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프 마니아인 친구가 있었다. 체격은 작지만 험악하게 생긴 청년이 허름한 아저씨 점퍼를 입고 인사동과 황학동을 돌며 칼날을 살피고 있노라면 상인들은 저런 인간에게 칼을 팔아도 되는가, 돈 몇푼에 양심을 넘기는 거 아닌가, 고뇌하는 얼굴이 되곤 했다. 착하게 생긴 내가 거들어야 할 것 같았다. “아유, 아저씨, 괜찮아요. 이런 쪼끄만 칼로 사람 죽일 것도 아니고.” 그러자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죽일 수 있어.” 넌 눈치도 없냐. 감히 친구를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좌판을 정리하는 아저씨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오래전 그 애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작고 평범한 싸움이 일어났다. 맞은 아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마침 주머니에 있던 주머니칼을 꺼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때린 아이를 한번 찔렀는데…. “즉사했어.” 뭐라고. “엄청난 우연으로 어딘지도 모르면서 정확하게 급소를 찌른 거지. … 마치 킬러처럼.” 친구는 침통하게 말했다.
그랬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커터칼을 금지하라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성인용 에로틱 로맨스로서 싱거운 실체를 드러낸 가운데, 때마침 시선을 유혹하는 영화가 있으니 피터 스트릭랜드 감독의 <듀크 오브 버건디>다. 몇몇 영화제에서 소개된 다음 올해 초 영미권 일부에서 개봉한 <듀크 오브 버건디>는, 겉으로 보이는 지배자-복종자 관계 뒤에 색색의 실크 커튼처럼 섬세하게 겹쳐진 두 여자의 사도마조히즘적 성애를 탐구하는 영화다. 화면은 나비 표본처럼 우아하지만, 고통부터 우스꽝스러움에 이르는 관능의 온갖 성분을 망라한 내막은 만만치 않다.
02/06
<폭스캐처>를 관람한 많은 사람들이 탁월한 몸 연기(physical acting)의 향연이라고 평한다. 나 역시 맨 앞줄에 서서 동의하는 바다. 연습용 인형과 묵묵히 섀도 레슬링을 벌이는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의 모습으로 테마를 암시하는 도입부부터 눈사태처럼 설명 없이 들이닥치는 결말까지 <폭스캐처>는 대사에 의존하지 않는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말 바보
-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영화를 본 이주승은 변요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에 대박났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예언이었다. 홍석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 7기 작품인 <소셜포비아>는 현피( ‘현실 플레이어 킬(Player Kill)’의 준말)를 소재로 한 독특한 사회파 드라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은 부산에서부터 들불처럼 퍼져나갔고, 제4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고 주연배우 변요한과 이주승이 TV드라마 <미생>과 <피노키오>를 통해 각각 스타가 되면서 개봉 전부터 화제의 정점에 올랐다. 롤플레잉 게임 속을 누비는 듯한 몰입감과 스릴, 은근한 복선과 현실에 대한 은유는 <소셜포비아>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온라인 세상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비하인드를 홍석재 감독으로부터 들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어떤 선수에게 가해진 악플러들의 공격에서 모티브를 얻었
[flash on]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 않았으면…
-
<신데렐라>와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남자, 케네스 브래너를 만났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신데렐라>와 브래너의 이름을 연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도 디즈니에서 만드는 실사영화 <신데렐라>라니. 하지만 영화를 본 뒤에는 그런 오해와 편견이 모두 사라졌다. 일대일로 인터뷰 기회가 주어진다는 소식에 기뻤다. 고심해서 묻고 답하기보다 그냥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 그가 만든 <신데렐라>는 따뜻하고 착한 영화였다. 3월의 첫날, 베벌리힐스에서 케네스 브래너와 만나 나눈 인터뷰를 전한다.
-<토르> 시리즈와 ‘잭 라이언’이라는 주로 남성 관객을 겨냥한 영화들을 만든 뒤, 디즈니의 ‘신데렐라’를 영화화했다. 왜인가.
=예상 밖이기 때문이다. 나는 커리어에 있어서 예상 밖의 것들을 좋아한다. 동화,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 그리고 디즈니 영화라니,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예상 밖이었다. 그리고 최근의 경험
[현지보고] “용기와 친절”을 이야기하면서도 재밌을 수 있다
-
-
-디즈니 프린세스들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들려달라.
=어릴 적 할머니가 디즈니 프린세스의 코스튬을 만들어주셨다. <알라딘>의 재스민 의상이었는데, 7살 때 시스루 스타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가 두명 있는데, 다행히 그 둘이 내가 이런 공주놀이에 빠져드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웃음)
-<신데렐라>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 기분이 어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나 역시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실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도됐다.
-<신데렐라>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나.
