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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다(연재 첫글을 이런 말로 시작하게 돼 유감이다). 알다시피 이 오래된 여성 혐오적 관용구에는 문제가 많다. 일단 ‘여적여’ 프레임은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 사이에서는 진지한 우정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 오직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이성애 세계관 아래에서 우월한 수컷을 두고 다투는 적이 될 수 있을 뿐. 혹은, 여성 퀴어 영화/드라마를 다룬 박주연의 책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를 따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떤 여자들을 라이벌로 여기라고 했을까? (…) 여자들이 서로 안 싸우면 너무 큰일을 할 것 같아서였을까?” 물론 이 자리에서 ‘여적여’가 실은 남성 중심 사회가 악용하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아무리 미운 사람(꼭 여자가 아니어도 된다)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명백한 적’으로 명쾌하게 분류하는 게 꽤 어렵다는 걸 경험적으로
[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다만 ‘여적여’일 뿐, 여성들에게 제한된 관계 다양성이 가리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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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희열
‘영화제작에 대한 영화’들이 되새기는 악몽의 원체험, 이제는 얼마간 진부한 은유로 느껴지면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꿈의 운동은 저 유명한 <8과 1/2>(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1963)의 첫 장면이다. 차들로 빼곡한 도로 위 자동차 안, 옅은 연기가 새어 나오자 한 남자가 절박하게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 광경을 말없이 구경하는 주변 운전자들의 사뭇 사악한 표정과 시선이 이 순간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그때 남자가 자동차 천장을 비집고 제 힘으로 탈출하더니 어느새 가볍게 날아오른다. 바람을 타고 구름 위로 떠올라 갑갑한 세속의 풍경으로부터 유유히 멀어지는데, 땅 위의 누군가가 남자의 발목에 걸린 밧줄을 잡아당긴다. 저항할 새도 없이 그가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악,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자, 영화감독이다. 구속과 한계, 자유와 권능, 그리고 추락. 아마도 꿈이 이어진다면 자동차 장면으로 돌아와 이 행로는 다시 시작되고 말 것이다. 추락의 결말을 안다고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영화로 꿈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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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은 내가 가장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밑단이 신발을 덮는 커다란 힙합바지를 사야 했다. 그 바지는 가을 학예회 때 H.O.T.의 <열맞춰!> 무대에 오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 동성로에는 ‘소금창고’라는 대형 보세 옷가게가 있었는데, 입구부터 매장 안까지 4m 정도 되는 긴 진열대에 모두 그 바지가 걸려 있었다. 수개월간 모은 용돈을 들고 가 오래전부터 찍어둔 바지(다리 라인을 따라 얇은 흰 줄이 선명하게 박힌)의 값을 치를 때, 나는 그 분위기와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핑클과 S.E.S.의 무대를 하는 친구들은 주로 무용실을 빌리거나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연습했지만, H.O.T.나 젝스키스 무대를 선택한 아이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모두 소각장과 옥상으로 향했다. 나는 우리 학년에서 가장 춤을 잘추는 ‘춤신춤왕’의 ‘멤버 충원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새로 산 바지를 입고 노점에서 산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한심한 꼬라지들 구제불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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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연우가 인터뷰 장소로 들어섰을 때 긴장했던 건 그가 <우리, 집>에서처럼 상대를 꿰뚫어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뉴진스에 푹 빠져 있다”며 환히 웃는 얼굴로 드라마 속 오싹한 기운을 대화 초장에 몰아냈다. 작품에서 연우는 남편‘들’을 죽였다고 알려진 ‘마녀’, 반사회성인격장애를 가진 이세나로 분했다. 심리상담전문의 영원(김희선)과 그의 남편 재진(김남희)을 두고 대립하며 극의 핵심적인 한축을 담당했다. 젊은 여성배우에게 흔치 않게 들어오는 역할의 기회를 잡아 강렬하게 연기하기까지 연우는 대본과 거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미스터리한 여자 정도로 묘사된 세나에 대한 감을 잡고자 대본을 수백, 수천번” 읽었다.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는 권능에 취해 있는 과시적 인물”이라는 걸 파악한 뒤 신비롭고 어딘가 둔탁한 느낌이 몸에서 배어나오도록 움직였다. 캐릭터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눈을 잘 깜빡이지 않는다는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활용해 세나 특유의 사
[WHO ARE YOU] ‘우리, 집’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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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는 필연적으로 빨갛게 볼이 달아오르는 시기다. 비단 여드름 때문만은 아니다. 매사 급물살치는 희로애락에 불안정한 내면을 아낌없이 강타당하다 보면,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섬약한 마음을 찢기다가도 이내 타인에게 얼음장 같은 말을 비정하게 내리꽂다 보면, 자연히 뺨이 울긋불긋 날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는 한자어 풀이처럼 사춘기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꽃이 무성히 피었다 지는 봄철이기도 하다. 애틋해서 아련하고 덧없어 소중한 날들이다.
