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대종사>의 주요 공간 중 하나인 금루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곳이었다. 중국 광둥 지방 최초의 승강기가 설치되고, 아름다운 기생들이 모이고, 온갖 화려한 소품들로 장식된 화려한 요정이기 때문은 아니다. 강호의 영웅들이 드나들며 서로의 내공을 확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대종사>가 금루라면 이는 <2046>(2004) 이후 거의 10년 만에 한자리에서 만난 왕가위 감독, 양조위, 장쯔이 세 고수 덕분일 것이다. 영화에서 장쯔이는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궁이 역을 맡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쳐내고, 양조위는 묵묵히 무예의 길을 지키는 엽문을 연기해 서사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는다. 6월15일 왕가위 감독과 함께 내한한 양조위, 장쯔이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라”는 극중 궁 대인의 대사처럼 <일대종사>를 되돌아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음 장부터 펼쳐진다.
[일대종사] 검무의 예술가들
-
“김병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사장님이 이걸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예순이 넘으셨지만 안목은 젊으세요.” “왜 자꾸 나이 얘기를 하고 그래. 내가 철딱서니가 없어서 얘한테 야단맞을 때도 많긴 한데.” “말에 뼈가 있는데요. (웃음)” 티격태격, 옥신각신.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부녀 지간처럼 지내온 이춘연 대표와 전려경 PD의 대화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씨네2000 창립이 꼭 20주년인 2013년, 그들의 작은 재난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결코 작지 않은 승리를 이어가고 있는 8월19일에도, 그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과거는 히스토리, 미래는 미스터리, 현재는 선물(present)”이라는 이춘연 대표의 목소리에서 사뭇 밝은 기운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간만에 수백만 관객이 건네온 선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든 그들을 만나 테러 중계 작전의 뒷이야기와 제작자-PD-감독의 삼위일체 포메이션에 대
[이춘연, 전려경] 우린 사람 영화를 만든다
-
‘타비르 사라일.’ 이스마일 카다레의 <꿈의 궁전>에 등장하는 이 국가기관은 독재자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조직이다. 국민들의 수면과 꿈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철권통치를 하는 절대군주라고 하더라도 국민들로부터 ‘자발적인’ 충성을 받고 있다는 환상을 원하는 법. 무의식의 무대인 꿈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수단이 있을 수 있을까. 타비르 사라일이 ‘위대한 제국의 최고 중추기관’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마르크 알렘이 이 기관에 말단 공무원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철저한 보안과 신비에 감싸인 그곳에서 알렘이 처음 근무하게 되는 부서는 ‘선별부’. 전국에서 수집된 수백만개의 꿈들 중에서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꿈들을 솎아내는 곳이다. 술탄이 다스리는 제국의 방방곡곡에는 수많은 타비르 사라일의 분소가 있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분소에 찾아와서 내용을 구술한다. 필경사가 받아적은 꿈들은 중앙으로 보내지고 선별
[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모든 독재자들의 꿈
-
베케트의 네편의 텔레비전 단편극(<쿼드> <유령 삼중주> <한갓 구름만…> <밤과 꿈>)에 붙인 철학적 해제. 들뢰즈는 베케트의 전작을 꿰뚫으며, 블랑쇼와 카프카, 예이츠, 베토벤까지 그 폭을 확장해나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베케트 말년의 작품에 붙인 들뢰즈 말년의 에세이다. “가능한 것을 소진하면서 그는 소진된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는 가능한 것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소진한다. 모든 피로 너머에서, ‘결국 다시 한번’ 가능한 것과 끝장을 본다.”
[도서] 들뢰즈 말년의 에세이
-
-
어느 날 정재승 교수가 트위터에서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는 왜 사라졌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백인천 프로젝트. 미국에서는 1941년 타율 0.406을 기록한 테드 윌리엄스 이후, 한국에서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첫해 0.412를 기록한 백인천 이후 4할 타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막상 읽어보면 백인천 프로젝트 자체보다는 4할의 가능성이 가장 많았거나 많다고 여겨지는 김태균, 양준혁, 정근우 등 야구선수들의 인터뷰가 재미있다.
