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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한국영화

소외와 폭력의 현실 다룬 문제작부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신작 장편까지

<댄스타운>

<무산일기>

2010년의 한국영화를 지켜보면서(아직 공개되지 않은 영화를 포함하여) 반복적으로 떠올렸던 말은 폭력과 현실이었다. 8월에 극장가를 달궜던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 때문만은 아니다. <이끼>가 건드리고 있는 공동체 속에 은폐된 폭력의 문제는 여러 영화에 고루 분산되어 있다. <>는 미자라는 60대 여성이 경험하는 순수(시)와 폭력(자살) 사이의 문제를 보여준다. 새롭게 소개되는 박수영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부근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어린 소녀의 실종과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영화를 이끄는 긴장감의 두 축이다.

폭력이 등장하는 순간 문제가 되는 것은 ‘윤리’이다. <이끼>의 주인공 류해국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근거, <>의 미자가 손자를 경찰에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결단의 순간이야말로 윤리의 지점을 이룰 것이다. 2010년의 한국영화는 윤리의 순간을 장르의 판타지로 은폐하기도 했고, 직접 토해내며 역겨움을 동반하기도 했다. 왜 이처럼 폭력은 한국영화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가. 이것은 <의형제>처럼 분단의 해묵은 상처일 수도, 노홍진 감독의 <개같은 인생>처럼 오랜 숙제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역사적 현실은 오래전부터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고, 2010년의 한국영화는 이러한 문제를 다양하게 변주해 보였다. 한쪽에서는 장르화의 흐름도 있었지만 한쪽에서는 성찰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내려다보게 만든다.

탈북자 다룬 <무산일기> <댄스타운>

이러한 흐름 속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탈북자’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다.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는 한국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탈북자의 삶을 보여준다. 주민등록번호가 125로 시작되는 전승철은 한국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탈북자 사내다. 그는 범죄자도 아니고 이주노동자도 아니지만 그들 이상으로 취급당한다. 박정범 감독은 양익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전승철을 직접 연기했고, 연출까지 도맡았다. 마치 감독의 육체가 영화 그 자체인 것처럼 전승철은 거리를 방황하며, 맞고, 무시당하고, 폭력에 노출된다. 그리고 중반 이후에는 탈북자들의 내부로 들어간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경험하는 탈북자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결국 돈 때문에 같은 사람들을 배신하고 우정을 저버린다. 그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교회 공동체의 나약한 모습이나 국가의 경찰력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파국을 보여주고 있다. 비전부문에 상영되는 전규환 감독의 <댄스타운>도 마찬가지다. 남편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탈출한 리정림은 한국사회의 남성적 폭력과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한다. 탈북자이자 여성이라는 자리는 리정림을 이중으로 소외시킨다. 한번의 소외가 아니라 두번, 세번의 소외. 심지어 자신이 소외당하는지도 모른 채 소외되는 현실이야말로 올해의 한국영화가 관심을 갖고 지켜본 현실의 흐름이다. 장률 감독의 <두만강>이 그려내는 겨울의 강가처럼 탈북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오고, 소년들은 이를 평범한 일상처럼 바라보게 된다.

소외와 폭력은 젊은 감독들의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난 감독의 <평범한 날들>의 일상은 알고 보면 상처가 쌓여가는 순간들이고, <혜화, 동>의 시린 겨울은 아물지 않은 상처 사이를 헤집는 뒤늦은 해후이다.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은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뒤엉키는 양상을 보여준다. 어디서나 상처와 신음이 피어난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한국과 중국 스타의 화려한 만남이라는 화제성을 지녔지만 시애틀행 버스에서 만난 불우한 사람들의 러브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아시아인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에서 외롭고 소외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교감하는 순간은 단순한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것이지만 짧은 육체의 접촉과 전망없는 그들의 현실을 절감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김태용 감독 특유의 환상적 장면이 애잔하게 펼쳐진다. 한적한 유원지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건너편에 대화를 나누는 백인남녀의 입술을 빌려 자신들의 마음을 말한다. <가족의 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흡사 영화 속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판타지의 연출은 그들의 희망을 토로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방독피>

<할수 있는 자가 구하라>

김곡, 김선과 윤성호, 그리고 김종관

개인적으로 이러한 순간들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판타지를 통해서이든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려 하는 것이든 영화가 피워내는 힘 중 하나는 분명 꿈을 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순례 감독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시골에서 소를 키우며 사는 시인을 따라 전국의 우시장을 돌면서 과거의 연인을 반추하고, 과거의 상처를 되새김질하는 주인공의 현실과 환상이 스며들어 있다. 이서군 감독의 <된장> 역시 사랑의 완성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랑의 연대기를 환상적인 된장의 맛으로 피워낸다는 단순한 설정에 마음이 끌렸다. 폭력을 다루는 영화들이나 폭력적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복잡한 현실 세계의 거울과 같았다면, 이들 영화는 단순함으로 마음을 끄는 작품들이다.

끝으로, 이러한 흐름에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김곡, 김선 감독의 <방독피>는 특유의 정치적 풍자를 통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면의 폭력을 변주해 보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먼저 공개한 뒤 극장용으로 재편집된 윤성호 감독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윤성호의 스타일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장 뤽 고다르의 <Every Man for Himself>의 한글 제목을 빌려온 이 작품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동료들과 함께 영화 만들기의 열정을 재확인해준다. 수많은 단편영화를 통해 주목받아왔던 김종관 감독은 첫 장편 <조금만 더 가까이>를 내놓았다. 여러 에피소드가 뒤엉켜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단편영화들을 확장한 듯 보이지만 ‘사랑을 둘러싼 다양한 풍경’이라는 점에서 김종관 감독의 색채가 잘 드러난다. 이들 영화를 따로 언급하는 이유는 달라진 말하기 방식이 드러난다는 데 있다. 아마도, 이 세 영화는 자신만의 언어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소중한 날의 꿈>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

하지만, 그들과 함께 여전히 구해야 할 것들은 남아 있다. 스폰지하우스의 대표이자 첫 장편을 만든 조성규의 <맛있는 인생>처럼 새로운 영화를 구상도 해야 하고, 한해에 한편 이상의 장편을 만들어내는 이상우 감독처럼 영화 만들기의 속도를 높이며 살기도 해야 하고, 여전히 한국영화는 조금 더 많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보여주고 싶은 많은 영화들이 부산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도 있다. <히치콕의 어떤 하루>를 만들었던 이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소중한 날의 꿈>이라는 장편애니메이션을 내놓았다. 작품 속 인물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스타나 한국 인물들의 얼굴을 슬쩍 본뜬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감독은 흡사 그들이 모여 지금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여고생 이랑의 소망을 빌려 담백한 소망을 제시하는 애니메이션의 판타지만으로도 올해 한국영화는 어두운 현실과 폭력의 점철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슬로건 중 하나가 ‘힘내라, 한국영화’였다면 올해는 스스로 조아리고 싶다. “고맙다, 한국영화.”