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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니 87년생 천우희는 항상 실제보다 한참 어린 소녀로 각인되어왔다. <써니>(2011)에서 본드에 취해 깨진 병을 들고 매점에서 악다구니를 쓰던 ‘본드녀’가 그녀였고, <한공주>(2013)에서는 끔찍한 성폭행의 피해자이지만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죄인처럼 도망 다녀야 하는 17살의 ‘공주’였다. <우아한 거짓말>(2013)에서 그녀는 가난한 환경에서도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책임을 진 의젓한 언니 역할로 소임을 다했다. 앞서 <26년>(2012)에서 권정혁(임슬옹)의 누이로 잠깐 얼굴을 비칠 때도 그녀는 교복 차림이었다. 이 많은 소녀들 사이에서 교복으로 상징되는 해맑은 소녀의 이미지를 단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다는 지점에 이르면, 배우 천우희가 대변하는 분위기가 보다 명확해진다.
“<우아한 거짓말> 때 이젠 교복을 벗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웃음)”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젊은 과부. 마을에서 쫓겨나
[천우희] 무당 노릇을 강요받는 젊은 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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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피곤한 중년의 아이콘’이라더라. (웃음)” <골든타임>(2012)에서 3일 밤낮으로 수술한 뒤 퇴근하다가 응급 환자가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고 다시 병원으로 차를 돌리는 의사 최인혁, <미생>(2014)에서 오로지 일만 하는 직장인 오상식 등 최근 드라마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인물들은 김광태 감독이 촌장 역할에 이성민을 떠올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골든타임>에서 빨갛게 충혈된 눈, 피곤에 전 푸석푸석한 피부 등 선배님의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촌장 집권 말기의 피곤한 마을 풍경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 출연을 부탁드렸다”는 게 김 감독의 설명.
촌장의 하루 일과는 마을 일에서 시작해 마을 일로 끝난다. 마을의 대소사는 전부 그에게 보고되고, 그의 결정을 따른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의 취침시간도 그가 종을 쳐서 알릴 정도다. “마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을 잘 아우르고 있
[이성민] 양면성을 지닌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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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피아노 연주 하면 드라마 <밀회>(2014)의 유아인이다. 기타 연주 하면 <고고70>(2008)의 조승우다. 앞으로 피리 연주 하면 <손님>의 류승룡부터 떠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앞의 두 악기와 달리 피리가 등장하는 영화가 또 나올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손님>에서 류승룡이 연기한 우룡은 피리 부는 사나이다. 절름발이의 몸으로 폐병을 앓는 아들 영남(구승현)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그는 한마디로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다. “귀때기가 달린 짐승들은 모두 움직”일 만큼 피리 연주에 재능이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으로 먹고살기 힘든 상황임에도 얼굴에 살이 통통 붙어 후덕해 보이는 인상은 그가 “인성 좋은 사람”인 동시에 “수완이 좋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살면서 큰 죄 한번 짓지 않고 살았을 법한 그가 지도에는 없는 마을에 들어가 마을 촌장(이성민)의 부탁을 받고 들끓는 쥐들을 내쫓다가 감당하기 힘든
[류승룡] 풍곡리의 피리 부는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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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8할이다. 연기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김광태 감독이 전한 관전 포인트대로 <손님>(개봉 7월9일)은 연기 선수들이 모였다. 류승룡, 이성민, 천우희, 이준이 그들이다. 1950년대, 떠돌이 악사 우룡(류승룡)과 그의 아들 영남(구승현)은 영남이 앓고 있는 폐병을 고치러 서울로 가는 길에 한 외딴 마을에 들른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허가 된 바깥세상과 달리 마을은 평화롭기만 하다. 다만, 숫자가 늘어나는 쥐떼들이 유일한 골칫거리다. 촌장(이성민)은 우룡에게 병원비를 줄 테니 쥐떼들을 쫓아내달라고 요청하고, 우룡은 촌장과의 약속을 믿고 쥐떼들을 마을 밖으로 몰아낸다. 그때부터 감춰져왔던 마을의 진실이 드러난다.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아가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작품인데, 저 배우들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지난해 촬영이 끝난 까닭에 오랜만에 만난 네 배우는 스튜디오에 들어오자마자 서로의 안부부터 물었다. 다음 장부터 극장
[류승룡, 이성민, 천우희, 이준] 연기 선수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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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포위된 풍경들
형사가 차에서 내려 걸어가면, 영화가 시작된다. 강력계 형사 정재곤의 눈앞에서는 거대한 타워크레인들이 아파트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중이다. 이 아파트들은 재개발 열풍이 도시에게 안겨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도시는 고도성장기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춘을 꿈꿨고, 아등바등 살던 사람들은 아파트 한채 면적만큼의 행복을 상상하며 중산층의 삶을 꿈꿨다. 물론 밀려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에 밝지 못한 이들은 어디에나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에게 ‘기회’란 상승을 위한 도약대가 아니라 삶의 예측 불가능성만 증가시킬 뿐인 선택의 기로였다.