[도서] 4할 타자는 왜 사라졌는가
-
노새(뮬)의 삶. 이만큼 현대인의 삶을 잘 묘사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남의 짐을 지고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노새는 주인공 소설 <뮬>의 주인공 제임스와 케이트에 다름 아니다. 종말적 경기불황에 예상 못한 임신이 닥치면 한번만(!) 마약 운반책으로 일하는 것도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소설을 쓴 토니 데수자가 실제로 아내의 실직과 어린 두 아이에 더해 쓰던 소설을 포기하면서 경험한 종말론적 파국의 두려움에서 생각해낸 이야기다.
[도서] 종말론적 파국의 두려움
-
영국 드라마 <셜록>의 팬이라면 주목할 것. 시즌1과 2의 모든 사건을 분석한 <셜록: 케이스북>이 출간되었다. 셜록 홈스를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주홍색 연구>가 <분홍색 연구>로 바뀌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와 같은 드라마 뒷이야기는 물론 셜록의 집 세트 구석구석을 볼 수 있는 사진과 해설을 비롯해 관련 자료들이 실렸다. <셜록>을 제작한 스티브 모팻과 마크 게이티스의 회고는 특히 흥미로운데, “코난 도일의 원작들은 단 한번도 프록코트와 가스등을 중요시하지 않았어요. 경탄할 만한 수사와 무시무시한 악당, 피가 얼어붙을 듯한 범죄에 여성들이 크리놀린을 입던 끔찍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다였죠. 다른 탐정들은 사건에 연연했지만 셜록 홈스는 모험을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탐정들과의 차별점이라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실루엣만으로도 셜록 홈스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프록코트를 고집하지 말 것, 그리
[도서] 시즌3를 기다리며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소개되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호평을 받았던 이돈구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가시꽃>의 시네마톡이 8월20일 CGV대학로 무비꼴라쥬관에서 열렸다. <가시꽃>은 친구들의 압박으로 인해 성폭행에 가담하게 된 성공(남연우)이 시간이 흘러 피해자 장미(양조아)를 다시 만나게 된 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순수 제작비 300만원의 초저예산영화’라는 사실로 이목을 끌었지만 강렬한 주제의식과 충격적인 결말로 더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작품이다.
시네마톡의 진행을 맡은 이화정 기자는 “단 10회차의 촬영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사실이 놀랍다”는 말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또한 “초반부터 관객을 제압하는 느낌이 좋았고 좁은 공간을 활용해 극중의 답답한 공기를 잘 표현했다”는 촌평을 달았다. 이 감독은 “매스컴을 통해 성폭행 사건의 뉴스를 접하고, 그에 대한 이 사회의 처벌 방식이 타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으로
[시네마톡] 제작비 300만원 맞고요
-
권효 감독과 함께 위안부 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스토리를 쫓아온 시간만 4년. 그 시간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킨 것 같냐는 질문에 안보영 PD는 “잠깐 생각해봐야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망설였다. 그러고도 끝내 드라마틱한 변곡점들을 찍어 보여주기보다 “작가님이 12권의 더미본을 수정했듯 우리도 12편 이상의 편집본을 고치고 또 고쳤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 지난한 과정 끝에 <그리고 싶은 것>의 개봉까지 성사시킨 그녀의 표정에는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었다. 개봉 당일인 8월15일 <그리고 싶은 것>이 종일 상영되고 있는 인디스페이스 앞에서 그녀를 만나 그녀가 권효 감독과 비로소 그려낸 것과 앞으로 그녀가 독립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서 그려내고 싶은 것에 대해 물었다.
-광복절 개봉은 애초 계획했던 건가.
=빤하지만 최적이라 판단했다. 365일 유효한 이슈라는 건 없으니까.
-올해도 아침부터 인터넷이 야스쿠니 참배 신사 문제로 시끄럽더라.
=올
[flash on]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았다
-
<설국열차>가 어느덧 천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지금, 원작자인 장 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 그림)와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 글)이 한국을 찾았다. 1970년대부터 자크 로브(글)와 알렉시스(그림)의 구상으로 시작된 <설국열차>는 1977년 알렉시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 마르크 로셰트가 새로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기나긴 작업 끝에 <설국열차>는 1984년 드디어 1권 <탈주자>가 세상에 공개됐고 1986년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크 로브마저 1990년 세상을 떠났고, 장 마르크 로셰트는 뱅자맹 르그랑과 함께 후속편을 구상하여 시리즈를 재개했다. 그렇게 2권 <선발대>와 3권 <횡단> 작업이 시작되어 지난 2000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결됐다.
