시
자본주의의 유령 <코스모폴리스>
-
6월 한달 동안 쏟아져 나온 한국 호러영화의 행보는 꽤 실망스럽다. <무서운 이야기2>는 감독 세명의 각기 다른 개성을 확인하는 데 그칠 뿐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꼭두각시>는 호러와 에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길을 잃었고, <닥터>는 이야기가 주인공인 미치광이 의사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앞의 세 호러영화와 달리 <더 웹툰: 예고살인>은 웹툰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성실하게 풀어가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한 포털사이트 웹툰 파트 편집장(김도영)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밀실이라는 이유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짓는다. 하지만 담당 형사 기철(엄기준)은 사건 현장에서 타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피해자가 죽기 직전 웹툰 작가 지윤(이시영)과 통화했고, 그가 죽임을 당한 방식이 지윤의 웹툰 속 한 장면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기철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지윤은
웹툰이라는 흥미로운 소재 <더 웹툰: 예고살인>
-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가. <화이트 하우스 다운>은 백악관을 종종 그 디즈니랜드와 다를 바 없는 테마파크로 둔갑시켜온 롤랜드 에머리히의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영화다. 오바마의 백악관보다 스릴 넘치는 이 테마파크의 안내자는, <다이하드> 시리즈의 존 맥클레인의 대를 이으려는 듯 흰 소매 셔츠 차림으로 동분서주하는 사내 존 케일(채닝 테이텀)이다. 그에겐 미국의 대통령 제임스 소이어(제이미 폭스)를 여느 슈퍼히어로보다 동경하는 딸이 있다. 그는 딸의 마음을 얻고자 대통령 경호원 면접에도 응시하지만 고배를 마시고 대신 딸과 백악관 투어에 나서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쳐들어온 테러 집단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대통령을 구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이하드> 같은 액션영화를 가족영화로 확장시킨 듯한 이 영화의 강세는 의외로 액션보다 코미디에 찍힌다. 캐릭터, 대사, 소품, 상황 등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영화 <화이트 하우스 다운>
-
<더 테러 라이브>
제작 씨네2000 / 감독, 각본 김병우 / 출연 하정우 /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 개봉 8월1일
<더 테러 라이브>의 재료는 어찌보면 단출하다. 하나는 재난, 그리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 대표배우 하정우다. 어느 날 방송사로 걸려온 한통의 전화. “10분 뒤에 마포대교를 폭발하겠다!”는 협박. 장난이 아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실제 마포대교가 눈앞에서 폭발한다. 영화 시작한 지 불과 4분 만이다! <더 테러 라이브>는 시작부터 가속 페달을 밟는 영화다. 한정된 시간, 모큐멘터리의 틀 안에서 감독이 주목하는 건 테러의 규모가 아니라, 테러범의 전화를 받은 앵커 윤영화(하정우)의 반응이다. 이후 90여분은 테러범, 앵커, 경찰청장, 그리고 피해자가 얽혀든 급박한 긴장의 기록에 할애된다. 방송사 스튜디오에 있는 하정우의 연기로 영화의 스릴이 완성되고, 전체 재난의 규모도 짐작할 수 있는 색다른 형태의 재난영화다. 신인 김병우 감독은 “
[Coming Soon] 색다른 형태의 재난영화 <더 테러 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