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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에는 잠언집이 등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로 그 잠언집 같은 위력을 발휘해왔다. 수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에 위로받고 희망을 품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연인과 다시 시작한 커플은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 선택을 저주하며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한 연인들의 수와 얼추 비슷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지금은 당신의 모든 게 마음에 들어요”, “지금은 그렇겠죠. 그런데 곧 거슬려할 테고 나는 당신을 지루해할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아요”로 이어지는 마술같이 낭만적인 화해의 끝에서 나는 늘 당혹스러웠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걸까? 저렇게 쉽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그들은 기억을 지웠으니까. 결론은 알고 있지만 그 결론에 이르렀던 모든 괴로움을 잊었으니까. 그래서 실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장은 괜찮을 수 있다.
이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다시 시작하면 우리 과연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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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특명을 받았다. “공자관 감독을 만나고 오라.” 중국계 감독이 내한한 줄 알고 부랴부랴 검색부터 했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더라. 공자관은 아들 자(子), 벼슬 관(官)이라는 본명으로 한국 에로영화계에서 이름깨나 날리고 있는 감독이었다. 상업영화계에서 수위 좀 높다 하는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제대로’ 벗는 에로물을 15년 가까이 만들어온 공력 센 연출자이기도 하다. 그의 신작 <친구 엄마>가 11월12일 개봉하면서 인터뷰가 성사됐던 것이다. 1990년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부흥기를 맞았던 비디오 영화시장이 와해된 후 에로영화계도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이고 에로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IPTV로 직행하는 게 관례처럼 돼버린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공자관은 이 업계에서 굳건히 살아남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에로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현실과 애환을 담은 자전적 이야기 <색화동>으로 2006년에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됐고 이
“영상계의 마광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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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시리즈 특유의 타이틀 시퀀스는 늘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의 기대를 한껏 높이곤 한다. <007 스펙터>의 타이틀 시퀀스는 대니얼 클라인만의 작품이다. 그는 <007 골든아이>(1995), <007 네버다이>(1997), <007 언리미티드>(1999), <007 어나더 데이>(2002), <007 카지노 로얄>(2006)과 <007 스카이폴>(2012)의 타이틀 시퀀스를 작업한 바 있고 이번이 일곱 번째 참여다.
<007 스펙터>의 주제가는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4관왕에 오른 영국 뮤지션 샘 스미스가 부른다. 1965년 이래 영국 남성 솔로 아티스트가 주제가를 맡는 건 처음 있는 일로, 그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더 라이팅스 온 더 월>(The Writing’s on the wall)이다.
<007 스펙터>는 <007 살인번호>(1962)
<007 스펙터>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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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하우저 Oberhauser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라스> <007 스카이폴>의 모든 악당들이 소속되어 있는 스펙터 조직의 수장. <007 스펙터>에서 그는 본드의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연 많은 악당이다. 어둠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스펙터 조직의 회의장소에 잠입한 본드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압권.
출연작
<007 스펙터>
르쉬프 Le Chiffre
신보다 투자수익을 더 믿는다는 계산적인 악당. 알바니아 출신 체스 챔피언이자 포커에 능통한 천재다. 본드로 인해 주주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히자 거액의 판돈이 걸린 포커게임에서 승리해 손해를 만회하려 한다. 이따금씩 피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남자. 본드를 막는 데 실패하자 조직으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출연작
<007 카지노 로얄>
미스터 화이트 Mr. White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매번
악당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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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07 스펙터>는 <007 스카이폴>의 속편인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007 퀀텀 오브 솔라스>(2008)가 개봉했던 7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전편인 <007 카지노 로얄>(2006)이 멈춘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되는 <007 퀀텀 오브 솔라스>의 오프닝은 팬들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지속적으로 출연하는 등장인물과 악당은 있을지언정 이전의 본드 영화들은 대개 별개의 작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니얼 크레이그가 새롭게 열어젖힌 007 시리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개연성이다. 과거의 사건과 결과가 현재의 제임스 본드를 만드는 것이다. <007 카지노 로얄>의 속편이라 부를 수 있는 <007 퀀텀 오브 솔라스>는 21세기 본드 프랜차이즈가 획득한 이 새로운 개성의 명백한 증거였다. 샘 멘데스가 합류한 <007 스카이폴&g
죽은 자들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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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번째 본드 영화, <007 스펙터>가 11월11일 개봉했다. <007 스카이폴>에 이어 다시 한번 샘 멘데스가 연출한 이 영화는 대니얼 크레이그가 출연한 007 3부작(<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라스> <007 스카이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체불명의 조직, 스펙터와의 대결을 다룬다. <007 스펙터>의 개봉과 더불어 영화에 대한 궁금증과 극장에 가기 전 미리 알아두어야 할 인물들, 작품에 대한 사소하지만 인상적인 정보들을 한데 모았다.
