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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 단지 안 분수대 근처는 바람이 잘 모이는 곳이라 꼬마들의 좋은 놀이터다. 너른 잔디밭이 있고 한가운데 넙데데한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제법 운치있다. 어느 날 잔디밭 둘레에 쇠 펜스가 쳐졌다. 애들이 잔디밭을 넘나들고 나무에도 올라탄다며 동네 어르신들이 관리사무소에 요구했다고 한다. 안전 때문이 아니라, 비싼 나무가 망가진다는 이유였다.
이석기 의원실 등에 대한 국정원 주도의 압수수색 혐의는 내란음모 등이라는데, 내용을 보다 보니 잔디밭을 막아버린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형법에서 정하는 ‘내란’은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행위’이다. 공유지에 대한 거주민들의 ‘주권 행사를 배제’하고, 안건으로 올렸다는 안내 하나 없이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공론을 모을 ‘기능을 소멸’시켰으며, 잔디밭에 나와 고함을 지르거나 관리사무소장을 들들 볶는 식으로 정상적인 아파트 관리의 ‘행사를 불가능’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분수대 근처의 ‘질서를 파괴’했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내란음모, 무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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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설국열차>를 처음 봤을 때 봉준호만은 앞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프로덕션 규모와 프로덕션 시스템의 가위에 눌려 봉준호가 자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악전고투한 흔적을, 주관적이지만,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는 대단원의 장면에서 윌포드를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는 내가 본 어떤 영화에서보다 압도적 기운이 약했다. 스테이크를 굽는 옆모습으로 에드 해리스/윌포드가 화면에 등장해 커티스와 긴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동작과 말투는 화면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봉준호 영화에선 간단한 설정 화면에서도 늘 화면 내의 조형적 긴장이 탱탱하고 배우들의 기세가 그 긴장을 버텨내는 주요 동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설국열차>를 두 번째 보고 나서 이 작품이 여전히 흥미로운 봉준호의 영화적 진경이지 않을까 유보적인 입장이 되었다. 다소 이완된 형태지만 봉준호의 영화적 결기는 화면 속에서 지탱되고 있었
[신 전영객잔] 품었던 생각을 끊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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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선희>의 문수(이선균)를 보며 불현듯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났다. 파리의 북한 유학생으로 분했던 <밤과낮>부터 영화과 대학원생으로 출연하는 <우리 선희>까지, 홍상수 감독의 다섯 영화에 출연한 이선균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따로 떼어 붙여놓고 보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들 영화에서 이선균은 대개 지식인이었으며 어떤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비슷한 역할을 맡은 적이 있는 김태우, 김상경 등의 배우들과는 또 다르다. <옥희의 영화> 속 한 장면. 구애를 퍼붓는 진구(이선균)에게 옥희(정유미)는 “난 네가 착해서 좋아. 믿을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이선균이 진구를 연기하기 때문에 비로소 진심처럼 들린다. 젖먹
[이선균] 때때로 진심 때때로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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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던진 질문에 한참을 고민한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가 싶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좀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에서 선희로 분한 정유미는 선희처럼 모두의 눈길을 잡아끌고, 선희처럼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선희처럼 알 수 없다. 그녀를 설명하려는 말은 차고 넘치지만 그 어떤 것도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 몇번의 대화가 오가고 미로를 헤맨 끝에 겨우 실타래 한쪽 끝이 잡힌다. ‘모르겠다’는 대답이야말로 최선을 다한 진심의 형태다.
