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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작을 만들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면 이런 방법이 있다. 일단 할리우드의 친한 유명 배우 한명을 꼬여낸다. 그와 동석하여 칸영화제로 향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전세계의 거물급 투자자들이 몰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만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제작비를 구한다. 게다가 그 과정을 카메라로 전부 찍어놓는다면 돈도 구하고 영화도 한편 뚝딱 만들게 될지 모른다. 염치 불구한 이 뚝심의 프로젝트는 정말 성공한다. 제임스 토백은 알렉 볼드윈을 앞세워 2012년 칸에 간 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이라크 전쟁 버전으로 바꾼 <티그리스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기획하고 있다며 투자자들을 수없이 만나더니 마침내 긍정의 답을 얻어내고, 그 과정은 <사랑받고 내쳐진>이라는 다큐로 탄생하고, 2013년 칸에서 상영된다. 하지만 유의사항. 이것은 “내 인생의 95%는 돈을 얻으러 다니는 거였고 나머지 5%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가혹한 진실을 대면할 줄 아는 어느
돈을 얻기 위해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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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풍운아들이 가득했던 1970년대 할리우드. 그 시대 할리우드의 숨겨진 사건 사고와 활약상을 꼼꼼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총망라하여 많은 인용과 일화를 가능케 해주는 흥미로운 책 <헐리웃 문화혁명>은 그중에서도 할 애시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1970년에 감독 데뷔하여 정확히 10년간 뛰어난 영화들을 만들고 80년대에 조락한 그는, 1988년 59살의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헐리웃 문화혁명>은 그 두꺼운 책의 종결부를 그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데 바치고 있다. 마치 애시비의 퇴장을 말하는 것이 1970년대의 퇴장을 말하는 것인 양.
책 속에는 그에 관한 증언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할은 ‘엿 먹어라 씨팔놈아. 나는 이렇게 할 작정이니까. 싫으면 네 귀에 박아둬’ 하는 식이었다”, “그는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 싸웠지만 자신이 언제나 거부하는 편이어야 했다”, “할은 제도를 혐오했다. 한편으로는 이를 두려워했다”, “할은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70년대와 함께 사라진 불운한 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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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나는 명료함에 대항해 싸웠다. 그 모든 바보 같은 명확한 정답들에 대항하면서 말이다. 도식적인 삶, 매끈한 해결책들은 꺼져버려라. 삶이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 감독 존 카사베츠는 그렇게 말했고 그 삶의 명료함에 대항해 싸우는 혼란스러움의 무기로 여배우이자 아내인 지나 롤랜즈를 택했다. 도식적인 삶, 매끈한 해결책들이 어쩌지 못하는 혼란함의 상태를 그녀보다 더 뛰어나게 연기한 여배우의 사례는 영화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다.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신경쇠약에 걸린 여배우(<오프닝 나이트>), 불안하고 위태로운 정신 상태에 놓인 아내(<영향 아래 있는 여자>) 등 카사베츠의 세계관은 롤랜즈의 연기로 실현됐다. 그리고 예술적 동반자인 카사베츠가 1989년에 사망하자 사실상 롤랜즈의 전성기도 영화적으로 막을 내렸다. 롤랜즈는 지금도 그들의 방식대로 그들의 영화를 보존하려는 것 같다. 가령 카사베츠 영화 세계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낸
도식을 버리고 정답과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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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제4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말론 브랜도의 이름이 불렸을 때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말론 브랜도 대신 시상대에 오른 묘령의 인디언 여인이 인디언의 인권에 관한 글을 낭독하려 했기 때문이다. 연설은 이내 제지되었고 심지어 대리인으로 나선 사친 리틀패더 공주는 진짜 인디언이 아니라 배우임이 밝혀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국인디언운동(AIH)의 정당성을 알리려 했던 그의 계획은 멋들어지게 성공했고 시상식은 할리우드 역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니. 아마도 집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을 말론 브랜도는 사색이 된 아카데미 관계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통쾌해하지 않았을까.