1인 밴드 볼빨간사춘기의 음악 또한 활동명 그대로 사춘기의 정체성을 품고 있다. 사랑하는 상대가 애태울지언정(<좋다고 말해> <나만, 봄>) 그에게 온 우주를 안겨주고 싶다고 고백한다(<우주를 줄게>). 뜻대로 안되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다가도(<나만 안되는 연애> <나의 사춘기에게>) 바로 울적한 마음을 털고 호기롭게 떠날 계획을 세울 수 있다(<여행>).
[커버] 일상에서 노래를 길어올리며, <볼빨간사춘기: 메리 고 라운드 더 무비> 볼빨간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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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해설가에게 “선수로 뛸 거냐?”라고 묻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정치평론가는 “정치 안 하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지방의원 출신 정치평론가로서 나는 “뭐 하러 그 짓을 또 합니까?”라고 답한다. 물론 평론가로 사는 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올해도 그렇다. 비민주적인 진행자 교체에 항의해 한 프로그램을 떠나기도 했다.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위원 몇몇은 나를 모략하며 특정 정당 출신이라는 허위 사실을 씌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정치하는 것보다는 편하다.
의원은 신기한 직업이었다. 의회에서 관료나 다른 정치인과 치열하게 다투는 일, 길거리나 행사장에서 행인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일을 모두 한다. ‘싸우는 감정노동자’랄까. 평론가는 (조회수나 후원에 신경을 끈다면) 화면과 지면에서 할 말 하고 내려오면 그만이다. 정치인은 늘 표와 역학을 의식해야 한다. 당선하는 정치인은 소수고, 임기 끝나면 또 선거다. 돈은 돈대로 깨진다. 공공선에 복무하는 이타심으로 이 모든 것
[김수민의 클로징] 극한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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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이훤 앓이의 시작을 알리는 <해를 품은 달> 속 이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여진구 배우를 만났다.
16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서늘하면서도 깊고 큰 눈망울에 낮은 목소리.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할 소년 같은 배우가 <하이재킹>에서 첫 악역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니 그의 30대, 40대가 더 기대된다.
[archive] 어린 시절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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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 서울 메트로폴리탄의 한 아파트. 이곳엔 인간을 돕기 위해 제작됐지만 지금은 주인에게 유기된 로봇 헬퍼봇들이 모여 거주한다. 헬퍼봇 올리버는 자기를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옛 주인 제임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일상을 산다. 어느 날 배터리 충전기가 고장난 또 다른 헬퍼봇 입주민 클레어가 올리버의 방문을 두드린다. 기종이 다른 두 로봇은 아옹다옹 다투지만 금세 서로를 궁금해하는 이웃이 된다. 제주도에서 반딧불이를 보는 것이 꿈인 클레어는 올리버 또한 제주도에 사는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윽고 올리버와 클레어는 함께 제주도로 떠난다.
인간을 찾아 나선 두 로봇이 인간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알아간다. 인공지능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서 숱하게 마주한 로그라인이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은 특유의 ‘오래된 것들’로 작품을 채우며 극의 분위기와 내러티브를 따스하게 감싼다. 무성영화 상영 극장처럼 무대 위에서 재즈풍 넘버의 라이브 연
[CULTURE 스테이지] 어쩌면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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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커플이 함께 출연하는 <환승연애> 시리즈 이후 연애 프로그램엔 고유의 컨셉이 중요해졌다. 남매의 연애를 응원하는 <연애남매>, 퀴어 리얼리티를 담은 <남의연애>, 동명의 원작 웹툰을 기반한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까지 화제에 오른 프로그램들은 모두 독특한 기획의 힘을 받았다. 이번엔 무속신앙이다. <신들린 연애>는 신점, 타로, 사주 등 다양한 영역의 점술가가 모여 짝을 찾는다. 본래 연애라는 게 불안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래를 예견하는 점술가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고 각자의 문제에 대비할 수 있을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실제로 신점, 타로 등을 운영하는 곳들이 2030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운세 애플, 사주 상담 AI 챗봇 등이 각광받는 현대사회에서 <신들린 연애>는 젊은 세대가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을 정통으로 차용했다. 무당 출연자들이 신내림을 받게 된 과정과 그 과정을
[이자연의 TVIEW] 신들린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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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
넷플릭스 | 12부작 / 연출 김용완 / 출연 설경구, 김희애, 이해영, 김미숙 / 공개 6월28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괴물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겠다
<돌풍>은 권한대행직에 오르기 위해 현직 대통령을 시해하는 동호(설경구)의 모습으로 막을 올린다.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부패 기득권 청산이다. 수진(김희애)을 비롯한 정경유착의 주범들은 살아남기 위해 여론과 법의 빈틈을 교묘히 공략한다. 궁지에 몰린 동호에게 남은 것은 대의를 부르짖는 올곧은 신념뿐이다.