두 사람은 <설국열차> 외에도 <백색진혼곡>
[flash on] 영화의 긍정적인 결말에 놀랐다
-
“샬토는 가장 전문적인 배우이면서 또한 가장 정신 나간 사람이기도 하다. 분명 그 둘 중 하나일 텐데(웃음) 아무튼 그에게는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정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엘리시움> 홍보차 샬토 코플리와 함께 방한한 맷 데이먼은 그에 대해 “뭔가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이 그로 하여금 배우로서의 독창성을 지니게 한 것 같다”고 했다. <디스트릭트9>과 <A특공대>를 통해 단숨에 할리우드 메이저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는 것 같은 그의 존재는,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의 입에서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게 만든다. 그만큼 그가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는 어떤 계보로 쉽게 파악되지 않는 독특함이 있다. 미확인 비행물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엘리시움>의 샬토 코플리는 영화 속 맷 데이먼의 반대말이다. 오직 살기 위해 엘리시움으로 가려는 맥스(맷 데이먼)를 가로막는 주인공이 바로 크루거(샬토
[샬토 코플리] 미확인 돌발 생명체
-
16살의 이누크(가바 피터슨)는 이누이트의 후예다.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북극곰 사냥꾼인 아버지를 잃고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된 어머니와의 불화로 집을 나와 방황하다 결국 사회복지시설로 옮겨가게 된 이누크는 그곳에서 시설 아이들과 함께 물개 사냥을 떠나는 지역 사냥꾼들의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최고의 사냥꾼 이쿠마(올레 요르겐 하메켄)는 이누크의 몸속에 사냥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팀을 이루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선조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북극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이 영화의 성취는 수천년 동안 얼음 위에서 살아온 이누이트족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극한의 땅에서 이누이트의 후예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지만 빙하가 녹아내리는 만큼 그들의 삶의 터전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감독은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의 사냥꾼과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복지시설인 ‘청소년의 집’ 아
이누이트로의 정체성 <북극의 후예 이누크>
-
38살 미혼모, 아줌마 몸매에 출산 뒤 요실금까지 있는 파리지엔 사진작가 마리옹(줄리 델피)은 뉴요커 언론인 밍구스(크리스 록)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그들은 각자의 아이를 데려와 뉴욕의 아파트에서 동거한다. 사진전시회를 앞두고 파리의 가족을 뉴욕의 아파트에 초대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아빠와 철없는 여동생 때문에 이틀간의 일상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자신의 영혼을 파는 퍼포먼스를 준비한 마리옹은 말썽쟁이 가족들을 이끌고 사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2데이즈 인 뉴욕>은 우디 앨런의 도시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코스모폴리탄 코미디다. 파리 로맨스인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007)의 속편이지만 전작에 대한 이해 없이도 충분히 즐겁다. 전작과 같은 배우를 기용하면 <비포 선라이즈>(1995) 시리즈와 비슷해 보일까봐 이번 작품에서는 남주인공을 교체했다고 한다.
여주인공 마리옹은 어쩌면 <비포 선라이즈> 시
현실적 연애, 그리고 육아의 비전 <2데이즈 인 뉴욕>
-
영화 <잡스>는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를 만든 시대의 괴짜 잡스의 인생을 훑어간다. 컴퓨터광 20대에서 2001년 아이팟 등장 직전까지 20여년간이 주된 배경이다. 스티브 잡스(애시튼 커처)는 노동자 출신 양부모가 평생 모은 돈을 등록금으로 쏟아붓게 되자 대학을 자퇴하고 청강으로 원하는 것들만 골라 배운다. 20살 때 친구들과 함께 부모의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컴퓨터는 남다른 안목과 직관적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다. 제품과 사업에 대한 강한 집중력은 냉혹하게 주변 친구와 연인과 아이를 홀대하게 한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혁신과 완벽주의에 대한 몰두로 인해 경영진과 불화를 일으켜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그가 떠난 뒤 하락세를 겪던 애플은 십여년 뒤 잡스를 다시 불러와 제2의 혁신을 준비한다.
영화는 스티브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에만 밀착하여 그가 살아간 시대의 맥락을 놓친 채 20여년의 일대기를 주마간산 격으로 관통해간다. 영화 속 잡스는 혁신의 아이콘이었지만
혁신의 아이콘 <잡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