=<다운튼 애비> 촬영장에 있었고,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보통은 받질 않는데 그날은 받았고, 케네스(브래너)가 직접 소식을 알려줬다.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는 내게, 아직 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현지보고] 유리구두는 신으라고 만든 게 아니라는!
-
또 하나의 <신데렐라>가 극장을 찾아온다. 신데렐라가 실은 팜므파탈이었다는 식의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가 아니다. <신데렐라>라고 하면 원작 동화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디즈니의 1950년작 애니메이션 <신데렐라>를 오리지널 스토리로 삼아 지고지순하게 만들어진 실사영화가 2015년판 <신데렐라>다.
디즈니는 최근 몇년간 자사가 보유한 클래식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실사영화화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그 첫 시작은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였고, 다음은 샘 레이미 감독을 기용한 <오즈의 마법사> 프리퀄인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2013)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속 악역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말레피센트>(2014)가 이 행보의 뒤를 이었다. 이 프랜차이즈의 최근작이 오는 3월13일 전세계 동시 개봉하는 <신데렐라>다.
영화는 주인
[현지보고] 아는 이야기가 낯설게 보이네
-
다큐멘터리가 현장을 지킨다면, 다큐멘터리를 지키는 것은 영화제다. 이때 현장은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방 한구석이기도 하다. 실험, 진보, 대화를 슬로건으로 한 인디다큐페스티발이 3월26일(목)부터 4월1일(수)까지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열린다. 시급한 사회 현안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개막작으로 선정된 가운데 과거 투쟁을 회고하는 작품이 그 뒤를 든든히 받친다. 실험성으로 무장한 사적 다큐멘터리도 여전히 시선을 모은다. 크고 작은 고민을 안고 이를 돌파하려는 시도가 담긴 다큐멘터리를 통해 봄을 앞당겨보자.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제작팀 / 2014년 / 78분 / 국내신작전
<복지갈구 화적단>이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를 송출 중인 미디어 활동가들이 핵발전소가 들어설 예정인 삼척을 방문한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과의 인터뷰와 촬영을 통해 그곳의 분위기
[영화제] 다큐의 봄
-
김명준 감독은 이제는 잊혀진 재일조선인 학생야구단을 찾아 그들을 한국의 그라운드에 서게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그 일련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한국전쟁 직후, 정부는 선진 야구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초청경기’를 계획한다. 1956년부터 1997년까지 해마다 8월이면 재일조선인 야구 소년들이 ‘모국’을 방문해 야구를 했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같은 야구인들이 모두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신분으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엔 군산상고와 재일동포팀이 봉황대기 결승에서 맞붙는다. <그라운드의 이방인> 제작진은 1982년, 잠실야구장에서 결승 경기를 치른 재일동포팀 멤버들을 찾기로 한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긴 채 야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양시철, 김근, 권인지 등 당시의 멤버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조촐한 동창회 자리를 가
잊혀진 재일동포 야구단을 그라운드에 다시 서게 하다 <그라운드의 이방인>
-
미국 LA에서 변변한 직업 없이 살아가던 존(강지환)과 첸(박정민)은 우연히 땅속에 파묻혀 황천길을 건널 뻔한 보스(안석환)를 구해준다. 그 일을 계기로 둘은 재즈바를 운영하는 보스의 왼팔과 오른팔이 된다. 어느 날, 재즈 싱어가 되길 꿈꾸는 보스의 여자 사라(윤진서)가 보스의 돈가방을 들고 도망친다. 큰돈을 버는 게 꿈인 첸과 사라와의 사랑을 꿈꾸는 존은 사라진 돈가방과 사라를 찾아 각자의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려 한다.