<우리 선희>에는 선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선희는 어떤 아이니.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똑똑하고 똘기도 있는 용감한 친구. 마무리는 항상 착하고 예쁘다로 끝나는 두루뭉술한 답변. 이 모든 표현들은 정확히 선희를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선희를 완벽하게 오해하도록 만든다. 단어의
[정유미] 정유미라는 질문 오늘이라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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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메이크업 받고 같이 촬영하는 거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지?” <씨네21> 표지 촬영 현장에 들어선 <우리 선희>의 두 배우, 이선균과 정유미가 재미있어한다. 두 사람은 <첩첩산중>과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까지 홍상수 감독의 세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만났다면 지금과는 다른 관계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이선균이 말한다. “장르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나, 본연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보호막이 없는” 홍상수 감독의 현장에서 모든 배우들은 “자연스럽고, 꾸밈없고, 편한”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보니 정해진 컨셉과 설정이 있는 촬영과 만남이 두 배우에겐 오히려 어색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세편의 영화에서 연인 사이로 호흡을 맞춘 그들이지만, 프레임 바깥에서 이선균은 정유미에게 “말 없이 곁에 서 있어도 안심이 되는” 선배고, 정유미는 이선균에게 “<우리 선희>
[우리 선희]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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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들 사이에서 문와쳐 윤창업(37) 대표는 “아이디어가 많고, 도전을 즐기는 젊은 기획 프로듀서”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1년 영화 전문 투자사 아이엠픽쳐스에 들어가 기획, 투자, 제작 관리, 마케팅, 해외 세일즈를 두루 경험했고, 2004년부터서는 제작사 화인웍스의 창립 멤버로 합류해 <마음이…>로 프로듀서 데뷔를 했다. 2008년에는 자신의 회사 문와쳐를 창립해 <블라인드>(감독 안상훈/출연 김하늘, 유승호)로 236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이후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 기획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윤 대표는 올해 초 2013년은 ‘안식년’이라며 숨고르기를 선언했다. 그랬던 그가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현장에 돌아왔다. 한/중 합작영화 <짜이찌엔 아니>, 한/미 합작영화 <더 캐치>, 한/일 합작영화 <핀란드 파파>, 세편의 합작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들고서 말이다.
-“2013년은 쉬어가는
[윤창업] “중국시장에 제대로 들어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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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감독 바즈 루어만 /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캐리 멀리건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감독 박신우 / 출연 한석규, 손예진, 고수
바즈 루어만 버전의 <위대한 개츠비>를 보며 수차례 파티장면의 화려함에 길을 잃을 찰나, 다행히 그는 이정표 역할을 할 장면을 제시한다. 확실히 그는 원작에서 묘사된 1920년대 뉴욕의 혼란보다 개츠비와 데이지, 그리고 남편 톰의 삼각관계에 매진했다 싶은데, 플라자 호텔 장면에서 묘사된 삼각관계는 그 의도와 가장 근접하지 않았을까 싶다. 연인 데이지를 되찾으려는 개츠비의 초조함이 극에 도달한 상황이자, 아내를 잃을 위기에 처한 톰의 질투심이 폭발하기 직전.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깨는 건 사랑의 칼자루를 쥔 데이지다. ‘당신을 사랑했지만, 남편도 사랑했다’는 애매모호한 정리. 그 순간 모든 게 끝났다. 압축된 공기가 해제되고 사건은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남은 건 데이지를 위해 부를 축
[digital cable VOD] 사랑도 시간도 움직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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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영화 전문감독이었던 히로키 류이치가 몇 년 전부터 사랑스러운 성장영화들을 내놓고 있다. 제15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키즈아이 섹션에 초청된 <괜찮아 3반>은 <오체불만족>의 작가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이 영화는 팔과 다리가 없는 아카오 선생(오토다케 히로타다)과 5학년 3반 아이들이 함께 보낸 일년을 다정한 시선으로 지켜본다. 영화를 찍는 동안 히로키 류이치는 수많은 아역배우들의 “현장 선생님”이 되어야했다. 그에겐 “도전적인 프로젝트”였던 <괜찮아 3반>의 촬영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소설 <괜찮아 3반>을 영화화했다.