007 Spectre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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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본드, 제이슨 본. 사실 이들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냉전시대는 물론 지금도 근무한다. 우리가 ‘간첩’, 스파이라고 불러서 그렇지, 자국에서는 엘리트 애국자들이다. <의형제>의 강동원이나 <7급 공무원>도 마찬가지. 정식 직급이 7급일 뿐 최고로 훈련된 비공식 외교관이다. 이처럼 동사무소(주민센터)에 근무하는 이들만 공무원이 아니다. 요즘은 특채, 별정직, 계약직 등 비정규직이나 비상근 업무도 많고 다양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공무원은 공무원”이다. ‘철밥통’, 안정성, 비교적 쉬운 업무라는 통념이 뿌리 깊다. 최근 일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9급 공무원 시험에 지원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저녁이 있는 삶>. 한때 저항적 지식인이었던 손학규가 쓴 이 책의 제목은 우석훈의 주장대로 제목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군사 정권 시절 얘기지만 1970년대 중반에는 육사만 졸업해도 5급 공무원(사무관)으로 특채되기도 했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9급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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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인 쌍문동 골목길은 저녁마다 아이들을 시켜 반찬을 주고받고, 형편이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의 연립주택에서 십년 넘게 유년기를 보낸 나 역시 같은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살림살이를 공유하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가전제품 할부 외판원이 시연하는 녹즙기나 전기쿠커 따위는 집집마다 빠짐없이 구입했다고 한다(엄마 말에 따르면 그렇다). 일종의 경쟁이나 반드시 동참해야 하는 사교 활동이었을까? 이웃에서 음식이 오면 절대 빈 접시로 돌려보내지 않는 것도 아주머니들끼리의 교양이었고, 뭘 담아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엄마의 모습도 꽤 여러 번 보았다. 맞벌이가 많은 동네의 분위기는 또 달랐을 것이다. 동네마다 조건과 필요에 따라 교류의 범위나 형식이 달라질 뿐 이웃끼리 가까우면 가까운 만큼 불편한 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웃간의 정이라 말해지는 대부분이 정말 그
[유선주의 TVIEW] 좋기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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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5 <내부자들>
2014 <관능의 법칙>
2012 <원더풀 라디오>
2011 <최종병기 활> <마마>
드라마
2014 <비밀의 문> <기황후>
2013 <결혼의 여신> <특수사건 전담반: TEN2> <구가의 서> <구암 허준> <돈의 화신> <마의>
<감자별> <별에서 온 그대> <잘 키운 딸 하나> <메디컬 탑팀>
2012 <닥터 진>
2011 <무사 백동수>
2010 <산부인과>
연극
2012 <연애가중계>
2011 <충주시대> <오셀로> <뮤지컬 햄릿>
2010 <파티컬 클럽 십이야> <삼월이 오면>
2008 <룸넘버 13> <와인할매>
2007 <두근두근&g
[who are you] 공들여 만든 단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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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인 토리노국제영화제가 11월20일부터 28일까지 토리노 시의 네 군데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영화제는 최근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이전까지 젊은 영화인들의 실험정신에 기조를 둔 영화제의 중심 테마가 ‘일과 노동’이었다면 올해부터 ‘삶의 선택, 가족’으로 그 테마가 바뀌었다. 이러한 기조의 변화는 이탈리아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례로 토리노국제영화제에는 ‘치푸티’라는 수상 부문이 있다. 치푸티는 이탈리아어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과 노동’이 기조였던 토리노국제영화제에 치푸티라는 명사는 그 기조를 뒷받침해주는 훌륭한 말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제는 지난 20여년동안 ‘치푸티 공로상’을 수여하고 경쟁부문에서도 ‘일과 노동’이라는 테마에 걸맞은 영화를 소개해왔다. 그러나 올해 영화제에서 소개된 15편의 경쟁부문 상영작(시리아 감독 사라 파타히의 <코마>
[로마] 일과 노동에서 삶과 가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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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가 <슈가랜드 특급>(1974)을 만들었을 때 평론가 폴린 카엘은 “앞으로 수년 내에 청년 스필버그가 미국영화계를 접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극장 데뷔작 <대결>(1971)이나 <슈가랜드 특급>, <죠스>(1975), <미지와의 조우>(1977), <1941>(1979) 등으로 이어지는 스필버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젊은 영화광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할리우드를 타락시킨 블록버스터 멘털리티의 효시로 폄하받은 <죠스>도 지금 다시 보면 고전의 아우라가 풍긴다.