정재곤은 아파트 건설 현장에 눈길을 주지 않고, 무심히 주차장을 걷는다. 그 역시 남들처럼 부동산 열풍에 기대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아마 그 시도는 실패했을 것이고, 가정은 파탄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범인을 쫓되 돈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박해천의 영화비평] 아파트, 마카오, 컨테이너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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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든> Snowden
감독 올리버 스톤 / 출연 조셉 고든 레빗, 셰일린 우들리, 스콧 이스트우드
정치영화에 조예가 깊은 올리버 스톤이 미 국가안보국(NSA)의 개인정보 수집 활동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이야기를 찍었다. 영화는 스노든이 하와이와 홍콩을 오가며 자신을 다룰 다큐멘터리 <시티즌 포>(2014)의 감독 로라 포이트라스, <가디언> 기자 글렌 그린월드를 만나며 러시아에 망명을 요청하기 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 북미 개봉예정.
[WHAT'S UP] NSA의 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전기영화 <스노든> Snow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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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딜런 프랜시스(Dillon Francis)가 또 한건을 저질렀다. 그는 메이저 컬럼비아와 계약하며 ‘매달 타코 벨 20달러 상품권을 12개월 동안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명시해 트위터를 웃음바다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번엔 뮤직비디오다. 그가 지난 6월에 공개한 <Not Butter>의 뮤비는 음악 산업과 뮤직비디오 바이럴 마케팅을 조롱하는 패러디물로 기획됐다. 줄거리는 이렇다. 딜런 프랜시스의 에이전시가 뮤직비디오를 기획한다. 처음엔 20대 팬들이 좋아할 재미 위주의 뮤비가 목표였다. 하지만 모니터링 결과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모양이다. 그러자 초안을 폐기하고 더 자극적인 2차 제작본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부족했는지 이번엔 아주 노골적으로 ‘파티를 더 섹시하게 만들라’든가, ‘아주 막장으로 가보자!’는 주문이 떨어진다. 그러자 최종본은 모든 출연자가 올 누드로 섹스 파티를 벌이는 포르노 필름이 된다. 마지막 컷은 여자주인공이 성기를 문질러 사정을
[마감인간의 music] 아주 막장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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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심야식당>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정훈이 만화] <심야식당>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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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 키튼입니다. 성룡이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꼽으라는 질문에 0.5초 만에 돌아온 답변이었다. 버스터 키튼이 누구인지 모르는 리포터가 까르르 웃었다.
30년이나 늦게 도착한 박수군요. 노인이 말했다. 회고전 자리였다. 30년 전 만들어졌으나 당대에는 외면당했던 <제너럴>이 상영 중이었다. 관객이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웃음을 토해내는 소리를 극장 밖에서 들은 뒤였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 기자가 열심히 받아 적었다.