말론 브랜도는 자서전에서 “나는 권위에 도전해 성공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라고 밝힐 만큼 관습과 권위를 혐오했다. 그렇다고 반항을 위한 반항에 무작정 매달리는 철부지는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활용할 줄 아는 지능적인 반역자에 가깝다. 1960년
크게 한방 먹은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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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뵈티커는 투우사다. 청년 시절인 1930년대에 멕시코에 갔다가 투우에 흠뻑 빠졌다. 원래 그는 운동에 만능이었고, 대학 때만 해도 미식축구 선수로 평생을 살 포부를 가졌다. 그 희망은 부상 때문에 포기했는데, 다리 부상을 크게 입은 뒤, 멕시코에 휴양차 여행을 갔다가 투우를 보고 반해버렸다. 뵈티커의 표현에 따르면 “너무나 위험하고, 너무나 중세적”이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그는 당장 투우를 배웠다. 소개를 받아 당대 최고의 멕시코 투우사였던 카를로스 아루사로부터 직접 배웠다. 1939년 프로 투우사로 멕시코시티에서 데뷔했는데, 첫 시합에서 가슴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경험으로 뵈티커는 투우 관련 영화로는 고전으로 평가받는 루벤 마물리언의 <혈과 사>(1941)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영화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타이론 파워에게 투우하는 법을 가르쳤다. 적극적인 성격의 그는 컨설턴트로 연출부에 들어갔는데, 어느새 식사 준비는 물론 엑스트라들 관리
성난 소를 향한 카우보이의 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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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가필드의 불꽃같은 삶에는 천성을 거스르지 못하는 사람의 운명이 새겨져 있다. 그는 194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명이었고, 특히 필름 누아르의 아이콘이었는데, 경력의 절정에서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1952년, 39살 때였다. 사인은 심장질환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공식적인 발표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대신 스트레스 때문에 죽었을 것이란 소문을 더 믿었다. 바로 1년 전, 존 가필드는 미국 의회의 비(非)미활동조사위원회(HUAC)에 소환돼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그 뒤 1년간 할리우드에서의 활동 중지는 물론 수사기관의 끊임없는 미행까지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인의 삶이 완벽하게 파괴된 것이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인 존 가필드는 1930년대 뉴욕의 ‘그룹 시어터’(Group Theater) 출신이다. 여기는 러시아 출신 연극인들이 많았던 곳으로, 메소드(Method) 연기의 본산이었고, 또 진보적 예술인들의 거점이었다. 엘리아 카잔
배신을 용납하지 않는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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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시엘 해밋은 폐병 환자였다. 1차대전에 참전하자마자 폐병에 걸려 전쟁 때는 병원에만 있었고, 이후로도 병은 죽을 때까지 완쾌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입에 물고 살았다. 더 나아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브랜디를 섞는 등 한순간도 손에서 술을 놓지 않았다. 담배 피우는 폐병 환자에 알코올 중독자인 대시엘 해밋은 30대 때부터 사실상 죽음과 동거하는 공포 속에 살았다. 이때 쓴 소설들이 전부 범죄물이고, 이른바 미국 하드보일드 문학의 보석들이다. 하드보일드의 3대 작가로 지금도 제임스 케인,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대시엘 해밋이 꼽힌다.
그런데 해밋은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작가로 명성을 날릴 때인 40대에 공산주의에 투신한다. 서구 선진국 가운데 공산주의가 거의 싹도 틔워보지 못한 나라가 미국인데, 그렇다면 해밋의 불행한 말로가 약간은 짐작될 것이다. 해밋은 속된 말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시대의 부조리와 맞서는 ‘위험한 삶’을
폐병 걸린 공산주의자의 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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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다, 지금 왜 아웃사이더인가.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그냥 가상의 아웃사이더 연대기가 문득 떠올랐고 가장 공고한 중심을 갖춘 할리우드를 소재로 택했다. 너무 잘 알려져 유명한 이들과 이제는 주류로 가버려 아웃사이더라 부르기 어려운 이들을 제외한 다음, 할리우드 역사상 베스트 아웃사이더 11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한마음은 아닌 것 같다. 제각각의 다른 사정과 태도들이 여기 있다. 그게 바로 그들을 할리우드의 아웃사이더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아놓고 보니 우리가 원했던 게 이것이 아니었나 싶긴 하다. 현재의 중심과 안주에 거리를 두고 각양각색의 삶을 살아간 11개의 자유.
대시엘 해밋 1894년 5월27일~1961년 1월10일 <말타의 매>(1941)
존 가필드 1913년 3월4일~1952년 5월21일 <악의 힘>(1948)
버드 뵈티커 1916년 7월29일~2001년 11월29일 <라이드 론섬>(1959)
말론 브랜
반골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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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 다이어리] <엘리시움> 다음 화두는?
[헌즈 다이어리] <엘리시움> 다음 화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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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도적인 결혼 혹은 결혼식에 전혀 매력을 못 느끼는 사람이지만, 최근 들어 두 커플의 결혼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김조광수, 김승환씨 결혼과 이효리, 이상순씨 결혼이 그것. 한 커플은 미니멈하게 (조촐한 그들만의 공간에서), 한 커플은 맥시멈하게 (가능한 한 많은 하객이 참석할 수 있도록 공개된 야외에서) 결혼을 한다. 단출한 결혼식을 택한 이효리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멋있어지는 연예인. 결혼도 참 그녀답게 한다. 지켜보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 흐뭇하다. 광장의 결혼을 택한 김조광수 감독 커플을 보는 마음은 기쁘면서도 한편 짠하다. 그들이 광장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소수자이기 때문이므로.