<태양을 쏴라>가 조준하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실패한 사랑과 우정? 혹은 그들의 어그러진 꿈이었을까. 결과적으로 <태양을 쏴라>는 자신이 펼쳐놓은 이야기와 그림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면서 그 어떤 과녁에도 화살을 명중시키지 못한다. 캐릭터와 이야기엔 빈틈이 많고, 연기와 연출엔 너무 힘이 들어갔다. 인물들의 과거는 지나치게 생략됐고, 꿈을 좇는 자들의 현재엔 노력과 고민의 흔적이 지워져 있다. “이
돈과 사랑을 좇는 자들의 '아메리칸드림' <태양을 쏴라>
-
바닷가 외딴집에 자동차 정비공 콜랴(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와 아내 릴랴(옐레나 랴도바), 아들 로마가 산다. 이들이 살던 땅이 개발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콜랴의 가족은 내쫓길 위기에 처한다. 콜랴는 시 당국의 회유를 거부한다. 콜랴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시장 바딤은 어느 날 밤 콜랴의 주거지에 무단 침입해 협박한다. 콜랴는 시장을 고소하기 위해 변호사 드미트리와 함께 경찰, 검사, 판사를 찾아가지만 누구도 이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급기야 경찰서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콜랴가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초반 줄거리를 따라가보면 <리바이어던>은 전형적인 사회고발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하나의 적에 맞서는 피해자 혹은 영웅이라는 직선적인 이야기를 거부하고 어느 순간 다면적인 관계망을 펼친다. 이에 따라 영화는 성장극과 치정극, 사회극을 오간다. 리바이어던은 성경 속 바다 괴물이자 상상의 동물을 가리키는 말로 토머스 홉스의 저서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홉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괴물이다 <리바이어던>
-
외딴 바닷가 마을에 자리잡은 고풍스런 대저택에 금발의 소녀 마니가 산다. 마침 방학을 맞아 이 마을에 요양차 들른 12살 소녀 안나는 친구 없이 혼자 지내던 마니와 자연스레 친해진다. 안나는 부모를 잃고 ‘아줌마’ 요리코에게 입양된 자신의 과거를 마니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안나가 마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정신을 잃고 인근 숲에 쓰러진 채 발견되어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20번째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 <추억의 마니>는 영국 아동문학 작가 조앤 G. 로빈슨의 소설 <추억의 마니>(When Marnie Was There)가 원작이다. 지브리의 전작들을 판타지에 주력하는 작품과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작품으로 거칠게 나눈다면, <추억의 마니>는 두 영역의 장점을 모두 끌어안으려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과 같은 동적인 영화들의 구조를
스튜디오 지브리의 20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추억의 마니>
-
공간은 여전히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다. 춘천 약사동의 망대와 주변 사람에 관한 기록인 <망대>는 공간을 다루되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비 내리는 어두운 도시. 때는 2037년, 장소는 춘천이다. 7년 전 타임머신이 개발된 덕에 시간여행이 가능해졌다. 정부는 시간여행을 통제하려 하지만, 통제망을 피해 다른 시간에 숨어 버린 불법체류자들이 다수 양산된다. 시간감시관인 ‘나’는 불법체류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2014년의 춘천에 파견된다. 불법체류자들은 춘천 약사동의 망대 주변으로 숨어든다. ‘나’는 조사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불법체류자들과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문승욱 감독은 <나비> <로망스> 등 극영화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2009년 <시티 오브 크레인>을 시작으로 다큐멘터리쪽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자신의 극영화적 베이스를 반영해왔다. 인천을 배경으로 한 <시티 오브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시선의 힘 <망대>
-
리암 니슨이 또 총을 들었다. 이번에는 은퇴한 킬러다. 뉴욕 브루클린의 밤을 지배하는 갱단 소속 킬러 지미 콘론(리암 니슨)은 현역 시절 ‘무덤제조기’라 불릴 만큼 악명이 높았다. 의리와 핏줄을 중요시하는 조직의 보스 숀(에드 해리스)은 망나니 아들 대니(보이드 홀브룩)를 목숨처럼 아낀다. 지미 역시 가족을 꾸리긴 하지만 그의 아들 마이클(요엘 신나만)은 가족을 내팽개친 아버지를 증오하며 산다. 그러던 어느 날 보스의 아들 대니가 사고를 치고 만다. 대니는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현장을 목격한 마이클을 처리하기 위해 도망가는 그를 뒤쫓지만 마침 마이클을 찾아온 지미는 아들을 죽이려는 범죄자이자 보스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소식을 전해 들은 보스 숀 역시 아무리 오랜 친구라지만 조직의 보스로서 아들을 죽인 남자와 그 가족을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런 올 나이트>는 아들을 잃고 복수를 다짐한 아버지와 아들을 살리려 애쓰는 아버지가 맞
뉴욕 도심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 <런 올 나이트>
-
라스베이거스 일급 카지노에서 일하는 닉 와일드(제이슨 스타뎀)는 얼른 은퇴하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엉망이 된 채로 나타난 옛 연인 홀리(도미닉 가르시아 로리도)가 복수를 도와달라 청하면서 닉의 계획도 물거품이 된다. 그녀의 복수 대상은 악명 높은 부호 대니(마일로 벤티미글리아)로, 잘못 건드렸다가는 역풍맞기 십상인 난감한 상대다. 실력을 감추고 지내던 닉은 홀리의 복수를 돕기로 한다.
제이슨 스타뎀의 이름만 보고 <와일드 카드>를 <분노의 질주>류의 액션영화로 오해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신용카드 한장으로 무장 거한들을 제압하는 어떤 장면을 제외하고는 닉은 몸 쓰는 일이 거의 없다. 직접 말하길, “비행자격증을 보유하고 있고, 도쿄에서 가라테를 수련했으며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5분 만에 암기한 <뉴욕타임스> 기사를 5주간 복기 가능할뿐더러 국제권투대회에서 3회 연속 챔피언을 달성한 데 이어 4개 국어도 유창”하다는 닉은
특수한 정신 능력을 가진 한 남자의 복수극 <와일드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