노인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966년 2월1일. 71살이었다. 그것은 본인의 영화와 무척이나 닮은 해피엔딩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시종일관 주변으로부터 폄훼당하고 멸시당하며 무시되고 간과된다. 혹은 아예 잊혀진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러닝타임의 마지막 1분여를 남기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복권된다. <셜록 주니어>에서 할머니의 돈을 찾아주기 위해 자기 돈을 내밀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0.5초와 30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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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재 감독은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2부를 시나리오 없이 찍었다. 테두리는 있었다. 가령 고조시 관광안내소에서 처음 마주친 혜정(김새벽)과 유스케(이와세 료)는 장면이 끌날 때 함께 그곳을 나서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밟아 그리 되는지는 배우와 감독을 포함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그날의 공기가 만들어간다. 감독은 두세 장면을 위해서는 대사 샘플도 준비했다. 완성된 영화의 해당 장면과 거꾸로 비교해보니 열린 촬영 현장에 흐른 화기애애한 긴장이 눈앞에 그려진다.
06/16
내일 명동에서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장건재 감독과 세 배우가 참석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다. 영화도 복습하고 보도 자료도 들춰본다. 이 영화의 홍보물은 유난히 팬시상품풍으로 디자인됐다. 예뻐서 갖고 싶어지는 영화, DVD와 관련 상품을 소유하고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영화. 이것이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포지션이다. <한여름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영원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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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쓴의 5만 원 자취방 인테리어>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1∼2인 가구 집 꾸미기 안내서. 전작이 더 친절하게 집 꾸미기를 도와주었다면 이번 책에서는 집 꾸미기를 스토리텔링과 연결지어 다른 목적 혹은 분위기의 방 꾸미기를 보여준다. 돈을 아껴 직접 원하는 대로 꾸민다는 것은 이번 책에서도 큰 장점.
[도서] 1∼2인 가구 집 꾸미기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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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전동화로부터 원동력을 얻어 쓴 현대소설 앤솔러지. 2011년 월드판타지상 베스트 앤솔러지 부문 수상작인 이 책은 고전동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이 책을 기획한 케이트 번하이머는 “모든 위대한 소설은 위대한 동화이다”라고 말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견해를 빌려 “모든 위대한 내러티브는 위대한 동화”라고 강조한다.
[도서] 고전동화의 현대적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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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를 연재 중인 재즈평론가 황덕호의 <그 남자의 재즈 일기> 개정판. 떠밀리다시피 재즈 음반 가게를 맡아 운영하게 된 주인공이 재즈에 빠져드는 과정을 1998년 3월11일에 시작해 2000년 11월17일에 끝나는 일기로 기록한 형식으로 쓰였다(이 설정은 어디까지나 허구다). 기존의 1, 2권을 한권으로 묶었으며, 그사이 절판되는 등 어떤 식으로도 들을 수 없게 된 음반 안내가 추가되었다.
[도서] 재즈평론가 황덕호의 <그 남자의 재즈 일기>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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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간 나의 독서를 위해 초빙한 작가는 두 미국인이다. 제임스 설터와 리처드 브라우티건으로, 설터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쓰기로 하고 오늘은 브라우티건의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에 대해 말하고 싶다.
단편집인 이 책의 원제는 <Revenge of the Lawn>으로, 바로 첫 번째 단편의 제목에서 딴 것이다. <잔디밭의 복수>. 8쪽밖에 되지 않는 <잔디밭의 복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할머니는 미국의 과거라는 풍랑 속에서 등대처럼 빛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잠깐 당부의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문장 하나를 읽고 상상하고 그다음 문장을 음미하며 읽을 것. “할머니는 워싱턴주의 조그만 마을에 사는 밀주업자였다.” 아아, 미국의 과거라는 풍랑. 아아, 등대처럼 빛나는 사람. 이 할머니에게는 잭이라는 동거인이 있었고, 그들은 30년이나 같이 살았다. 잭은 화자인 ‘나’의 친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물건을 팔러 왔다가 일주일 후 배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이미지를 따라가며 길을 잃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