<더 글로리> <소년심판> <비질란테>. 대한민국에는 지금 뜨거운 사적제재 열풍이 불고 있다. ‘정의로운’ 구원자는 법과 원칙을 대신해 악인을 심판하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넷플릭스 <돌풍>의 동호도 마찬가지다. 정의를 위해 제 한몸 불사르겠다는 그는 정치 혐오에 빠진 국민이 그토
[OTT 리뷰] ‘돌풍’ ‘가족이라서 문제입니다’ ‘팬시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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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트루먼 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본 영화인데 처음 봤을 때의 충격 그대로였다. <트루먼 쇼>를 처음 봤을 때도 충격과 후유증이 상당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봐도 그 충격은 여전했다. 오히려 전엔 몰랐던 디테일들이 보여 더 박진감 넘치게 봤다. 핸드폰 배경화면도 <트루먼 쇼>의 명장면으로 해뒀다.
조PD <친구여>(Feat. 인순이)
어릴 때 정말 인기가 많은 가요였고 그땐 그저 신나는 곡으로 즐겼었다. 예전 노래를 좋아하는데, 최근에 다시 들으니 이렇게 가사가 와닿고 가슴 찡하게 만드는 곡인 줄 몰랐다. 원래 하나에 꽂히면 반복해서 듣는 편인데 최근 가장 많이 듣는 곡이고 거의 반복하듯 듣는 것 같다. 가사가 정말 좋다.
배움
연기 그리고 무술과 승마 등을 배우고 있다. 새롭게 접하
[LIST] 박서함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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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나 단체 따위의 주의·정책·의견 따위에 찬동하여 이를 위하여 힘을 쓰는 사람. 지지자(supporter)의 국어사전 정의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속 서포터스 RED는 지지자의 사전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는 행보를 보인다. 2000년대 초반 서포터스 RED는 K리그의 강팀 안양LG치타스의 팬덤이‘었’다. 하지만 2003년 안양LG치타스는 시즌 종료 후 돌연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고, 이 과정에서 RED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응원 팀을 잃은 RED는 대기업과의 대치도 불사하며 시민구단을 세우기 위해 9년여간 험난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RED의 투쟁기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다. 이들의 절실한 몸부림이 가져올 극기정신이 관객에게 어떤 열정을 고무할지 기대를 모은다. 실제 안양시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나바루 감독과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를 연출한 선호빈 감독의 공동 연출작이다. 제15회 DMZ국
[Coming Soon]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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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영화협회(BFI)의 2024 여름 시즌 프로젝트인 ‘스톱모션: 대형 스크린에서 만나는 수작업 애니메이션’의 티켓 판매가 시작됐다. 8월1일부터 9일까지 BFI 사우스뱅크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엔 1933년 제작된 <킹콩>을 포함해 <아르고 황금 대탐험> <치킨 런> <유령신부> <코렐라인: 비밀의 문> <판타스틱 Mr. 폭스> <아노말리사> 등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을 모두 모아 상영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코렐라인: 비밀의 문>의 헨리 셀릭, <치킨 런>의 피터 로드, <월레스와 그로밋>의 닉 파크,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의 기예르모 델 토로 등의 감독들이 행사의 특별 게스트로 참석한다.
이번 행사의 주요 후원사인 라이카 스튜디오는 8월12일부터 10월1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무료 전시회 <라이카: 프레임 x 프레임>도 연다
[런던] 수작업 애니메이션의 맛, 8월부터 10월까지 런던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스톱모션애니메이션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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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4일 한국영화산업위기극복영화인연대(이하 영화인연대) 소속 16개 단체가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과 함께 멀티플렉스 영화관 3사(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를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신고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6월26일 소비자·시민사회단체가 티켓값 담합과 폭리 혐의로 멀티플렉스 3사를 공정위에 신고한 지 8일 만이다. 이하영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회복세로 접어들던 2022년 한국영화계는 멀티플렉스 3사의 세 차례 티켓 가격 인상으로 회복세가 가로막히고 있다”며 “2020년에서 2022년 사이 멀티플렉스 3사가 영화 티켓값을 인상했지만, 수익배분을 위한 객단가는 2022년을 기점으로 떨어지고 있어 영화 투자와 제작을 멈추는 실정”이고 “극장측은 회사 기밀을 이유로 통신사 할인을 포함한 상세 부금 내역을 밝히지 않고 있어 불공정 정산이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화인연대는 멀티플렉스 3사가 “정산에 관한
[포커스] 급격한 티켓값 담합부터 ‘깜깜이’ 정산까지, 극장 불공정 정산 문제 공정위 신고 관련 영화인연대 기자회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