무슨 결혼식을 그리 요란하게 하느냐고 흘겨보는 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면 된다.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물론 안 하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 당연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해서 결혼하겠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광장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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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되게 세게 찌릿했는데!” “아니요.” “되게 세게 그죠?” “아니요!” 처음 본 남자의 서류에 손가락을 뻗다가 탁 쳐내는 손과 접촉한 느낌을 눈치없이 떠드는 여자.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의 태공실(공효진)과 주중원(소지섭)의 첫 만남은 이렇게 민망했다. 많은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눈치없음은 순수함의 발현인 양 일종의 덕목처럼 사용되어왔다. 남자의 세속적인 조건은 뒤늦게 깨달아야 하고, 작은 조직에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왕따나 희생양이 되어 그가 그녀를 위로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공실은 첫 만남부터 서류를 엿보며 “여기(대형 복합쇼핑몰 ‘킹덤’) 사장님이신가봐요?”라고 대번에 찌른다. 그녀가 청소용역으로 취직한 쇼핑몰 사람들도 어딘가 이상한 공실을 핍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머리채를 잡아끌어내는 과격한 쪽은 주중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접촉을 시도하고, 나사 빠진 사람처럼 ‘이힛’ 하고 웃거나 미간을 찌푸리고 징징대는 여자. 냄새나는 머리로 “
[유선주의 TVIEW] 로코의 변주 어디까지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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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성냥 가진 사람 있나요?”
20살짜리 배우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성숙한 로렌 바콜이 입에 담배를 물고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하워드 혹스 감독의 <소유와 무소유>(1944)에서다. 데뷔작이고, 상대역은 필름 누아르에선 당대 최고였던 험프리 보가트였다. 그런데 빛을 쏘는 듯한 눈빛에, 남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담뱃불을 요구하는 당돌한 바콜의 모습은 웬만한 중견 배우의 포스, 그 이상이었다.
험프리 보가트와 담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온갖 인상을 쓰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그의 아이콘이 됐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 모습을 흉내냈을까. 제임스 딘도 보가트를 흉내낸 것 아닐까. ‘보가트처럼 대마초 피우지 마’(<Don’t Bogart That Joint>)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다(<이지라이더>의 삽입곡 중 하나). 보가트와 담배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으면, 이 노래에서는 스타의 이름이 동사가 됐다
[한창호의 오! 마돈나] 남자를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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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실제 부인인 천순덕(77) 할머니는 이북 원주 출신으로, 피난길을 나서며 3일만 지나면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뒤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할아버지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전부터 입버릇처럼 “영화제가 나를 인간 만들었다”고 말해온 조재현 감독의 마음속에는 결국 다큐멘터리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일부러 슬레이트를 치지 않았기에 할아버지는 ‘느닷없는’ 독백을 쏟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연기경험이 없었지만 주연으로 섭외된 이후부터 촬영을 위해 4일간 면도를 하지 않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조재현 감독의 말에 따르면 “트레일러 속 리어카야말로 세상의 모든 다큐멘터리 소재들이 다 담긴 할아버지만의 작은 우주”다. 한/중 청소년들이 독도를 방문한 기사가 실린 신문, 그리고 낡은 우유곽(일부러 남양유업 우유곽을 바닥에 박박 갈아 실었다) 등 감독이 직접 배치한 세상의 풍경이기도 하다.
“두번 만에 끝낸 거
[씨네스코프] 없는 게 없는 할아버지의 리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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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 감독이 타슈켄트 식당의 직원인 김갈리나씨를 인터뷰하고 있다. 김갈리나씨는 촬영현장의 러시아어 통역과 김알렉스씨의 인터뷰까지 도맡아준 중요 인력이기도 했다. 그녀는 인터뷰를 하기 전, “카메라에 예쁜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며 화장을 새로 하고 의상도 갈아입는 성의를 보여줬다.
“감독님이 나보다 더 어려요? 그럼 내가 언니네!” 처음엔 김정 감독과의 인터뷰를 쑥스러워하던 김허스베타씨는 서로의 나이를 알고 난 뒤 눈에 띄게 적극적인 모습으로 돌변했다.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를 자랑하는 김허스베타씨의 큰아들. 함께 사진에 담긴 김허스베타씨의 미모도 만만치 않다.
다큐멘터리 <거류>와 극영화 <경>에 이어 김정 감독은 <열린 도시> 프로젝트에서도 이주와 공간의 테마를 이야기한다. “이주 공간에 대한 성찰과 함께 처참하지만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이주민들의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그려내고 싶다.”
안산 땟골마을 한복판에 낯선 언어로 쓰인 간
[씨네스코프] 고려인들의 장밋빛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