카엘의 눈은 예지력이 있었지만 스필버그가 존 포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 영화를 만드는 거장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도 젊었을 적엔 스필버그 영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화광의 유희정신으로 가득 찬 <레이더스>(1981)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다. 1994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졸업식에서 스필버그는 이런 말
[김영진의 영화비평] 이념보다 강한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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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의 첫 수업 시간. “아침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 때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교실에 들어와 뭔가를 나누어주었다. 칫솔과 치약이었다. 학교 근처의 보건소에서 온 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보건 위생에 대해 알려주러 온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들이 나누어준 칫솔과 치약으로 이 닦는 방법을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치약을 보느라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앙증맞게 생긴 작은 치약의 하얀 바탕 표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호피와 차돌바위, 그리고 홍길동과 곱단이. 신동우가 그린 만화 <풍운아 홍길동>의 주인공들이었다. 알루미늄 껍데기 위에 그려진 신동우의 그림이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멋진 것을 나눠주는 학교란 정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 치약을 애지중지 모셔두고 한동안은 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내 주위에는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그는 왜 만화를 더 그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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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 해결되는 것은 무엇일까. 물대포로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민주주의와 인권은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인가. 제20회 인천인권영화제 개막작 <콜리지알스, 민중의 의회>도 이런 물음을 상기시킨다. 심각한 정치•경제 위기에 빠진 2001년 아르헨티나. 정부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그러는 사이 대통령이 4번 바뀌고, 주민들이 직접 민중의회를 조직해 자치운동을 벌이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아르헨티나의 다큐멘터리가 앙코르 상영작으로 영화제의 문을 연다. 여성과 노동이란 주제로 엮은 한국 독립장편다큐멘터리 경순의 <레드마리아2>와 박소현의 <야근 대신 뜨개질>, 부당해고를 당한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기 <기타 이야기> 등도 상영된다. 폐막작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가 기록한 세월호 관련 중편다큐멘터리 <바다에서 온 편지2-정의의 걸음> <바다에서 온 편지3-알고 싶습니다>이다.
[인디나우] 제20회 인천인권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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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인 도트그래픽, 책으로 만난다
포털 사이트 Daum ‘만화속세상-웹툰’에서 연재됐던 선우훈 작가의 <데미지 오버 타임>이 두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선’이 아닌 ‘점’을 모아 그리는 도트그래픽 등 새로운 웹툰 형식과 미학을 개척한 이 작품은 좀비에 맞선 인간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웹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공개 50.1화, 50.2화를 수록해 단행본만의 특성을 살렸다. 서점 북새통과 유어 마인드, 그리고 알라딘 온라인 스토어 세곳에서만 구매 가능하다.
다이나믹 ‘꿀잼’ 듀오
“오늘도 열심히 산 듯해. 세상은 반대로 자포자기한 듯해. 그래 몇 시간 후면 오네 fuckin new day. 늙네 늙어 느리던 시간까지 속도를 낸다면 완전 속수무책.”(다이나믹 듀오 8집 《GRAND CARNIVAL》 수록곡 <도돌이표>의 가사 일부.) 15년간 열심히 한국 힙합신을 일궈온 다이나믹 듀오의 새 앨범 《GRAND CARNIVAL》이 나왔다. 그 어떤 앨범
[culture highway] 이제 곧 작별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