=프로듀서가 원작자가 직접 출연할 거라면서 나에게 영화화를 제안했는데, 원작을 읽어보니 도전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 같았다. 원작에 있는 에피소드를 거의 그대로 살려서 쓴 각본을 토대로 영화를 찍었다. 잔잔한 영화라 자칫 설교하는 것처럼 보일
[flash on] 오체불만족? 오감대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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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메테우스>에는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난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나온다. 인간 탑승자들이 우주선 프로메테우스호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어 있는 동안 데이빗은 모든 것을 돌본다. 마이클 파스빈더가 연기한 이 안드로이드는 매력적인 외모에 감정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표현’하고 이해할 줄 알며 “요청받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데이빗의 탄생을 다룬 별개의 영상물이 제작되어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데, 데이빗을 ‘감성적’(emotional)이라고 소개한다. 그렇다고 프로메테우스호의 승무원이나 탑승객이 그를 인간처럼 대접하지는 않는다. 묘하게 각이 서 있는 말투와 행동 때문에 그가 인간이 아님을 수시로 인지하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데이빗이 인간처럼 행동할 때마다 혹은 인간처럼 질문을 던질 때마다 거리를 두려는 듯 데이빗에게 “너는 로봇, 나는 인간”임을 확인하는 말을 한다. 가끔은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다면 로봇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로봇도 섹스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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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를 생각하면 실비아 플라스의 집요하고도 단호했던 자살이 떠오른다. 그녀가 죽기 몇주 전 출간된 자전적 소설. 실비아 플라스는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여성주의 소설가로 가장 자주 이름이 오르내린다. 히스 레저가 출연했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의 ‘깐깐한’ 여주인공이 들고 있던 하드커버 책이 <벨 자>였다는 사실도 이 책의 상징성을 알려준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과 일기도 함께 읽기를 권한다.
[도서]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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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불노’ , 그러니까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를 열렬히 지지하는(드라마든 책이든 양쪽 다든!) 팬들에게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저 끝내주는 이야기꾼 조지 R. R. 마틴의 만수무강 아닐까(최소한 완결 전에는 절대 돌아가시면 안돼!). 기껏 등장인물에 애착을 갖게 만들어놓고 죽여버리는 이 매정한 작가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5부 <드래곤과의 춤>이 3권으로 출간되었다. 책 두께만큼 시간과 책장을 비우시길.
[도서]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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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증이 있어 일본 밖으로는 못 나간다던 온다 리쿠였는데, 라틴아메리카에 다녀와 에세이를 냈다. <한낮의 달을 쫓다>를 비롯해 일본 곳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소설들을 쓴 작가답게 라틴아메리카 현지 느낌이 물씬 나는 소설 다섯편을 써서 같이 실었다. 읽다보면 소설이 에세이 같고 에세이가 소설 같은 느낌이 드는 책. 과대망상이라는 뜻의 제목처럼.
[도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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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빈민가 연구에 선구적 구실을 한 사회학자들은 이제 주로 도시 변두리 주민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소설가들조차도 대개 가난의 문제점이나 변화하는 세계의 현실하고는 거리가 먼, 중산층의 정신을 탐구하기에만 바쁘다.”
1961년에 출간된 멕시코 하층민 가족에 대한 르포르타주 <산체스네 아이들>의 책머리글은 지금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다. 자고로 돈을 많이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이 더 잘 팔리기 마련일 테니. 시위대가 천막을 친 자리에 화단을 만들고, 달동네로 유명했던 동 이름을 개명하고, 노점이 있던 자리에 컨테이너를 놓는 서울에서는 이 책이 어떻게 읽힐까.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어느 시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또한 같을 수도 없다. 처음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한번 자줘야 할 것 아니야?”라고 추궁당한 일을 회고하는 목소리는 귀에 익지만, 아들이 칼에 배를 찔려 죽은 날에조차 식당 일을 쉴 수 없었던 어
[도서] 피할 수 없는 가난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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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백마 탄 왕자님’이 다시 돌아온다. 백마 탄 왕자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 이 남자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지 않을까. 언제나 스위트한 미소가 걸려 있는 입꼬리, 한없이 든든해 보이는 어깨와 가슴,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보면 주저하지 않고 손부터 내밀 것 같은 신사적인 태도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운 이 남자, 대니얼 헤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니얼 헤니는 우리가 으레 기억하던 매너 좋고 선량한 왕자님이 아니다. <스파이>의 이중스파이 라이언 역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 대니얼 헤니에게선 어쩐지 위험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대학 시절엔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미국에서 모델 일을 하며 런웨이와 연극 무대를 오가던 대니얼 헤니는 CF를 찍던 중에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헨리 킴 역에 캐스팅되어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KBS 드라마 <봄의 왈츠>의 필립, 영화 <Mr. 로빈 꼬시기>의 로빈 헤이든을 차례로 거치며 그의
[대니얼 헤니] 나쁜 젠틀맨이라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